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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의 병 치료/중풍병(마태복음8:5-13)

중풍병도 현재까지 불치의 병입니다. 중풍병도 걸리면 본인을 비롯해서 가족들이 모두 고생을 합니다.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하나가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산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손발 등이 마비가 되어서 식물인간들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 2000년 전의 일이라면 더 고통 받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신의 하인이 중풍 병으로 몹시 괴로워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실만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7:1-10을 보면 그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도 지어주고,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백부장이었습니다. 지배국의 군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예입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끌고도 갈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하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백부장이니만큼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옆의 장로들이 모두 인정하는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부장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는가? 자신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명령하면 듣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권세가 있으신 예수님은 명령만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백부장은 그리스도의 특출하고 분명한 신적인 행동을 듣고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계시된 하나님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계시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많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부장을 예수님은 칭찬부터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의 믿음보다 낫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배척만 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백부장더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때에 백부장이 나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이유는 그리스도예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정신적인 지주로만 삼는 교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가능성의 관계가 아닙니다. 믿음의 관계입니다.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가능성은 이미 넘어선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은 제한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심이 아니라 우리 측의 불신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길을 그리스도에게 길을 터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간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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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의 병 치료/문둥병(마태복음8:1-4)

병(sickness)은 생물체의 전신이나 일부분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병에 걸리면 가벼운 병이나 중병이나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다. 가벼운 감기나 배탈만 나도 사람들은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문둥병에 걸리면 예나 지금이나 불치의 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병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한정된 장소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1874년 병원균을 발견한 Hansen(1841-1912)에 의해서 한센씨병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징벌과 연관된 질병으로 여기거나 죄를 상징하는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이 의심되면 의원이 아닌 제사장에게 가서 병증을 진단받았습니다(레13:8).

일단 문둥병에 걸리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윗입술을 가리며, 타인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야 했습니다. 제사장에 의해 문둥병으로 판명이 되면 많은 제재조치를 받았습니다. 진 밖으로 추방되어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죽어도 격리된 곳에서 장사지내야 합니다. 성직을 수행하거나 성물을 먹지도 못했습니다. 성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에 걸리면 사회는 물론이고 가족과도 격리되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때 한 문둥병자가 나와서 예수님께 절을 하고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eja;n qevlh/")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Qevlw, kaqarivsqhti)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에게 결례대로 문둥병이 나았다는 것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지체하지 않고 성전으로 빨리 달려가야 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제사장에게 자신의 나은 몸을 보이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이 먼저 들어가면 틀림없이 성직자들이 문둥병자를 깨끗하다고 선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속하게 성전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의 문둥병을 낫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막1:41). 문둥병자의 믿음의 요청과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둥병자의 “원하시면”과 예수님의 “내가 원하노니”의 조화와 하나님의 주님의 무한하신 긍휼하심이 문둥병자의 병을 낫게 했으며,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자칭 주관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꼼짝을 못했습니다. 사탄이 이 세상을 얽어매려 했지만, 여자의 후손은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았습니다. 사탄의 나라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입니다. 오늘도 왕으로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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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역(마태복음8:1-9:34)

예수님의 초기 이적들을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다음에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마태는 자료의 배열을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 아니고 주제별로 배열한 것입니다. 초기 이적들에 관한 공관복음서의 기사들을 보면


마태복음8-9장은 여러 가지 기적이 있습니다. 8:1-4/문둥병치료, 8:5-13/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치료, 8:14-15/베드로의 장모의 병치료, 8:16-17/석양의 치료, 8:23-27/ 풍랑을 멈추심, 8:28-34/가다라 사람 치료, 9:1-8/중풍병자를 고치심, 9:18-26/야이로의 딸 치료, 9:20-22/혈루증여인을 고치심, 9:27-31/두 소경을 고치심, 9:32-34/귀신들린 벙어리를 고치심.

마태가 5-7장의 산상수훈과 8-9장의 내용을 연결한 것은 예수님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을 전략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a. 예수님의 천국 가르침과 치료사역 요약(4:23-25)

b. 산상수훈을 주시는 말씀의 메시야(5-7장)

b'. 천국기적을 행하시는 메시야(8-9장)

a'. 예수님의 천국 가르침과 치료사역 요약(9:35-38)

