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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변의 시대가 오나 끝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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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대가 오나 끝은 아님(마태복음24:6)

예수님은 격변의 시대들이 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대 심판 때까지 여러 현상들이 일어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사람들도 나올 것이라 하셨습니다(5절). 다음으로 난리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난리(povlemo"/전쟁, 싸움)와 난리 소문이 무성할 것이라 했습니다(6절). 그러나 아직 종말의 때가 아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있을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때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오랫동안 태평시대였습니다. Pax-Romana의 구가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황제들의 강력한 정책들로서 로마는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들도 Pax-Romana의 평화를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Pax-Romana는 믿을 것이 못되었습니다. 인간들의 정부는 하나님의 통치와 틀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로부터 40년이 지난 후에 로마에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로마제국을 흔들었던 황제들이 연이어 바뀌게 됩니다. 자살하고, 암살하여 일 년에 4명의 황제가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 유명했던 폭군 Nero가 68년에 죽습니다. 그러자 스페인에 주둔했던 Galba를 로마 원로원은 ‘제일인자’로 인정하고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Galba가 제위에 앉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Galba는 황제로 추대는 받았지만, 로마에 즉시 와서 황궁을 정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Otho에게 사주를 받은 황제 근위병에 의해서 69년1월15일에 암살을 당합니다.

Otho는 Galba를 죽인 후에 게르마니아 사령관인 Vitellius가 먼저 황제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게르마니아 군단이 Vitellius를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Otho와 Vitellius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Otho는 Vitellius군에게 패하여 69년4월15일에 자살을 합니다.

Otho가 자살했다는 말은 즉시 로마의 원로원에 알려졌습니다. 이에 원로원은 Vitellius를 로마의 ‘제일인자’로 승인합니다. 그러나 Vitellius는 Otho휘하의 군사들에게 같은 로마군으로서 너무나 혹독하게 대했습니다. Otho는 Vitellius의 군에게 복수마저 하지 못하게 했음에도 마치 노예처럼 생각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Vitellius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Vitellius에게 철저한 원한을 품은 ‘도나우군단’에게 패배하여 69년12월20일에 살해당합니다. 이로 인해 Vespasian이 로마의 황제가 됩니다.

로마의 정국에 유대인들은 몹시 흔들렸습니다. 누구를 지지할지, 누가 황제가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유대인들은 엄청난 공포감만 증폭시켜야 했습니다. 이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우리도 미래를 모르는 상황으로 인해서 여러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의 종말이 온듯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셔야 이 세상의 끝입니다. 그때까지 성도들은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고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And

