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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라(마태복음7:7-11)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서 생활필수품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있으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의식주는 짐승들과는 다릅니다. 질이 있는 의식주생활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으로 한다고 해도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의 방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세례/성찬),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구할 것을 요구하시는 주님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하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우리가 부족할 때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곧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너희는 구하라(Aijtei'te). 구한다는 것은 겸손과 필요에 대한 의식입니다. ‘구하라’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응답을 전제하는 믿음이 구하는데에 있습니다.

너희는 찾으라(zhtei'te). 찾는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성경을 읽고 상고하며(요5:39), 모이기를 힘써야 하며(히10:25),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마7:21,24,25).

너희는 두드리라(krouvete).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위에 참는 것을 더한 것입니다. 사람은 문이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하지만 구하는 것도 인내, 찾는 것도 인내, 두드리는 것도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않는 기도는 요행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인내하고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9절에서 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 중에 자기의 아들이 떡을 달라고 했을 때 떡 비슷한 것을 줄 사람이 있겠으며, 생선을 달라고 했는데 생선 비슷한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povso") 하늘에 계신 전능자께서 자기 자식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줄때까지입니다. 응답될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반드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방편을 주셨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자녀 된 우리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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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거부하면 주지 마라(마태복음7:6)

거룩한 것과 진주를 주지 말라(Mh; dw'te). 무엇에게,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발로 밟고 찢어 상할까 염려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지혜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국한시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격 없고 속된 멸시자들에게는 복음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전하지 말라’와 ‘전하라’는 말은 충돌합니다. 더구나 개나 돼지를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 머리에 개나 돼지라고 써있지도 않을뿐더러 어떠한 표식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유대인들 가운데서 거리의 개는 천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개들은 몸집이 크고 흉하게 생겼으며, 사나웠습니다. 이 개들은 떠돌이 개로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는데 음식물 찌꺼기나 쓰레기 더미 주변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개들을 부정하고 더럽게 생각했습니다(잠26:11, 벧후2:22, 계22:15). 그것들은 위협적이고(시22:16,20), 울부짖고 으르렁거리며(시59:6), 탐욕스럽고 파렴치했습니다(사56:1). 아주 천대들 받았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먹히는 것은 사람에게 내린 하나님의 특별한 저주의 한 증표.였습니다(왕하14:1, 16:4).

돼지들은 개와 마찬가지로 천하고 불결한 짐승으로 간주했습니다. 구약성경은돼지를 먹지 못할 부정한짐승들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레11:7, 신14:8).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가증한 것이었습니다. 탕자가 들에 가서 돼지를 치게 한 것은 그의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입니다(눅15:15,6).

우리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이유는 복음이 구원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개나 돼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개나 돼지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즉 복음을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개나 돼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단들이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옳다고 끝까지 우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개나 돼지보다 더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복음이 마이동풍이요, 우이독경입니다. 이들은 전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개나 돼지들(타락한 멸시자들)에게 복음을 금하시는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조롱거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모독하고, 업신여겨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 전하는 일들을 그만두지 않을까이며, 값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모독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까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합니다. 그래서 값이 없는 것입니다. 왜 복음은 값없는 가치를 지녔습니까?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몇 사람도 아닌 수십억의 사람들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가치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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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비판(마태복음7:1-5)

我田引水라는 말은 자기 논에 물 대기라는 뜻으로,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도 아전인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니까 비판이란 단어의 잣대를 들이대어 전혀 비판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못본 체 하며 진실과 거짓, 선과 악에 대한 것을 분별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남들에 대해서 혹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세리는 아주 나쁜 자들이다.” “창기 역시 나쁜 사람들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할 자들이다”라고 조상들의 유전으로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의 혹평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인인 줄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무조건 혹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과 예수님은 이들을 비판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신앙생활을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행하면 천국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판단의 기능을 금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못된 병폐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의 죄만 본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이지 못한 왕이 신하들이나 백성들의 도덕성이 나쁘다고 지적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교통규칙을 날마다 어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준법정신을 외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은 제7계명을 어기면서 성도들에게 그 계명에 충실하라고 하면, 그 말씀이 먹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검찰이나 법관이 깨끗하지 못하면서 남을 재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우리들이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선자가 되면 타인의 잘못은 돋보기로 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은 간과해버립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들은 신앙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소외되어 버립니다. 하나님 편에도 사람들 편에도 설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분별을 하고 비평을 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혹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단들에게는 혹평이상의 비판을 가해야 합니다. 그 외에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판은 바르게 하되 자신도 살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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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6:25-34)

