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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들의 성별(출애굽기29:19-21)

속죄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대제사장인 아론과 제사장들인 아론의 아들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려졌습니다. 희생제(번제)는 여호와께 무조건 온전히 복종할 그 직분을 나타낸 것입니다. 수양의 피는 직분을 위임받은 사람의 몸에 각각 상징적으로 발랐습니다(20절). 그 피는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발라졌습니다. 그 오른손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졌습니다. 몸의 여러 끝 부분에 피를 바름으로서 사람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듣고 행함으로 성별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날의 생활 중에서 전적으로 헌신함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온전히 이루는”(요4:34)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장들이 되는 자들의 온전함을 뜻하는 상징입니다. 제사장들은 수양의 피로 뿌려졌습니다. 제사장들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21절). 이것은 제사장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성령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권능에 힘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총명하며, 생동하는 자세로 사는 하나님의 새로운 존재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육체를 주신 것은 그 육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구상에는 엄청난 죄악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죄악을 저지릅니다. 자기들은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아주 더러운 행위입니다. 로마서1:21-23을 보면 인간의 행실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어떠한 종교를 가지거나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해야 깨끗한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해결하지 못한 죄가 있기에 진흙탕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근본자체가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인간이 어떻게 거룩할 수 있는가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성화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는 절대로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이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출애굽기에서는 계속 이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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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님의 신분

요한복음 1:1-3

어느 성에서 굉장한 연회가 열렸습니다. 그 연회는 보통의 연회가 아니었습니다. 각국의 왕들이 참석했습니다. 왕이 미처 오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특사를 보냈습니다.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에 있는 온 나라들이 그 연회에 관심을 총 집중시켰습니다. 그 연회에 가장 귀하신 분이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연회를 주관하는 宴會長은 초비상이었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이래 일생에 가장 귀한 연회였기 때문입니다. 연회장은 오실 분의 사람됨을 체크했습니다. 최고였습니다. 존귀함을 체크했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훌륭해서 그분을 잘 소개하기 위하여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연회장은 그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모아서 작성하였습니다. 이윽고 그 분이 도착하자 연회장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분을 감명 깊게 소개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소개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모시고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께서 변화하실 때도 목격하였습니다.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갈보리언덕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났습니다. 승천하심도 친히 눈으로 봤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기간은 물론하고 승천하시기까지를 친히 눈으로 보았던 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jEn ajrch'/ h\n oJ lovgo",

I.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예수님(1a).

“신분”(state)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개인이 속하는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 또는 법률상 사람의 일정한 지위나 자격”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신분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유익합니다. 신분을 안다는 것은 정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안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분을 안다는 것은 죄인 된 우리로서는 최고의 정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사9:6; 요1:1).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마1:18-25/눅2:5-7) 인간이라고도 말합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를 신성(Deity)과 인성(Humanity)을 가지셨음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계시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태초라는 말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약간씩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요한복음 태초보다 훨씬 오랜 후의 태초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창세기의 태초가 요한복음의 태초보다 훨씬 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태초는 만물을 창조할 때의 태초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의 시간을 말합니다. 창세기 1:1절의 태초(tyviarEB])는 창조의 시작점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ajrch'//아르케)는 우리의 상상을 시작하기 이전입니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입니다. 즉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전의 상태입니다. 요한복음 1:1은 시간 이전의 어떤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 내에서의 시작이 아닙니다. 절대적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결부시켜서만이 언급될 수 있는 시작입니다.

