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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복음(로마서1:15-17)
바울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울사도가 복음을 사랑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전파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란 나는 기회를 얻어 복음전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고 기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치욕적이었다는 말입니다. Roma의 총독은 황제를 대신하는 지방관입니다. Roma의 총독이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은, Roma인들을 우위에 두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Roma인들의 생각에는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이 어떻게 복음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Roma인들이 복음을 과소평가하지 못하도록 일축한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에게 있어서 힘은 로마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전 세계를 제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들은 무서운 나라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될 집정관이 전투에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인들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그들의 전투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Roma인들은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마저 복음은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Roma인들이야 한 세대를 풍미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영원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윗의 혈통에서 성경대로 출생하여 메시아로서의 일들을 모두 마쳤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왕으로 오셔서, 위대하게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높아지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즉 전 세계의 어떤 나라도 어떤 민족도 모두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환장한 듯합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눈을 부라리고 달려듭니다. 목숨을 걸고 돈에 매달려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위해서 온 생애를 다 걸고 있습니다. 오직 세속적인 명성을 위하여, 오직 오늘과 내일 즉 살아있는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와 내세를 위한 준비는 zero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열심인데, 저 세상을 위해서는 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 세상을 위한 spec은 전혀 쌓은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접하거나 복음이 오면 받아들이면 되는데 인간의 오만함이 복음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당하게 귀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자에게 유효하게 역사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모든 믿는 자에게/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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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과 인간의 관계(로마서1:15-17)
사람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심판이든지, 구원이든지가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여러 종교를 신봉하면서 안심하고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심판대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방송이나 신문, 그리고 여타 언론과 직접적인 전도를 하고 있어도 도무지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져야 하고 퍼져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리스도십자가 사역은 구속의 사역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사역을 말할 때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부정과거 시제로 사용했습니다.
마태복음20:28 인자가 온 것은…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주려(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마가복음10:45 인자의 온 것은…주려함이니라(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베드로전서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동사, 직설, 과거, 수동)
히브리서9:12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동사, 분사, 과거, 중간)
히브리서9:15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동사, 분사, 과거 중간디포)
디모데전서2:6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동사, 분사, 과거, 능동)
디도서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동사, 직설, 과거, 능동)
고린도전서6:20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동사, 직설, 과거, 수동)
고린도전서7:23 …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동사, 직설, 과거, 수동)
갈라디아서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동사, 직설, 과거, 능동)
갈라디아서4:5 …속량하시고(동사, 직설, 과거, 능동)
요한계시록5:9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동사, 직설, 과거, 능동)
요한계시록14:3-4 3…구속함을 얻은(동사, 분사, 완료, 수동) 4…구속을 받아(동사, 직설, 과거, 수동)
사도행전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동사, 직설, 과거, 중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현재 진행 중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의 공로로 쌓아지는 것이 아니고 완성입니다. 단번에 구원받은 것이지, 점차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택하심을 통해서, 선택에 관계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가르침을 통해 소명에 관계하시며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령님은 인침을 통해서 칭의에 관계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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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로마서1:15-17)
하박국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히브리서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소위 기도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람 많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에게서 더러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들은 완전한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목회의 폭이 넓으면 비례해서 자신들의 모든 것들이 완전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 있다면 세상의 종교에서나 생각할 법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신성모독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절대로 의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말을 사용한 구약의 주된 단어군은 qd'x;/tsâdaq에서 왔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dikaiovw/dikaiôo입니다. Murray는 법적인 의미를 갖는 기본형 qd'x;/tsâdaq가 Qal(능동형) Hiphil(사역형) Piel(강의형)으로 널리 쓰인다고 했습니다. 또한 Hihpael(재귀형)으로 한번 쓰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70인역 성경과 신약성경에서 dikaiovw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Leon Morris는 “-ovw(오오)로 끝나며 도덕적 특질을 언급하는 동사들은 선언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선언적인 의미이지, ‘-게 만든다’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지, ‘의인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이 주관적인 변화에 반대되는 객관적인 법정적 심판이라는 사실을 다음의 구절에서 증명합니다.
