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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우리야의 아내·솔로몬(마태복음1: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성경에서 다윗(Dauivd)은 ‘사랑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825번나오고, 신약성경에서는 58회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가장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인물들 중의 하나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새도, 그의 형제들도, 심지어 사무엘조차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곳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다윗의 아들들 중에서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을 받은 사무엘은 다윗의 일곱째 아들까지 모두 지나간 것을 보고 적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기대를 전혀 하지 않은 다윗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그로부터 비로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확률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밧세바([b'v,-tB')는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야의 아내로 나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는 다윗의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어쩌면 죽음에 내몬 여자입니다. 그리고 다윗과의 부적절한 관계에 들어갑니다. 다윗아 요모조모로 머리를 써서 우리야를 전사케 한 후에 본격적으로 밧세바는 다윗과의 동거생활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죽이십니다. 이로 인해 다윗과 밧세바는 시름에 잠긴 후 회복됩니다. 그런데 이 밧세바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십니다.

솔로몬(Solomwvn)은 사울왕 40년의 통치, 다윗왕 40년의 통치 후에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마지막 40년간 왕이었던 사람입니다. 밧세바와 다윗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은 완전하였지만 끝에서는 실패한 왕입니다. 알렉산더 휘테는 “솔로몬의 실패는 가장 비극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예표를 찾는다면 그는 바로 솔로몬이 될 것이지만 솔로몬은 매일 음탕한 생활로 인해 결국 실패자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확실히 솔로몬은 가장 이상적인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이상적이지 못한 왕으로 전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의 족보에 오릅니다.

오늘 우리들이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죄를 미화(beautification)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유다는 다말에게서 ···”,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는 룻에게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입니다. 이들은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이러한 죄인들조차 품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은혜임을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조차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족보에서 볼 수 있습니다.

And

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마태복음1:4,5)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아미나답(!Aminadavb/Amminadab)은 히브리어 야미나다브(나의 백성은 고귀하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미나답은 유다 자손으로서(대상2:10) 나손의 아버지이며(민1:7),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의 아버지이며(출6:23), 다윗 왕의 선조였습니다(룻4:19).

나손(Naasswvn/Nahshon)은 히브리어 나손(마법사)의 헬라형입니다. 나손은 암미나답의 아들로 유다 지파의 족장입니다(민1:7,2:3,10:14). 모세시대의 방백이었고, 아론의 처남이며(출6:23), 다윗의 선조입니다(룻4:20-22).

살몬(Salmwvn/Salmon)은 보아스의 부친입니다(룻4:20). 살몬과 라합의 관계는 성경에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리고의 두 정탐꾼과 라합에 관한 이야기를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때 두정탐군 중의 하나라고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보아스(Boovz/Boaz)는 ‘민첩’이란 뜻이며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친족이며, 룻의 두번째 남편입다(룻4:10-4:13).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한 부유한 농부로서 모압 여인이며 전에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의 아내였던 룻을 사랑했습니다. 고엘(goel)제도로 나오미의 재산을 찾아주고 룻과 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오벳(!Iwbhvd/Obed)은 히브리어 오베드(예배자에서 유래했으며, 다윗왕의 조부입니다(마1:5,눅3:32).

이새(!Iessaiv/Jesse)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다’를 의미합니다. 이새는 베레스의 후손인 보아스와 룻의 손자이며, 오벳의 아들입니다. 이새는 아들 여덟 명과 딸 둘을 두었습니다. 이새는 베들레헴에 거주한 부유한 지주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자주 ‘이새의 아들’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새가 이스라엘의 미래의 메시야 왕의 조상으로 언급됩니다(사 11:1).

본 족보에 기록된 이름들은 세속역사에 있어서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 알렉산더 등은 알아도 성경에 기록된 이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세속역사에서 위대하게 생각되는 인물들을 배설물보다 못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감히 제외시켰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거론된 이름들은 우주적으로 생각합니다. 두 세계(이 세상과 저세상)에 연결된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의 존재는 별로라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부는 두 세계에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두 세계에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그리스도예수께서 위대합니다.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And

유다·다말·베레스·헤스론·람(마태복음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우리나라는 출신성분을 많이 따집니다. 양반 찾고 상민을 찾습니다. 특히 출신성분을 많이 따집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을 지겹게 따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영달에 이용합니다. 정치와 경제 등 공공성이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여 망쳐버립니다. 실력과 능력보다 성분을 따져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족보에 올라있습니다. 그 족보에 첫 번째 여자가 다말입니다.