그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말씀이 만물의 창조 전부터 계셨습니다. 말씀(lovgo")은 세상 이전에 선재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함께 시작한 시간보다 먼저 존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우주만물의 시작이 전혀 없는 태초부터 계신분입니다. 아직 시간이 시작되지 않은 태초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이 태초는 어떤 새로운 일이 조만간 시작되는 긴장된 태초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lovgo")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선재적인 신분이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왜 말씀으로 계셨습니까? ‘로고스’라는 말을 헬라적으로 성경에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계신 이유는 그 본질과 직무를 표현하고자 함입니다. 말은 드러내는(reveal) 것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듣는 자가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조상 아담은 그의 후손들에게 치명적인 것을 남겨주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파멸의 곳인 지옥으로 들어가야 할 입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었습니다. 점점 패괴해져 갔습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모두 가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이 세상은 어둠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이 세상은 폭발하여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동산에서 과일 몇 개 먹은 것 치고 너무나 가중처벌 된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지금도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 몇 개 먹는 것은 주인의 마음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加重處罰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명령을 준수하는데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황금 10,000톤을 놓으나 선악과를 놓으나 어기는 수치는 똑같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선거법 위반혐의로 재판에서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을 받거나 배우자·직계존속 및 선거사무장·회계책임자 등이 300만 원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당선이 무효화됩니다. 100억원 받은 사람이나 100만원 받은 사람이나 모두 당선무효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인간은 불순종에 이르렀습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예견한대로 인간의 눈이 “열림”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다른 길을 보았습니다. 연약함을 경험했습니다.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질병이 인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이 세상에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는 창조이전부터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Incarnation)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사람으로 불리어지지 않았습니다. 태초에는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의사소통인 말씀(communication)으로 계셨습니다. 우리와 친밀한 관계성을 갖고자 요한을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다바르/로고스)은 인간에게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히11:3).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멸망하시기도 합니다(벧후3:5-7).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 받아야 할 사람을 살리십니다(약1:18).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의 머리를 밟으시고 깨버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기 이전에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두 번째로)

II.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예수님(1b2).

1b와 2절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kai; oJ lovgo" h\n pro;" to;n qeovn, kai; qeo;" h\n oJ lovgo".

2. ou+'to" h\n ejn ajrch'/ pro;" to;n qeovn.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함께(pro;")는 “~ 에서부터, ~을 향하여”입니다. 어떤 장소에서부터 출발하는 동작입니다. 또한 어떤 장소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다”는 것입니다. 향한다는 것은 의지하기 위한 것이며 합동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서 계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계획되어 있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예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3-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창세전에 그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구원이기에 현세에서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의 최소한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혜롭고 능력 있는 구원입니다. 은총과 사랑이 있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최대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시려고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때가 차매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정하셨습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한 말씀이신 예수님은 그 신분이 존귀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1절 중간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했습니다. 곧 ‘하나님은 말씀이라’가 아닙니다.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님의 존귀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나 편재하여 계십니다. 카나리아 제도에도 계시고, 전주에도 계십니다. 천국에도 계시고 이 땅에도 계십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언약하심을 끊임없이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신성에 속한 것을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의 통치는 우주 및 전 세계의 유일하신 통치자이십니다.

말씀이신 통치자가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항상 동적(dynamic)인 존재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동적(dynamic)으로 계십니다. 따라서 로고스를 가진 사람들은 항상 동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향해 동적인 존재로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로고스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상태로 계십니다. 성부와 성령하나님과 대등한 위치로 신비하게 존재하십니다.(pro;" to;n qeovn)

그래서 우리가 로고스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교통하십니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하신 것처럼,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위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와 곡식을 가리지 않은 추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천국의 백성과 지옥의 백성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으스스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울면서 생활하는 통곡의 계곡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첩첩산중에서 헤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항상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의 눈동자가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듣기 위해 항상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그분의 능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의 우리에 대한 긍휼은 아직까지 측정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오직 관심은 그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으며 지금도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오늘 세 번째로)

III.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3).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pavnta di! aujtou' ejgevneto, kai; cwri;" aujtou' ejgevneto oujde; e{n. o{ gevgonen.

우리의 우주는 광대합니다. 한 줄기의 빛은 시간당 11억km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하수라 하는 은하계를 지나가는데 빛의 속도로 10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은하계는 수십억 개의 은하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계산하기 바랍니다.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가 약 1억 4000km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종이 한 장이라고 가정합시다. 가장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20m높이의 종이더미가 필요합니다. 은하계의 직경을 나타내는 데는 496km 높이의 종이더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시속 1600km로 自轉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110,000km로 태양을 공전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216만km로 공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24시간마다 우리는 9,000만km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336억km의 공간을 여행합니다. 20세 된 사람은 6,720억km를 여행하였습니다. 지구둘레를 1,680만 바퀴를 돌았다는 말입니다.

