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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경제(사도행전4:32-35)

우리나라에 정확한 교회의 숫자는 모릅니다. 각 교회의 경제사정도 모릅니다. 어떤 교회는 풍부하게 사용하고, 어떤 교회는 늘 빚에 쪼들리고 있습니다. 같은 사명과 같은 뜻을 가졌지만, 사정은 다릅니다. 어떤 교회들은 돈이 남아돌아 사회사업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들은 돈이 없어서 대출받고, 그도 모자라 매달의 운영비를 걱정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극과 극의 경제를 운영하는 곳 중 하나가 교회입니다. 어찌보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면서 평행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성도들이 많이 있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적은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교회를 개척하라고 했어?’ ‘이제 교회도 big-deal 이 필요해’라고 합니다. 순전히 작은 교회를 비하하는 말이며, 동시에 생각 없이 하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되도록 목회자로 부름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목회자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때에 목회자로 간다고 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보장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앞으로 나갈 뿐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사회의 경제구조와 비슷합니다. 피라밋으로 형성된 맨위에 부유한 교회들이 있고. 그 밑에 중소형교회들(순전히 교인들의 숫자에 의한)이 있습니다. 사실 중형교회도 경제면에서는 괜찮습니다. 문제는 소형교회들입니다. 소형교회의 어떤 목회자들은 눈을 뜨기가 겁이 날 정도라고 했습니다. 밀려드는 세금 등과 각종요금을 어떻게 감당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교육비 등을 어떤 방법으로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은 없거나 미미합니다. 그야말로 핍절한 목회생활입니다. 어디에서 조달할 수도, 그렇다고 목회를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끝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기도하고, 움직이고, 또 기도합니다. 그리고 움직입니다. 그래도 힘이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국의 성도들의 신앙성향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들이 신앙생활 할 때는 충성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들의 움직임은 직장과 가정과 교회였습니다. 직장이 끝나면 교회로 갔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에서 직장으로 출근할 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도들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큰 건물을 선호하고 그 인파에 숨어버리기를 원합니다. 적당한 부서에 들어가 적당히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소일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소형교회는 힘이 들어집니다. 또는 도심에서 목회하다가 재개발이 되면 그냥 쫓겨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쫓겨날 때는 맨손으로 쫓겨나는 것을 우리들은 언론을 통해서 봤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내 일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남의 일입니다. 4:34을 보면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현재 양극화된 한국의 교회는 핍절한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들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형제애(ajdelfovth")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애가 없기 때문에 양극화된 상태로 계속 질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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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경제(사도행전4:32-35)

사람이 한 평생을 살려면 엄청난 식량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양을 계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하루에 물만 계산한다하더라도 1일분을 최소한 1.8ℓ로 계산한다면 1.8ℓx250만명=450만ℓ입니다. 빵으로 계산한다면 제과점 빵으로 기준해서 5개정도로 계산한다면, 5개x250만=1250만개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당시에 정확한 숫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250만-300만 명으로 계산한다면, 1일에 소모하는 물만해도 약 6000톤, 빵2000만개 이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죽는 날까지의 양을 계산한다면 과히 적지 않은 양입니다. 식량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옷, 집 등 수많은 것들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합니다.

이번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들은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총리를 비롯해서 장관들을 하려면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도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은 그들이 저지른 일들을 범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위장전입을 하면 추상같은 법의 제재를 받습니다. 국민들이 땅 투기를 하면 언론과 법의 엄청난 제재를 받습니다. 국민들이 쪽방 촌 투기를 하면, 범법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국민들이 대가성으로 뇌물을 받으면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국민들이 어떤 사람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을 정부와 여당에서 인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덕성은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삶은 윤택하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살림을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라를 이용해서 자신들을 윤택하게 해보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32절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물건을 서로 같이 썼습니다. 자기 소유지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같이 쓰고, 같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들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밭을 팔고, 집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판 것의 일부를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으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즉 이때 초대교회는 공동체경제였습니다. 같이 쓰고 같이 나누는 공동체경제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재산문제를 생각해볼 때, 초대교회와 비교해보면 극과 극입니다. 개교회 독립체제인 교회들은 위치 좋고, 세력이 있으면 경제생활은 걱정이 없습니다. 걱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주 마다 부흥되고 확장됩니다. 그러나 재정이 넉넉지 못한 교회들은 매주 마다 걱정입니다. 전기세, 수도요금, 통신비, 교회월세금 등을 매달마다 걱정해야 합니다. 정말 핍절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같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려운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과 이상간의 dilemma에 아니 빠질 수가 없습니다. 교회공동체를 어렵게 운영해가는 교회들 힘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때에 더욱 힘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실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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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사도행전4:23-31)

