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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기(마태복음1:1)

신구약 중간기는 약 400년간입니다. 말라기에서 마태복음 안에 400년이 숨어 있습니다. 이 기간 안에 팔레스타인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말라기 때는 유다가 Persia였는데 신약성경을 펴보면 갑자기 Rome가 나옵니다. 대륙의 판도가 Persia, Greece, Rome로 바뀌었습니다.

Persia시대는 주전559-330년까지,1 팔레스타인에게 영향을 끼친 해는 주전450-330년으로2 약200년간입니다. 이때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주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사람들이 4차에 걸쳐서 돌아올 때도 이 때였습니다.

Greece시대는 주전330-166년까지입니다. 알렉산더가 주전333년에 마케도냐에 주둔하고 있던 Persia 군대를 격퇴하고 대륙을 제패했습니다. 알렉산더도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여 유대인들이 이주해서 살도록 특권까지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주전326년 6월에 열병에 걸려 죽자, 3유럽과 마케도냐, 그리스 일부는 안티코너스 왕조가, 이집트와 남부 시리아는 톨레미왕조가, 에게해안에서 힌두쿠스 지역의 아시아는 셀류커스왕조가 다스렸습니다.

하스모니아 왕조시대는 주전166-63년까지로 이때는 헬라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를 희생제로 쓰게 했습니다. 이에 마카비형제가 반기를 들어 독립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깨끗이 정화시켰는데 이것이 수전절의 기원입니다.4

Rome는 주전753년-주후455년으로5 신약성경 전체가 로마시대 때 썼습니다. 주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헤롯 안티파테르의 아들을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당시 예루살렘 실권자들이 등장하는데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전3세기경 마카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생겼었으며 헬라문화를 배척한 사람들이고, 사두개인들은 바리새파와 같은 시기에 생겼는데 헬라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서를 복사하는 사람들로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사람들로 율법을 잘 알기 때문에 교법사로도 불렸습니다.

1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기독교연대표』(서울: 기독교문사, 1985), 22.

2 오픈성경편찬위원회 편,『오픈성경』(서울: 아가페출판사, 1990).

3 이원희, 신현주,『성서속의 역사와 지리』(서울: 기독교문사, 1990), 138.

4 H.H 할레이,『성서핸드북』박양조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3), 433.

5 시오노 나나미.『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김석희 옮김 (서울: 한길사, 2000),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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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야고보서는 많은 오해를 받은 서신이다. 하나는 사도적 권위에 대한 의심 때문에 초대교회 당시 제기되었던 정경성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당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와 마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오해를 받아왔는가? 바울사도와는 상반된 것 같은 이행칭의(justification by works)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당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말했다. “…야고보서는 다른 책들, 즉 요한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베드로전서와 비교했을 때 의로운 지푸라기 서신”(ein recht strohern Epistel)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오해들은 수신자와 그들의 상황을 간과했기 때문이다.1

1. 저자

본서의 저자는 야고보라 했다(1). 그런데 신약성경에 야고보라는 이름이 여섯 명이나 된다. “주의 형제" 야고보(갈1:19),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게네사렛 호수의 어부인 야고보(막1:1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3:18), 작은 야고보(막15:40), 사도 유다(가롯 유다가 아님)의 아버지 야고보(행1:13) 등이다. 이 중에 야고보의 저자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이다. 이에 대한 외증으로 로마의 클레멘트의 ‘고린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바나바서신’, ‘12족장의 서신’, 풀리갑의 ‘빌립보편지’등에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언급되어 있다. 내증으로는 사도행전15:13-21, 21:17-25, 갈라디아서1:19, 2:9-10에서 보여준 야고보와 본 서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2

2. 저작 장소

여러 설이 있다.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을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 부활이후에 예루살렘 밖으로 나갔다고 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점으로 보아서 예루살렘으로 추정하고 있다.3

3. 야고보서 수신인

야고보서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약1:1). 본 서신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로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에 흩어져 있던 동방의 신자들이다.4 하지만 로마제국전체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신자들이지만, 동시에 흩어져 있는 일반 기독교인들이기도 하다.5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여러 곳에 있는 신자들이다.6

4. 저작 연대

야고보서의 정확한 연대는 언제인지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지만,7 45-48년경으로 보기도 하는데,8 대체적으로 야고보의 순교직전인 주후62년경으로 본다.9

5. 저작의 동기와 목적

야고보는 죽은 정통, 즉 입으로만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런 생활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보고 그것을 시정하려고 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주로 믿음의 실천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적했다.10 특히 선한 행위는 무시되어도 믿음에 대한 단순한 동의만 있으면 구원받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려고 쓴 글이다.11

