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4)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09.11.11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
  2. 2009.11.10
    다윗과 예수그리스도
  3. 2009.11.09
    예수그리스도의 신분
  4. 2009.11.08
    낳음의 의미
  5. 2009.11.07
    메시야의 계보
  6. 2009.11.06
    연관된 블로그
  7. 2009.11.06
    신구약 중간기 2
  8. 2009.11.06
    야고보서 개관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마태복음1:1-16)

“···예수의 계보는 ···아브라함의 자손···”(1절),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2절), “···아브라함으로부터···”(17절).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무려 약 4100년간의 gap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의 관계를 성경은 무수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예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8:58) 약 4100년간의 시간을 뛰어넘은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예수님의 인성으로 하면 아브라함이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다만 성경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습니까?

그 의도는 새로운 인간을 길러 즉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여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방법을 거절하여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구원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인류전체를 다루었으나, 그 시대에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인류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선택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데라 때 아브라함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데라가 하란에 주저앉았을 때 다시금 아브라함을 불러서 지시하십니다. 창12:3을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로써 인간의 구원계획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00살에 이삭을 낳는 등 순탄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맥이 거의 끊어질 상태가 한 두 번이 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성경대로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는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심을 이 세상에 알리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예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입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족보와 누가복음족보  (1) 2009.11.13
여인들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2
다윗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0
예수그리스도의 신분  (0) 2009.11.09
낳음의 의미  (0) 2009.11.08
And

다윗과 예수그리스도(마태복음1:1-16)

“다윗의 자손이요···”(1절),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6절),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17절).

사무엘하 5장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삼하5:1-3). 다윗은 엘리제사장 때 빼앗긴 언약궤를 찾아오려합니다(삼하6:1-2). 그러나 언약궤를 모시는 과정에서 우(愚)를 범합니다. 언약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어야 하는데 수레에 싣고서 모시다가 웃사가 즉사합니다(삼하6:6-7). 그리하여 언약궤는 오벳에돔의 집에 석달 간 있었는데 그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삼하6:11).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오벳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시온산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런 후에 다윗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천막에 있는 것이 여간 죄송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단선지자에게 성전을 건축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나단은 좋아서 즉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쁘게 생각하시며 허락하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전건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삼하7:5-7). 하지만 이때 하나님은 “다윗의 위가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7:13)고 하셨으며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솔로몬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성전을 건축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이방의 신까지 섬겼기 때문입니다.

“영원히”라는 세 번 반복된 표현은 솔로몬의 시대를 초월한 말씀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영원함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영원히”라는 표현에는 먼 훗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는 성전인 자신의 몸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됨으로써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한 약속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실현된 것입니다(히1:6). 이사야9:7을 보면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성취로 눅1:32에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1:1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왕의 계보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인류의 제와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인들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2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1
예수그리스도의 신분  (0) 2009.11.09
낳음의 의미  (0) 2009.11.08
메시야의 계보  (0) 2009.11.07
And

예수그리스도의 신분(마태복음1:1-16)

“신분”(state)이란 사전적 의미는 “개인이 속하는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 또는 법률상 사람의 일정한 지위나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세 가지 신분이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선재적 신분,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성육신하신 비하의 신분,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높아지신 우주의 주권자로서의 승귀의 신분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자하나님이라고 말하고(사9:6; 요1:1),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마1:18-25); 눅2:5-7) 인간이라고도 말합니다. 교회는 매우 오래전부터, 특별히 칼케톤회의(주후451) 이후로 그리스도의 이성의 교리를 공인하였습니다. 칼케돈회의는 잘못된 견해들을 막기에 노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The Deity of Christ)은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의 본성입니다. 자신이 구속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본성에 참여해야 하고, 모든 악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의 순종과 고난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엄성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의 속성을 지니고 계셔서, 신적직분과 대권(大權)이 그리스도에게 속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에 관해 말한 것들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해 말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The Humanity of Christ)은 먼저 창세기3:15의 원시복음에 타락한 인류에게 여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구속될 소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원시복음에서 메시야 개인이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는데 정한 기한이 찰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는데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중보자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하고,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반드시 무죄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적신분은 곧 이 세상에 오시기전의 신분으로서 성자하나님의 신분입니다(요1:1-3). 비하의 신분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적위엄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로 인성을 취하셔서, 최고의 율법수여자이신 자신이 율법의 요구와 저주 아래 있게 된 신분입니다. 승귀(昇貴)의 신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시고 율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선하신 기쁨에 참여하며, 이에 합당한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오르신 것입니다. 승귀는 부활, 승천, 하늘로의 귀환입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1
다윗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0
낳음의 의미  (0) 2009.11.08
메시야의 계보  (0) 2009.11.07
신구약 중간기  (2) 2009.11.06
And

