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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석에 앉은 잘못된 자들(마태복음23:1-4)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제지를 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이상 저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말하는 지키고 행하되,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희들은 말은 하되 그 말을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고는 자기들은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은 관용어입니다. 즉 예수님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모세의 권위를 계승한 지도자들로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이 관용어는 ‘~의 자리에 앉아서 거만을 떨다’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자리란 유대인들이 율법교육과 예배를 위해 사용하던 건물회당 앞자리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높은 의자였습니다. 랍비가 이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읽고 설명하고는 했습니다.

원래 율법은 613개입니다. 금지계명 365개, 허용계명248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항에 율법사들이 엄청나게 덧붙였습니다. 안식일에만 금지된 노동이 39개항이었습니다. 이러한 조항을 세부로 또 나누었습니다. 쟁기질하는 일, 수확하는 일, 단을 묶는일, 반죽하는 일, 굽는 일, 털을 깎는 일, 털을 표백하는 일, 털을 빗는 일, 털을 채색하는 일, 털을 잣는 일, 털을 짜는 일, 두 실을 감는 일, 시침질하기 위해서 뜯는 일, 가젤라를 사냥하는 일, 도살하는 일, 가죽을 벗기는 일, 소금에 절이는 일, 가죽을 정리하는 일, 깎아 내는 일, 절단하는 일, 두 개의 글자를 쓰는 일, 두 글자를 쓰기 위하여 지우는 일, 건축하는 일, 무너뜨리는 일, 불을 끄는 일, 점화하는 일, 망치질하는 일, 무엇인가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일등입니다. 심지어 등불을 끌 때 “만일 누가 이방인과 도둑과 악령이 두려워서 그리고 병자를 잠들게 하기 위하여 등불을 끈다면 그는 무죄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등과 기름을 아끼기 위하여 그러하였다면 그는 유죄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들은 옳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그 말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은 잘합니다. 그러나 그 말대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말은 하는데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말라고 하고서 정작 자신은 교만합니다. 내가 총회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총회장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모세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말을 했으면 행동이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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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해 질문하심(마태복음22:41-46)

바리새인들이 많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뉘 자손인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자손이라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시편110:1을 인용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윗이 주라고 말했는데,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편110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는 미래의 메시야가 다윗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알았어야 할 것은 메시야(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인 동시에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인간인 동시에 초인간적인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은 그 자손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그의 권력으로부터 내려와 미래에 오실 분을 바라본 것입니다. 다윗자손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 자신의 후손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4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편을 생각할 때 가운데에 왕이 앉아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른쪽에 그보다 못한 자가 앉을 것이다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우편은 가장 영예로운 자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편에 앉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배에 동참하고, 그의 대적들을 굴복시키는 전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이 주님의 발아래 꿇림을 당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목을 밟을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5장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담-셋…노아-셈까지입니다. 그러나 10장에서 그 뒤를 이어 12장에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통틀어서 역대상에서 다시 족보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족보가 등장합니다. 이럴 경우에 그리스도는 셋의 엄청난 인간계열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모든 족보에 등장한 사람들은 주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족보를 들이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로 높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자신을 말할 때 주의 계집종(hJ douvlh kurivou)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노아도, 마리아도 모두 주님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신성을 모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모르면 풀리지를 않습니다. 태어난 연도, 인간의 족보로만 따질 때 예수님은 더욱 풀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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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마태복음22:34-40)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을 물리쳤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상당히 호의적이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을 계속 시험하려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물리쳐 준대 대해서는 후련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끈을 풀지 않았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했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게명은 총 613개입니다. 이 계명들은 금지나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질문의 요지는 613개의 계명 중에서 어떤 한 계명만 선택한다면, 다른 계명들 즉 612개의 계명들은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하고 저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예수님 말한마디에 꼬투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첫째 계명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했습니다.