초대교회 당시 교회 내에 신앙과 행위가 타락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고 주장하며, 알맹이 없는 신앙으로 생활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신앙고백만 가지고 자신들의 구원은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교리가 편만했었다. 이에 야고보는 시험과 박해를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일함에 빠져 있는 유대인 동료들을 각성시켜, 심판이 임박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어떻게 시험을 견디며 말씀을 듣고 악한 정욕을 죽이고 혀를 재갈 먹이며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다가올 심판을 대비하여 살게 하려 했다.12

마르틴 루터가 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을까? 야고보서를 읽으면 행위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원받는 다는 인상을 야고보서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를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야고보서의 핵심적인 문제는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행함이 결여된 신자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큰 고민 중 하나는 교회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즉 예수 믿는 증거가 삶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입증되어야 하는데 순종 없는 신앙고백만 무성하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가? 그 원인은 한국교회가 이신칭의의 은혜의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칭의와 성화의 균형 잡힌 것’ 보다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성화와 선행에 대한 강조는 소홀히 하고 칭의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기독교의 구원을 ’값싼 구원’으로 만든 것이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신자의 선행은 그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래서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또는 신자의 ‘상급론에 종속시켜 버리든지, 아니면 구원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향에 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말할 때 절대로 행함과 분리된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과 행함은 바늘과 실처럼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닌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는 교훈은 야고보서가 특히 강조하지만, 이런 강조는 성경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핵심적인 교훈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이중기준’을 제시하시는 것 같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행위구원’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 같다. 과연 야고보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울과 대조적으로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일까?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나타나야 하는 것이기에, 구원받은 자는 그 ‘구원의 표’가 선한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의 사상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을 주장했던 바울과 정확 히 일치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런 강조는 바울 서신에서 더 잘 찾아 볼 수 있는데 바울이 기록한 모든 서신은 그것이 교리적이든 신학적이든 언제나 행함과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 또한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를 서로 나눌 수 없는 통합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나 야고보나 행함은 믿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권면은 “상급을 위해 선한 행실”이 아니라, 정상적인 신자의 삶 자체가 행함이 동반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남보다 더 하는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상급논리가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들을 교만과 공로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13

6. 신학적인 문제

이상으로 살펴볼 때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대립관계가 아니었다. 야고보서의 대상은 믿음은 있지만 실천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었기에 야고보는 성숙한 삶을 위해 행함’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바울은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유대교와의 긴장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만을 강조해야만 했다. 즉 야고보와 바울은 ‘상황’이 달랐고 독자가 서로 달랐다.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한 채 마치 한쪽은 옳고 우월하고, 다른 한 쪽은 틀렸고 열등하다는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기 때문에(갈5:16)m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제일 먼저 물으실 질문은 ‘무엇을 믿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했는가?”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이제는 우리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분을 즐기기만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역사와 민족 앞에 책임을 감당하는 ‘실천적 그리스도인’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1. 한천설, “야고보서 설교를 위한 배경연구”『히브리서,야고보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편집팀 편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4), 290.

2. 신성종,『신약총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252.

3. 두안 리트핀 외,『BKC강해주석시리즈28/디도서ㆍ빌레몬서ㆍ히브리서ㆍ야고보서』김운성 외 옮김 (서울: 도서출판두란노, 1996), 157.

4. 신성종,『신약총론』, 157.

5. 한천설, “야고보서 설교를 위한 배경연구”『히브리서,야고보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296.

6. 토마스 맨튼,『핸드릭슨 패턴 주석 야고보서(上)』이길상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7), 29.

7. 토마스 맨튼,『핸드릭슨 패턴 주석 야고보서(上)』, 28.

8. 두안 리트핀 외,『BKC강해주석시리즈28/디도서ㆍ빌레몬서ㆍ히브리서ㆍ야고보서』, 156.

9. 한천설, “야고보서 설교를 위한 배경연구”, 293.

10 신성종,『신약총론』, 255.

11 신성종,『신약총론』, 255.

12 토마스 맨튼,『핸드릭슨 패턴 주석 야고보서(上)』, 29.

13 토마스 맨튼,『핸드릭슨 패턴 주석 야고보서(上)』, 30.