8-9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나라를 침투하여 포로 된 사람들을 구출하는데, 사탄은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혀 사탄은 힘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세상을 정복합니다. 사탄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죄와 죽음을 정복하러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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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마태복음7:28-29)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무척 놀랐습니다. 여태까지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잃었습니다(ejxeplhvssonto). 한동안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지속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놀랐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권세 있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같지 않았습니다. 왜 마태는 서기관들과 예수님을 대조했습니까? 당시의 서기관들은 가르침이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복사하거나 연구하여 가르치는 전문 율법학자였습니다. 서기관은 주로 레위지파에서 나왔으며 세습이었습니다. 왕정시대에 서기관은 국가중요문서를 기록하고 정리하며 보관하는 역할을 했으나 포로기 이후에는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은 율법교사로서 바리새파에 속하며 산헤드린 공회의 핵심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와전된 율법을 가르쳤으며, 분명치 않은 추론적으로 생각해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셨고(요14:6, 18:37),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문제들, 곧 생명과 죽음과 영원의 문제들을 제시하셨으며, 주께서 하신 설교는 체계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고 있듯이 다양한 예화들(5:13-16, 6:26-30, 7:24-27)과 구체적인 실례들(5:21-6:24)을 사용하심으로써 호기심을 자극시키셨습니다. 주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곧 청중들의 영원한 행복에 관심을 가지신 분으로서 말씀하셨고 또한 아버지와 그의 사랑을 지적하셨습니다(5:44-48). 또한 주님은 “권세있게” 말씀하섰습니다(마5:18,26).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그 자신의 내적인 존재에서, 그리고 성경에서 직접 나온 것이었습니다(5:17, 7:12, 4:4,7,10).

서기관들은 성경을 이야기하지 않고 조상들의 유전과 분명치 않은 추론으로 가르쳤고(마5:21), 하찮은 문제들에 시간을 낭비하였으며(마23:23, 눅1:42), 서기관들은 자주 장황한 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의 설교는 자주 바싹 마른 흙먼지 같았습니다. 서기관들은 사랑이 결핍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에게 배우는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 속에 느끼는 중 대한 문제들을 근거를 두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 편에서 행해지는 신념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에서보다는 오히려 자기표현과 강렬하게 추구하는 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질문들을 던지시고 그것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고 고쳐서 하나님의 나라에 데리고 들어가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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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건축자(마태복음7:24-27)

예수님은 “그러므로”(ou+'n)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에는 산상수훈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5:2에서부터 7:23까지의 모든 말씀입니다. 팔복(5:2-12), 세상의 소금(5:13), 세상의 빛(5:14-16), 율법의 완성자(5:17-20), 살인에 대하여(5:21-26), 간음에 대하여(5:27-30), 이혼에 대하여(5:31-32), 맹세에 대하여(5:33-37), 원수사랑에 대하여(5:38-48), 구제에 대하여(6:1-4), 기도에 대하여(6:5-8), 주기도문(6:9-15), 금식에 대하여(6:16-18), 재물에 대하여(6:19-24), 염려에 대하여(6:25-34), 판단하지 말 것(7:1-6), 기도에 힘쓸 것(7:7-12), 좁은 길과 좁은 문(7:13-14), 거짓선지자의 경계(7;15-20), 불법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7:21-23)입니다. 이 말씀이 ‘그러므로’안에 모두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제자들만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5:1)라는 구절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끝으로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두 가지의 건축을 예로 들면서 말씀을 듣고 지킬 것을 말씀했습니다. 집을 짓는데 한 사람은 반석위에 주초를 놓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집 모두 이상 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집을 지은 후에 기후변화가 있었습니다.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큰 바람이 불었습니다. 홍수가 났습니다. 그때 집 지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래위에 지은 집은 무너졌습니다.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을 지혜로운(frovnimo"/통찰력 있는) 사람이라 했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을 어리석은(mwrov"/우둔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이 영혼을 위해서 견고한 집을 지으려면 기초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조심스럽게 경청하고, 그대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두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입니다. 반석위에 주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이 있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건축자 중에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거주하면서는 건축을 아주 잘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끝나고는 모래위에 집을 짓습니다. 바로 멸망당합니다. 즉 영혼을 위한 집, 다음 세상에 대한 집은 전혀 짓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음 세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 세상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결코 다음 세상은 존재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코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지혜로운 건축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람이 불어’와 ‘비가 내리고’와 ‘창수가 나고’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만 닥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닥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초를 예수님의 말씀에 놓고 그대로 행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그 모든 상황들에 안전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위에 집을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냥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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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마태복음7:15-20)