신명기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Hiphil)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 의인을 의롭다 함에 있어서 재판장들이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기32: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Piel) / 엘리후에 따르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롭다 했다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즉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잠언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Hiphil)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이것은 분명히 그 땅의 재판장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뇌물 때문에 악인을 의롭다고 선언하거나 의인을 정죄하는 그 재판장은 여호와를 분노케 했습니다.
누가복음7:29 “하나님을 의롭다하되”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고 선언하거나 인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롭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의롭다하심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죄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심은 복음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의롭다하심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지, ‘어떤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치 내가 죄를 짓지도 않은 것처럼 나를 보신다”라는 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Roman-Catholic의 교리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Roman-Catholic은 트렌트 공회(Council of Trient/1547)를 인용하는 Catholic교리문답(1994)은 “의롭다 하심은 죄의 속함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사람의 거룩하게 하심과 새롭게 하심”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의롭다 하심은 세례에서 시여되며(para. 1989)”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의 능력에 의해 우리를 내부적으로 의롭게 하신다(para. 1992)”라고 말합니다. 즉 이들이 말하는 의란 하나님의 의와 어느 정도 있는 인간자신의 의가 합해져 인간을 의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의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와는 동떨어진 우리 밖의 의입니다. 우리의 노력 대가로 얻은 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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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사도성(로마서1:11-15)
J. C. Lambert는 “사도의 권위는 영적이며,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공공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없었다. 바울은 스스로 초기 사도들 전체가 지녔던 견해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였으며(갈2:6,11),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려고 노력하였다(고후4:2). 사도들이 집단적으로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권위를 행사하였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습니다(Herbert Lockyer, 1982, 30). 사도는 예수님께 택함을 받은 12제자입니다.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보낸 12제자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어야 했습니다. 예외로 바울은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Gospel Serve, 2005, 577). “사도적”이란 말은 사도적 과거를 강하게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사도적”이란 역사적 측면이 가시화되는 말입니다. “사도성”에서는 교회의 인간적 측면이 강하게 부각됩니다(G. C. Berkouwer, 2006, 256). 그래서 다른 속성들과는 많이 논쟁이 붙었었습니다. 지금도 사도권이 계승되었다느니, 자신이 사도라느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Karl Barth는 “사도적”이라는 것을 ‘사도들의 가르침과 지시를 따르며, 그들의 규범적 권위 아래에 있는 것이며 그들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고, 그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전하는 message를 듣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성은 반드시 사도들의 교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 교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로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초자연적인 영감을 통해 그들에 의해서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Roman-Catholic이 말하는 것처럼 교황이 사도권을 계승했다고 하는데, 비성경적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Roman-Catholic과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도성은 사도들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 교리는 초자연적인 계시로 주어졌습니다. 초자연적인 영감을 통하여 그들에 의해서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이 혈통과 상관없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쫓는 사람들인 것처럼, 사도적인 교회는 “연속되는 승계”의 문제와 관계없이 사도들의 믿음의 자취를 좇는 교회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에 순복하는 것만이 교회의 사도성을 보장합니다. 사도성은 결코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교회 조직의 승계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승계는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해도, 교리적인 순수성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속성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0:40 너희(사도들)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가복음10:16 너희(뽑힌 72명)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요한복음13:20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히3:1)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이 지명하신 사도들이 그분의 권위를 입고 능력을 받은 대리인들이며 대변인들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분의 사도들의 말을 듣거나 거절하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듣거나 거절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사도들)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사도행전2:42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갈라디아서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에베소서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1:1-2: 2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먼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요한계시록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Reymond는 교회가 ‘사도적”이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원래의 기초인 사도들의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분의 교회가 ‘사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거짓된 선지자들이 장차 교회 안에 나타날 것을 자신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에 경고하셨습니다(마24:11,24, 막13:22).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는데, 그 교회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계2:2).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시험을 위한 시금석은 구약성경에 이미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선지자가 예언한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가 선언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해 주신 신앙과 일치하는가(신13:1-3, 18:20-22)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들에 덧붙여 신약성경의 교회에서는 사도로 자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언자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행1:22). 또 그가 다른 사도들이 가르친 동일한 복음을 가르치고 동일한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고 합니다(갈1:8-9, 고전15:11, 고후 1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요일4:1-3). 사도임을 입증하는 기적과 기사들, 표적들을 행해야 합니다(고후12:12).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들을 위하여 고난과 박해를 기꺼이 감내해야 합니다(고후12:13-13:13).
