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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솔로몬
역대하1:1-17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나 왕권이 바꾸어질 때 국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최고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나라는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주전4세기 Greece의 알렉산더는 유명한 정복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리스는 곧 기울었습니다. 로마의 Julius Caesar 역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암살을 당하자 그의 정책도 변하고 나라가 한 동안 요동을 쳤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세종대왕은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점점 조선의 역사는 기울었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여러 나라들의 상황이 대통령이 바뀔 때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약 400년간 왕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초 대왕 사울을 거쳐서 다윗이 왕으로 있었을 때에 왕권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나이가 들어서 왕위에 있지 못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Solomon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Solomon은 다윗 왕에 비해서 아직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 같은 왕이 되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여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1절에서 6절을 보면
1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가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케 하시니라 2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재판관과 온 이스라엘의 각 방백과 족장들을 명하고 3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 있음이라 4다윗이 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장막을 쳤었으므로 그 궤는 다윗이 이미 기럇여아림에서부터 위하여 예비한 곳으로 메어 올렸고 5옛적에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의 지은 놋단은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더라 솔로몬이 회중으로 더불어 나아가서 6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오늘 첫 번째로
I. 하나님께 예배하는 Solomon(1-6절)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국민들보다 빼어난 덕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mission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명예와 권력을 위해 최고통치자로 나섰다면, 그로 인해서 국민들이 슬픈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울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최고 통치자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최고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사람들을 골라서 일할 수 있고, 바른 통치를 할 수 있습니다. 최고 통치자는 국민들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법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스스로도 법을 지켜야 합니다. 민심이 무엇인가 정확히 알아야 하고, 항상 국민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항상 소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든든히 서 갈수 있습니다.
Solomon은 그 왕위가 든든해졌습니다. 갈수록 나라가 성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Solomon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1절). 매사에 하나님께서 Solomon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Solomon은 겁이 났습니다. 나라는 점점 성장해가고, 신장되어 가는데 자신은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일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왕의 반만 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Solomon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똑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막상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심히 고민되었습니다. Solomon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이 물려준 나라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물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Solomon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표들을 소집했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재판관(fp;v;), 방백(aycin:)들, 각 족장들을 전부 소집했습니다.
잠시 Solomon은 어디로 갈까 망설였습니다. 기브온 산당으로 갈까,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릴까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Solomon은 소집된 모든 사람들과 기브온 산당으로 갔습니다. 여호와의 회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법궤는 없었습니다. 다윗이 기럇여야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대상13:-15:). 3절에서 5절을 보면 회막과 번제단의 이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회막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입니다. 번제단 역시 모세시대 브살렐이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출31:2-9). 성경의 기자가 Solomon의 예배가 합법성이라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Solomon은 기브온 산당에 오기까지 많이 번민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브온 산당이 크고(왕상3:4), 모세 때 만든 회막과 번제단이 있었기 때문에 기브온 산당에서 희생을 드렸습니다. Solomon은 회막 앞에 있는 번제단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6절).
국가의 대통령이나 왕들은 책임이 막중합니다. 여름에 가물어도 왕의 탓, 홍수가 나도 왕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국가적으로 무엇이 잘못되면 왕의 탓으로 돌립니다. 닭이 AI로 죽을 때도, 농사가 너무나 풍년이 들어도, 태풍이 불어와 피해를 입어도 모두 대통령 탓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풍년도 적당히 들어야 합니다. 왕은 국민들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왕은 항상 stress를 받습니다. 그래서 폭군들은 강권을 쓰고 공안정국으로 몰아 공포의 정치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왕은 한 마디로 왕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항상 위민(爲民)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국민을 위할까? 무엇을 하면 국민들에게 득이 될까?”하고 고심을 해야 합니다. 왕의 자리에 앉아서 권력만 휘두르면 폭군입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면 무능한 군주입니다. 왕은 국민들을 위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입니다. 백성들의 피를 빠는 흡혈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왕이 되려는 자는 신중해야 합니다.
Solomon은 제단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혼자 간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 앞에 먼저 섰습니다. 아마도 천명 내외가 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천번제는 천 마리의 짐승을 1000일 동안 드린 것이 아닙니다. 1000마리를 한꺼번에 드린 것입니다. 기브온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1000마리의 짐승을 각을 떠야 했습니다. 번제단에서 화제로 하나님께 태워 올렸기 때문입니다.