And

스가랴 개관

서론

스가fi(hy:r]k'z)]는 자카르(rk'z:/기억하다)와 야흐(Hy:/여호와의 축약형)에서 유래한 말로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이다. 스가랴는 소선지서 중에 가장 긴 책이다. Jerome은 히브리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책은 기독교인들에게 다른 성경처럼 중요한 책이다.1

1. 저자

본서의 저자는 스가랴이다. 스가랴는 베레갸의 아들, 잇도의 손자이다(1). 스5:1과 6:4, 느12:16에서는 ‘잇도의 아들’로 되어 있는데, 성경에서 ‘벤’은 손자도 포함한다. 스가랴의 조상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제사장의 가문이다. 1:1과 7:1에 의하면 2년 정도 사역하였다.2 학개가 성전재건을 독려하고 나선지 두 달 후인 주전520년 10월에 하나님의 신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여러 환상을 보았다. 1-8장에 나오는 환상과 예언은 520년 10월부터 518년 12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3

2. 저작 연대

스가랴서의 연대는 주전520년10-11월부터 518년 12월까지 말씀을 선포했으나, 9장에서 14장까지는 정확한 연대는 나오지 않았다. 역사적인 상황은 학개 때와 동일하다.

3. 저작의 동기와 목적

이스라엘은 주전930년에 남북왕국으로 분열된다. 분열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한다. 남왕국 유다는 주전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한다. 포로로 끌려간 유다는 70년이 지난 주전536년에 1차 귀환을 해서 성전재건을 시작한다(세스바살). 주전520년 2차 귀환한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같이 성전재건을 한다. 이때 학개와 스가랴가 설교를 한다. 스가랴는 14년이나 중단된 성전재건을 다시 시작하도록 격려하고,4 성전을 건축하고 있었던 백성들의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과 미래의 유다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스가랴서는 책망과 교훈, 그리고 격려의 선포로서 환난의 시대를 향한 말씀집이었다.5

스가랴는 1-8장과 9-14장 두 분으로 구분한 다음 폴 R. 하우스는 스가랴를 다섯 부분으로 구분했다. 스가랴는 과거 이스라엘을 공정히 다루신 여호와의 공의를 확언하고(1:6), 여덟 환상은 하나님을 “예루살렘과 시온을 향해 질투하는 분”으로 묘사하며(1:7-6:15; 1:14), 7-8장에서 사유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최종회복의 서막인 9-11장에서 본문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와 보호자로 소개한다. 12-14장에서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집중한다.6

스가랴는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이다 회화체산문, 시적표현, 환상과 예언, 상징적 표현 등으로 인하여 난해한 책으로 평가하지만 메시야에 대해서 풍부한 정보제공을 하여 소선지서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스가랴와 그리스도는 이사야를 제외한 그 어떤 선지자보다 풍부하고 선명한 메시야 예언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그리스도를 여호와께서 보내신 천한 종, 즉 순, 성전을 건축하는 제사장과 왕, 온유와 화평으로 그의 왕국을 건설하는 자, 배신당하여 팔리는 자 등 메시야의 예언에 대한 기록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메시야 환상에 대한 의미

1:7-17 화석류 나무 사이에 홍마를 탄자

시온과 이스라엘 백성의 압제

1:18-21 네 뿔과 네 공장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자가 받을 심판

2:1-13 척량줄을 잡은 자

하나님이 보호. 영화롭게 함

3:1-10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정결

이스라엘의 정결

4:1-14 순금 등대

성령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능력을 더함

5:1-4 날아가는 두루마리

개인의 죄에 대한 심판

5:5-11 에바 가운데 앉은 여인

없어질 민족의 죄

6:1-8 네 병거

열방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

결론/6:9-15 관을 쓰는 여호수아

그리스도의 강림

4. 신학적인 가치

스가랴는 선지자들의 말을 다시 강조하였다. 그들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이다(7:11-14).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보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 종교생활을 했다고 지적했다(7:7).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예배생활보다도 참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돌아보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심을 보여 주었다(7:9-10). 많은 학자들은 스가랴와 에스겔의 유사점을 지적한다. 둘 다 선지자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신학적 종말론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멕케이(Cameron Mackay) 같은 학자는 “스가랴는 에스겔 40-48장의 가장 빠른 주석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슷한 신학적 주제가 있는 것이다.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왕권의 상징이며(출15:8) 또한 새로운 왕국은 제사장의 나라로 제정된 것이다(출19:6).