여호수아를 부르신 하나님

여호수아1:1,2

앤드류 카네기(1835-1919)는 미국의 최대 철강회사를 세운 사람입니다. 은퇴 후에는 자선사업을 한 사람입니다. 카네기는 근대인물 39명의 전기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카네기가 전기를 쓰면서 느낀 공통점은 39명중 31명이 가난하고 불후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21세기는 과거의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입니다. 실제로 어느 때보다 살기 좋은 시대입니다. 그리고 편안한 시대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힘의 시대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풍족하게 삽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꾸만 도태됩니다. 그런데도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무런 이의를 제기 하지 않습니다. 즉 어떻게든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옆의 세상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후의 세상은 있어도 옆의 세상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힘든 일을 우리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모세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계속 좌절하고 땅에 엎드려 있어야만 할까요? 오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하나님께서 내일을 위해 역사의 주역이 되라 하십니다(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인생은 하나님의 무대에서 공연하는 배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유명을 달리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 모든 사람들이 들어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현재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미래의 사람들이 역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뛰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가진 자를 주연배우라 하고 못 가진 사람들은 엑스트라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주연을 하기를 원합니다. 엑스트라에서 탈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타를 다르게 구분합니다. 간단하게 구분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스타와 엑스트라를 구분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엑스트라로 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스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우리를 조심스럽게 대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스타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1절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죽었습니다. 모세가 죽자 온 이스라엘이 슬퍼했습니다. 보통 애곡의 기간이 7일인데 비하여 모세는 30일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세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죽음에 따라 이스라엘은 큰 차질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모세와 버금 갈 인물이 이스라엘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광야까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앞에 두고 꿈의 지도자가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db,[,)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자신의 종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해야 여호와의 종이라 칭합니다. 여호와의 종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여호와의 종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그러한 모세가 죽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를 이스라엘은 맞은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부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있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없으면 다른 모세를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일을 할 스타였습니다. 자신이 스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니까 스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도자는 사람이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모세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일어나라(쿰)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네가 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31: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따라서 여호수아는 슬픔을 멈추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야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들어가야 할 땅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이제 모세의 하던 일은 여호수아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세는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는 없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여호수아가 하여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겁이 났습니다. 이전에 모세가 하던 일을 보니 자신은 굉장히 초라했습니다. 모세의 움직임은 기적을 동반했습니다. 모세의 거동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따랐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로서는 이스라엘을 이끌만한 힘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쓰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여호수아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총P.D.이십니다. 총P.D.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역사의 주연으로 뽑으셨습니다. 조감독이 바꾸지 못합니다. 조명감독이 바꾸지 못합니다. 작가가 바꾸지 못합니다. 작가는 성부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안심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신다는데 누가 방해합니까? 아무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어떤 누구도 우리들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이 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는 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일을 위해 역사의 주역이 되라 하십니다. 오늘 두 번째로)

II. 하나님께서 내일을 위해 요단을 건너라 하십니다(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일어나라”하십니다. 사람이 걷기 위해서는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라” !Wq (일어나다·일어서다·세우다]는 것은 어떠한 행위를 하기전의 예비적인 동작입니다. 엎드리거나 앉은 위치에서 일어나는 동작입니다. 여호수아가 엎드려 있는 한 이스라엘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털고서 일어나야 합니다. 모세의 죽음만을 애곡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전의 것을 회상하고 그 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때가 오지 않으리라 가정(假定)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일어나기만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 앞에는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 세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전도도 해야 합니다. 선교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정의 일들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나에게 떨어진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에 떨어진 명령입니다. 우리는 명령받은 즉시 지체말고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걸을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달릴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들은 반드시 필요한 동작입니다.

무엇이 일어나는 동작입니까? 여호수아는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호수아는 일어났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해서 일어섰습니다. 즉 일어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침체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불신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까 말까 하는데서 일어서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무시하는 한 복 받는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삽니다. 마태복음 7:24-27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시행해야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의 생활과 직결되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에게 일어나 요단을 건너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40년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요단을 건너야 약속된 땅으로 가는데 아무도 건너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일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요단강은 불가능의 강이었습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강이었습니다. 그 강은 공포와 두려움의 강이었습니다.

우리는 요단강을 넘어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복된 곳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강은 우리가 건너야 할 숱한 고난의 강입니다.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강을 필히 넘어야 합니다. 이 강은 용기와 지혜만으로도 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넘을 수 있습니다. 요단을 건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 없이 요단을 건너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으로 가기 위해서 요단을 건너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왜 교회에 나오는지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도들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아무것도 살지 못할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요단을 건너야 했습니다. 요단을 건너서 이미 수백 년 전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무엇이 요단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정확히 요단을 알고 있습니다. 요단이 아무리 공포의 강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낙원의 시냇물입니다. 우리생각에 요단이 죽음의 강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생명수가 흐르는 강입니다. 지금 국제경제나 국제정치무대는 참으로 어둡습니다. 북한문제가 무려 58년이나 끌어왔습니다. 그 북한이 핵실험을 했습니다. 경제는 곤두박질하여 회복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우리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그에 동화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빗자루로 쓸어버리라 하십니다. 그럴 때에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이 우리에게는 평범한 일처럼 온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한 손에 쥐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얻게 하리라. 형통하리라. 평탄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곳에 가시든지 어느 때에든지 승리할 때까지 보호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일을 위해 역사의 주역이 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일을 위해 요단을 건너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와 같습니까? 여호수아와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셔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쓰십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준비된 자를 쓰십니다. 준비된 자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일을 누가 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촌교회의 일을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모두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이끌고 나가야 할 사람들이 얼마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미 우리들은 모세의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에게 임무가 주어지듯이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And