Solomon은 국가의 시작을 예배와 함께 했습니다. 솔로몬은 시작이 밝았습니다. 거기에 다윗의 아들이란 이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잘 섬겼던 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에게 큰 이점이었습니다. 신앙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물려받았음을 말합니다. 다윗에게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물려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하는 일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왕이 되었다고 폭탄주나 마시면 정권내내 폭탄주정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왕이 되었다고 잘난 척이나 하면 간신배들이 그의 주위에 파리 몰려들듯 모여듭니다. 그래서 그 정권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러므로 왕이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국정을 예배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왜 예배로 시작해야 합니까? 우리 인간들은 상당히 많은 것들이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하기 전에는 인간의 능력은 천사보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많은 것들이 제한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무한한 능력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많은 청사진(blueprint)을 그립니다. 이 청사진은 주로 학생 때 그립니다. 그런데 그 청사진이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수능점수에 맞춘 청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청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달립니다. 열심히 training을 합니다. 그리고 전진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획이 틀렸음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무능을 단적으로 지적했는데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인생계획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무능력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인생계획을 세우지만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대로 진행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무능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따라서 무능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내 인생계획을 정확하게 아시는 분을 찾는 것은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예배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을 시작하든지 하나님께 의뢰하는 의식입니다. 우리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표식입니다. 우리의 주권도 하나님께 있다는 표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의 인생이 제대로 갑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계획대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숨이 붙어있는 한 예배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Solomon은 왕에 올라서 첫 번째 한일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로 7절에서 17절을 보면
7이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8솔로몬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나의 아비 다윗에게 베푸시고 나로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9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는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로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을 삼으셨사오니 10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11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너로 치리하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12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존영도 주리니 너의 전의 왕들이 이 같음이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이 같음이 없으리라 13이에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 회막 앞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치리하였더라 14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15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16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 왔으니 왕의 상고들이 떼로 정가하여 산 것이며 17애굽에서 내어 올린 병거는 하나에 은 육백 세겔이요 말은 일백 오십 세겔이라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을 위하여도 그 손으로 내어 왔었더라
Solomon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릴까, 기브온 산당에서 예배를 드릴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Solomon(1-6절)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극적인 사례는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엘리야가 갈멜산상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들과 겨루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경쟁자가 무려 850:1입니다(왕상18:19). 도저히 game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숫자로 봐서도 압권인 바알의 제사장 450과 아스다롯의 제사장 400인은 그 배경 또한 엘리야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법원, 검찰, 경찰, 언론, 여론이 모두 엘리야의 반대편에게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지지자가 없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한 사람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game은 이미 끝난 game이나 다름없다고 모두들 생각했습니다. 국가의 비호를 받는 종교와 단독game을 하기 때문입니다.
game의 법칙은 하늘에서 불 내리기입니다. 그래서 벌려놓은 제물을 태우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것도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먼저 양보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은 금상첨화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바알이 틀림없이 응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마나한 game이라고 생각했습니다. 850명은 국가의 비호아래 show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오전이 지나가고 저녁이 되어도 제물을 태울 불은커녕 작은 불씨하나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에 엘리야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어떤 show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옵소서”였습니다. 그랬더니 즉각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850:1의 경쟁률에서 엘리야가 승부수를 잡은 것입니다.
Solomon이 일천번제를 드린 그날 밤에 하나님(!yhiOla>)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la'v])고 했습니다. 이때 Solomon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지체 없이 말했습니다. 지혜(hm;k]j;)와 지식([D;m')을 구했습니다. 그 지혜와 지식의 사용처는 바른 정치를 펴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Solomon에게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 생각에는 Solomon이 구하라고 하면 ‘부귀영화’나 ‘원수들의 죽는 것’을 구할 줄 아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백성을 바르게 치리하는 것을 구하는데, 하나님께서 심히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bonus로 Solomon에게 지급하신 것이 ‘부귀영화’입니다. 그러면서 너 같은 사람이 전무후무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왕상3:15;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14절에서 17절을 보면 Solomon이 받은 응답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은금을 쓰기를 돌같이 썼습니다. 귀한 백향목을, 흔한 무화과나무를 쓰듯 하였습니다. 비싼 말들과 전차를 겁 없이 수입했습니다. Solomon이 부유함과 융성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강성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했습니다. 상업적으로 융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부귀영화와 지혜를 받아 평생에 그것을 누렸습니다.