헤롯(@Hrwvdh")家(가)는 예수님과 사도시대에 유대에서 세력을 휘둘렀던 왕가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네 명의 헤롯이 있습니다. 이두매의 안티파테르(Antipater)의 아들 헤롯대왕, 이 자의 말년에 세례요한과 그리스도께서 탄생했습니다(마2:1 눅1:5). 그는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마2장).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대왕과 사마리아 여인 말다케 사이의 아들로서 세례요한을 참수한 경박하고 관능적이었으며 사악하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Herod Agrippa I)는 누가에 의해 Herod이라고만 불리며 요세푸스는 Agrippa라 부릅니다.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두 황제 갈리굴라(Caligula)와 글라우디오(Claudius)의 그늘에 점차 왕의 칭호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전역의 통치권을 획득했습니다. 이 자가 세베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킨 자입니다. 아그립바Ⅱ세(Herod AgrippaⅡ)는 Herod Agrippa I세의 아들이며, 그의 부가 죽었을 때 17세였습니다. 48년에 Claudius Cesar로부터 칼키스(Chalcis)의 통치권을 부여 받았으며, 유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및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 감독권을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헤롯가는 교회에 대해 항상 악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대적자로, 박해자로 나옵니다. 헤롯은 빌라도와 더불어 교회의 대적자였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이후에 무능한 총독으로 전락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것은 유대인들의 시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18절).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9절). 그리하여 빌라도는 유월절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7절).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사형언도를 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했습니다(24절).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 대해서 심히 정죄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죽이려고 기획재판까지 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인데 왜 빌라도가 사도신경에 등재되어 후세에까지 계속 정죄를 당하는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그리스도의 최종 수난에 관계된 여러 인물들 가운데 빌라도의 이름만 기록된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38)은 말하되 ‘그는 어찌하여 재판관으로서의 본디오 빌라도 아래 고난 받으셨는가? 그가 무죄하시되 오히려 세속재판관에 의해 정죄(定罪)를 받으신 것은 그것에 의해 우리를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엄한 심판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게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적 사실성이 매우 특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 가는 길의 여러 계단들의 하나인 빌라도의 정죄를 전기적(傳記的)인 묘사함에 관심두지 않고, 이 수난의 구원적 의의에 두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죄의 용서와 영원히 사는 것으로 결론하는 그 신경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하여 이름을 기록한 것은 관원 빌라도가 아니라 로마사람 재판관 빌라도였습니다. 그의 재판권은 하나님의 주신 바로서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을 선언한 후에 사형을 선고함으로 그의 죽으심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지만 빌라도는 단지 세속재판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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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박해(사도행전4:23-31)

교회는 애초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구약의 교회 즉 하나님의 사람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약시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박해란 이미 교회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 중에 일찍 박해를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5:10-13절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따라서 박해는 세상 끝날 까지 함께 있는 훼방거리요, 그리스도의 장애물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 구약 신약의 성도들 할 것 없이 핍박은 항상 예상했습니다. 마음에 이미 다짐을 하여 의연하게 대적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은 예고된 것입니다(마20:22, 23:34,35, 24:8-10, 막13:9-13). 그래서 의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눅6:22,23, 17:33, 요17:14). 잘 견디는 자에게 구원과 상급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마5:10-12). 핍박으로 인해 교회가 확장됩니다(행8:1,4, 11:19).무엇보다 박해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8:35-39).