십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내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구는, 네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총613개의 계명이나 십계명을 압축하면 두 개의 계명으로 나누어집니다. 즉 모든 계명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두 돌판도 첫째 돌판에는 1계명에서 4계명이, 둘째 돌판은 5계명에서 10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계명들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율법과 선지자)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온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그 계명이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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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인들의 계략(마태복음22:23-33)

예루살렘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 부류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즉 바리새인과는 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은 현세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부활도, 영생도, 영적인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최고행정, 정치, 종교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왜 예루살렘의 실권을 쥘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사회를 독점하다시피했습니다. 그 방법으로는 헬라와 로마에 붙어서 협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모세오경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책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교리와 신앙이 전혀 맞지 않는 사두개인들과 의기투합한 것입니다. 이들은 평소에 서로 시기했던 사람들입니다. 서로 경쟁했던 사람들입니다. 예로 바리새인들은 로마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로마를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데에 한통속이 되었습니다. 물과 기름이 연합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을 동원해서(23절)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인즉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계명을 끌어왔습니다(24절).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에 대한 것입니다.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것은 형이 무자했을 때에 가족의 기업을 잇게 하기 위해 취해진 것으로서 결혼의 신성성을 저해하지 않을 정도에 의해 국한된 계명이었습니다(신25:5-6). 7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자가 혼인을 했는데 후사가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돌째도 죽고, 말째까지 죽었을 때 형사취수제에 의해 그 여인은 말째까지와 결혼을 했는데, 부활이 있다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부활은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대두되므로 없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들이 오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활했을 때는 혼인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천사들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생활이 주는 연약성을 모두 벗어버립니다. 더 이상 불완전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여기에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언급하셨습니다(32절). 어떻게보면 심판의 부활은 부활이라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았다는 것은 영생, 영광을 위한 부활이기 때문에 이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에 들어가는 사람 이외의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부활에 참예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입니다. 부활에 참예하지 못할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요, 무한한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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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의 계략(마태복음22:15-22)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7일의 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토요일 : 마리아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음(요12:1-12)

일요일 : 승리의 입성 (요12:12-19)

월요일 : 제2차 성전 정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마21:12-22)

화요일 : 바리새인들과 대결하심

◦ 자신의 권위에 대하여(마21:23-27)

◦ 세금 바치는 것에 대하여(마22:15-22)

◦ 부활에 대하여(마22:23-33)

◦ 가장 큰 계명에 대하여(마22:34-40)

바리새인들의 비난(마23장)

헬라인들의 요청(요12:20-50)

감람산 강화(마24,25장)

수요일 : 침묵의 날

목요일

유월절을 준비함(마26:1-20)

다락방에서 일어난 사건들(요13,14장/마26:20-35)

겟세마네로 가는 도중의 사건(요15,16장)

위대한 대제사장적 기도(요17장)

겟세마네에서 일어난 일들(마26:36-56)

갈보리에 달리기 전 마지막 이적(눅22:50,51)

금요일 : 불법 재판들과 그 결과 십자가에 달리심.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예수님을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7일의 화요일에 예수님을 얽어맬 묘책을 생각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인즉 세금문제로 예수를 얽어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칭찬을 늘어놓습니다. “당신은 참되고,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훌륭한 분”이라고 추켜세운 후에 시저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않아야 합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이미 헤롯당원들을 데리고 갔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고, 바치라고 하면 유대의 법을 어기기에 이번에는 걸려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인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이번에도 잡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하든지 예수믿는 자들을 비방하려고 합니다.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힘으로 비방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성도들이 빌미를 제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탄은 계속 물고 늘어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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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복을 입지 않은 자(마태복음22:11-14)