우주에서 인체로 돌아옵시다. 발길이와 팔 길이가 일치합니다. 우리의 핏줄을 전부 잇는다면 지구를 3바퀴 돌 수 있는 거리입니다(120,000km). 피가 몸을 완전히 도는 시간은 46초입니다. 눈을 한번 깜빡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1/40 초입니다. 혀에 침이 묻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맛을 알 수 없고 코에 물기가 없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갓난아기는 305개의 뼈를 갖고 태어나는데 커가면서, 여러 개가 합쳐져서 206개 정도로 줄어듭니다. 사람의 허파는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무겁습니다. 모든 인간은 코에 극소량의 철(Fe)을 가지고 있어서 커다란 자장이 있는 지구에서 방향을 잡기 쉽도록 해줍니다. 빛이 없을 때 이것을 이용해서 방향을 잡습니다. 눈의 근육은 24시간 동안 약 100,000번 움직입니다. 다리가 이 정도의 운동을 하려면 적어도 80Km는 걸어야 합니다. 두개의 콧구멍은 3~4시간마다 그 활동을 교대합니다. 즉 한쪽 콧구멍이 냄새를 맡는 동안 다른 하나는 쉰다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재채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재채기는 시속 160Km의 속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만물의 극히 일부인 지구와 인체를 잠깐 상고했습니다. 만물을 모두 나열한다면 평생을 그 연구만 하다가 일생을 마쳐야 합니다. 그래도 다 못하고 극히 일부만 건드렸다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우주의 기원에 관해서 모든 시대는 인간들의 정신을 지배해 왔습니다. 창조에 대한 억측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사람들이 모두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 하셨습니다. 하면 될 것을, 아니다 라고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간단합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박하려고 여러 가지 거짓말을 붙이고 붙였습니다. Big-Bang이니 우연이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붙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도 안 되는 군더더기가 지금도 계속 붙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先在(선재)하신 로고스를 통해서 존재하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창조 되어질 때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없었는데 제멋대로 우연히 나온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대충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세밀하게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영혼)까지 만드셨습니다. 종류대로 아름답고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에는 로고스이신 예수님의 의지와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심오함과 신비함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인간을 창조하심에는 기이하고 기이한 창조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기쁨을 누리시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1:3).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시19:1).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대신 다스리라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친히 교제를 나누시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15세기에 보헤미야[Bohemia]의 종교개혁자 쟌 후스(1372-1415)가 어느 날 거리에 나갔다가 두 그림이 나란히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개탄했습니다. 한 그림은 나사렛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청빈하고 초라하였습니다. 소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곁에 붙어 있는 그림은 로마교황의 그림이었습니다. 교황은 머리에 삼층 면류관을 썼습니다. 사람들이 어깨에 멘 호화찬란한 가마를 타고 있었습니다. 시종이 옆에서 양산을 받쳐주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청연감에 따르면 교황이란 “로마의 주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합니다. 사도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의 후계자라합니다.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守長입니다. 서(西)유럽의 總大主敎입니다. 이탈리아의 首席大主敎입니다. 로마 管區大主敎입니다. 로마首都大主敎입니다. 바티칸의 주권자입니다. 교황의 모습은 나사렛 예수님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교황의 종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서민의 신분이었습니다. 평신도의 신분으로 있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행어사였습니다. 그의 신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 창조주이신 예수님과 항상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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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에스라1:1-4

타국의 지배를 받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으면 모든 자유가 박탈되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것에서부터 일상적인 말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숨 쉬는 것까지 간섭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남의 나라에 지배를 받고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치욕의 36년간(1910.8.29-1945.8.14) 주권 없이 살았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주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입니다. 더구나 지배국이 어떤 나라냐에 따라서 고통의 도가 더할 수 있습니다. Assyria나 독일(Germany)같은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은 거의 살아남을 확률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초토화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제 명에 살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가닥 희망을 잡고자 합니다. 그 희망마저 없다면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신다고 했을 때도 믿지 않았습니다. 1절을 보면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이스라엘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소식을 새롭게 들어선 왕궁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무슨 소식입니까? 첫 번째로