낳음의 의미 (마태복음1:1)

아브라함이 이삭을, 야곱이 유다를, 유다가 베레스를, 베레스가 헤스론을, 헤스론이 람을, 람이 아미나답을, 아미나답이 나손을, 나손이 살몬을, 살몬이 보아스를,보아스가 오벳을, 오벳이 이새를, 이새가 다윗을, 다윗이 솔로몬을, 솔로몬이 르호보암을, 르호보암이 아비야를, 아비야가 아사를, 아사가 여호사밧을, 여호사밧이 요람을, 요람이 웃시야를, 웃시야가 요담을, 요담이 아하스를, 아하스가 히스기야를, 히스기야가 므낫세를, 므낫세가 아몬을, 아몬이 요시야를, 요시야가 여고냐를,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스룹바벨이 아비훗을, 아비훗이 엘리아김을, 엘리아김이 아소르를, 아소르가 사독을, 사독이 아킴을, 아킴이 엘리웃을, 엘리웃이 엘르아살을, 엘르아살이 맛단을, 맛단은 야곱을, 야곱은 요셉을 낳았습니다(1:2-16a). 여기는 남자들이 낳았습니다.

그러나 16절b를 보면 “마리아에게서”(ejx h|")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낳았다고 했습니다. 즉 동정녀(parqevno")가 낳았다는 말씀입니다. 동정녀“파르데노스”란 헬라에서 “성숙한 젊은 여인”이나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의미했습니다. LXX역본에서 “파르데노스”는 히브리어 hl;WtB](베둘라/사24:4)를 번역했는데 베둘라는 남자들과 접촉하지 아니한 처녀를 의미하였습니다. 또한 구약에서 처녀는 hm;l]['(알마)였는데 이 뜻은 젊은 여자이지만 역시 결혼하지 않은 남자 즉 남자와 접촉하지 않은 여자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3:15의 성취입니다. 갈4:4-5절을 보면 구약에 대한 신약의 성취였습니다. 이사야7:14의 성취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어떻게 잉태했습니까?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잉태된 것입니다. 만일에 사람으로 잉태되었다고 하면 예수그리스도는 구원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고된 대로, 예언된 대로 초월적인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즉 약속된 왕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오히려 그들의 주(主)가 되시고, 그들을 구원(救援)하러 오셨습니다. 인간의 조상이며, 우리의 조상이 저질러 놓은 죄의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출생부터 달라야 했습니다. 그의 출생은 태고부터 예고되었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예고되어야 했습니다. 그 오랜 세월 즉 수천 년부터 예고되었지만 한치의 빈틈도 없이, 조금의 오차(誤差)도 없이 정확하게 예언대로 오신 것입니다. 그의 오심으로 오늘날 우리들도 나음을 입고, 속죄(贖罪)함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는 말씀은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이력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셔야 했던 그의 이력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낳음은 인간을 구속(救贖)함에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가 어떤 신화( myth)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 스스로도 구원을 받아야 할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자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1
다윗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0
예수그리스도의 신분  (0) 2009.11.09
메시야의 계보  (0) 2009.11.07
신구약 중간기  (2) 2009.11.06
And

메시야의 계보(마태복음1:1)

Bivblo" genevsew" jIhsou' Cristou' uiJou' Daui;d uiJou' jAbraavm.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그 분은 다윗의 지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예수는 “그가 확실히 구원하신다”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Wv/hy](예호수아”의 헬라화된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간됨의 후손일지언정 실제로는 다윗의 주가 됩니다(마22:41-46). 그러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모든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주로 모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디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때는 예수님의 인성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의 잉태로 태어나지 법적인 아버지인 요셉을 육신의 아버지로는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요셉이 예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낳았다고 말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 외에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직분상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jv'm;(마사흐)에 해당하는 헬라어입니다. 이 명칭은 자기백성을 구원할 자가 성령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선지자(신18:15)로, 유일하신 대제사장(시110:4)으로, 영원하신 왕(시2:6)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명명된 것은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백성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의 우두머리인 아브라함이 나오고, 왕적인 계보의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14·14··4(14x3)이라는 방식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1세기 당시의 다윗이라는 이름의 Gematria 방식1입니다. 마태의 이러한 관점은 inclusio(라/가둠,제한)구조에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다윗-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1:1), 아브라함-다윗-그리스도로 끝내는데(1:17), 중요한 인물이 맨 처음과 맨 끝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세계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러 하늘 보좌를 비워두고서 잠시 이 세계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목적이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팔레스타인에 2000년 전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는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을, 미래의 모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히브리어의 알파벳이 나타내는 숫자로써 그 단어가 지닌 뜻을 풀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한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1
다윗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0
예수그리스도의 신분  (0) 2009.11.09
낳음의 의미  (0) 2009.11.08
신구약 중간기  (2) 2009.11.06
And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sulwsuk