따라서 자신이 사도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도를 계승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탈교회화 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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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보편성(로마서1:11-15)
보편성이란 특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을 받으려면 거액의 돈을 내야 한다든지, 지성인, 즉 elite들에게만 구원이 임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제한을 받기 때문에 보편성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보편성이 되려면 사람들에게 많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28:18-20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모든 족속(pavnta ta; e[qnh)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하고 어떤 민족은 안 되고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동서고금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를 믿는 자마다(pa'" oJ pisteuvwn)입니다. ‘저(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이지, ‘믿어도 너는 완 돼, 너는 돼’가 아닙니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큰 교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큰 교회는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Roman-Catholic은 교회의 보편성을 Roman-Catholic 세력이 미치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Roman-Catholic이 미치지 않으면 교회가 될 수 없다는 황당함을 주장합니다. 교회의 보편성은 지상명령(마28:18-20)에 따른 복음의 민족적인 보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온 세상 앞에 나타내는 可見的(가견적) 공동체인 교회의 성격에서 나옵니다.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universality)은 지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으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회원 구성에서 분리주의나 배타주의를 추구하는 교회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갖는 보편성이라는 측면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현재의 교회 성장학은 사회의 한 계층만을 파고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요구하신 것 이외에 또 다른 자격을 신자 됨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베드로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행10:13-15).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자꾸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는데,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서 성경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입니다(마태복음28:19, 갈라디아서3:28, 골로새서3:11, 요한계시록5:9-10,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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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거룩성(로마서1:11-15)
Roman-Catholic은 교회가 성례와 미사와 여타 선행으로 인해서 거룩해진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수많은 이단들이 얼마나 많이 소위 예배하고 선행을 행하며 성례의식을 하는데도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사야6:1-4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요한계시록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거룩하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약에서 ‘거룩하다’는 말을 vd,qo/로 표현합니다. 즉 거룩함이란 분리된, 신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qôdesh’는 ‘거룩함’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qôdesh’는 거룩한 영역에 속하는 사물로 凡俗(범속)한 것과는 구별되는 사물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성의 영역과 범속의 영역 간의 상호불가침적 구별을 유지시켜야 했습니다(민18:32). 고유적으로 거룩한 것, 또한 하나님의 법률이나 종교의식에 의해 거룩하다고 명명된 대상은 범속한 것으로 취급하면 안 되었습니다. 예로 안식일은 거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과 관련된 금지 사항들은, 그날의 독특한 성격을 유지시켜 주고 그 날이 범속한 날로 취급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룩한’ 것을 a{gio"/hâgios라고 했습니다. 즉 ‘신에게 바친’이라는 뜻입니다. 신에게 바친 것은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하다는 것과 성경이 생각하는 거룩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아무것이나 거룩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로 聖火奉送(성화봉송)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귀신들에게 바쳤던 불을 거룩한 불이라고 명명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불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라는 단어를 아무데나 붙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연관이 있을 때만 붙여야 합니다. 관련도 없으면서 聖地(성지)다, 聖人(성인)이다, 聖女(성녀)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Reymond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라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확정적으로 거룩하고, 교회는 그 성화(聖化)가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삶 전체에 표현된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다고 했습니다. 칼빈(Calvin)은 “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하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그리스도께 헌신된 공동체라는 점에서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John Murray는 성도는 확정적인 성화와 점진적인 성화를 소유했다고 했습니다(John Murray, 2001, 289-318). 어떻게 그렇습니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17:15-19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고린도전서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후서6:14-7:1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에베소서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5:25-27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5:23-24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베드로전서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교회의 거룩함은 확정적인 동시에 점진적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확정적인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와 더러움으로부터 급격하게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고, 그 거룩함이 점진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의롭다고 선언하심으로 인해 이제 성화의 과정이 반드시 따라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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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교회의 속성/교회의 통일성(로마서1:11-15)