다말은 가나안 사람이면서 이스라엘의 율법을 철저하게 따르려고 한 사람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장손 엘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가나안 사람이면서 야곱집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에 의해 차남(次男) 오난과 동침을 합니다. 그러나 오난은 그렇게 낳으면 자신의 가계가 되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그 의무를 다하지 않고 바닥에 설정합니다. 이로 인해 삼남과 다시 동침하기 원했지만, 유다의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자, 창녀로 위장하여 유다와 동침을 하여(물론 유다는 전혀 몰랐음) 베레스를 낳습니다. 이는 다말의 숭고한 목적에서 비롯되어 예수님의 조상에 오르게 됩니다.

베레스(Farev"/Perez/파열)는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유다의 아들로 다말이 낳은 쌍둥이 중 하나입니다(창38:29, 민26:20, 룻4:12,18, 대상27:3, 마1:3).

헤스론(!Esrwvm/Hezron/닫혀버린)은 유다의 손자입니다(창46:12, 민26:6, 룻4:18,19, 대상2:9;4:1).

람(!Aravm/Ram/높은)은 헤스론의 아들입니다(룻4;19, 대상2:9,10, 마1:3,4).

사실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는 끊어졌다가 이어지고, 전혀 엉뚱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즉 사탄은 유다의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죽자 아주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셋째인 셀라가 있어서 꺼림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셀라가 장성해도 다말에게 주지 않자 또 한번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이 장외홈런을 쳤습니다. 다말이 유다로 잉태한 것입니다. 유다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말이 임신한 것을 알자 부정한 여자라고 불에 태워죽이라고 했을 때에 사단은 “이제 끝났다”하고 확신을 했을 때, 다말이 불속에서 살아나옵니다. 사단은 말리고, 훼방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지 못합니다. 즉 족보 안에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프로젝트(project)가 숨어 있습니다. 이 족보가 선택받은 과거의 사람들, 현재 선택받은 사람들, 그리고 미래의 선택받을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제공하게 됩니다. 단순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가 아닙니다. 오시리라는 메시야의 계획이 이 족보들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예수의 계보가(Bivblo" genevsew" jIhsou' Cristou').

And

이스라엘의 조상을 통해서 오심(마태복음1:1-2)

세상에서의 신화(myth)나 전설들은 실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신라의 박혁거세나 고구려의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든지, 견훤이 지렁이로부터 시작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창시자가 나오자마자 걸어서 일곱발자국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대하게 만들고자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어떤 다른 동물에서 왔다가 다시 다른 동물로 가는 예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믿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보다 더한 초자연적인 출생도 할 수 있습니다. 천상에서 갑자기 오실 수도 있고, 천사의 모습으로 와서 얼마든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대로 오시려고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수태는 인간적인 방법의 일부를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그리스도까지는 수천 년의 갭이 있었지만 그 갭을 뛰어넘어서 출생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원래는 갈대아 우르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됩니다. 당시의 세상은 아브라함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처처에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속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나안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그의 후손을 낳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아들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갖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전혀 수태시키지도, 수태할 수도 없을 상황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후에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어서야 어렵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여러 시험을 겪게 하십니다. 아브라함 100살 때 겨우 낳은 아들을 모리아에 인신제사를 해야 하고 당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통한 구속계획은 좁고 협착하게 계획하셨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하셨습니다. 그것의 순종함도 체크하셨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같은 성정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달랐습니다. 사는 방법도, 신앙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아들입니다. 더구나 유다는 가나안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사실 야곱이나 유다를 보면 우리들이 왜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쓰신 것을 보면 이미 이방의 구원은 아브라함 때에 예견된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이삭, 야곱, 유다는 장자들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장자들은 무시되었습니다. 즉 메시야의 혈통에 포함될 사람들은 나이로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의 공로나 어떤 장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선택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And

복음서 저자들이 묘사한 예수그리스도(마1:1, 막1:1, 눅1:1-3, 요1:1-3)

복음서 저자들은 네 명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입니다. 두 명은 사도이고, 두 명은 사도가 아닙니다. 마태는 전직(前職)이 세리입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 겸 통역자이며, 초대교회의 핵심인물입니다. 누가는 수리아의 안디옥의 출신으로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직(前職)의사였습니다.사도요한은 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요13:23). 이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묘사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로 묘사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를 했습니다. 왕은 족보를 지녀야 하기 때문에 마태복음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인간은 족보를 지녀야 하기 때문에 누가복음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종은 족보가 필요 없기 때문에 족보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족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습니다.

