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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를 어기는 자들(로마서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6절과 27절은 바울사도당시에 벌써 만연되어 있었던 성적인 방종입니다. 왜 이런 방종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창조물안에 이미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조물을 신격화시켜 창조주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렸습니다. 이러다보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들을 내버려두셨습니다. 온갖종류의 우상숭배, 성적인범죄 반사회적인 범죄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쌓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대심판때가지입니다. 그때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때는 선과 악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때는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사람들이 확실하게 알 때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배반했던 사람들이 땅을 칙 통곡할 것입니다. 돈만 알고 돈에 환장한 사람들은, 그때 환장한 돈 때문에 통곡할 것입니다. 그때는 배교한 사람들의 대성통곡의 때입니다. 권력 때문에, 명예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두고 대성통곡할 때입니다.
바울사도는 여기에서 당시에 만연되어 있는 방탕한 동성애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악을 경시하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당시에도 로마제국은 성윤리가 땅에 떨어졌었습니다. 현재는 더합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세계적으로 표를 얻기 위해서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나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면에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수면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성애자들이 시위를 하고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분명히 죄인데 죄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레코-로만시대의 성윤리는 더없이 타락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도 성윤리는 더없이 타락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 땅에서 계속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그대로 놓아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보복하셨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덮으려고 하지만 덮어질 수 없습니다. 이미 대심판은 예고 되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서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마3:10).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법칙을 바꾸는 자들에게 그 심판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순리를 어기고 역리하는 자들,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우상을 섬기는 자들, 반드시 보복을 당합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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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형상의 우상(로마서1:18-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써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세상이 거룩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는 가장 가증할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마귀가 좋아하는 귀신들을 섬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월성신이나 사람의 형상, 짐승의 형상, 새의 형상, 온갖 벌레의 형상들을 어떤 의례나 의식에 맞추어서 섬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신성하고 신비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다가 여기에 멈추면 이생과 내생을 망쳐버립니다.
사람들이 왜 우상숭배를 좋아할까요? 우상숭배의 원인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으로부터입니다(롬1:21-23,25). 우상숭배자와의 접촉으로 인해서 우상숭배를 합니다(민25:1-3). 그리고 이방사람들과의 혼인으로입니다(왕상11:6-8). 탐심 때문에 우상숭배를 하게 됩니다(골3:5). 우상숭배를 유익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렘44:15,18-19).
사람들이 우상의 대상으로 삼는 형상은 참으로 쓸데없는 헛것들입니다. 태양, 달, 별입니다(신4:19,왕하21:5). 천사들입니다(골2:18). 동물들입니다(롬1:23). 애굽의 신들입니다(출12:12). 황금 송아지이고(출32:4), 구리뱀입니다(왕하18:4). 그물과 초망이며(합551:16), 새긴 석상들이고(사2:16, 민33:52), 벽에 그린 우상들입니다(겔8:10). 귀걸이나 부적들입니다(창35:4). 드라빔이며(창31:19, 삿18:14, 호3:4), 마귀를 섬기고(신32:17, 시106:37, 고전10:20), 수염소를 섬깁니다(레17:7,대하11:15). 에봇을 섬기는가 하면(삿8:27), 재물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마6:24, 눅16:11). 능력이 없는 인간을 섬기기도 하며(행14:11,28:6), 우상의 형상을 숭배합니다(신4:16-18).