예루살렘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마태복음24:1-2)

예수님의 여섯 번의 대 강화는 다름과 같습니다.

첫 번째 대 강화: 5:2-7:29 산상설교

두 번째 대 강화: 10:5-42 갈릴리

세 번째 대 강화: 13:1-58 갈릴리 바닷가

네 번째 대 강화: 18:1-35 가버나움에서

다섯 번째 대 강화: 23:1-39 예루살렘성전에서

여섯 번째 대 강화: 24:1-25;46 감람산 강화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세 번째 성전이었습니다. 처음의 성전은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의 재위5년째(주전975년)에 시공하여 7년간의 공사를 끝낸 끝에 주전 968년에 준공했습니다(왕상6:37-38). 그러나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유대가 바벨론에 포로가 된지 70년 만에 돌아옵니다. 주전535년에 성전재건공사를 시작하여 중단되었다가 주전 516년에 준공되었습니다. 주전169년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졌습니다. 성전의 번제단 자리에 제우스신상을 세웠습니다. 마카비에 의해 정화했지만, 주전63년에 로마의 폼페이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세 번째 성전은 헤롯이 건축했습니다. 그의 재위18년째인 주전20년경 건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은 18개월 만에 15층 규모로 개축하고, 주전9년경 완성했습니다. 거기에 성전 뜰, 성전 담, 성전 문 등 외곽을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이 공사는 주후 64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000명의 제사장들과 2,0000명이 동원되는 대역사였습니다. 건축에 사용된 대리석만 해도 90-120cm나 되는 규모였습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는 파괴된 성전 터에 로마식 신전을 세웠으며, 7세기경에는 이슬람사원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오게 된 시기는 우리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의 유월절 속죄양이 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헤롯성전의 규모를 그들은 보고 놀랐습니다. ‘그 웅장함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심중에는 이미 멸망될 성전이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아름답고 웅장해도 그것은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건물에 초점을 맞춥니다. 건물의 크기로 목사를 평가합니다. 건물이 크면 목사는 훌륭하게 되어 있습니다. 건물이 작으면 목사는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입니다. 천년된 건물이라도.

And

예루살렘의 심판예고(마태복음23:37-39)

누가복음2장에 나오는 아우구스투스는 시리아속주인 유대에 대한 정책을 탄력적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시리아 속주는 헬레니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유대는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였습니다. 즉 다신교사회와 일신교사회가 같이 공존하였습니다. 그때에 수도 로마에도 유대인을 위한 회당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 지방에도 다신교 민족을 위한 신전이 있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로마인들은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유대에 대한 정책은 주전63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폼페이우스나 주전48년에 로마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카이사르도 유대를 속주화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동맹관계로 로마의 우방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폴로루스((Gessius Florus)총독은 유대의 14대총독입니다. 주후66년 6월에 플로루스가 유대의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금화17달란트를 몰수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67년 5월에 Nero는 베스파시안으로 하여금 6,0000명을 예루살렘에 투입했습니다. 70년8월10일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예언한 대로였습니다.