염려라는 것은 인간들이 죄를 지은 이래 지금까지 계속된 인간들을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염려 merimnavw/merimnao는 mevrimn/merimna(불안스러운 두려움)에서 유래한 말로 “염려하다”입니다. merimnao는 고전 헬라어문헌에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돌보다’ 어떤 것을 ‘염려하다’나 ‘주의 깊은 관심을 가지다’. 어떤 것에 ‘집중하거나 열중하다, ~을 얻으려고 노력하다, 분투하다’ ‘어떤 것에 대한 걱정스러운 기대, 어떤 것을 직면하거나 당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염려(걱정)하는 것’ ‘심사숙고하다, 탐문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은 무거운 짐이 가해지면 자신은 무기력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에 처한 것으로 상상합니다. 염려로써 인간은 자기가 당면한 것으로부터 최선을 다하여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5,31,34절).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세 곳 모두 mh(하면 안 되므로)v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절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염려하지 않아야 할 예문을 말씀하십니다. 26절을 보면 공증의 새를 보라하셨습니다. 새는 경작하지 않는데,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르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새들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염려해서 키를 늘린 사람이 있느냐?(27절) 옷 때문에 왜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꽃은 길쌈도 아니하고, 수고를 하지 않아도 옷을 입히신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의 지위와 영광도 백합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은 지금 있는 피조물들에게 은혜를 입히신다는 말씀입니다. 당장 태워질 들풀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데 너희들은 크고 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들은 염려대신 하나님의 나라(basileiva)와 의(dikaiosuvnh)를 찾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람들이 아버지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데 쓸데없는 걱정으로 불안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게 된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못할 때 사실상 걱정합니다. 염려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을 해서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염려라는 것은 사실상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분명히 있는데, 이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믿음으로 생각지 못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에 너무나 집착하지 않아야 할뿐만 아니라, 필요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줄을 믿는 것이 성도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한님의 선하심과 섭리하심을 적극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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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6:24)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는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주인 중에서 한 주인은 미워하고(misevw), 한 주인은 사랑하기(ajgapavw) 때문이고, 한 주인을 귀중하게 여기고, 한 주인을 소홀하게 여기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러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성도들이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하나님(qew'/)이 명사/여격/남성/단수입니다. 재물(mamwna/') 역시 명사/여격/남성/단수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어떤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재물을 포기할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재물에 기울어지면 하나님을 포기할 것입니다. 즉 최고의 것, 자기희생, 열정적인 충성을 두 주인에게 공히 나누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까? Calvin은 제자들이 탐욕을 멀리하여야 할 것을 경고한다 했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부를 숭상할 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소외되어 간다는 말씀을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자신들의 욕심을 동시에 순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 명의 장로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퇴임했고, 한 사람은 재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제대로 했느냐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정권보다도 공정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신대통령들보다 못했고,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신대통령이나 장로들의 대통령이나 money gate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재물(mammon)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313년에 공인되자 교회는 영적인 생명력이 급격히 저하되었습니다. 박해받는 입장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기독교가 정치화되었습니다. 기독교 실업인들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갈수록 영적인 생명력이 둔화되었습니다. 이럴 때 이집크 출신인 안토니(256-356)는 자신의 많은 재산을 팔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누이에게도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가서 평생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mammon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mammon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만큼 영적인 생명력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옛날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사람들, 현재 사람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mammon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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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보아라(마태복음6:22-23)

예수님은 눈을 몸의 등불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라 했습니다(22). 하지만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으로 인해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셨습니다. “성하다”aJplou'"는 뜻은 “천진난만한”이라는 뜻입니다. 나쁘다는 ponhrov"로서 “나쁜 상태에 있는, 사악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병든 눈으로 볼 때는 소경인 상태입니다. 소경이 아닌 상태에서 나쁘다는 말은 일부로 좋은 것을 보지 않는 눈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눈(@yI[')은 “눈, 샘물, 샘”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아인”은 눈 그 자체 이상의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인”은 전체 보는 과정과 나아가 이해하고 순종하는 전체과정을 나타냈습니다(렘5:21). 눈은 지식, 성격, 태도, 성향, 견해, 열정 및 반응을 표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눈은 인간의 내적 생각의 좋은 지표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눈(ojfqalmov")은 구약의 “아인”을 번역하는 말로서 시력의 기관(눈)을 의미했고(눅6:20), 눈의 기능은 형상을 파악하는 것입니다(마6:22-23). 예수님의 말씀은 눈의 도덕적 언급과 더불어 눈이 건전할 수도 있고 건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악하고 시기적인 눈이 있으며(마20:15, 막 7:22),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눈이 있습니다(요일2:16, 벧후2:14). 눈은 범죄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마5:29). 우리에게 있어서 눈은 감각적인 지각이 아니라, 영적인 지각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눈에 빛을 주십니다.

눈에 대해서 예수님은 몸의 등불이라 하셨습니다(마6:22-23, 눅11:34).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라고 했습니다(마7:3-5). 자신의 잘못을 먼저 회개하고 남을 정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범죄한 눈을 빼어 내버리고 했습니다(영적으로/마18:9).