이럼에도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합니다. 아는 형상의 우상에게, 모르는 형상의 우상에게 절을 하면서 섬기고 있습니다. 섬기는 만큼 더 지옥불 한가운데에 들어가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상섬기는 것에는 동서고금이 없고 신분고하가 없습니다. 그만큼 보편화되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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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만한 것(로마서1:18-23)
양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 양심/suneivdhsi"/suineîdesis/쉬네이데시스/conscience는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 Democritos 이래 쉬네이도/suneivdw/‘함께 보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의 Cassius Dio, Strabo, Plutarchos 등 저술가들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들을 회고해 볼 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의거하여 그의 양심이 선한지, 악한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선한 양심은 평강을 누리는데 반해 악한 양심은 양심의 소유자를 사정없이 괴롭혀서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일례는 모친 살해죄를 지은 Orestes의 비극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양심을 자신을 파멸시키는 질병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헬라문헌은 거의 악한 양심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반해 로마인들, 특히 Cicero는 자주 선한양심과 심지어 깨끗한 양심과 가장 좋은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습니다. 양심은 자주 비난과 좌절의 성격을 띠고 나오는 실패와 악에 대한 회고적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에 있어서 한 인간 속에 두개의 자아가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동일한 사물들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세력들 즉 질서를 지향하는 세력과 무질서를 지향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등은 과거의 무질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양심은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이 존재론적인 것일 경우, 자아성찰에 있어서 지식이 크게 작용하는 반면에 그 갈등이 윤리적인 경우에, 그 자아성찰에 있어서 도덕적 양심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후기 스토아(Later Stoa) 학파(Seneca)에서 양심의 회고적 특성은 피타고라스학파(Pythagoreans)의 영향을 받아 약화되었습니다. 양심의 역할은 순리대로 살도록 인간을 인도하고 그의 도덕발달을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양심 속에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방향표지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임무는 여전히 주로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사람의 비판적 항소법원의 임무이었습니다.
LXX역본의 용법에서 명사 ‘쉬네이데시스’는 전도서10:20에서 마음을 번역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양심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가 헬라인들과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가 더 중요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시139편)을 통하여 왔습니다. 책임 있는 행위를 가능케 하였던 이 말씀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신30:14). 선과 악은 이 말씀에 의하여 인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시14: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양심은 자아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조화시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은 자기의 자의식을 탐색하는 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책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그의 율법을 순종으로 준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고통 하는 양심이 실체에 대하여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는 그 본래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인간에게 그의 처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거룩한 재판관의 소리입니다. 양심의 기능은 마음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내적불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창42:21 삼상24:5 삼상 25:31).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내적인 불화와 갈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정죄하고 참회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회개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시51편).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하며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양심은 한 사람 속에서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필로는 로마인 Seneca가 들은 것만큼이나 높이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양심은 자율적 항소 법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형성된 규범적 실체였습니다. 양심의 임무는 ‘유죄를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여 참회케 하는 것이 양심이었습니다. 양심은 일단 깨어나게 되면, 고소자로 등장하여 양심 소유자를 기소하여 죄를 씌우고 수치를 당케 하였습니다. 반면에 양심은 그를 바로 잡아주며 회개할 것을 권면하는 재판관으로서 지시했습니다. 양심은 설득하고 나면 기뻐하고 누그러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계속적으로 그 죄인을 괴롭힙니다. 양심은 자비하신 하나님 품으로 이 죄인을 이끌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수행합니다. 필로의 양심 교리의 구약성경적 기반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양심은 의지와 지식사이의 분열이나 판단과 행위사이의 분열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자아인식’을 의미하였습니다. 즉 양심은 아무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 인식인’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사항을 피력하고 있는데,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 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바울은 ‘쉬네이데시스’에 어떤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우상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연약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임의로 먹음으로써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의혹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C. A. Pierce의 ‘신약성경에서 양심’(1955)이란 연구논문에서 Pierce는 suineîdesis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그릇된 일을 행할 때 느끼는 고통이라는 도덕적으로 나쁜 부정적 의미를 지닌 일상적인 헬라어였다고 주장합니다. Pierce는 이 용어가 양심을 표어로 사용한 고린도 교회를 경유하여 신약성경으로 들어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이 용어가 나오지 않으며 고린도서와 후기 서신들에서 이 단어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절박한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특히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관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양심에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고기를 