박해의 칼이 얼마나 교회에 영향력이 있습니까? 사람을 죽이고, 교회를 말살하기까지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지중해변의 작고 적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교회는 늘 칼의 위협에 있어야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박해에서 해방시키고 교회회의를 하기 위해 감독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러자 팔이 없고 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로 인함이었습니다. 주후500년경부터 시작된 로마카톨릭은 종교개혁의 때까지 그 이후로 약1000년간을 성도들을 박해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녀재판을 했습니다. 종교재판으로 종교인들을 엄청죽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건재했습니다. 구약의 교회도, 신약의 교회도, 초대교회도, 중세시대에도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박해의 칼이 목에 들어와도 선교는 중단 없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박해의 총알이 날아와도 교회의 전진을 막지 못합니다. 사보나롤라, 위클리프 요한 후스, 왈도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갑 , 이그나티우스 등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했지만, 순교의 피들은 또다른 폴리갑을 만들었으며, 또 다른 후스가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교회와 함께 했기 때문에 이들은 두려움이 이미 없었습니다.

현재도 박해는 계속됩니다. 그 양상만 다르게 나타나지, 박해는 계속해서 교회를 괴롭히고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대 심판 때가 되어서야 박해는 없습니다. 그때는 사단까지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박해는 산발적으로 전 세계교회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박해가 교회를 멸하기는커녕 오히려 교회의 성장에 물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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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교회에 대한 태도(사도행전4:23-31)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40세 된 남자를 고쳐주고는 예루살렘종교권자들에게 잡혀서(4:2), 그들과 논쟁하던 일, 그리고 조금도 그들에게 밀리지 않았던 일, 또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놓아주었던 일 등을 사도들의 공동체에 와서 모두 보고했습니다. 殺氣騰騰(살기등등)하고 氣勢騰騰(기세등등)하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던 말을 모두 교회공동체에 알렸습니다. 그러자 사도들과 교회는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모인무리들이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왜 그들이 공동체에 복귀해서 기도했습니까? 다른 제자들과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둘 보다는 셋이 낫고, 셋보다는 열이 나은 공동체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는 미래를 위한 교회로 점점 발전해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갈 준비를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사도들이나 초대교회는 박해 때마다 예루살렘공동체(초대교회)에 모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교회에 모여 같이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야고보 순교이후에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할 뻔 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해방되었을 때에 역시 교회에 복귀하여 보고를 합니다.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는 사도바울이 선교여행이 끝난 후에 꼭 예루살렘교회에 와서 보고를 합니다.1 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고 베드로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교회에 와서 선교보고를 합니까? 그곳에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그곳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구심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이외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어떤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세우셨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교회도 아니고 사역자도 아닙니다.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주님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1 나요섭. “예루살렘교회의 초기모습”『사도행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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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힘(사도행전4:23-31)

안디옥에서 태어난 John Chrysostom(/!Iwavnnh" Xrusovstomo"요한 크리소스텀)이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였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감독이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뛰어난 설교자였습니다. 또한 고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세세한 신학논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크리스천의 실천적 삶의 원리들을 설교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397년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궐석(闕席)이 되자 그곳 사람들이 크리소스톰을 안디옥에서 납치하다시피 데려와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세운 것은 그 당시 그의 높은 명성과 평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고위직이라고 죄를 덮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황후는 감정을 상하였고, 지방성직자들은 크리소스톰이 너무나 엄격하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 크리소스톰을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백성들이 크리소스톰을 지지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황제는 그 반응에 놀라서 다시 그를 불렀습니다.

교회의 힘이 무엇입니까? 건물입니까? 아니면 성도들의 숫자입니까? 아니면 목회자의 知名度(지명도)입니까? 아니면 敎勢(교세)입니까? 과연 현대의 성도들은 건물을 보고 교회를 가며, 성도들의 숫자로, 목회자의 유명도로, 목회자의 지명도, 그리고 교세의 형편을 따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교회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착각하고 교회끼리 경쟁하며, 성도들 간에 서로 원수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관입니다.