37절을 보면 하나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과거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예루살렘을 살리려고 많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방인들 편에서 생각하면 너무나 편애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파멸을 예방하려 했습니다. 선견자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대제사장들을 보냈습니다. 이 일을 수없이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선견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계속 그런 일을 반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이제는 손을 떼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손을 떼신다는 것은 거기에서 떠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떠나시면 저들 혼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희 집이 황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영원히 볼 수 없었습니다. 이미 메시야를 보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부지런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의 살 길, 사람의 살길을 알려주는데도 믿지 않습니다. 종교편향이라고 하기나 하고, 종교는 자유라고 하고, 왜 당신의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느냐 합니다. 복음을 믿는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는 길을 알려주시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참혹한 일은 없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성전이 주후 70년에 파괴되어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고 죽으면 영원히 파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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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돕는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마태복음23:29-36)

그들(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단장했습니다. 그리고 비석들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들이 악어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만일에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했습니다(29-30절). 유대인들은 구약역사를 보면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애를 먹였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스가랴 등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선지자에 대하여 반 게메렌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선지자들은 신정정치의 공무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들이 들은 바를 말이나 상징으로 공포함으로써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별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보내어진 하나님의 사자였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뚜렷한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대언자였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인이었고, 주의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의 권능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대언자로 역할을 하였고, 그의 권위는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의 선한 목자였으며, 표징으로 그의 메시지의 진정성을 입증하였다. 선지자들은 종종 선지적 비평과 옛 계시에 대한 해석과 새 계시로 동시대인들의 기대를 산산이 부셨다. 그래서 새 계시가 주는 충격이 너무 커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기도 했다. 선지자들은 선지자의 개인적 특성, 당시의 상황, 백성들의 필요, 계시 내용 등에 따라 달랐다. 각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증언하도록 성령에 의해 강권되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살리는데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전체를 말씀하십니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까지의 피를 말씀했습니다(창4:8/역대하24:20-22). 예수님은 히브리성경 원전의 순서대로 창세기(아벨)를 말씀하고, 역대기(스가랴)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구약시대 전체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조상과 같이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보다 더 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을 더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 뱀의 새끼들이라 했습니다. 즉 마귀의 새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미처 채우지 못했던 악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미래가 100%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한 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를 상대로 핍박하고, 교회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 주님의 성도들을 죽이는 사람들 결코 심판으로 인해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대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비웃는 그대로, 그리고 피해를 주는 그대로 주님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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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마태복음23:27-28)

이스라엘은 유월절에는 각 지방에서 순례객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일 년 삼차 정하신 곳에서 여호와 앞에 보여야 했습니다. 신명기16:16을 보면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그때에는 각 지방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무덤들을 새로 단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시체로 인해서 사람들이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민수기19:16을 보면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순례자들이 시체나 인간의 뼈에 무의식적으로 접촉함으로 인해서 불결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풍상에 빛이 바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무덤에 회칠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는 무덤이요”라고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하는 것은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무덤의 겉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그 안에는 죽은 자들의 뼈와 더러운 먼지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더럽다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기만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거짓치장을 멋지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더라 말하기를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인다 하셨습니다. 실제는 의인이 아닌데 의인(divkaioi)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겉으로 봐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의인인 것처럼 보이나 안으로는 악행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법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괴리감이 있는 그들의 행동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했다가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누구보다 더 지킬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외식(uJpokrithv")이라는 말은 ‘사칭하는 자’라는 뜻도 있고, ‘위선자’라는 뜻도 있으며, ‘불신앙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계에 있는 모든 위선자 중 90%가 예루살렘에 있다’라는 랍비의 말이 있습니다. 위선은 유대교에서 비난 받았던 중요한 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주 위선적인 처신을 하였으므로 책망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은 마치 무대공연자의 연기와도 같은 지극히 고의적인 기만술책을 썼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자주 범하는 죄 중의 하나가 이중인격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이것은 중직일수록 더 높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람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고 영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결과로 발생된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로 인해서 70년경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품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지고 안과 밖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위선은 영을 속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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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형식에 매인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25-26)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의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았습니까”하고 물으면 비록 모르더라도 “예”하고 전원일치해서 대답한다. 왜냐하면 전원일치하여 알았다고 대꾸하는 것이 알았습니까 하고 묻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선생님의 명분, 학생으로서의 당위, 그리고 모두가 알 것이라는 지배적인 추세 때문에 모른다는 본심을 희생시킨다. 여기서 ‘모른다’고 사실을 말하는 독립적 언행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의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미학교의 어린이들은모르는 것이 있으면 민망스러울 정도로 완고하게 모른다고 버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선택할 때, 어느 한두 사람이 선택한 메뉴가 반드시 내가 꼭 먹고 싶은 것이 아니더라도 대개는 그에 휩쓸려 “나도, 나도”하며 동일화하는 다중에 휩쓸라는 습성이 있다.