먹는 관습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양심만이 변함없고 오류를 범치 않는 안내자라는 사상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4:4에서 바울은 ‘나는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는 동사형을 사용하여 양심 그 자체로는 그가 행했을런지도 모를 어떤 비행에서 그를 무죄 방면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양심이 죽었거나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 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동의 옳음과 잘못을 결정하는 데는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기껏해야 양심은 沮止物/저지물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후기 서신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이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예법에 관한 고린도 교회의 긴급한 문제들에 비추어서 양심의 한계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형제는 우상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고 있는 강한 형제의 본을 따라서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 정해진 분명한 행동원칙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연약한 것입니다. 그는 그 고기를 먹고 나서 양심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고전8:7,10,12).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민감하여 동시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양심입니다. 이 dilemma로부터 헤어날 길은 ‘지식’에(고전8:11) 의거한 것입니다. 즉 양심에 의해 고통당하지 않는 “강한” 형제를 모방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고전8:13). 고린도전서10장에서 양심은 다시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양심의 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없었습니다(고전10:27-29). 이 문제는 보다 약한 사람과 그의 양심에 대한 관심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집니다. 신자는 시장에서 무엇이든 사서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식물의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약한 형제가 고기가 우상에 바쳐진 것이었다고 말하면 그것을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이는 고기를 먹는 사람의 양심을 더럽힌다거나 반신반의하는 습관에 젖어 듦으로써 그의 영성을 약화시키는 경우가 아니라 민감한 사람의 양심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양심을 행동의 길잡이라고 부르는 것을 오로지 고통을 피하려는 수단으로만 삼는다면, 양심은 대단히 불완전한 길잡이가 됩니다. 어떤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양심은 지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0:25). 이유는 양심 그 자체만으로는 그 고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오로지 그 양심 밖에 있는 도덕적인 원칙들과 관련하여 효과적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청결한 양심이라 해도 의로움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4:4). 반면 지나치게 예민한 양심은 다른 근거들 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을 뿐인 dilemma로 고통을 당하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8장과 10장). 양심은 끊임없이 무시당함으로 인하여 화인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된 교리와 거짓된 관습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양심이 그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합니다(딤전4:2, 딛1:15). 역으로, 사사기 11장의 입다(Jephthah)에 관한 기사는 지나치게 민감한 양심입니다. 입다는 가장 불경한 결과를 초래할 서원을 하나님께 했습니다. 양심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분장시키는 오직 하나의 부분일 뿐입니다. 양심의 일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우리가 그릇된 일을 행할 때 느끼는 고통처럼 양심은 붉은 경고의 신호등처럼 작동합니다. 양심은 우리 행동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이중 점검자로 일합니다. 양심은 주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작용합니다. 그리고 양심은 교육받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덕법을 범하였을 때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는 수단과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 의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합니다. 도덕적 가치와 원칙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분별력과 합리적인 사고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는 능력과 아울러 좁은 의미의 양심을 포함합니다.
Immanuel Kant(1724-1804)에 있어서 양심은 보통 선악을 판단하는 생득적인 능력으로 여겼습니다. Kant는 그것을 인간의 내면에서의 법정의 의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Kant의 양심론은 양심을 내면의 법정으로 삼는 사상으로 일관했습니다. 영국의 Hutcheson, Shaftesbury 등에 있어서 양심은 도덕감정이었지만, 볼프(Wolff)학파에게 있어 그것은 이성에 기원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Kant는 1760년대 중반까지 영국 도덕감정론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비판기에는 스스로 볼프의 전통에 따라서 이성주의적 입장을 우위에 놓았습니다. 그것이 양심을 내면의 법정으로 삼는 사상이었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법정의 의식이 양심이다” 따라서 “거기서 자신의 생각이 서로 고소한다든지 변명한다든지 한다”. 그리하여 양심은 도덕적 자기의식으로 간주됩니다. 양심이 법정인 한에서 고소하는 인격(원고) 내지 판가름하는 인격(재판관)과 고소당하고 판가름당하는 인격(피고)이 각각 다른 인격이지 않으면 불합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양심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고로부터 보아 다른 인격의 존재가 요구됩니다. Kant에 따르면 양심은 인간의 본질과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감성계와 예지계의 양쪽에 걸쳐 존재하기 때문에 양심도 동일한 존재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해야만 합니다. 예지인(homo noumenon)은 감성인(Sinnenmensch) 내지 현상인(homo phaenomenon)에게 있어 다른 인격이라는 것으로부터 이들 두 인격을 두 계기로 하여 양심법정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객관에게가 아니라 자기(주체) 자신에게 상관하는 관계라는 것으로부터 Kant에 있어서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바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지성입니다. 그 점과 관련하여 지성은 자주 잘못을 범하는 데 반해, 양심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행위를 행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도덕적 판단력’이었습니다. 그 점과 관련하여 양심은 잘못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Kant는 “형식적 양심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양심의 활동은 시간적 질서에 따라서 (1)행위(결심) 이전, (2)행위 중, (3) 행위 후로 나눕니다. (1)은 경고하는 양심입니다. (2)는 원고와 변호사가 등장하는 양심입니다. 즉 가책을 깨닫고 변명을 하는 양심입니다. (3)이 재판관의 판결로서 나타나는 양심입니다. 즉 후회를 깨닫는다든지 마음의 평안함을 깨닫는 양심입니다. Kant에서 양심의 개념은 언뜻 보아 주된 흐름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개념은 도덕법칙이나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의 생각 또는 이성의 사실이라는 사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통합하고 있습니다.
