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새벽강해'에 해당되는 글 26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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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마태복음9:18-26)
지금까지 예수님은 여러 병을 고쳤습니다. 문둥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에 걸린자, 귀신들린 자, 그 외에 여러 병을 고쳤습니다.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한 직원(회당)이 예수님께 와서 절하면서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오셔서 손을 얹으면 살겠습니다(19절). 그 사람의 간청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갔습니다(19절). 그 집에 들어가니까 벌써 장례식을 치루느라 시끄러웠습니다(23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모두들 물러가라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24절). 예수님은 사람들을 내보내신 후에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바로 그 소녀가 일어났습니다(25절). 이러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회당은 장로의 회에 의해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목격도 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 딸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눅8:42). 그러다가 예수님이 그 집에 가는 사이에 죽었습니다. 그 집에서 회당장에게 기별하기를 이제 죽었으니 예수님을 더는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눅8:49-50). 회당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결국 그는 딸과 다시 살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나온 첫 번째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통상 사람들이 죽으면 영혼은 육신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이미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곳에서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분리되었던 영혼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 소녀의 몸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집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은 죽으면 다시 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엘리야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왕상17:23). 엘리사가 죽은 뒤 어떤 시체가 그의 뼈에 닿자 살아난 사람이 있었습니다(왕하13:21). 하지만 수백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죽었었는데 살아 난 것입니다. 숨이 멎어서 장례를 치루고 있었는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납니까?
질병과 죽음은 죄의 산물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생긴 것입니다. 이 질병과 죽음은 인간들이 뛰어넘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사람 앞에서 지금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탄의 위세는 예수로 인해서 접어야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불치의 병들이 나았습니다. 심지어는 죽었던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어둠의 세력들이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감히 피조물이 창조주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 (0) | 2010.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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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 (0) | 2010.02.16 |
제자들의 금식문제 (0) | 2010.02.14 |
마태의 부름 받음 (0) | 2010.02.13 |
중풍병자를 고치심 (0) | 2010.02.12 |
제자들의 금식문제(마태복음9:14-17)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헤어졌다가 모였다가 하는 일입니다. 어제까지는 모였다가 오늘 헤어집니다. 그런가하면 어제까지 헤어졌던 자들이 오늘 뭉치는 일입니다. 정치적인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이합집산 하는 사람들은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 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영원한 적이 없고, 영원한 친구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당들이 그렇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국회에서 멱살을 잡고, 치고받으며 싸웠던 자들이 오늘 같은 정당에 소속되어서 같은 정책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자신들이 비슷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들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기도와 금식하는 것이 우리와 같다고 여기면서 자신들의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서로 등을 돌리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순수한 질문인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집을 비유하면서 금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통상 이스라엘의 결혼은 7일간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이 축제기간 중에 신부의 집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때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더 쉽게 설명하시기 위해서 수선한 옷과 포도주부대를 예로 들었습니다. 새 옷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통상적인 비유를 쓰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친 새로운 것들을 낡아서 달아빠진 형식 안에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지속적인 기쁨과 즐거움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어느 누구도 훼방할 수 없습니다. 항상 혼인집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죽은 종교의식으로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기쁩니다. 기쁨 자체가 불가피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장례식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항상 혼인집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있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 (0) | 2010.0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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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0) | 2010.02.15 |
마태의 부름 받음 (0) | 2010.02.13 |
중풍병자를 고치심 (0) | 2010.02.12 |
사람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8:28-34) (0) | 2010.02.12 |
마태의 부름 받음(마태복음9:9-13)
예수님께서 행로에 마태가 세관에 앉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마태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두말없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9절). 당시의 마태의 직업은 악명 높은 세무서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에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aJmartwlov")이 같이 음식을 들었습니다(10절). 누가 보아도 유대인으로서 소위 품위가 없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들은 악명을 떨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보고 주의를 줄 목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유대인인 너희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상종하는가? 이들의 이 말씀을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에 답을 주셨습니다. 그 답은 예수님 자신은 병든 자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12절). 바리새인들과 당시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13절). 