I. 고레스를 감동시키신 하나님(1절)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간 지 약 800년 만에(사사시대400년, 왕정시대400년) 외세의 압제를 받게 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Assyria에 멸망이 됩니다. 남왕국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Assyria는 주전612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남북왕국 모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특히 유다는 3차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주전539년에 페르시아에 멸망을 당합니다. 같은 지역이 주인만 달라진 것입니다.

고레스는 정권을 잡자 바로(주전538년) 그의 칙령을 내렸습니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담화문은 秋霜같았습니다. 고레스의 담화문은 전령을 통해 전국에 전해졌습니다. Persia에 내려진 vr</K(Cyrus)의 칙령은 시각을 다투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텔레비전으로, 또는 전문으로 보내면 되는데 당시는 전령이 말을 달려서 각 지역에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전령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고레스의 명령을 전한 것입니다. 칙령의 내용은 유대민족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레스는 유대와 아무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고레스는 유다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왜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합니까? 고레스가 유다를 풀어주기 위해 돈을 받은 것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레스에게 lobby를 한 일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유대인들을 풀어주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왕권으로 전국에 특별 명령을 내렸습니다. 고레스의 추상같은 명령은 전령들을 통해서 속속 전달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j"Wr)을 감동시키셨기(rW[)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을 응하게(hl;K;) 하신 것입니다. 즉 고레스의 자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고레스에 대해서 말하기를 바벨론을 멸망시킬 자라 했습니다(사13:17-22). 압제하는 바벨론을 칠자라 했습니다(사21:2). 모든 나라들이 고레스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 했습니다(사41:2). 심지어 고레스는 하나님의 목자라 하였습니다(사44:28). 고레스를 메시야라고까지 했습니다(사45:1-4). 고레스가 나의 백성을 놓을 것이라 했습니다(사45:13). 고레스는 이 일을 반드시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사46:11, 사48:14-15). 누구의 말씀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의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5:11-13을 보면 “11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1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13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유다왕 여호야김 4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단1:1). 이때가 주전 606년입니다. 그로부터 70년은 주전 536년입니다. 이때가 고레스 통치원년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70년이 되는 때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고레스는 어느 날 140년 전의 기록 문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140년 전의 문서인데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사44:28, 사45:1-4). 140년 전의 문서에 “고레스는 나의 목자라, 나의 메시야 고레스는,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고레스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자신이 전략을 잘 세워서 전쟁에 승리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머리가 좋고 힘이 좋아서 왕이 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고레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즉시 시행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회교국가인 아프카니스탄도 하나님이 관리하시고, 우상을 섬기는 아프리카도 하나님이 관리하시고, 불교국가인 인도도 하나님께서 관리를 하시며, 카톨릭의 국가들도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신들끼리 나누어서 “나는 하늘을 만들고, 너는 땅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동물을 만들어라. 너는 식물을 만들어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신 세상입니다. 저절로 되어 진 세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통치를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우리에게 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내 직장도 하나님이 섭리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내 사업장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관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을 믿고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고레스에 대해서 감동하기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지으셨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입을 만들기 전에 고기를 먼저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조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우리들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속을 낳고, 하나님의 섭리는 그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잘해야 우리들의 삶이 편안합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감동시키셨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II.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고레스(2-4절)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4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찌니라 하였더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그 은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그러한 인물입니다. 사울왕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겸손했습니다(삼상9:21). 사무엘이 사울더러 이스라엘의 왕이 되라고 했을 때 자신은 작은 지파중의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출발한 사울은 시작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은혜로 시작했습니다. 누가 그를 비방했어도 대응하지 않았습니다(삼상10:27). 왕이 되기 전에 적을 크게 이겼습니다(삼상11:11). 그러고도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제사장인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만나고서부터 더욱 곁길로 갔습니다. 즉 시기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예루살렘의 처녀들이 노래한 것을 가지고 평생 불순종하는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이후 사울왕은 하향곡선을 급히 긋게 됩니다. 그리고 불명예스런 왕이 됩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듣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인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 Persia 제국(empire)의 막강한 왕이었는데, 마치 말잘 듣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먼저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나를 왕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2절).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어디 있든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했습니다. 거기에 축복까지 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3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의 백성들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고레스는 사람들만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디 있든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본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경비를 지출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편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별도로 경비를 지출하라고 했습니다(4절).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고레스는 세 단계를 거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유대인들을 위한 조서를 선포합니다. 3절은 고레스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지원책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갈 완전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고레스는 재무관 미드르닷에게 성전의 기물들을 유대까지 운반한 후에 스룹바벨(세스바살)을 만나서 성전이 완공될 때까지 잘 보관하였다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또한 시리아의 총독인 사트라부사네스에게 유다의 성전건축은 내 명령하에 하는 공사니 모든 경비를 사마리아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충당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누구든지 방해를 하지 못하게 조처를 한 것입니다. 재무관이나 총독들은 고레스에게 잘 보이려고 고레스보다 더 잘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끔씩 이방의 왕들을 그의 종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역대상5:26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 했을 때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이웃나라들을 채찍으로 여러 번 사용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방나라의 왕들까지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시대를 볼 때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이방인들이나 소외된 자들이 더 잘 믿었습니다. 세리나 창기, 사마리아인, 이방인들이 훨씬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도가 비교도 안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다른 교회와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이왕이면 서울의 대형교회와 비교해보았습니다. 교회규모가 달랐습니다. 그 교회는 수만 명입니다. 우리교회는 삼십 명이 채 안됩니다. 그 교회는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교회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교회건물의 모습이 없습니다. 그 교회는 감리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얼마 전에 이단에게 분당에 있는 교회를 팔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 교회는 세습을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 교회도 말씀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다고 하는 교회가 이단에게 교회를 팔았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비교해보았을 때 우리교회는 무엇 하나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내세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소망이자 자부심입니다.