사도들을 종교권자들이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위협하고(아마도 다시 이러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는다 했을 것임) 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들을 구류할 어떤 근거가 없었습니다. 어떤 변명할 근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기각한 것입니다. 교회에 막강한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루살렘의 종교권자들은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일인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잡아눟을 수 없었습니다. 체포영장 발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들이 공공의 적도 아니었습니다. 병이 있는 사람들을 고쳐준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일 밖에 없습니다. 사기를 한 것도 아니고, 소요를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아무 힘없는 이들을 누가 보호해줍니까? 사자 같고 이리 같은 저들의 칼날을 누가 피하게 하십니까? 세상과 사단의 무기는 강력합니다. 총과 칼입니다. 그럴듯한 교리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누가 막아주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들을 누가 막아주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호하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세상이 칼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폭탄으로, 막아주시고, 세상이 총을 가지고 있으면 미사일로 막아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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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령에 대한 교회의 자세(사도행전4:13-22)

사도베드로와 사도요한은 두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과 예루살렘의 실권자들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18-20) 그러나 예루살렘의 종교권자들에게는 이러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명령입니다(행4:18).

항상 교회는 두 명령에 대해서 어디가나 들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이미 받은 명령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받은 명령은 나라에 따라서 사회적인 현상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랐습니다. 초대교회시대, 교부시대, 중세시대, 종교개혁시대, 근세교회시대, 현대교회시대 모두 두 명령을 들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명령은 듣지 않으면 바로 제재가 옵니다. 기독교국가가 아니거나, 기독교국가라도 잘못된 통치자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제제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두 사이에서 항상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태동 때부터 두 명령의 사이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종교권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문제로 예수님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황제숭배사상으로 많은 성도들이 순교까지 했습니다. 교부시대에는 조용하다가 로마-카톨릭의 잔인한 박해가 100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교황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음이었습니다. 500년경부터 시작된 로마-카톨릭은 근 1000년간 종교개혁시기까지 칼과 총으로 포교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종교재판에 회부시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이슬람권이 정복했을 때에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전파된 기독교도를 한 사람 한사람 현상금을 걸어놓고 체포해 죽였습니다.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에서 기독교를 아예 박멸시킬 요량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 이후에도 이 세상은 할 수만 있으면 기독교를 박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루살렘의 실권자들의 말에 베드로와 요한은 정면반박을 했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자세입니다. 세상의 명령이 하나님말씀에 위배될 때는 과감하게 정면으로 반박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탄없이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대형교회들이 정부의 편을 드는 것, 세속화된 것 등을 볼 때 한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명령을 우리들이 받았을 때, 하나님의 명령에 상치되는 것은 물어볼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정답을 말함과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의 약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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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세상의 요구(사도행전4:13-22)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들도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홍보효과를 노리고자 광고를 냅니다. 예를 들어 ◯◯◯◯회사가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를 광고에 게제하고 내보냅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타 종교인들이 방송국에 항의를 합니다. 종교편향에 치우쳐서 방송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선교를 목적으로 광고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스포츠선수들이 경기에서 선전한 후 경기장에서 cere·mony를 합니다. 기독교선수들은 주로 기도로 cere·mony를 합니다. 역시 이것을 다른 종교인들이 보고 방송국에 항의를 합니다. 그런 모습은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수들에게도 그런 뜻을 전하기도 합니다. 종교편향이라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3차 분열을 초래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세계교회협의회)는 언뜻 들으면 교회일치운동(敎會一致運動/ecumenical movement)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교파나 교단을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도의 일치결속을 도모하는 세계교회운동·교회합동운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WCC는 이름만큼 세계적이나 세계적이지 못한 일들을 합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도록 전도하는 것은 신구약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며, 신앙은 역사적 경험적 열매로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불교를 믿으나 힌두교를 믿으나 어떤 것을 믿어도 천국에 간다는 잘못된 이론을 펴고 있습니다.

로마인이야기를 쓴 일본인 시오노나나미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저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 내부에서 유대교를 고수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다른 민족에게 유대교를 포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기독교의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교는 남에게 포교하는데 열성을 보이지 않는 반면 기독교도는 포교에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손에 쥔 종교권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위협한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위협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요구, 아니 교회에 대하 사단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다양합니다. 항상 이중성을 추구하는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거나,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성도들을 위협합니다.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 이들의 경계사항입니다. 양상만 다를 뿐 오늘도 내일도 이것은 계속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이런 요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끝 날 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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