Hegel에 있어서 양심이란 원래 동일한 자기 내부에서의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는 대화적인 구조입니다. 대화의 한편은 개별적인 행위를 직접적인 자발성을 지니고서 실현하는 자기입니다. 다른 한편은 그 행위의 윤리성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자기입니다. 양심의 가책에서는 전자가 재판되는 것, 후자가 재판하는 것입니다. 헤겔은 양심의 이러한 구조에 착안하여 이 구조 자체가 그것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되는 두 사람의 개인 사이에서의 대화를 상호인정론으로서 전개합니다. 요컨대 그는 이러한 상호인정을 행위 하는 양심과 비평하는 양심 사이의 운동으로서 보아가고자 했습니다.
옛날에는 서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주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단지 약간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곡식이나 과일을 훔쳐 먹는 일종의 장난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잃어버린 사람이나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당시 세시풍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의 것을 훔치는 일입니다. 당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그리고 수없이 ‘훔치지 말라’고 마음에서 외칩니다. 왜 그럴까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은 거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심은 하나님의 스파이로서 인간의 감시자이기도 합니다. 양심은 마음속에 있는 목사입니다. 양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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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만한 것 (0) | 2019.02.20 |
하나님을 알만한 것(로마서1:18-23)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워터루(Waterloo/Belgium중부의 마을로서 1815년 Napoléon이 Wellington에게 참패당한 곳)가 하나님이었도다!”라고 관용어 같은 말이 있습니다. Wellington 대신에 Napoléon이 승리를 거두었다면 Europe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최근 세계전쟁의 결말은 결국 역사상의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연합국이 승리하지 않고 추축국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승리했다면, 지금 세계는 어떻게 돌아갈까요? 구 쏘련과 중공 같은 공산국가와 대립했을 때, 이들이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틀러, 무쏠리니, 메이지유신 같은 작자들이 세계를 집어삼켰다면,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은 사람들, 안중근 의사의 심판의 총탄에 이등박문이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강력하고 의로운 국가들에 의해서 고대의 부패한 국가들이 패배했던 사실을 소급해서 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복자도 대개는 사악했지만, 피정복자만큼 그토록 도가 지나칠 정도로 죄악에 꽉 차 있지는 아니했습니다. 시편기자는 제왕과 나라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 있노라고 담배하게 선포했습니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니라”(시 75:6,7/롬13:1). 바울은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오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심이라”(행 17:26, 27)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기독교의 체계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에 관한 하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 나라와 관계하고 계신다고 언급했습니다.
애굽(출9:13-17, 롬9:17, 렘46:14-26)
앗수르(사10:12~19; 겔31:1-14, 나3:1-7).
바벨론(렘50:1-66, 51:1-4), 메데 바사(사44:24-45)
메데 바사와 희랍(단8:1-8, 15-21),
알렉산더 제국이 멸망한 후 일어난 4왕들(단8:9-14, 22-25, 11:5-35)
로마제국(단7:7,2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보다 사악한 나라로 하여금 보다 덜 사악한 나라를 정복토록 허용하시기는 하지만, 결국에 이르러서는 보다 덜 사악한 나라보다는 보다 더 사악한 나라를 호되게 다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합1:1-2:20).
이스라엘은 전쟁만 약3000번을 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강국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조그만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시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해 지니고 있는 신관(神觀)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계하시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던 신관은 특기할만합니다. 온 세계가 다신론(多神論/polytheism)과 범신론(況神論/pantheism)에 절망적으로 빠져 있던 순간에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많은 조상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이고 무한하시며 거룩하시고 자기계시적 하나으로 알았으며, 또 우주의 창조주와 보존자와 통치자로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편만 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는 호되게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를 들어서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다가도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설 때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과 열방에 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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