Solomon은 계획적으로 기브온 산당에 간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걱정이 되어서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한 순수한 마음으로 기브온 산당에 갔습니다. 한 두 명 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갔습니다. 같이 간 사람들은 Solomon의 명령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순응했습니다. 일천희생을 드릴 때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은 이후에도, 이전에도 없을 하나님의 큰 은혜(cavri")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Solomon을 심히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Solomon의 1/10만 되어도 괜찮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공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모든 재산을 Solomon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재산의 1/100만 있어도 우리는 한숨을 돌리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6:25-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염려하지 말라(mhv)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하나님 즉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백성이라고 해도 몸을 가진 우리들이기에 물질이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250만 명을 사막으로 인도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장 먹일 물과 음식이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있는 5000명이 먹을 것이 없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예수님까지 초청한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꼭 해야 하는데 지갑에 돈이 없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당장 굶고 있는데 양식이 없음을 주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선행해야 할 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가장 선행(prw'ton)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basileivan tou' qeou')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th;n dikaiosuvnhn)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하라(zhtei'te)는 말은 “끊임없이 계속 찾으라”는 말입니다. 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계속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계속 힘쓰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선행해야 할 것은 뒤로 미룹니다. 그리고 은혜만을 먼저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실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주일에서부터 토요일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Solomon에게는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예배를 드린 결과 Solomon은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예배를 잘 드리고 엄청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특정한 예배가 있고, 포괄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특정한 예배는 순서를 정해서 정해진 날짜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포괄적인 예배는 우리의 전 삶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이 세상에서 행할 윤리적인 일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화 벤허는 부제가 ‘그리스도 이야기’(A Tale of the Christ)입니다. 주인공인 벤허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 유대인입니다. 벤허는 어느 날 친구인 메살라가 로마총독을 보호하는 사령관으로 부임합니다. 그러나 친구인 메살라는 옛친구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총독이 부임 행군 중에 동생이 기왓장을 실수해서 떨어뜨리는 바람에 메살라가 벤허의 어머니, 동생, 연인을 몽땅 감옥에 넣고 재산도 몰수하여 벤허는 갤리선의 노예로 고역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선단(船團)을 지휘하는 호민관을 위험에서 구해줌으로써 그의 양자가 됩니다. 호민관이 자기의 반지를 벤허에게 줌으로써 벤허는 이제 더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호민관의 아들로 신분이 변했습니다.
요한복음1:12을 보면 우리들은 자연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부자관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앞에 고귀한 미래가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붙여서 주시겠다고 제의를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 사람들이 미신을 좇게 됩니다. 미신을 좇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면 우리들에게는 미래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지런히 예배하여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옷(출애굽기28:4-5)
제사장들의 옷은 겉옷과 반포속옷과 관과 띠입니다. 에봇은 겉옷 위에 입는 긴 앞치마와 같이 생긴 것으로 대제사장의 어깨에 걸치게 되었습니다. 어깨로부터 무릎 밑에까지 내려오는 소매가 없는 겉옷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두 조각으로 되어 한 조각은 몸 뒤를 가리고 다른 한 조각은 앞부분을 가리도록 했습니다. 이 에봇은 금으로 된 견대로 양 어깨에 붙들어 매도록 했으며 그 견대 위에는 호마노 둘을 붙이고 각 보석마다 이스라엘 여섯 지파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에봇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고 금실로 수를 놓았으며 하나의 허리띠로 몸에 매어 졌습니다.
판결흉패는 에봇의 가슴 부분에 붙인 네모반듯한 천 조각입니다. 이 흉패에는 금테에 물린 값진 보석 열두 개를 네 줄로 달았으며 각 보석 위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흉패(@v,jo/hōshen/호셴)는 에봇과 동일한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흉패는 귀퉁이에 금고리를 단, 가장자리가 한 뼘(약3인치)쯤 되는 직사각형 주머니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은 열 두 개의 보석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금줄은 위의 고리를 에봇의 견대에 있는 보석들에 연결시켰습니다. 이 흉패는 나라의 일치, 대제사장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백성들의 의존,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그들의 나아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통로를 상징했습니다. 흉패 안에 있는 우림(Urim)과 둠밈(Thummim)이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출28:15-30). 70인역본은 이것을 히브리어 ‘판결흉패’ 결정의 흉패'에 대한 ‘판결의 신탁’으로 불렀습니다.