종말론/스가랴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말세에 일어날 그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 메시아적 왕은 도래할 것이며(9:9), 그는 보편적인 통치를 하시고(9:10), 자기백성을 보호하시며(9:10-17),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10:2,3), 포로 된 자들을 다시 모으시며(10:6), 구원하셔서(12:-9), 영원히 열국을 심판하실 것이다(14:3. 스가랴서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사건과 재림 등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메시아/스가랴서는 메시아에 대한 사상도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스가랴서에는 이사야서 다음으로 메시아적인 목자-왕에 관한 것들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배반당하며(11:12-13), 찔림과 매맞음을 당하실 것이다(12:10/13:7). 이와 같이 메시아는 고난을 통과하시지만 또한 통치(9:9-10)와 구원(14:1-6)하실 자로서 평강과 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9:9-10). 그러나 메시아의 목자와 왕에 대한 개념은 사실 에스겔서에 먼저 나타나 있다(겔 34:23-31 37:24).7

성전재건/스가랴서의 어조는 권면이다.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권면사항이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고(1:2-6), 밤에본 환상을 선포하기도 하고(1:7-6:8),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 것이다(9-14장), 당시에 긴급한 사항이었던 성전재건을 기초로 해서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미래까지도 이야기하고 있다.8

스가랴는 복과 저주를 지닌 언약적 삶에 대한 신학적 시각을 제공한다.9

성전건축을 하라고 하신 이유는 성전을 모토로 해서 이스라엘이 과거의 사건에서 벗어나야 함이었다. 하나님을 떠나 다시는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독촉하신 것이다.

결론

스가랴서는 신약성경에서 71번이나 인용되었다. 계시록에서 31번, 복음서에서 27번 인용되었다. 이와 같이 미래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며, 특히 계시록에서 많이 인용한 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특히 14장). 나귀를 타고서 의와 구원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신 겸손한 모습을 가진 메시아적 왕에 의해서 완전한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속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분은 바로 우리의 왕이시다.

1 레이몬드 딜러드·트렘퍼 롱맨,『최신구약개론』박철현 옮김 (경기: 크리스챤다아제스트, 2003), 653.

2 이학재,『구약성경에서 배운다』, 503.

3 김지찬,『구약개론』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00), 254.

4 『큰 성경』

5 이학재,『구약성경에서 배운다』, 506.

6 폴 R, 하우스,『구약신학』, 697.

7 이학재,『구약성경에서 배운다』, 508.

8 김지찬,『구약개론』(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2000), 255.

9 반 게메런,『예언서 연구』김의원·이명철 옮김 (서울: (주)엠마오, 2004),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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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개관

서론

빌레몬서는 바울서신 가운데서 가장 짧은 단어이다. 335단어로(헬라어)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편지를 단순히 한 개인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호의를 요청하기 위한 편지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 편지의 밑바탕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변화된 관계를 통하여 주어진 주인과 노예라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들어있다. 빌레몬서에서 취급하였던 노예의 상황은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에게는 이미 익숙한 관계인데, 복음이 이들을 어떻게 묶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 저자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이다. 바울은 저자로서 자기를 언급했다(1:1). 본서의 내적인 증거 1:1,19을 보아서 알 수 있다.

2. 저작 장소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 죄수였다(1,9,10,23절). 사람들이 자유롭게 바울에게 오고가며 도주한 오네시모도 바울을 통해 회심하는 사건이 가능했음을 고려할 때 그가 갇혀 있던 곳은 사도행전28:30절에 묘사된 로마이다.

3. 빌레몬서 수신인

빌레몬서의 수신자들은 빌레몬과 압비아, 아킵보와 그 집에 있는 교회였다(1절).

4. 저작 연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바울사도가 갇혀 있던 곳은 사도행전 28:30절에 기록된 대로 로마라면, 이 편지는 바울의 1차 로마 투옥시절인 주후 60-61년경에 쓰였다.

5. 저작의 동기와 목적

초대교회에는 노예가 많이 있었다. 그 원인은 로마제국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편지의 목적은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다가 바울을 만나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안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고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다. 바울이 요청하는 것은 도주 노예인 오네시모에 대한 선처였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쳐 나와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모르지만 바울에게로 갔다. 바울과의 만남은 오네시모에게 변화의 계기였다. 바울은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10절)이라고 부른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통해 회심했거나 아니면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주인 빌레몬에게 저지른 잘못을 바울의 감화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매우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1절). 그러면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일단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원하는 바는 오네시모가 자신에게 돌아와 사역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접하고 용서한 다음 다시 바울에게 돌아갈 것을 허락해야 한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런 선처를 기대하면서 오네시모를 보내고 그때 ‘사면 추천서’처럼 따라 붙은 것이 빌레몬서다.

