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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성전을 숙정하시는 예수님
  7. 2010.06.14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
  8. 2010.06.13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

직분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구원(마태복음21:28-32)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허울뿐인 종교인들에게 말을 합니다. 두 아들의 비유로 그들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한 포도원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먼저 맏아들에게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아들은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포도원주인은 둘째아들에게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가서 일했습니다. 이 상황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말합니다. 누가 아비의 뜻대로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작은 아들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정곡을 찌릅니다. 그들에게 엄청난 말을 합니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그들보다 먼저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근거로 세례요한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오히려 믿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까?

히브리사람들의 순종을 나타내는 말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ynIn]hi/Here l am, sir)입니다. ‘아버지여 가겠소이다’가 바로 순종을 나타내는 히브리식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대답만 그렇게 했습니다.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있다 뉘우치고 갔습니다. 여기에서 첫째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즉 예루살렘성전의 實勢들이었습니다. 둘째아들은 당시 유대에서 죄인취급을 받았던 로마의 앞잡이들 세리였고, 창기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면전에서 그들을 깎아내려 하나님의 일을 말로만 한다고 하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그들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함에도 탐욕스러웠고, 교만했으며, 잔인성은 말할 것도 없으며,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유대사회에서 얼마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세리 같고 창기와 같게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라나 교회 또는 어떤 단체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교회의 어떤 직분을 받으면 직분자체가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간섭할 것이나 안할 것이나 다하며,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힘이 듭니다. 이들은 자신이 왜 세워진지를 모르고 교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를 위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And

성전의 주인을 몰라본 종들(마태복음21:23-27)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알려져서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그리고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는가?’ 이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하면 나도 너희에게 답변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질문인즉 ‘요한의 세례는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하늘에서 왔는가? 사람에게서 왔는가?’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자칫하면 올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늘로서 왔다고 하면 왜 세례요한을 믿지 않았을 것이냐고, 예수님이 말할 것이고, 만일 사람에게서 그의 권세가 나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에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도 너희들이 물은 질문을 답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신앙은 소경만도 못했습니다. 문둥병환자보다 못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검증하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면 얼마든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잘못된 신앙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누구도 자신들의 밥그릇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비밀요원들을 예수님이 주변에 배치해놓고 수시로 보고를 받으면서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를 조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빨리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검증하려고 진실성문제에 도전해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 문제에 실패하자 이제는 예수님의 소명과 위임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즉 자신들과 같이 제사장은 위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은 스스로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편 것입니다. 성경을 근거로 해서. 시편110:4을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자신들은 이러한 근거로 성경에 의해서 대제사장의 위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대제사장의 직무가 성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로마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샀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많이 듭니다. 주님은 종으로 되고, 교회의 실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의 주인 같습니다. 사실은 주님이 모든 교회의 주인인데, 주님이 종처럼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2000년 전의 예루살렘지도자들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하나가 수많은 중소형 교회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예수님의 참된 교회라고 말합니다. 성경적인 교회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실은 자신들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And

믿음과 기도(마태복음21:20-22)

마태는 무화과나무가 언제 죽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왕되심, 우주의 창조주 되심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기적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11:20-25을 보면

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로부터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다가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보다 더한 일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산더러 바다에 들어가라 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기라 하셨습니다. 그대로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다윗, 그리고 선지자들 등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믿음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다가 그 지방 사람들의 우상에 빠져버렸습니다. 빠지되 깊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내 교육을 시켰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 나라들을 통해서 징계도 했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포로의 상태로 전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았습니다. 아예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말씀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말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닮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 닮지 않아야 합니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닮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야 합니다. 즉 기도하되, 믿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하면 산을 바다로 던질 수 있다는 기도는 역사에 우리들의 삶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을 하는 능력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협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And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마태복음21:18-19)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Bhqaniva)는 ‘베트 아니야’ 즉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집’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동쪽 3㎞의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며,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해 있습니다. 베다니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살았습니다(요11:1,2),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마26:6, 막14:3).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를 자주 방문 하셨으며 잠시 유하기도 하셨습니다(마21:17, 눅10:38-40, 요11:1,2, 12:1).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곳입니다(요11:42).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이른 아침 성으로 들어오실 때 무척 시장하셨습니다. 그때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기에 그리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잎만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매를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막11:12-14).