반포속옷은 가는 베실로 짰습니다(레8:7). 그 속옷에는 띠가 있어서 띠를 띠라고 했습니다(출39:27-29). 이 옷의 특징은 통으로 짠 것입니다. 반드시 이것을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또 대제사장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입었습니다(출39:27).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속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 허물과 부끄러움을 가리는 속죄와 칭의의 옷입니다. 성경 이사야53장에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심을 말씀하는데, 그대로 요한복음19:23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군병들에게 속옷이 벗기우고,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시고, 그의 의의 속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시22:18). 띠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진리로 무장할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관은 이는 흰 세마포로 만든 대제사장의 머리 관이었습니다. 이 관의 앞면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금패를 붙였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옷은 거룩하고 화려했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제사장에게 영광과 장식을 부여해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은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거룩한 옷을 입히셨습니다. 우리역시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은혜로 하늘의 거룩한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만일에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하늘의 거룩한 옷을 입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의 옷(출애굽기28:1-3)
아론과 나답, 아비후와 엘르아살, 이다말을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직분’(@h'K;/chahan)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다”는 뜻으로 중개자의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중개하고 전달하는 직분입니다. 이스라엘 제사장의 직무는 제사라기보다 신탁의 전달이었습니다(출17:9).
구약의 기름부음 받은 직분은 선지자 왕, 제사장입니다. 성경은 예언자와 제사장 사이를 확실하게 구별하였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임명을 받습니다(신18:l8. 히5:4). 그러나 예언자는 백성에게 대해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접근하며 또한 백성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구약시대에 교사였지만, 예언자들과 달랐습니다. 예언자는 백성들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무들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특권들을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하나님에게 합당하게 접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한 의식적 준행을 강조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자로서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되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되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속한 일들, 즉 종교적인 일들을 수행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직을 행하였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었습니다. 즉 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제사장직을 예표한 모형이었습니다. 구약은 오실 구속주의 제사장직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편110:4과 스가랴6:13은 이것을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직은 제사장 직분을 가진 메시야를 예표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거룩한 옷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거룩하신 자 여호와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 전에(레11:45) 거룩하지 못한 몸을 거룩한 옷으로 가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마음에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하여 옷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hm;=k]j j'Wr(/rūah hākmāh/루아흐 하크마/지혜로운 영)으로 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옷은 제사장의 특별한 지위와 임무를 나타냅니다. 제복자체가 인간의 사적인 것들이 드러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죄와 허물로 얼룩진 사람들입니다. 이 허물들을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감추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도 감사해야 합니다.
등불관리(출애굽기27:20-21)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감람나무 기름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 기름은 순결한 기름이어야 했습니다. 감람기름은 잎과 가지, 분말 등을 넣고 짓이겨서 짜내기도 하고 스스로 흘러나오는 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막에서 쓰는 기름은 착유기로 짜낸 기름이 아니라 스스로 흘러나온 기름을 말합니다. 이러한 기름은 가장 좋은 기름으로 흰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증거궤 앞(지성소)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서 이 등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30:7,8, 레위기24:3,4에 의하면 저녁부터 아침까지 불을 켜라 명령하셨습니다.
출애굽기30:7,8 7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찌며 8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찌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찌며
레위기24:3,4 3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찌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찌니라
저녁에 등대에 등잔을 갖다놓고 불을 켜서 밤 동안 빛을 밝혀놓고, 아침에는 등잔들을 청소하고 새로운 신선한 기름을 넣으라는 것입니다. 이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기름입니다(슥4:2-6, 요3:34, 히1:9). 제사장은 영원히 불을 켜고 꺼야 했습니다. 매일 저녁 그들은 그 불을 밝혔습니다. 매일 아침에는 불을 끄고, 심지를 다듬었습니다. 기름이 담긴 쟁반을 청결하게 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양의 기름을 채웠습니다. 그들은 세시에, 여섯시에, 아홉시에, 열두시에 나타날지도 모를 주님의 모습을 위하여 미리 예비하고 빛 가운데서 예배드릴 준비를 갖춰 놓고 있었습니다. 등불은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5:14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정결하고 밝게 빛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등대처럼 세상의 슬픔과 괴로움 속에 서서 인도해 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등불을 켜고 기름을 항상 준비해야 하는 임무를 가졌습니다. 이 임무를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불성실한 성도들이 아니라 신실한 성도들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권에 잡히고, 명예욕에 잡히면 결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령충만한 은혜를 항상 간직하고 항상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누리며 긴장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내리실지 하늘에 채널을 고정하고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등대에 불이 밝혀있지 않고, 청소도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떨까요? 그런데 그러한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막뜰(출애굽기27:9-19)