순종의 구약적인 의미는 [m'v;(듣다)입니다. 듣고 이해하며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순종의 신약적인 의미는 복종(uJpakohv)입니다. 듣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것입니다. 고레스의 순종에 지구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고레스의 순종에 유대인들은 비로소 고국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내 뜻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우리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인 설교자가 전해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순종한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대개 부분적인 순종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것은 순종하지만 어떤 것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마치 돌같이 단단한 땅을 파지 못하는 쟁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모두 순종하면 포크레인같은 힘이 나오게 되는데 부분적인 순종으로 인해서 송곳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합니다. 노아의 시대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노아의 여덟 사람만 제외하고.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의 모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롯과 두 딸만 제외하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여호수아 갈렙만 제외하고. 억지로 순종하든지. 자발적으로 순종하든지 순종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실행에 옮기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살점을 도려내는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순종을 하면 하나님의 동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었습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이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모두 보냈습니다. 그에 따른 경비를 소집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소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범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교회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것보다 넓습니다. 우리들 개개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넓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힘들어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의 삶에 나타날 것입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And

제사장을 위한 번제(출애굽기29:15-18)

모세는 또 수양하나를 취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수양의 머리위에 안수를 해야 했습니다. 역시 아론의 아들들의 죄가 수양에게 轉嫁되는 의식입니다. 수양이 들어갈 때는 죄가 전혀 없었는데 아론의 아들들이 수양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안수함으로서 수양은 아론의 아들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게 되었습니다(15). 제사장도 역시 먼저 속죄를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세는 수양을 잡아야 했습니다. 역시 수양의 피를 취하여서 단 위의 주위에 뿌려야 합니다. 단 주위를 거룩케 하는 의식입니다. 그 수양의 각을 떠서 그 장기(臟器)와 다리는 씻어서 각을 든 고기와 머리와 함께 그 수양의 전부를 단위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였습니다. 이제 거행할 위임식에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번제의 목적은 자신을 속죄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레1:4, 9:7).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1:4)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레9:7)