12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너무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그러셨을까? 예수님도 시장하셔서 공연한 화풀이를 하셨는가? 아닙니다. 중동지방에서는 무화과를 거두어들일 때가 6월입니다.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이 일어난 때는 4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가 말한 ‘때’는 수확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확기 이전에도 무화과나무는 열려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없었습니다. 잎만 무성했습니다.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무성하면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즉 잘못 자란 무화과나무입니다. 실패한 무화과나무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말라죽게 하셨습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시는 performance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합니다. 심판하시는 주님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주이십니다. 긍휼의 주님,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심판하시는 주님입니다. 과거의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품으시기 위해서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으로는 열심이었습니다. 필요 없는 계명을 만들어놓고 잔뜩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잎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잎만 무성한 신앙생활은 안 됩니다. 열매가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And

예루살렘성전의 잘못된 자들(마태복음21:14-17)

예루살렘은 고도였습니다. 사무엘하5:5을 보면 “헤브론에서 칠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주전1010년에 왕이 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이니까 1017년에 예루살렘으로 왕도를 옮깁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고도였습니다. 물론 포로생활 70년이 있긴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왕도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름도 많습니다. 모리아(창22:3), 여부스(수18:28), 시온(왕하19:21), 살렘(시76:2), 아리엘(시29:1), 헵시바(사62:4), 다윗의 성(삼하5:7), 하나님의 도성(시46:4), 여호와의 성읍(사60:14), 여호와의 산(사30;29),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사60:14), 만군의 여호와의 산(슥8:3), 거룩한 성(시48:2, 계11:2), 영원한 하늘의 집(계22:19), 소돔과 고모라(사1:10), 의의 성읍(사:26), 하나님 편에서 나의 성읍(사45:13), 나의 성산(사11:9).

이랬던 예루살렘이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읍이 자신의 주인을 몰라보았습니다. 그 안에 잘못된 사람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그 성읍에 세속화된 사람들, 인본주의자들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신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권세를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겨왔던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영적으로 무뢰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예수님의 긍휼을 받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경과 저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병고쳐주는 것도 싫고,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들은 싫은 것을 넘어서 예수님께 대하여 분노가 치밀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시8:2을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떤가? 정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공공연히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니라는데 일부 교회는 맞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로 인해서 심각한 오류에 빠졌습니다. 일부교회들에 의해서 한국의 교회들은 도매금으로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의 간판을 걸었고, 하는 일들이 교회와 유사해서 교회로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에 교회라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공공의 적이 된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러면서도 교회행세는 꼭 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적이기도 하고, 사회의 공공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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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루살렘성전을 숙정하시는 예수님(마태복음21:12-17)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여러 번 오르셨습니다. 소년시절에 성전에서 선생들과 질의응답을 하셨습니다(눅2:46). 이외에도 여러 번 성전에 가셨습니다(막11:27-33, 12:35-44, 49, 요5:14-47, 7:14-28, 10:23-38, 18:20, 2:19,20, 마21:14).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실 때마다 속이 상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순례 객들을 위해 돈을 바꾸어주고 제사에 쓸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을 발견하 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외정에 들어가셨습니다. 이곳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정말 슬픈 광경을 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이 더렵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곳이 아니라 시장이 되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돈벌이가 잘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와 양을 팔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도처에서 온 순례자들로 성전은 만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가보다 훨씬 비싼 고가를 지불하고 제물을 샀습니다. 예배자는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허락을 얻어야 했습니다. 상인들과 제사장들이 짜고 못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 대가로 상인들은 제사장들에게 뇌물을 지불했습니다. 왜냐하면 상인들은 제사장들에게 이권을 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돈은 제사장 안나스와 교활한 제사장 가야바의 돈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상인들과 제사장은 몹쓸 관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실 때 물건을 사는 사람들과 파는 사람들의 소동을 들으셨습니다. 거기에 동물의 시끄러운 소리와 오물과 악취가 났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외국 돈은 세금으로 바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반 세겔의 성전세는 유대의 돈으로 지불해야 했습니다(출30:13). 역시 문제가 있는 거래였습니다.