결국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들은 전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자신 이외의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은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바리새적인 사람들을 더 죄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어떠한 것을 의미합니까? 마태 말고도 유명한 세리는 삭개오입니다. 이들은 정말 악명이 높았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턱없이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로마에는 정한 만큼만 보내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착복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 아예 세리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세리들 즉 죄인들과 함께 하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은 믿음이라는 것은 조건 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조건 없이 부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평생을 속죄해도 끝이 없는 죄얼을 주님께서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전에는 마태와 같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 마태보다 더한 사람입니다. 우리역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병든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0) | 2010.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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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금식문제 (0) | 2010.02.14 |
중풍병자를 고치심 (0) | 2010.02.12 |
사람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8:28-34) (0) | 2010.02.12 |
자연을 다스리는 예수님 (0) | 2010.02.10 |
중풍병자를 고치심(마태복음9:1-8)
예수님께서는 거라사 사람들이 거절하시므로 인해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거라사에서 가버나움에 오기 위해서는 다시 배로 와야 했습니다(1).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시자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2)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다고 했습니다. “네 병이 나았다”하시지 않고, ‘네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말씀들은 뜻밖이었습니다. 이에 어떤 서기관이 속으로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참람하다(blasfhmevw)는 것은 ‘중상하다 ’는 뜻으로 신성모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도그럴것이 죄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데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서기관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서기관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어찌해서(iJnativ) 마음에 사악한(ponhrov") 생각을 하느냐고 했습니다. ‘네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죽어 있던 몸이 말 한마디로 살아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는 것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5절).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올 때는 남의 힘으로 왔던 중풍병자가 자신의 힘으로 걸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침상까지 같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런 권세(ejxousiva)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사람들에게 나타냈습니다. 순회하시면서 불치의 병을 고치심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중풍병만 고치시면 될 줄 알았는데, 죄까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몰랐습니다. 과거의 선지자들이 오실 메시야의 모습을 말했을 때 주님을 알아야 했지만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먼저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허물만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해서 그들에게는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판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녜’ 하면 되는데, 딴소리들을 합니다. 자신들의 믿는 것과 자신들의 종교를 내세웁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하면, 모든 종교들이 뷔페식으로 골라서 좋은 곳으로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실은 아무리 많은 종교들이 있어도 오직 두 길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더욱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 성령님을 거절하는 것,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절하는 것이 곧 하나님은혜를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하면 안 됩니다.
제자들의 금식문제 (0) | 2010.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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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의 부름 받음 (0) | 2010.02.13 |
사람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8:28-34) (0) | 2010.02.12 |
자연을 다스리는 예수님 (0) | 2010.02.10 |
제자의 자세 (0) | 2010.02.09 |
사람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8:28-34)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으로 가시려 했습니다(23절). 그런데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24절).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시려하는데 훼방하는 사건입니다. 가다라(Gergeshnov")는 Gadarhnov"(거라사인/Gadarenes)이며, 가다라(gadara;)에서 유래했습니다. 가다라는 트랜스 요르다니아(요단 저편)의 한 도시로 갈릴리 바다의 남단의 동남쪽으로 약 56㎞ 되는 곳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도시들 중의 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와 부근 지방의 주민들은 주로 헬라인들입니다.
거라사에 예수님이 가셨을 때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둘은 무척 사나웠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28절). 이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과 부딪히자 “왜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안에 있는 귀신이 말하게 한 것입니다. 그 주위에 돼지 떼들이 있었는데,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가기를 허락해달라고 주님께 말했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돼지 2000마리가 바닷물로 뛰어 들어가 몰사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거라사 사람들은 재산상의 손실로 인해서 예수님이 거라사지방을 떠나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생명보다 돈을 더 귀중하게 여깁니다. 돼지 2000마리의 값을 현재시세로 친다면 약 8억6천 만원입니다.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떠나주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얼마의 손해가 더 있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떠나가기를 원했습니다.
현재는 인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여깁니다. 용산에서 7명이 죽었지만, 정부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전쟁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억울함을 당해도 그것을 풀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인권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있어야 인권을 찾지, 힘이 없으면 인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도들이라 하는 사람들도 맘몬과 주님 사이에서 맘몬을 고르고 있습니다. 대형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그렇고, 일류를 추구하는 교회들이 그러하며, 금싸라기 땅에 교회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우쭐댐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돈보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보다 귀합니다.
