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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형식에 매인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25-26)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의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았습니까”하고 물으면 비록 모르더라도 “예”하고 전원일치해서 대답한다. 왜냐하면 전원일치하여 알았다고 대꾸하는 것이 알았습니까 하고 묻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선생님의 명분, 학생으로서의 당위, 그리고 모두가 알 것이라는 지배적인 추세 때문에 모른다는 본심을 희생시킨다. 여기서 ‘모른다’고 사실을 말하는 독립적 언행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의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미학교의 어린이들은모르는 것이 있으면 민망스러울 정도로 완고하게 모른다고 버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선택할 때, 어느 한두 사람이 선택한 메뉴가 반드시 내가 꼭 먹고 싶은 것이 아니더라도 대개는 그에 휩쓸려 “나도, 나도”하며 동일화하는 다중에 휩쓸라는 습성이 있다.

또한 일상의 교제나 직장생활에 있어서도 이 같은 겉과 얼굴과 속이 다른 이중성으로 공적얼굴과 사적얼굴을 잘 배려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조종 해 나간다. 예로 만나기 싫은 사람을 오래 만에 길가다 만났다 하자. 속으로는 에이하고, 빨리 가버리라고 속 얼굴은 찡그리면서 겉으로는 “반갑다. 일새 꼭 한 잔 하자”고 겉 얼굴은 웃는다. 외래자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는 막중하고 과분하게 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환대한다. 그 환대 때문에 몇 달 동안 조의조식(租衣租食)을 한다는 건 다반사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것 하나 쓸모 있는 것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버려야 할 것들만 잔뜩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들이 율법위에 여러 가지 규정을 덧붙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손을 씻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법제화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손을 씻는 양과 질, 물 붓는 방법,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 손의 자세 등을 규정해놓았습니다. 이런 의식을 하면서 그들은 자랑했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힐난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접을 깨끗이 닦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책망하셨습니까? 그릇은 깨끗하지만, 그 안에 담겨지는 음식은 탐욕과 방탕의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부정부패비리로 얻은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것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접은 따라서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최근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들은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거의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비리와 부패가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이 사람들이 망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이 사람들이 속한 교회들이 파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7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파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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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인과 믿음을 저버린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23-24)