성막의 뜰은 일반회중이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입니다. 성막의 뜰은 기둥과 세마포 및 그 제반 요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막 뜰은 남편으로 45m, 북편으로 45m, 서편으로 22.5m, 동편으로 22.5m였는데 동편으로 문이 나 있습니다. 이 문은 크기가 9m입니다(16). 성막 뜰 안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놓여 있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는 하얀 세마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성막은 멀리서 보면 천으로 된 울타리 같았습니다. 문에서 들어서면 성막 뜰이 있습니다. 이 뜰은 휘장(또는 막)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뜰의 휘장을 좋은 베실로 짜서 조각목 기둥에 걸어서 만든 것은 義를 구함입니다. 그 의는 인간 자신의 의가 아닙니다. 어떤 율법의 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 안에 계시된 복음의 의입니다. 그 복음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천하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아가게 됩니다(요14:6,히7:25,행4:12). 교회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이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곳입니다(딤후2:15). 문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법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문이라고 했습니다(요10:9).그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10:참조).그리스도는 사죄의 문, 구원의 문, 의와 천국의 문으로 이끄시는 문입니다.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목적은 백성들이 거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거룩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죄를 속죄하기 전까지는 백성들이 직접 여호와께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녀로 선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집 안으로 영접해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들처럼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 부정 및 사망에 대한 지식만을 가져다 준 율법의 섭리하에 있었습니다. 이에 거룩하신 여호와와의 친교는 오직 하나님께서 지명하시고 성별하신 중개자들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즉 계약을 세움으로써, 그의 종 모세를 통해서, 그리고 계약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그리고 아론의 집안에서 나온 택함 받은 제사장들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성막의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기도의 제물과 백성들이 땅의 직업으로부터 얻은 열매들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 가까이 직접 나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회막을 지나서 성소를 지나고 지성소에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의 때에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은혜의 문은 계속 열려있지 않습니다. 언제인가는 닫힙니다. 그때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릅니다. 일 년 후 일지 한 달 후일지 모릅니다. 은혜의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간구해야 합니다. 구원의 모든 문은 언제인가 닫힙니다.
번제단(출애굽기27:1-8)
이제 성막 밖의 기물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성막 밖의 기물은 회막 안에 있는 첫 번째 기물입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5규빗X5규빗X3규빗(2.25mX2.25mX1.35m)의 네모반듯한 단이었습니다. 놋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놋단으로 불렀습니다. 성막 안 성물 중 제일 큰 기구였습니다. 이 번제단 위에서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태워진 모든 희생 제물들은 죄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번제단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였습니다. 아울러 번제단 네 귀퉁이 뿔은 그러한 제물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했습니다. 번제단에는 네 모퉁이에 뿔이 있었는데, 이 제단은 성소의 동쪽에 자리잡았습니다. 광야시대에 이 임시제단은 다른 기구들과 마찬가지로 메고 다닐 수 있도록 그 무게를 줄이려고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단을 메고 다닐 채를 꿸 고리들은 제단 아래쪽 사면만을 덮는 놋그물에 붙였습니다. 제단의 뿔들은 수소의 뿔들을 모방했습니다. 이 뿔들 가운데에 제단의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릴 때에 속죄제물의 피를 뿔들에 발랐습니다(레4:7).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제단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그 뿔들을 잡았습니다(왕상1:50).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번제단에 딸린 재를 담는 통도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단에서 제물로 드린 고기를 태우고 난 재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3절). 부삽은 피를 뿌리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뿌리다는 뜻을 가졌습니다(3절). 고기를 옮기는 갈고리도 만들어야 했습니다. 불을 옮기는 그릇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기구들은 놋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유는 가벼워야 하고 불에 견뎌야 했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5대 제사 중에 가장 기본적인 제사입니다. 또한 모든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가리켜 “번제단”이라고 했습니다. 이 제사가 신약예배의 참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는 이런 제사제도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 자체가 성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죄이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벽이 가로놓이게 되었습니다. 즉 죄로 인해 담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단입니다. 이 제단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제단이 있어서 인간들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제단에 있었습니다. 즉 이 제단에서 동물들이 죽음으로 인간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제물들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냈습니다. 동물들이 죽을 때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까워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들을 샀습니다. 우리들의 죄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이 아니면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죄 값을 예수님께서 거저 용서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고, 대제사장이 되어서 그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첫 번째 휘장(출애굽기 26:36-37)
성막의 입구를 위해서도 휘장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짜서 성막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휘장도 내부휘장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혼합된 색채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그림을 넣지 말아야 했습니다. 단순히 줄무늬나 바둑무늬로만 짜야 했습니다. 이 휘장은 조각목으로 만든 다섯 개의 도금한 기둥들에 금고리들로 걸었습니다. 그 기둥들을 위하여 받침 다섯을 놋으로 부어 만들어야 했었습니다. 성막을 이런 식으로 건축했던 이유는 즉 벽을 직물로 꾸민 것은 단지 회막에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조각목 아카시아가 아라비아 광야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나무들 중 널판과 들보를 베어낼 수 있는 유일한 나무였습니다. 또한 조각목은 가볍고 내구성이 강했기에 간단히 들고 다닐 수 있는 성전을 위해서는 아주 적합하였습니다. 나무로 만든 골격은 그 밖과 안을 모두 주름 잡힌 휘장이나 다른 덮개들을 걸어 덮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친막의 성격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실 성소가 장막이어야 했는데, 그 까닭은 백성들이 방랑하며 장막가운데 거하는 한,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는 곳도 장막이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막을 즉 지성소만 만들어도 된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방의 신전들이나 신상들을 보면 거의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소를 더 만들어서 인간들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곳에서 자기 혼자 거하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의 백성을 만나기 원하셨습니다(25:22).