성경의 각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문학적 장르(genre/형식)인가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1세기 시대 유대의 그레코 로만(Greco-Roman)의 역사·문화적 상징세계(symbolic world)의 틀 속에서 이야기형식(narrative)으로 되어 있습니다. narrative의 형식은 그레코-로만(Greco-Roman) 문학양식을 따라 사람들의 생애에 따른 전기, 인물, 그들의 역사행적, 회상록 등을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신학적문서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구약-유대인의 성경(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하시는 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과 이적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죄에서부터 구원하신다고 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마가복음의 장르 역시 narrative형식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묵시적 관점도 첨가했습니다. 즉 마가는 세상은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 인간과 귀신 사이의 전장(戰場)으로 보았습니다. 세상이 사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응당 해방되어야 합니다. 강한 자는 더 강한 자에 의해 타도되어야 합니다. 어둡고 위험한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으려면 세상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서의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의 종으로 일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장르 역시 narrative형식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사회에서 소외당한 가난한 자, 여자, 사마리아인,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며, 성령에 대한 언급들도 자주 등장하고, 구원사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 구원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매우 강조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선지자적 기능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누가는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인자’, ‘종’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하여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의 장르 역시 narrative형식입니다. 요한복음은 표적과 강론을 통해 예수가 유대의 메시아, 즉 구약을 성취하신 약속된 구원자이심을 보여 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10:30)로 제시함으로써 그분을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빛 가운데 거하도록 장려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계시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어떠한 하나님을 믿으며, 어떻게 그 믿음을 확정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4복음서는 각각 다르게 예수그리스도를 묘사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사자(Lion)복음) 대상이 유대인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소(Ox)복음) 대상이 로마인입니다. 누가복음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사람(Man) 대상이 헬라인(전세계)입니다. 요한복음은 전능한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독수리(Eagle)복음) 대상이 모든 나라입니다.

And

마태복음족보와 기독교윤리(마1:1-16)

‘윤리’라는 말은 헬라어 “e[qo"”(에토스/관습)에서 유래했습니다. ‘윤리’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기준’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윤리학이란 “성경과 기독교적 확신에 준하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도덕은 ‘한 사람이 실제로 자신의 신념대로 살고 행동하는 것’이고, 윤리학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윤리는 ‘하나님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윤리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윤리는 규정적입니다. 의무론적입니다.

윤리적인 관념이나 도덕적인 관념으로 볼 때에 족보에 있는 여인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다말의 남편 엘이 죽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의 법으로 시동생 오난과 동침하지만 여호와의 목적에 악을 행하여 죽습니다. 다시 시동생 셀라에게 시집을 가려하나 나이가 너무 어립니다. 유다가 다말에게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셀라도 죽을까 염려가 되어서 다말과 떼어 놓으려 한 말입니다. 따라서 셀라가 장성해도 k말에게 주지 않겠다는 속셈입니다. 이에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고 임신하게 됩니다. 물론 유다는 그가 다말인지 몰랐습니다(창38:1-30).

라합(1:5)은 그 직업이 기생입니다. 유대인들은 라합의 직업을 여관주인이라고 하지만 히브리서 11:31을 보면 그 직업이 기생(povrnh)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중요한 정보제공을 합니다. 물론 자신의 가족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그래서 자신의 가족을 살립니다. 후에 라합은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립니다.

룻(1:5)은 출신이 모압 족속입니다. 모압족속의 유래는 창19장에 있습니다. 도저히 유대에 그 이름이 오를 수 없는 여지입니다. 그런데 역시 그리스도예수의 족보에 올라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로 나오는 밧세바는 성경에서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두고서 다윗과 동침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게 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역시 족보에 올랐습니다.