이번에도 예수님은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철저한 위선자였습니다. 돈의 액수가 작은 것들은 법을 만들어서라도 십일조로 냈습니다. 레위기27:30을 보면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이라고 했습니다. 땅의 소산 중에서 십일조를 낼 경우에는 땅의 곡식, 실과의 십분 일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박하, 회향, 근채’ 같은 작은 채소들의 십일조는 만들어서라도 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책망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저들이 만든 규례는 융통성 없이 지켰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훨씬 중요한 것은 소홀히 취급했습니다. 즉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말, 율법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큼직큼직한 율법, 꼭 지켜야 할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용산에 있는 신용산교회에서 용산참사로 희생된 고 이상림 집사는 이 교회를 15년 간 다녔습니다. 보통 교인의 부음을 들으면 담임목사나 부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유가족을 찾아가 예배하며 위로합니다. 하지만 이상림 집사 유가족이 다니던 교회는 참사 8개월이 지나도록 찾아오지도 않고, 위로예배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용산교회에서 이상림집사의 장례식장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주보에도 그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용산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신용산교회의 이춘우 장로가 재개발조합장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원로장로가 재개발 사업을 지휘하는 조합장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교회에서 예배하고 동네 이웃으로 지내온 사람이 세입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용역 직원들을 고용하고, 그들 뒤에 숨어서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이 눈치를 보느라고 한 사람도 장례식장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용산교회의 표어는 ‘거룩, 부흥 그리고 나눔’이라고 합니다. 신용산교회는 교회나 선교 단체 17곳을 지원하고 해외 선교사도 21명이나 후원한다고 하며, 정기적으로 이웃을 초청해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 교회를 다니면서 이해관계 때문에 적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성도들이 의와 신과 인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밖으로 잘 한다고 하더라도 안에서 잘 하지 못하면, 곧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관계를 떠나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교회사에 꾸준히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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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된 인도자인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16-2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맹세를 시정코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성전으로 맹세하면 그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있는 금(재물)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16절). 또한 제단으로 맹세하면 역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재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17절). 이들의 잘못은 성전과 성전 안에 있는 예물, 제단과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나누어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그들을 소경이라 했고, 어리석은 사람(mwrov")고 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재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무조건 옳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생각은 뻔합니다. 재물에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위선적입니까? 재물에 눈이 어두워있기 때문입니다. Cavin은 위선이란 실리추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인 미신은 대개 목사들의 허욕과 탐욕으로 양육된다고 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곁길로 가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합니다. 성경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성경이 아닌 것을 말하며,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타락한 예배를 교회 안에 끌어들입니다. 과거 Roman Catholic의 교황제도가 그랬습니다. 재물만 생각했기 때문에 수많은 방법을 통해 숱한 미신이 양산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는 성전의 금이나 성스런 제물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본질인지를 몰랐습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성전이 중요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5:33-37) 예수님은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머리로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맹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나 제단은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제단위의 제물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돈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물질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물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더러우면서 또한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이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물질에 대해서 탄력적이어야 합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아닌 것을 합리화시켜 기정사실처럼 믿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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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된 인도자인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16-2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맹세를 시정코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성전으로 맹세하면 그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있는 금(재물)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16절). 또한 제단으로 맹세하면 역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재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17절). 이들의 잘못은 성전과 성전 안에 있는 예물, 제단과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나누어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그들을 소경이라 했고, 어리석은 사람(mwrov")고 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재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무조건 옳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생각은 뻔합니다. 재물에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위선적입니까? 재물에 눈이 어두워있기 때문입니다. Cavin은 위선이란 실리추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인 미신은 대개 목사들의 허욕과 탐욕으로 양육된다고 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곁길로 가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합니다. 성경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성경이 아닌 것을 말하며,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타락한 예배를 교회 안에 끌어들입니다. 과거 Roman Catholic의 교황제도가 그랬습니다. 재물만 생각했기 때문에 수많은 방법을 통해 숱한 미신이 양산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는 성전의 금이나 성스런 제물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본질인지를 몰랐습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성전이 중요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5:33-37) 예수님은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머리로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맹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나 제단은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제단위의 제물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돈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물질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물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더러우면서 또한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이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물질에 대해서 탄력적이어야 합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아닌 것을 합리화시켜 기정사실처럼 믿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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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사람들(마태복음23:1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유대를 망치는 이들의 잘못은 적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라는 직임과 책임을 갖고 있으면서 뱃머리를 잘못 된대로만 돌렸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거기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내쫓고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무수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통일이스라엘로부터 분단왕국일지라도 그들의 잘못을 철저하게 지적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큼 떼어 붙여 유사한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유대교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제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어겼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을 보냈지만,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합니까? 천국 문을 막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같이 들어갈 사람을 구하러 다니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이방인들, 무할례자들을 유대교로 이끌려는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을 일반 군중들은 크게 칭찬했습니다. 타민족의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려는 근면성과 열심을 칭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원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LXX인역은 헬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이방인들을 위함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방인 전체를 표현할 때 헬라인이라 했습니다(요12:20-23/행18:4). 이방인들이 유대사회에 들어와서 경건한 유대인들의 생활과 습관, 찬송 등에 의하여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숭배하는 자들을 개종자라고 했습니다(23:15, 행2:10). 이와 같은 집회와 설교의 기회는 그리스도 안에 었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고 은혜가 되었습니다.

개종자들은 이전의 사악한 행실을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지켰던 각종 미신을 버리고 회당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여호와를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방인들을 유대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적이고 저희들이 신봉하는 단체에 가입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즉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을 얻게 하는 바리새인들을 만드는데 목적이었습니다. 새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오히려 유대의 바리새인들보다 더 잘못된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정말 어렵게 이방인들로 하여금 개종하게 해놓고는 지옥자식을 만든 것입니다.

제네바 에큐메니컬 센터에서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W.C.C.총회가 차기 총회개최지로 2013년 부산에서 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W.C.C.는 종교다원화를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교회이름을 빙자해서 지옥으로 가게 하는 단체들,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주님께서는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즉 사람들을 지옥으로 빠지게 하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And

심판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마태복음23:13-14)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점을 말씀하신 후 그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화있을진저(oujaiv)는 ‘오호, 슬프다, 화가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호세아7:13에도 ‘화있을진저’(y/a)가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에서도 47번이나 경고하였습니다. 마23:13,15,16,23,25,27,29, 눅6:24,25,10:13,11:42,43,44,47,52, 유1:11, 계12:12 등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7가지 ‘화있을진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23:13).

2. 자신처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멀리하게 함(23:15).

3.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만든 전통을 따르도록 함(23:16-22).

4. 하찮은 것들은 아주 중히 여기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 즉 정의나 자비나 믿음 등과 같은 것들은 무시함(23:23-24).

5. 겉은 깨끗이 하면서 속은 부패함(23:25-26)

6. 죄를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옳게 행동함(23:27-28).

7 과거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처럼 말하지만, 현재의 행동으로 보아서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23:29-36).