다음 블로그 : http://blog.daum.net/tjdmsdud

야후 블로그 : http://kr.blog.yahoo.com/sulwsuk

'연관 블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명령/재물에 대한 태도  (0) 2010.02.25
And

신구약 중간기(마태복음1:1)

신구약 중간기는 약 400년간입니다. 말라기에서 마태복음 안에 400년이 숨어 있습니다. 이 기간 안에 팔레스타인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말라기 때는 유다가 Persia였는데 신약성경을 펴보면 갑자기 Rome가 나옵니다. 대륙의 판도가 Persia, Greece, Rome로 바뀌었습니다.

Persia시대는 주전559-330년까지,1 팔레스타인에게 영향을 끼친 해는 주전450-330년으로2 약200년간입니다. 이때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주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사람들이 4차에 걸쳐서 돌아올 때도 이 때였습니다.

Greece시대는 주전330-166년까지입니다. 알렉산더가 주전333년에 마케도냐에 주둔하고 있던 Persia 군대를 격퇴하고 대륙을 제패했습니다. 알렉산더도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여 유대인들이 이주해서 살도록 특권까지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주전326년 6월에 열병에 걸려 죽자, 3유럽과 마케도냐, 그리스 일부는 안티코너스 왕조가, 이집트와 남부 시리아는 톨레미왕조가, 에게해안에서 힌두쿠스 지역의 아시아는 셀류커스왕조가 다스렸습니다.

하스모니아 왕조시대는 주전166-63년까지로 이때는 헬라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를 희생제로 쓰게 했습니다. 이에 마카비형제가 반기를 들어 독립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깨끗이 정화시켰는데 이것이 수전절의 기원입니다.4

Rome는 주전753년-주후455년으로5 신약성경 전체가 로마시대 때 썼습니다. 주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헤롯 안티파테르의 아들을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당시 예루살렘 실권자들이 등장하는데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전3세기경 마카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생겼었으며 헬라문화를 배척한 사람들이고, 사두개인들은 바리새파와 같은 시기에 생겼는데 헬라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서를 복사하는 사람들로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사람들로 율법을 잘 알기 때문에 교법사로도 불렸습니다.

1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기독교연대표』(서울: 기독교문사, 1985), 22.

2 오픈성경편찬위원회 편,『오픈성경』(서울: 아가페출판사, 1990).

3 이원희, 신현주,『성서속의 역사와 지리』(서울: 기독교문사, 1990), 138.

4 H.H 할레이,『성서핸드북』박양조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3), 433.

5 시오노 나나미.『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김석희 옮김 (서울: 한길사, 2000), 275.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1
다윗과 예수그리스도  (0) 2009.11.10
예수그리스도의 신분  (0) 2009.11.09
낳음의 의미  (0) 2009.11.08
메시야의 계보  (0) 2009.11.07
And

서론

야고보서는 많은 오해를 받은 서신이다. 하나는 사도적 권위에 대한 의심 때문에 초대교회 당시 제기되었던 정경성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당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와 마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오해를 받아왔는가? 바울사도와는 상반된 것 같은 이행칭의(justification by works)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당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말했다. “…야고보서는 다른 책들, 즉 요한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베드로전서와 비교했을 때 의로운 지푸라기 서신”(ein recht strohern Epistel)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오해들은 수신자와 그들의 상황을 간과했기 때문이다.1

1. 저자

본서의 저자는 야고보라 했다(1). 그런데 신약성경에 야고보라는 이름이 여섯 명이나 된다. “주의 형제" 야고보(갈1:19),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게네사렛 호수의 어부인 야고보(막1:1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3:18), 작은 야고보(막15:40), 사도 유다(가롯 유다가 아님)의 아버지 야고보(행1:13) 등이다. 이 중에 야고보의 저자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이다. 이에 대한 외증으로 로마의 클레멘트의 ‘고린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바나바서신’, ‘12족장의 서신’, 풀리갑의 ‘빌립보편지’등에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언급되어 있다. 내증으로는 사도행전15:13-21, 21:17-25, 갈라디아서1:19, 2:9-10에서 보여준 야고보와 본 서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2

2. 저작 장소

여러 설이 있다.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을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 부활이후에 예루살렘 밖으로 나갔다고 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점으로 보아서 예루살렘으로 추정하고 있다.3

3. 야고보서 수신인

야고보서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약1:1). 본 서신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로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에 흩어져 있던 동방의 신자들이다.4 하지만 로마제국전체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신자들이지만, 동시에 흩어져 있는 일반 기독교인들이기도 하다.5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여러 곳에 있는 신자들이다.6