마태의 부름 받음 (0) | 2010.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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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를 고치심 (0) | 2010.02.12 |
자연을 다스리는 예수님 (0) | 2010.02.10 |
제자의 자세 (0) | 2010.02.09 |
열병을 고치신 예수님 (0) | 2010.02.07 |
자연을 다스리는 예수님(마태복음8:23-27)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제자들과 동행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제자는 배에 올랐습니다(23절).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배에 큰 파도가 일었습니다. 파도가 배에 덮이게 되는 무서운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 예수님은 주무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야속하다고 했을지 모르며, 이 상황에 잠이 올 수 있느냐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24절). 제자들은 황급히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해주시라고 했습니다(25절). 그런데 예수님은 일어나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일어나신 후에 바람과 바다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26절). 그러자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야?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다가 만난 풍랑은 지진(seismov")에 의해서 일어난 풍랑입니다. 그 여파로 바다에 큰 파도가 일었습니다. 이 파도로 인한 제자들의 동요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ojligovpisto") 자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믿음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없는 것입니다. “거의 신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 주님께 구하여주시라는 것은 제자도의 훌륭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려워한 것은 아직도 주님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모른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는 것을 보고서 놀란 것은 주님의 정체(identity)에 대해서 잘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태풍이나 폭풍들을 우리가 알기로는 기압의 차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고기압과 저기압으로 인해서 바람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것을 막지 못합니다. 현재도 허리케인이나 태풍으로 인해서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칩니다. 이러한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속수무책입니다. 이러한 재해에 인간들의 대책은 피해예방을 해서 줄이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피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연까지 다스리는 분입니다. 보통 풍랑이 일 때 바람이 그쳐도 어느 시간까지는 풍랑이 멈추지 않습니다. 점점 파도의 높이가 줄어들다가 전혀 바람이 없을 때 바다가 잔잔해집니다. 그것이 자연현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풍랑 멈춤은 즉시 잔잔해졌습니다. 누구도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거의 없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간에 보아왔던 예수님의 기적들을 보아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제자들보다 더 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과거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고 그의 말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신(spirit)이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점점 깨달았습니다. 이전에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지만 이제는 자연까지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비로소 주님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믿음은 주님과 같이 하는 것이며, 그의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믿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심 (0) | 2010.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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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8:28-34) (0) | 2010.02.12 |
제자의 자세 (0) | 2010.02.09 |
열병을 고치신 예수님 (0) | 2010.02.07 |
불치의 병 치료/중풍병 (0) | 2010.02.06 |
제자의 자세(마태복음8:18-22)
예수님은 무리가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18절). 그곳은 가다라 지방이었습니다. 그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좇겠다고 했습니다(19절). 그러나 예수님은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주님은 어디에도 거처가 없다는 것입니다(20절). 또한 한 제자가 주님을 좇는 중에 부친의 장사를 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21절). 그러나 주님은 허락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22절). 두 경우에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서기관의 경우 주님을 좇겠다고 하는 신실성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이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기관은 예수님의 기적과 군중들을 따르는 열광 등을 보고 주님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얻어지는 것이 많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니시는 곳에는 여우나 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동물들은 쉴 곳, 즉 거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거처가 없습니까? 자신의 집이 있었고, 여러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거처할 곳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거처할 집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이 말씀은 은유(metaphor)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시기 때문에 거처할 곳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주님을 거절했습니다(요5:18). 갈릴리는 항상 주님을 내쫓았습니다(요6:66).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주님께서 떠나주기를 간청했습니다(마8:34). 사마리아 역시 주님께서 머무르기를 거절했습니다(눅9:53). 유대 온 땅이 그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마27:23). 하늘까지도 주님을 버렸습니다(마27:23). 그러므로 서기관을 거절한 것입니다.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자기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입니다.
한 사람은 청중 속의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주님을 따르기 원했지만 즉시 준비는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친의 장례를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의 시기를 연기해주도록 간구했습니다. 자식의 도리로서는 최선의 도리였습니다. 어느 봉사보다 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아니다”였습니다. 제자의 삶은 세상의 삶에 매여 있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자의 삶은 세상의 관심에 발이 묶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최고 우선순위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에 있어서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우선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의식주문제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삶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제자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만을 위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마쳤습니다. 제자도가 결여할 때 이미 제자가 아닙니다.
사람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8:28-34) (0) | 2010.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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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다스리는 예수님 (0) | 2010.02.10 |
열병을 고치신 예수님 (0) | 2010.02.07 |
불치의 병 치료/중풍병 (0) | 2010.02.06 |
불치의 병 치료/문둥병 (0) | 2010.02.05 |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심(마태복음8:14-15)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배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장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앓아누웠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나갔습니다. 방금까지 누웠던 사람이 일어나서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이긴 하지만 역경이 그의 가정에도 찾아왔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제자에게는 역경이 절대 없어야 한다고 우리들은 생각하는데 베드로에게도 역경은 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어려움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병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기도 하며, 여러 가지 고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3:14을 보면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기도”했습니다. 같은 책 20:1을 보면 히스기야도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평생을 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다는 아니지만 치료해주십니다. 기도할 때 은혜를 주시고, 병을 낫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고난을 돌보아 주시지 않음으로 주님을 원망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시편42편을 보면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들로서 위안을 받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날들을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많이 받지 못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사랑을 확인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듯한 생각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그러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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