이들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전시효과로 노린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본인들에 대한 은혜인데, 이들은 그렇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pro;" to; qeaqh'nai toi'" a[nqrwpo")였습니다.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과장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외식을 함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행위가 옳은 줄로 알고 그들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지고, 지도자라는 직함을 가진 자들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든 행위들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문을 막아버린 결과가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제사장의 나라라고 자랑하였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메시야를 배반했습니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장 좋은 기회를 가졌음에도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도 막아버린 것입니다. 하늘 문을 어느 민족보다 열어야 할 그들이 하늘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이미 종교다원화주의에 빠진 교회들이 있는가하면, 다양한 종교 속에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바른 말을 쏟아내지 않습니다. 종교간 화합이라는 美名하에 바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너무 깊이 이 세상과 타협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합니까? 천국의 문을 막아버리는 것이 됩니다.

And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마태복음23:5-12)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경문을 크게 넓혔습니다. 경문(fulakthvrion)은 율법이 써진 종이쪽지를 보관하는 작은 가죽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기록하여 경문에 담았습니다.

출1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13:10 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이 규례를 지킬찌니라

출13:11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출13:16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찌니라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신11: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신11: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

유대인들은 이 경문을 작은 상자들 속에 봉해 넣어 기도할 때 앞이마와 심장 맞은편의 왼편에 가죽 끈으로 고정하여 착용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출13:16과 신6:8 및 신11:18에서 주어진 지시에 따라 그것으로 자신들이 머리와 가슴에 하나님의 명령들을 새겨둘 의무를 엄숙히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옷술을 크게 했습니다. 옷술(kravspedon)은 옷자락 네 귀퉁이 끝에 장식으로 매다는 여러 가닥의 실입니다. 석류문양의 장식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기억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기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습니다. 또한 잔치자리에 초대를 받으면 상석에 앉았으며, 회당의 상좌에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랍비라 칭하면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경계하시면서 오직 선생은 한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한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사도 오직 한 분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자가 되려면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고, 자신이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여러 사람의 청문회를 봤습니다. 평소에는 좋은 대학교총장으로서 존경받는 사람이요, 이름 있는 공직자였는데 막상 청문회를 해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한국에 내려다가 오히려 상처만 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원히 비리와 불법의 사람으로 낙인이 된 것입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음을 알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겸손한 자세로 우리는 한없이 낮아져야 합니다. 과시하려는 사람은 언젠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And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신명기1:1-8

실수해서 실패한 것과 고의로 실패한 것은 실패의 결과가 다릅니다. 똑 같이 실패를 했지만 그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을 물을 때도 다르게 묻습니다. 실수해서 실패를 한 사람은 그 책임을 물을 때 정상참작을 합니다. 그래서 추후에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고의로 실패한 사람은 정상참작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회도 없고, 책임을 물을 때도 가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는 하지 않아야 하지만, 하더라도 고의성은 없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다가 실패한 것은 용서가 됩니다. 실수해서 실패한 사람과 고의로 실패한 사람의 마음가짐도 다릅니다. 실수해서 실패한 사람은 그 결과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의로 실패한 사람은 실패를 예견하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실수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1절에서 2절을 보면

1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2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아마도 모세는 38년 전을 회상하면서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1-2)

신명기는 세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1-4:43; 4:44-26:19; 27:-34:).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진입하기 직전에 모압 광야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신세대입니다. 과거의 세대는 위풍당당하게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으로 인해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모세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신세대였습니다. 불순종의 세대는 38년 전부터 최근까지 모두 광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2절을 보면 기가 막힌 내용이 나옵니다. 호렙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11일 길이라고 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nEr]B' vdeq;)는 가나안의 입구입니다. 거기만 넘으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11일 길을 40(1,4610일)년 간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로서는 통한이 서린 기억이었습니다. 사람들마다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모세가 기억하기 싫은 곳이 바로 가데스 바네아였기 때문입니다.

38년 전 애굽을 출발한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스파이의 보고를 받았습니다(민13:25-33). 그러나 보고사항이 나뉘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자”는 쪽과 “못간다”는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못 간다는 쪽이 훨씬 많았습니다. 열두 명 중에서 10명이나 되었습니다(83%). 갈 수 있다는 쪽은 2명(17%)이었습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많은 사람이 찬성한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한술 더 떠서 한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상황을 이스라엘에게 말했습니다. 그때가 출애굽한지 40년 11월 1일이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죽인 직후였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까?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아담이래로 인간들의 판단은 항상 옳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이후로 인간의 판단은 흐려졌습니다. 자기들 깐엔 옳게 판단한다고 하지만 항상 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권능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신 분입니다. 홍해도 갈랐고, 애굽의 바로를 깨뜨린 분입니다. 그들은 어떤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었습니다. 스파이를 보내고 말 것도 없었습니다(신1:21). 스파이를 보내자는 것도 그들의 판단이었습니다(1:22). 스파이를 보냈으면 연합해서 가나안에 들어갈 생각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그들은 불순종했습니다. 약 250만 명에서 겨우 3명밖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한 대로 40년을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게 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습니까? 인간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 인간들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실제로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하신일보다 가나안에 사는 족속들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스스로를 메뚜기로 비하한 이들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실패할 것은 뻔했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보다 가나안 사람들을 더 믿었습니다. 그래서 불신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믿는 것입니다.