4. 저작 연대

야고보서의 정확한 연대는 언제인지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지만,7 45-48년경으로 보기도 하는데,8 대체적으로 야고보의 순교직전인 주후62년경으로 본다.9

5. 저작의 동기와 목적

야고보는 죽은 정통, 즉 입으로만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런 생활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보고 그것을 시정하려고 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주로 믿음의 실천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적했다.10 특히 선한 행위는 무시되어도 믿음에 대한 단순한 동의만 있으면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려고 쓴 글이다.11

초대교회 당시 교회 내에 신앙과 행위가 타락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고 주장하며, 알맹이 없는 신앙으로 생활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신앙고백만 가지고 자신들의 구원은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교리가 편만했었다. 이에 야고보는 시험과 박해를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일함에 빠져 있는 유대인 동료들을 각성시켜, 심판이 임박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어떻게 시험을 견디며 말씀을 듣고 악한 정욕을 죽이고 혀를 재갈 먹이며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다가올 심판을 대비하여 살게 하려 했다.12

마르틴 루터가 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을까? 야고보서를 읽으면 행위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원받는 다는 인상을 야고보서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를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야고보서의 핵심적인 문제는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행함이 결여된 신자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큰 고민 중 하나는 교회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즉 예수 믿는 증거가 삶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입증되어야 하는데 순종 없는 신앙고백만 무성하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가? 그 원인은 한국교회가 이신칭의의 은혜의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칭의와 성화의 균형 잡힌 것’ 보다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성화와 선행에 대한 강조는 소홀히 하고 칭의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기독교의 구원을 ’값싼 구원’으로 만든 것이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신자의 선행은 그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래서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또는 신자의 ‘상급론에 종속시켜 버리든지, 아니면 구원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향에 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말할 때 절대로 행함과 분리된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과 행함은 바늘과 실처럼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닌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는 교훈은 야고보서가 특히 강조하지만, 이런 강조는 성경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핵심적인 교훈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이중기준’을 제시하시는 것 같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행위구원’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 같다. 과연 야고보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울과 대조적으로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일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나타나야 하는 것이기에, 구원받은 자는 그 ‘구원의 표’가 선한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의 사상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을 주장했던 바울과 정확 히 일치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런 강조는 바울 서신에서 더 잘 찾아 볼 수 있는데 바울이 기록한 모든 서신은 그것이 교리적이든 신학적이든 언제나 행함과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 또한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를 서로 나눌 수 없는 통합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나 야고보나 행함은 믿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권면은 “상급을 위해 선한 행실”이 아니라, 정상적인 신자의 삶 자체가 행함이 동반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남보다 더 하는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상급논리가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들을 교만과 공로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13

6. 신학적인 문제

이상으로 살펴볼 때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대립관계가 아니었다. 야고보서의 대상은 믿음은 있지만 실천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었기에 야고보는 성숙한 삶을 위해 행함’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바울은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유대교와의 긴장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만을 강조해야만 했다. 즉 야고보와 바울은 ‘상황’이 달랐고 독자가 서로 달랐다.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한 채 마치 한쪽은 옳고 우월하고, 다른 한 쪽은 틀렸고 열등하다는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기 때문에(갈5:16)m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제일 먼저 물으실 질문은 ‘무엇을 믿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했는가?”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이제는 우리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분을 즐기기만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역사와 민족 앞에 책임을 감당하는 ‘실천적 그리스도인’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1. 한천설, “야고보서 설교를 위한 배경연구”『히브리서,야고보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편집팀 편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4), 290.

2. 신성종,『신약총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252.

3. 두안 리트핀 외,『BKC강해주석시리즈28/디도서ㆍ빌레몬서ㆍ히브리서ㆍ야고보서』김운성 외 옮김 (서울: 도서출판두란노, 1996), 157.

4. 신성종,『신약총론』, 157.

5. 한천설, “야고보서 설교를 위한 배경연구”『히브리서,야고보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296.

6. 토마스 맨튼,『핸드릭슨 패턴 주석 야고보서(上)』이길상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7), 29.

7. 토마스 맨튼,『핸드릭슨 패턴 주석 야고보서(上)』, 28.

8. 두안 리트핀 외,『BKC강해주석시리즈28/디도서ㆍ빌레몬서ㆍ히브리서ㆍ야고보서』, 156.

9. 한천설, “야고보서 설교를 위한 배경연구”, 293.

10 신성종,『신약총론』, 255.

11 신성종,『신약총론』, 255.

12 토마스 맨튼,『핸드릭슨 패턴 주석 야고보서(上)』, 29.

13 토마스 맨튼,『핸드릭슨 패턴 주석 야고보서(上)』, 30.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