기독교윤리와 이 세상의 윤리는 다릅니다. 세상의 윤리로 기독교윤리를 잣대질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라합이 거짓말 한 것은 세상의 윤리에는 어긋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즉 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윤리여야 합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세상의 윤리이지 하나님의 윤리일 수 없습니다. 신명기7:2, 16절을 보면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1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진멸(!~yrIj}T' !rEj}h'; haharem taharim/하하렘 타하림)으로 “바치고 또 바치라”는 말로 “죽이고 또 죽여서 바쳐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아주 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두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세상윤리의 잣대로 잴수는 없습니다. 세상윤리는 이러함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반드시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너희들이 올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전부 신전창녀로 만들고 남자는 모두 무당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윤리마저 그들이 바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윤리와 세상윤리가 상충될 때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윤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네 여인들의 윤리를 세상윤리로만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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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족보와 누가복음족보(마1:1-16;눅3:23-38)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요람→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여고냐→스알디엘→스룹바벨→아비훗→엘리아김→아소르→사독→아킴→엘리웃→엘르아살→맛단→야곱→요셉’으로 총40명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요셉→헬리→맛닷→레위→멜기→얀나→요셉→맛다디아→아모스→나훔→에슬리→낙개→마앗→맛다디아→서머인→요섹→요다→요아난→레사→스룹바벨→스알디엘→네리→멜기→앗디→고삼→엘마담→에르→예수→엘리에서→요림→맛닷→레위→시므온→유다→요셉→요남→엘리아김→멜레아→멘나→맛다다→나단→다윗→이새→오벳→보아스→살몬→나손→아미나답→아니→헤스론→베레스→유다→야곱→이삭→아브라함→데라→나홀→스룩→르우→벨렉→헤버→살라→가이난→아박삿→셈→노아→레멕→므두셀라→에녹→야렛→마할랄렐→가이난→에노스→셋→아담→하나님으로 총77명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76명입니다.

똑같아야 할 족보가 왜 사람숫자도 틀리고, 순서도 틀릴까? 마태복음의 첫14명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이 두 족보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족보의 이름들이 서로 다르고, 마태는 생략을 많이 했습니다. 마태의 족보는 한 문단에 14(2x7)인씩 3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하향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상향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대상이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그 대상이 전 세계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비롯해서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메시야인 예수님은 인류에게 중요한 분이시고 인류는 바로 하나님자신에게서 유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록한 것입니다.

혹자들은 마태복음의 족보는 요셉이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일 것이라고 하지만, 만족한 답변은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누가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나타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는 메시야이고, 그래서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고, 누가는 예수를 인간의 대표로서 다윗/아브라함/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소망자로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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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과 예수그리스도(마태복음1:1-16)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3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5절), “···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5절),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

예수님의 족보에 다윗과 아브라함이 들어가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등장 하는 것은 획기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정상유대인들이 아닙니다. 다말은 가나안사람입니다(창38:1-20).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라합은 역시 가나안의 여리고사람입니다. 직업이 기생입니다(수2:1-21). 룻은 모압사람입니다(룻1:4). 창세기에 보면 모압은 근친상간의 족속이었습니다(창19:30-38).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부정한 여인입니다(삼하11:1-5). 이러한 여인들이 거룩하신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유다 때에 가서는 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을 다말이 이어주었습니다. 라합은 가나안에 살다가 이스라엘을 적극 도왔습니다. 룻 역시 보아스를 만나 오벳을 낳았습니다. 밧세바는 솔로몬을 낳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교보다 거룩함의 종교인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러한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 뜻을 모른다면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Calvin은 마태복음1:3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자기비하(exinanitio)의 시작이다(빌2:7).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족보를 티끌만한 범죄나 수치의 자국이 없이 깨끗하게 보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낮추고 종의 형태를 취하여 사람도 아닌 벌레,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시22:7)가 되시며 마침내에는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하기 위해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당시의 족보에서 부정한 출생의 사람도 조상으로 삼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미인을 찾고, 순수를 찾으며, 정의를 찾고, 깨끗함을 찾아도 사람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정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더러운 사람들뿐입니다. 어쩌면 위의 부정한 여인들보다 더럽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왕의 모습으로, 때로는 이스라엘의 처음조상의 모습으로 그리고 비하적인 모습으로 오기 위해서 연약할 뿐만 아니라 더러운 모습의 사람들을 조상으로 둔 것입니다. 우리같이 더럽고 나쁜 사람들을 위해서 천한 인간의 조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을 더러운 자리에 던져버릴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아낌없이 죽이는 자리에까지 내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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