또한 일상의 교제나 직장생활에 있어서도 이 같은 겉과 얼굴과 속이 다른 이중성으로 공적얼굴과 사적얼굴을 잘 배려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조종 해 나간다. 예로 만나기 싫은 사람을 오래 만에 길가다 만났다 하자. 속으로는 에이하고, 빨리 가버리라고 속 얼굴은 찡그리면서 겉으로는 “반갑다. 일새 꼭 한 잔 하자”고 겉 얼굴은 웃는다. 외래자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는 막중하고 과분하게 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환대한다. 그 환대 때문에 몇 달 동안 조의조식(租衣租食)을 한다는 건 다반사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것 하나 쓸모 있는 것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버려야 할 것들만 잔뜩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들이 율법위에 여러 가지 규정을 덧붙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손을 씻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법제화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손을 씻는 양과 질, 물 붓는 방법,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 손의 자세 등을 규정해놓았습니다. 이런 의식을 하면서 그들은 자랑했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힐난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접을 깨끗이 닦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책망하셨습니까? 그릇은 깨끗하지만, 그 안에 담겨지는 음식은 탐욕과 방탕의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부정부패비리로 얻은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것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접은 따라서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최근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들은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거의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비리와 부패가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이 사람들이 망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이 사람들이 속한 교회들이 파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7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파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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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인과 믿음을 저버린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23-24)

이번에도 예수님은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철저한 위선자였습니다. 돈의 액수가 작은 것들은 법을 만들어서라도 십일조로 냈습니다. 레위기27:30을 보면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이라고 했습니다. 땅의 소산 중에서 십일조를 낼 경우에는 땅의 곡식, 실과의 십분 일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박하, 회향, 근채’ 같은 작은 채소들의 십일조는 만들어서라도 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책망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저들이 만든 규례는 융통성 없이 지켰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훨씬 중요한 것은 소홀히 취급했습니다. 즉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말, 율법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큼직큼직한 율법, 꼭 지켜야 할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용산에 있는 신용산교회에서 용산참사로 희생된 고 이상림 집사는 이 교회를 15년 간 다녔습니다. 보통 교인의 부음을 들으면 담임목사나 부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유가족을 찾아가 예배하며 위로합니다. 하지만 이상림 집사 유가족이 다니던 교회는 참사 8개월이 지나도록 찾아오지도 않고, 위로예배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용산교회에서 이상림집사의 장례식장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주보에도 그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용산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신용산교회의 이춘우 장로가 재개발조합장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원로장로가 재개발 사업을 지휘하는 조합장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교회에서 예배하고 동네 이웃으로 지내온 사람이 세입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용역 직원들을 고용하고, 그들 뒤에 숨어서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이 눈치를 보느라고 한 사람도 장례식장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용산교회의 표어는 ‘거룩, 부흥 그리고 나눔’이라고 합니다. 신용산교회는 교회나 선교 단체 17곳을 지원하고 해외 선교사도 21명이나 후원한다고 하며, 정기적으로 이웃을 초청해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 교회를 다니면서 이해관계 때문에 적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성도들이 의와 신과 인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밖으로 잘 한다고 하더라도 안에서 잘 하지 못하면, 곧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관계를 떠나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교회사에 꾸준히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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