예수님은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시고, 그 일에 종사하는 모든 매매자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제사장들이 강도짓을 했습니다. 허가 내놓고 사람들을 강탈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했습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습니다. 시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실제 성전의 주인이신 분이 분노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가게를 가진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 등록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역시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등록합니다. 사람이 적은 교회에는 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보고 교회에 등록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예배의 처소로 생각하지 않고, 장사 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장사하는 장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않는 치졸한 생각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곳이고, 성도들의 교제의 장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And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마태복음21:1-11)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워졌을 때, 주님께서 두 제자에게 벳바게 맞은편 마을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마을에 매여 있는 나귀와 새끼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왜 가져 가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끌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나귀위에 겉옷을 폈습니다. 예수께서 타셨습니다. 무리들은 길에 겉옷을 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폈습니다. 따르는 무리들이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로 인해서 예루살렘 온성이 소동했습니다. 사람들이 무리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했습니다.

스가랴9:9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수없이 배반했어도 이스라엘을 시온의 딸(@/YxiAtB'), 예루살렘의 딸(!Il'v;Wry] tB')이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아들을 죽이려고 해도 내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내 백성, 내 아들이 아니라고(호1:9) 말씀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었습니다(호1:6). 내가 이스라엘을 꺾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었습니다(호1:4).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딸이라 부르실 때에는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할 때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귀한 딸들이 크게 기뻐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왕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나의 왕이 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가 오심을 사람들은 대망해야 합니까? 그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는데 그것도 작은 나귀새끼를 타십니다. 왜 나귀새끼를 타는 것이 겸손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동할 때 말을 탔습니다(슥9:6,20). 그러나 주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고대 사회에서 부와 권세를 나타내는 말과 달리, 겸손함과 나약함을 상징합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나귀를 타고서 입성하셨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는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의 통치방식은 무력이 아니라 평화의 정책입니다. 그는 말을 끊고, 화살을 끊습니다. 병거를 제거합니다. 온갖 전쟁무기를 제거하시는 통치방식입니다. 즉 복음이 가는 곳마다 전쟁은 없습니다. 그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요, 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방식을 표방하는 말씀입니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즉 먼 곳까지 그의 통치는 임하겠고, 전하는 메시지는 화평인데, 그 화평은 실재인 화평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오심도, 그의 가심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의로 오시고, 아버지의 보내심에 순종하심으로 오십니다. 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오십니다.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의 은혜를 입는 자마다 그의 통치를 받고, 그의 사랑을 입는 자마다 그의 나라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눌린 자, 억울한 자, 힘없는 자를 구분하지 않고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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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마태복음21장-23장)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난주간은 이때부터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있다면 피하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 혼자밖에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예고를 세 번이나 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1주일간 머무시며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십니다. 21장에서 23장까지는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신 사건에서부터 마지막 주간의 첫 며칠 동안 있었던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이때 주로 성전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유대지도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다’하는 사실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기록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쳤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부딪혔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십자가형을 빌라도에게 주문한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마태는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왕이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기록했습니다.

1. 왕의 공적인 등장 21:1-17

󰊱 예루살렘에 들어가심 1-11

󰊲 성전을 청소하심 12-17

2. 왕에 대한 존경 21:18-22:46

󰊱 열매 없는 무화과 21:18-22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도전 21:23-22:14

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1:23-27

② 두 아들의 비유21:28-32

③ 포도원 주인의 비유 21:33-46

④ 결혼잔치에 대한 비유 22:1-14

󰊳 바리새인과 헤롯당에게 답변 22:15-22

󰊴 사두개인들에게 답변 22:23-33

󰊵 바리새인들에게 답변 22:34-46

① 가장 큰 계명 22:34-40

② 다윗의 아들 22: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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