번제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그 제물을 완전히 받으셨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그것이 믿음으로 드렸다면, 그 드리는 자도 받으셨다는 점입니다. 번제는 완전히 태우는 번제로 묘사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서 열납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피 뿌림을 통한 대속의 속죄에 의해 그 분의 임재에로 나아오는 예배자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번제의 목적은 헌신을 위함입니다(레1:9).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1:9)

믿음을 갖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희생제물을 공적인 은혜의 공급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믿는 자들과 함께 연합합니다. 우리는 공적으로 예배가운데서 하나님의 받으심이 우리의 열심 때문에 받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받아들여짐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만이 우리를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무고한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힘은 무능력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무능력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잘났다고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론의 아들들 때문에 수양이 죽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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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제사장의 속죄제(출애굽기29:10-14)

모세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송아지머리에 안수하였습니다(10). 사람이 송아지 머리에 안수를 함으로써 대제사장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가 송아지에 轉嫁(전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송아지에게 옮기는 의식입니다. 즉 아론의 죄와 아론의 아들들의 죄가 송아지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아론이나 아론의 아들들이 경건하지 못했다면 송아지가 역시 경건하지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건하지 못한 것이 송아지에게 전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송아지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해서 회막문 앞에서 죽었습니다. 그 송아지 피를 네 손가락으로 단 뿔들에 발라야 합니다. 단을 송아지피로 거룩케 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를 단 밑에 전부 쏟았습니다. 기름들은 모두 단위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 이것이 속죄제였습니다(12-14). 제사장의 임직을 위한 속죄제였습니다. 제사장직의 계약은 희생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저들도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7:27,28을 보면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약점이 없는 제사장을 세우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oJ novmo" ga;r ajnqrwvpou" kaqivsthsin ajrcierei'" e[conta" ajsqevneian /호 노모스 가르 안쓰로푸스 카씨스테신 에콘타스 아스쎄네이안/(그) 율법은 무력함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다. 여기에서 “약점” ajsqevneian/아스쎄네이안 여성형으로 나타냈습니다(명사. 대격, 여성. 단수). 즉 율법의 지극한 약점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율법을 완전케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완전케 하시는 맹세의 말씀이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구약의 율법이 완성품이라면 창세기3:15의 말씀도, 구약의 수많은 메시아의 도래가 바꾸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도래가 온전케 되어야 했기에 아론으로 이어지는 대제사장의 직분은 약점(지극히 약한)을 가졌습니다. 율법이 완전하다며, 즉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굳이 예수님의 성육신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육신이 필요하기에, 그를 보내셨습니다. 그를 제사장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제사장입니다. 약점(무력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표상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그림자가 아니고 실체입니다. 오리라고 하신 메시야입니다. 창세가3:15에서 예언한 여인의 후손입니다. 인류의 죄를 덥석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를 짊어지셨고, 현재의 죄를 짊어지셨으며, 미래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변호하시고 도우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집을 마련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배려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시고 계십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은혜를 오늘도 우리는 간직하고 믿음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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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10대 박해

N0.