6. 신학적인 문제

한 개인에 대한 특별한 선처를 부탁하는 사신이지만 제자도, 그리스도인의 용서와 사랑, 하나님의 섭리 등에 대한 것이 곳곳에 박혀 있다. 특별히 당시에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던 노예를 주인과 동등한 차원에서 취급하는 몇 가지 언급들은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바울은 노예 제도와의 사회적 투쟁을 선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인 간의 모든 구분을 타파하는 복음의 정신은 결국 시간이 흘렀을 때 노예제도를 철폐하게 한 원동력이 되게 했다.

결론

바울은 그 자체로서는 하잘 것 없는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다. 오네시모는 범죄인이었다. 그런데 그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그의 용서를 빌고 있다. 우리는 바울사도가 관용을 얼마나 신중하게 다루는지를 읽을 수 있다. 곧 한 개인의 사적인 일보다 전체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아가페적 사랑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형제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지침서라고 보아야 한다.

1. 레이몬드 E. 브라운,『신약개론』김근수,이은순 역 서울: 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2. 유승원, “일상의 문제를 풀다가 성경이 된 아름다운 편지”『빌립보서,빌레몬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편집팀 편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3. 존,칼빈『칼빈성경주석10/히브리서,베드로전후서,골로새서,빌레몬서』, 존,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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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개관

서론

그리스(아가야)의 본토는 남쪽으로 6km의 좁은 폭을 가진 지협과, 동쪽으로 에게해, 서쪽으로 아드리아 해에 접하고 있는 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연결되어 있다. 이 지협을 지배하고 있는 고원 위에, 반도로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남북간 도로상에 걸터앉아 있고, 두 바다에 접한 항구들 사이에 위치한 곳이 고린도였다.

고린도는 주전4세기부터 아가야(그리스 남부지역의 도시)의 도시국가로 유명세에 있어서 아테네를 능가했다. 하지만 주전146년에 로마군대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주전44년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바울은 로마에서 추방을 당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 세워진 교회이다(행18:1-18). 주님께서 환상가운데 바울을 안위하시고 고린도에 머물 것을 말씀하심으로 고린도에서 1년6개월간 머물렀다.

1. 저자

바울은 저자로서 자기의 언급했다(1:1). 본서의 내적인 증거 ‘1;1-3, 3:4,6’와 초대교부들에 의해 바울 저작임이 증명되어 의심치 않았다.

2. 저작 장소

에베소에 있던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편과 사정에 관하여 듣고 난 후 기록했다. 이때가 바울이 3차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에 체류했을 때이다(행19:8-10).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분쟁소식은 3차 전도 여행 중에 알았다.

3. 고린도전서 수신인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들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다(1:2). 1절을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다. 초대교회는 가정집에서 드렸기 때문에 50명을 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여러 가정에 나뉘어서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높다.

4. 저작 연대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 중 에베소를 거점으로 이상 선교 사역을 전개했다(행 19:1-20). 고린도전서 16:5절에 따르면, 사도바울은 이 편지를 에베소 체류 기간 중에 오순절을 앞둔 마지막 몇 주 또는 몇 달 전에 기록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는 대략 A 55년 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5. 저작의 동기와 목적

고린도교회는 온갖 언변과 지식과 성령의 은사가 풍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많은 문제와 말썽으로 바울사도에게 큰 근심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들이 처 했던 사회, 문화적 환경은 오늘 우리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고 그들을 어지럽혔던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즉 ‘분파, 근친상간, 성도 간의 법정소송, 음행, 결혼과 독신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사도권에 대한 도전, 공예배 질서, 성령의 은사, 부활에 대한 불신 등’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권고하기 위해 편지를 보낸 것이다.

6. 신학적인 문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은사가 충만하고 지혜가 넘쳤지만 어느 교회보다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전반적인 생활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접목하였다. 고린도교회가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능력을 주셨다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성도들의 삶의 전 영역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신자들의 지혜와 의로움, 거룩의 참된 근원이다.

결론

바울은 서신서 전체에 걸쳐 고린도 성도들이 ‘구원(칭의) 그 후의 삶(성화)’으로 당연히 나가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교훈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의미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종말론적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 백성들이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길로 초청받게 된 것과 그에 따른 감사와 감격이 성도들의 여러 현안 문제들을 푸는 열쇠가 된다는 의미다.

참고서적

레이몬드 E. 브라운.『신약개론』김근수,이은순 역 서울: 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장해경. “현대교회의 거울, 고린도교회”『고린도전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편집팀 편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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