서양에서는 잔치 집에 가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옛날에 왕들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 때 성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초청한 사람들이 다 모였을 즈음 주인이 연회장에 모인 손님들을 보러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잔치자리에 왕이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 손님들이 다 모여야 합니다. 각각 자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왕이 잔치에 나와서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합니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예복을 입고 오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잔치가 벌어지는 곳에서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해 옷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놀란 것은 의외의 일이 아닙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왕을 무시하였던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거지들도 왕의 잔치에 참여할 때는 귀족들이 입는 존귀한 예복을 입었습니다. 근동에서는 예복을 준비해 놓은 커다란 의상실을 갖고 있는 것이 부의 상징이었습니다(욥27:16). 옷들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을 받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왕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을 줌으로써 자신 이 매우 관대하고 아량이 있는 사람임을 드러냈습니다(창45:22, 삼상18:4, 에6:8).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왜 그 잔치자리에 불려갔다가 쫓겨날 뿐만 아니라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던져졌는가? 이 사람은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왕이 모두 준비해놓은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10절의 ‘악한 자’보다 너 나쁜 상태로 되어버렸습니다. 7절의 ‘진멸 당하고 불사름 당한 동네’와 같게 되었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 예복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왕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것인데 곧 믿음입니다. 복음을 믿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잘못된 예루살렘의 실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이 세상의 현재 인구가 약63억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복음은 들었습니다. 선교, 신문, 방송을 통해서 전 세계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방법으로든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잡하고 듣기는 하지만,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복음을 듣는 자들에 비해 너무나 소수만 주님의 나라에 갑니다. 우리 역시 ‘악한 자’(10절)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의의 옷을 입어(욥29:14)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 옛 생활도 청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갈3:27). 오늘 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복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악한 자들이었는데 그리스도예수의 은혜로 예복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는 자들인데 자격증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And

심판받는 불신자들(마태복음22:1-10)

예수님은 이제 그들의 불신과 아울러 이스라엘 전체의 불신을 왕의 초청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신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왕과 같다고 했습니다. 왕은 아들을 위해서 혼인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이 혼인잔치는 왕이 베풀었습니다. 왕은 그의 종들로 하여금 잔치에 오도록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찬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소를 잡았습니다. 살진 짐승들을 잡았습니다. 잔치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어떤 사람들은 장사하러 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에 있었던 어떤 사람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했습니다. 그리고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대노했습니다. 그리하여 군대를 보냈습니다. 자기종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버렸습니다. 왕은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준비했으나 청한 사람들이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종들이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려오니 잔치자리가 가득 찼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왜 왕이 잔치에 오지 않는다고 사람을 죽입니까? 오기 싫으면 그만인데 왜 억지로라도 끌고 오라고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야기입니다.

왕이 나온 것은 이스라엘전체를 놓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와야 합니다. 이 잔치는 먹고 마시고 하는 잔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구원의 잔치입니다. 오지 않으면 영원한 흑암에 떨어지는 필수적인 잔치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았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과거(구약시대, 예수님당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사상은 강조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을 능욕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을 진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사거리로 보냈습니다. 사거리는 어디입니까? 로마제국입니다. 길을 잘 내는 로마제국을 말합니다. 즉 이제는 유대 밖으로 복음이 나가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 상당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베푼 혜택을 모두 거두어들이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선택받은 사람은 오히려 버려지고, 버려진 사람이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심층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배척했던 그리스도예수를 순전히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아무렇게나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배려로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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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위력(마태복음21:33-4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실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사람을 가루로 만들 것이다.’.

로마서9:22-23을 보면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라고 했고,

다니엘2:34-35과 “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44,45절을 보면 “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예루살렘의 실세들은 자신들의 세력은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곧 예루살렘에 심판이 닥치는 줄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평화가 지속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손실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못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들이 금강석같이 강하더라도 결코 예수님은 그것들을 깨어 박살을 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고도 예수님은 오히려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잘못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운전대 없이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장난차였습니다. 정상이 아닌 차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땅에 그런 차들을 관리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견인차를 불러서 도로 밖으로 끌어내버립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겁 없는 질주를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위해 가혹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악인들이 현재에도 횡행합니다. 여러 가지의 악인들이 있는데 종교적인 사람들이 더 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갖은 돌들을 던지지만, 오히려 던지는 사람들은 돌에 부딪혀 깨질 것이며, 그러고도 돌 같은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돌이 그들을 깨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정한 날에 심판을 하십니다. 따라서 그 돌에 맞기 전에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즉 예수님을 공격하려다가 오히려 맞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영원히 흑암에 갇혀서 고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즉시 순종하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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