무엇이 불순종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무엇이 불순종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왜 불순종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가장 큰 죄가 불신앙의 죄입니다.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40년을 거미줄처럼 미로를 헤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신(ejdivdasken) 후 그들에게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살든지, 듣지 않고 망하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마7:24-27). 내 말을 듣는 자는 총명한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듣고 행치 않는 자는 우둔한 자라 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영육 간에 살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길이 열림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38년 전의 일을 들추어내면서 그들의 부모들이 믿지 못해서 망한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3절에서 8절을 봅시다.

3제 사십년 십일월 그 달 초일일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고하였으니 4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 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하는 바산 왕 옥을 쳐 죽인 후라 5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6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 7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셨나니 8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사 그들과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하신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얻을찌니라

II. 하나님께 순종을 요구하는 모세(5-8)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주사와 약을 처방했습니다. 약을 주면서 네 시간마다 두 알씩 먹으라고 했습니다. 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두 시간마다 네 알씩 먹는 것이 지겨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집에서 처방을 했습니다. 네 시간마다 두 알씩 먹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병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가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의사를 찾아가서 네 시간마다 두 알씩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만약 당신이 내 처방대로 했다면 이미 다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방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균들을 더 화나게 만들었습니다.”하고 “당신이 내 말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환자가 의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습니다. 의사가 말하는 대로 해야 병이 낫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40년 11월 1일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때 하나님의 명령을 모두 전달하였습니다. 이때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 죽인 때였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왕 시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민21:21). 그러나 시혼은 이스라엘의 통과를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치러 나왔습니다. 이에 모세는 시혼을 죽인 것입니다. 바산 왕 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아예 없애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히 멸망케 하셨습니다(민21:33-35).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멸망을 왜 기록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강하게 막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시혼”과 “옥”같은 존재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들을 꼭 방해하고 있습니다. 건건이 물고 늘어지고, 건건이 우리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혹 제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타인들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같은 신자들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무늬만 신자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을 힘들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시혼이나 옥같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외쳤습니다. 너희들의 조상이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가 이 산지에 거한지 오래됐다. 그러므로 너희는 방향을 돌리라. 그리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라. 그 근처 곳곳으로 가라. 아라비아 산지로 가라. 평지로도 가고, 남방과 해변으로도 가고,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 유브라데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그 땅은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 땅은 후손들에게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 땅이 눈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38년 전에 현재의 부모들에게 전한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듣는 너희들은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긍정의 힘”(Your best life now)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조엘 오스틴입니다. 이 책은 7단계로서 구성되었는데 각 단계마다 7가지로 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참 좋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사람들에게 큰 독이 되는 책입니다. 긍정(affirmation)이란 ‘어떤 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긍정은 아주 다릅니다. 믿음은 성경에서 왔고, 오스틴의 심리학에서 왔습니다. 믿음은 어떤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긍정은 어떤 일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살라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셨습니다. 만일에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보셨다면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좋은 말만 했을 것입니다. “절대로 죄를 지적하지 말고 좋은 말만 하라”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유대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aujtoi'" Gennhvmata ejcidnw'n)했습니다(마3:7). 예수님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o[fei" gennhvmata ejcidnw'n); 마23:33). 긍정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강도질을 해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개판으로 날마다 술에 취해서 살아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야 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입니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 좀 거짓말하고 비리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게 뭐 어째”라고 이해를 해야 긍정적입니다.

사람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긍정의 힘” 영문제목은 ‘Your Best Life Now’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최선을 다하라’입니다. “긍정”이란 말은 “부정”의 반대말입니다. 믿음의 용어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스틴은 “내 안에 긍정 파워 만들기 7일”이라고 했습니다. “1.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펼친다. 2. 좋은 문장에 줄을 친다. 3. 마음속으로 크게 5번 외친다. 4. 열정적으로 소리 내어 5번 반복한다.” 그러면 7일 안에 당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의 1세들도 긍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열 명의 스파이들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자 그 말을 긍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하자 모두 ‘그 말이 맞다’고 긍정했습니다.

쇼생크탈출에서 주인공 앤디(팀 로빈스)의 친구로 나온 레드(모건 프리먼)이 교도소석방판정관들 앞에 불려갑니다. 판정관들은 레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그간 교화되었다고 생각합니까?” 레드는 “녜, 저는 충분히 교화되어 사회에 적응할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판정관들은 레드의 석방을 기각합니다.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판정관들이 레드에게 묻습니다. 그때 레드는 “저는 전혀 교화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사회에 적응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자 그의 석방에 판정관들이 모두 동의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긍정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역전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성공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리더쉽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창세기15:6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브람의 어떤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소망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의 변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찾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을 때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약속하신 것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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