눈을 밝히는 방법으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왕하6:17, 시119:18, 엡1:8). 하나님의 말씀이 눈을 밝혀줍니다(시19:8). 여호와의 지혜로 눈이 밝을 것이라 하셨습니다(전2:14).

우리들은 빛을 받아서 어떤 물체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것을 시사해줍니다. 즉 어떤 빛을 받느냐에 따라서 보여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예로 붉은 빛을 받으면, 우리의 눈이 붉은 빛을 보게 되고, 푸른빛을 받으면 보아야 할 것이 푸르게 보여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보려면, 어떤 빛을 받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이면서 세속적인 것만 본다면 신앙에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어서 마음의 눈을 소홀히 한다면, 바른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확실한 목표에 집중하려면 올바른 목표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의 쾌락만 추구한다면, 기독교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제대로 떠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길 때마다 주의해야 합니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695/예수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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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한 믿음/재물의 안정성(마태복음6:19-34)

19절에서 34장은 재물에 대한 것을 여러 각도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9-21은 재물의 안정성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22-23은 무엇을 보아야 바른 눈인가 하는 것이며, 24은 재물로 인해서 마음이 나누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34에서는 인생사에서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모두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물은 어디에 두어야 안전합니까? 예수님은 땅에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두지 말아야 할 이유로 좀과 동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두어야 할 이유로 좀이나 동록이나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부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Mh; qhsaurivzete uJmi'n qhsaurou;" ejpi; th'" gh'", 너희를 위하여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정어도 oujk이 아니라 Mh;를 사용하셨습니다. oujk은 보통의 부정어입니다. 그러나 Mh;는 “하면 안 되므로”라는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뉘앙스가 있는 단어입니다. 다음으로 긍정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정적으로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재산을 쌓아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땅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재산을 쌓는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하늘의 창고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은 이 땅의 복잡한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들의 관심과 열정을 하늘의 삶을 생각하는데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하나님의 영역을 창출하는 일들입니다.

왜 우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야 합니까? 보물 있는 곳에 우리들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보화들(재물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들도 포함)을 땅에 묶어두는 것은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땅에 재산을 묶어두는 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땅에 묶어두면 일시적인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늘에 쌓아두면 영원하게 됩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중에만 있으면 그 이름조차 성경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궁중을 빠져나왔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보다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축복, 축복하면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보물을 쌓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사람들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보화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썩어질 것으로 썩는데 심지 않고, 썩을 것으로 썩지 않는 곳에 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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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에 대하여(마태복음6:16-18)

금식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금식(nhsteuvw)은 (nh'sti"/먹지 않는)에서 유래한 말로 ‘음식이 없다’입니다.

LXX에서 금식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한 준비로 행하였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에 금식했고(출34:28 신 9:9), 다니엘도 환상을 보기 전에 금식했습니다(단9:3). 금식은 큰 근심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개인적으로 행하여졌습니다(삼하12:16-23 왕상21:27 시35:13,69:10). 금식은 전쟁과 멸망의 위험이 임박해졌을 때(삿20:26 대하 20:3 에4:16 욘3:4-10 유딧4:9,13); 메뚜기 재앙 때(욜1장과 2장); 포로지에서 돌아왔을 때(스8:21-23); 속죄제의 때(느9:1); 그리고 끝으로 죽은 자를 애도할 때(삼하1:12), 국가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금식에는 기도가 수반되었으며(14:11-12 느1:4 스8:21, 스8:23), 특별히 회개의 기도가 따랐습니다(삼상7:6). 금식하는 사람은 애곡하는 자의 자세를 종종 취하였습니다(왕상21:27).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겸허한 자세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금식의 심오한 의미는 사라져 갔습니다. 점차 금식은 경건한 공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이들을 논박했습니다(사58:3-7 렘14:12).

예수님 당시의 자신들의 종교에 열심이었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매주 이틀씩의 금식일을 지키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SBⅡ 242이하). 요한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막2:18).

예수님은 외적 금식을 비난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하는 금식을 비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할 때 독특하게 했습니다. 얼굴을 일부러 씻지 않았습니다.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염을 쥐어뜯기도 했습니다. 물론 금식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고도의 전략을 사용한 것입니다. 남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보여주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야! 정말 경건하구나!” “애통하면서 금식하는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연극(drama)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금식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는 표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의 행위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소위 많은 교회들이 보여주기 위한 신앙행위를 강조합니다. “우리교회는 무엇무엇을 잘합니다.”라고 자랑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아닌 것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습니다. 선행이나 자기수양 등이 하나님이 아시면 사람들은 몰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전시효과도 있어야 하지만, 항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신앙행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면 이미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show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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