박해한 황제들

년도

박해지역

주요 순교자들

1

Nero

44

로마와 그 변두리

베드로, 바울

2

Domitianus

90- 96

로마, 소아시아

로마의 클레멘트, 요한

3

Trajan

98-111

부분적

이그나티우스, 시므온, 소지무스

루푸스

4

Hadrian

117-138

부분적

텔레스포루스

5

Marcus Aurelius

161-168

부분적

폴리갑, 순교자저스틴, 포티누스

블랜디나

6

Septimus Severrus

202-211

부분적

레오니다스, 이레니우스, 페르페투아

7

Maximinus

235-236

부분적

우르술라, 히폴리투스

8

Decius

249-251

로마제국 전역

파비아누스, 코르넬리우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안디옥의 바빌라스

9

Valerian

257-260

로마제국 전역

프리스쿠스, 말쿠스, 알렉산더, 키프리안, 오리겐, 식스투스2세,

10

Diocletian Galerius

303-311

로마제국 전역

마우리티우스, 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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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위임식의 준비(출애굽기29:1-9)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제사장으로 섬길 직분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거룩하게 함이었습니다. 본 구절은 레위기8:1-9과 병행구절입니다. 위임식의 준비로 젊은 수소 하나와 흠 없는 수양을 취해야 했습니다. 무교병을 취하고 기름 섞인 무교과자, 기름 바른 무교전병을 모두 고운 밀가루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을 한 광주리에 담고 그것을 광주리에 담은 채 송아지와 두 마리 양을 가지고 성소에 와야 했습니다(3).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겼습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제사장의 옷들을 갖추게 했습니다. 의복을 가져왔습니다. 속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띠를 디우고 머리와 관을 씌우고 “여호와께 성결”이란 성패를 달고 관유로 기름을 부었습니다(4-6절).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어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이것은 위임식의 준비였습니다(7-9절).

“물로 (그들을) 씻기고”의 의식은 생명수로서 심령을 깨끗케 하여 영적성결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령으로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히9:13-14, 10:2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먼저 깨끗해야 됩니다(시24:4). 씻는다는 것은 정결하기 위해서 씻는 것입니다. “라하츠”는 직접적인 정결입니다. 죄로부터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는 에스겔 전체에 걸쳐 나타납니다(겔16:4,9, 23:40). 신약성경에서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에서 나타납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씻는 것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요2:6. 마15:2, 히 9:10).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계속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첫 번째 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그의 피로 씻습니다. 말씀으로 씻습니다. 기도로 우리자신들을 씻습니다. 우리가 씻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거룩하다고 하는 제사장도 씻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씻었습니다. 인간인 누구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헌신자들이 꾸준히 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도 씻어야 하고, 장로도 씻어야 하며, 권사도 씻어야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도 죄씻음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죄의 용서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물로 씻는 의식만으로 깨끗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애초에는 우리들의 목숨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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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속옷(출애굽기28:42-43)

제사장들은 그들의 벌거벗은 것을 가려야 했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은 엉덩이로부터 넓적다리에 이르기까지 내려오는 고의를 입어야 했습니다. 레위기6:10을 보면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당시의 일반 사람들은 거의 하체를 가리지 않은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맨살로 하나님 앞에 보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43절을 보면 성소에 들어갈 때에 그것들(속옷)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어원을 보면 치명적인 죄입니다. 죄(@/[; /ʽāȏn/아온)은 '불법을 저지르다(hw:[/ʽāvā/아바)에서 유래한 말로 “죄악, 사악”을 의미합니다. 이 죄가 왜 “치명적인 죄”라고 하느냐? “아온”은 집합적인 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15:16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의 죄(아온)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지 약625년 만에 아모리(가나안) 사람들의 “아온”이 관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또 이사야53:6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아온)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하였습니다.

‘아온’은 하나님 성품의 특성이 아닙니다. 인간의 속성과 행동입니다. ‘아온’은 사무엘상20:1, 8, 사무엘하 3:8, 느헤미야4:5, 시편51:2에서 여러 종류의 시민 생활이나 사회적(규칙)의 위반입니다. 여호수아22:17, 사무엘상3:13-14에서는 제의적인 (규율) 위반입니다. ‘아온’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과거의 범죄의 총합입니다. ‘아온’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폐하는 것입니다(욥15:4-5). ‘아온’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확고부동하지 않음과 결합되어 있습니다(시78:37-38). ‘아온’은 간음(민 5:31) 및 우상 숭배(호5:5, 렘16:10-11)입니다. ‘아온’의 다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소외입니다(alienation, 레26:40,사 59:2,1:4).

인간에게 이러한 “아온”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아온”으로 바로 성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모세에게 지시한 옷들을 입고 걸치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무트) 했습니다.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가리어주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가리어 주십니다. 우리의 “아온”을 그 분이 가리어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아온” 때문에 죽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아론보다도 더 높으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아온”을 가리어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오늘 살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출애굽기나 레위기를 볼 때에 하나님께 오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모리 족속같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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