지성소가 여호와의 참된 거처였습니다. 거기서 그의 현존에 대한 가시적 상징인 구름 가운데서 그룹들 위에, 그리고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보좌하셨습니다. 성소는 그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나타나 그의 예물들, 그들이 땅에서 거둔 열매들과 그들의 기도들을 가지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의 얼굴 앞에서 그의 계약은총의 축복을 즐거워해야 할 장소였습니다. 이 제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형태로 건설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수립된 이 하나님 나라는 회막 가운데서 구체화되었습니다. 고대의 상징주의에 의한다면, 정방형은 우주 혹은 코스모스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성서의 상징주의에 있어서도 정방형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인 하나님 계시의 장소 곧 일종의 이 세상을 의미했습니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의도되었습니다.
성막도 모든 것이 금으로 도금되었거나 아니면 순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널판과 기둥들의 받침들을 은으로 포장하였습니다. 하나님 거처의 영광은 장엄한 금 가운데서(욥37:22) 반영되었고 반면에 도덕적 순결성에 대한 상징이었던 은은 하나님의 집 또는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거룩함을 나타내주었습니다. 네 가지 색깔, 흰 베실은 찬란한 건물의 거룩함을 나타내주며 청색, 즉 밝은 청색이라기보다는 검정에 가까운 진한 청색은 남쪽지방에 있어서는 진짜 하늘 색깔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기원과 성격을 나타내주며, 자색. 즉 진하고 강한 빨강색은 왕의 영광을 나타내고, 홍색. 즉 피와 활기찬 생명의 색깔인 연하게 빛나는 빨강색은 왕 되신 거룩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히 멸망치 않을 생명의 힘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직물들에 수놓아진 그룹들의 모양을 통해서, 성막은 하늘의 영들이 하나님의 보좌, 즉 하늘의 예루살렘을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둘러싸고 있는 영광의 나라를, 즉 하늘의 부르심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몰려들게 될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성소의 기구배열(출애굽기 26:34-35)
지성소에는 증거궤위에 속죄소를 두라 하셨습니다(34). 그 휘장 바깥 북편에 떡상을 놓아야 하고 남편에 등대를 놓아 상과 마주 대하게 하라 하셨습니다(35). 이동을 할 때에 언제든지 성막의 문은 동편을 향해야 했습니다. 바깥에서 문을 통과하면 번제단이 먼저 있고 다음에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떡상이 있었습니다. 좌측에 금등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소 중앙에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금단으로도 지칭되었습니다. 가로46㎝, 세로46㎝, 높이92㎝의 크기로서 지성소 휘장 바로 밖 곧 성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향단은 하나님께 거룩한 향을 피워 올리는 곳입니다. 이 때 피워 올려지는 향의 연기는 성도의 기도를 상징했습니다.
물두멍(출30:17-21, 40:30-32)은 놋단과 성소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놋으로 만들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38:8절을 참고하면 여인들의 거울(구리)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단과 성막 출입시에 반드시 손과 발을 씻고 출입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뿐만 아니라 성도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살피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는 하나님의 보좌(施恩座)입니다. 이사야6:3절에 보면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거기 계십니다. 속죄소 밑에 율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보좌는 심판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은 죄인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보자면 죄인들을 모두 멸하여 던져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1년에 한번씩 대제사장에 의해 이곳에 피가 뿌려짐으로 그 죄를 유예하셨습니다. 이 피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 피를 인하여 심판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審判의 寶座가 施恩座가 된 것입니다.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