하나 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교회가 범교회적으로 하나 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교도와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담을 허문다는 것입니다. 교회당의 담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기능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세속화되었다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교회는 하나로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Roman-Catholic은 교황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교황과 그리스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한 성령에 의하여 세례를 받아 한 머리와 한 主를 가진 한 몸 안으로 접붙여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토대 위에 세워진 한 집이 있습니다. 한 목자를 따르는 한 양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불화와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 됨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인내와 사랑을 통한 화합을 요청하는 다양한 호소들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실재(fact)인 동시에 이루어져야할 이상(ideal)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시기를
요한복음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miva) 무리가 되어 한(ei|") 목자에게 있으리라
또한 주님께서 기도하시기를
요한복음17:20-23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바울사도는 그의 오랜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매우 애를 썼습니다.
로마서15:5-6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갈라디아서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린도전서1:10-13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린도전서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2:14-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에베소서4:3-6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빌립보서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골로새서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 되자’라는 슬로건에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저명하다고 하는 목회자들입니다. 이름이 있다고 하는 신학자들입니다. 이름만 대도 금방 알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사탄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합되어 있다고 하면서 실은 연합되어 있지 않은 교회는 하나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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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참된 교회를 유지했는가?(로마서1:11-15)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대행적인 기구입니다. 주님의 몸 된 기구이며,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는 신성한 곳이며, 교회는 죄가 없는 곳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지상에서 어떤 곳보다 치열하게 공격하는 기구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를 유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Robert L. Reymond에 의하면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자 곧 사도적인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교리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타락하는 성향이 급격히 나타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알려진 세계의 많은 지역에 있던 교회들이 순수한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으로부터 급격히 떨어져 나가고 있었는데, 삼위일체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교리 면에서 결함이 있는 견해들을 신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Pelagius적이고 사제 중심적인 관점들을 채택했습니다.
Pelagianism는 영적 구원에서 인간의 노력의 우월성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써 자유로이 선악을 행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란 단순한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의 죄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며 모든 사람에게 원죄가 있다는 설은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나 세례 등 적극적인 가치도 부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이 경건함을 가면으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기도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이러므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참된 교회를 규정할 수 있는 속성들(attributes)을 정의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당시에는 속성을 정의하는 움직임이 교회의 외적인 특성들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도들의 직접적인 계승자인 주교(bishop)가 다스리는 외형적인 기관으로 생각했습니다. 주교들이 참된 사도적 전통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3세기경에 가면 몇몇 교부들은 제도로서 주교구에 강한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Carthage의 주교였던 Cyprian은 “주교들을 사도들의 참된 계승자들이라 했습니다. 주교들을 재촉해서 “주교단이라고 불리는 단체를 형성하여 교회의 일치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곧 교회의 일치는 주교들의 일치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Cyprian에게 신자됨의 시금석은 주교에게 복종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한 복종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원칙은 ‘Extra ecclesiam nulla salus, Salus Extra ecclesiam non est’라는 격언이 되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논문에서 교회를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의 거룩한 총회’ ‘선택받고 의롭게 된 신자들’로 정의했습니다. 어거스틴도 키프리안의 생각을 따라 사도적 권위가 주교직의 계승을 통하여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어거스틴도 성례전적인 은혜를 베푸는 제도적인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Robert L. Reymond, 2004, 1062).
한때는 존경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전혀 존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일부교회들은 교회의 크기가 성공요소로 변해버렸습니다. 교리를 어떻게 하든, 이단들과 야합을 하든, 교회건물이 크면 큰 목사(?)로 여깁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를 유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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