너희는 (그들) 거짓선지자들을 조심하라.(Prosevcete ajpo; tw'nyeudoprofhtw'n) 천국에 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고, 욕을 먹으며,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반대에 부딪힙니다. 그런데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핍박과 박해 등은 주로 교회 외부에서 온다면, 거짓선지자들의 경우는 교회내부의 문제입니다. 딱 부러지게 말한다면 교회외부의 일이지만 교회 밖에서 볼 때는 교회내부적인 문제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진짜를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말합니다. 진짜 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확연한 비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인 하나냐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항거하지 말고 항복해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렘27:1-11). 이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들었을 때에 좋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냐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말하기를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다”고 말했습니다(렘28:1-5). 이 말이 진실이라면 하나냐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이 아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죄 값으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일단 선지자의 흉내를 냅니다. 그리고 짐짓 경건한 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씀이 하나님께로 부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는척 하고, 경건한척 하여 누가보아도 참선지자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항상 말할 때마다 평강을 외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인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순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가 아닌 가짜를 좇다가 신세를 망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을 성경에서는 거짓선지자들(마24:11,24, 막13:22, 눅6:26, 행13:6, 벧후2:1, 요일4:1, 계16:13,19,20, 20:10). 형태상으로는 거짓형제들(고후11:26, 갈 2:4)과 거짓-사도들(고후11:13)과 거짓선생들(벧후2:1)과 거짓연사들(딤전4:2)과 거짓증인들(마26:60, 고전15:15)과 거짓그리스도들(마24:24, 막13:22)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단들이 엄청 많습니다. 이것들이 양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 가운데 늑대들입니다. 늑대는 양을 잡아먹습니다. 즉 양을 잡아먹기 위하여 이빨을 감추고 양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자들을 여간해서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본성을 숨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행실이 다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기독교인들과는 다른 생활을 합니다. 가르침도 다르지만 하는 행실이 마귀의 종인지, 하나님의 종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아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거짓자들(이단들)의 하는 짓들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성경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들은 뱀의 후손들이고, 마귀의 종들입니다. 모두 지옥 불에 떨어질 존재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암적인 존재처럼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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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과 생명의 문(마태복음7:13-14)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넓습니다. 통과하는 문 역시 넓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통과하는 문 역시 좁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넓은 문을 통과해서 넓은 길로 갑니다. 전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많이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통과해서 가기도 하고, 국도를 통해서 가기도 합니다. 또한 지방도로를 이용해서 가기도 합니다. 물론 어느 길로 가도 서울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고속도로를 이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과 문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길이 아닙니다.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 즉 지옥과 천국의 두 길을 대조하는 말씀입니다. 좁은 문(stenh'" puvlh")은 그야말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좁은 길(qlivbw)은 그 상황이 더욱 힘들게 하는 길입니다. ‘협착하여’의 ‘들리보’는 ‘압박하다, 억압하다, 괴롭히다’라는 뜻입니다. qlivbw는 헬라어 문헌에서 ‘누르다, 짓누르다, 압착하여 짜내다, 문지르다, 둘러싸다, 가두어 넣다’이며 비유적 의미로는 ‘괴롭히다, 억압하다, 방해하다, 좌절시키다’라는 뜻입니다.

LXX은 ‘원수’(rx')의 번역어로 사용했는데, ‘괴롭히다, 적대감을 가지고 대한다, 억압하다, 적대하다, 파괴하다’의 의미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들리보’는 사람을 압박하는 상황에 쓰였습니다. 막3:9에서 ‘바짝 에워싼’ 것을 의미했고, 고후1:6에서 ‘환난 받는’의미로 고후7:5에서는 ‘가해지는 고통을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넓은 길과 넓은 문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 길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좋은데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좁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이유는 핍박을 받아야 하고, 모욕과 중상과 비방을 당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해야 합니다. 원수들까지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의무를 져야 합니다. 대개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은혜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배부를 것이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저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단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해당되고 영원에서는 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하나,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결코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어렵습니다. 좁습니다. 그 길을 통과하려한다면 옷이 찢겨지고 살점이 달아나는 길입니다. 이러므로 이 길을 가는 자들은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이 없으면 여간해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통과하면 영생으로 돌아갑니다. 오늘날에는 성경이 생명의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들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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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대접하라(마태복음7:12)

요새는 옛날과 달라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봉사정신으로 궂은일이나 어려운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생활수준이나 국민들의 봉사정신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받고서 봉사한다는 것은 이미 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동에 속한 일입니다.

Jeremy Bentham(1748-1832)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낳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원리를 정립했습니다. 바로 공리주의(Utilitarianism)입니다.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을, 최대한도로 많은 쾌락과 최소한도로 적은 고통이라는 양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의 모든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일을 하면서 충분히 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합니다. 세상적인 대접은 그래서 무섭습니다. 무엇을 주면 꼭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대가성이 있는 것입니다. 뇌물성이 있습니다. 이런 대접이라면 두려워서 받을 수 없는 대접입니다.

정치적인 뇌물이 그렇습니다. 줄때는 몰래 주지만, 대가가 있기 때문에 불리하다싶으면, 전부 진술하게 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대접은 일상생활입니다. 손님을 친절하게 맞아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것은 좋은 풍습이었습니다. 유대사회는 이미 자신들이 나그네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대접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보다 더 강조했습니다.

대접은 권리와 의무가 아닙니다, 타인에 대한 우리들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타인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많이 챙기는 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반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관심도 가지고, 살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이 이후로 닥칠 박해와 출교를 예상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보다 먼저 대접한다는 것은,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우선한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생각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은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대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시대로부터 발생되어 확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부터 모든 것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살고 죽어야 하는 우리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 없습니다. 먼저 남을 대접하는 것, 먼저 남을 생각하는 것, 모두 주님의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공리주의적인 종교들, 공리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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