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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안식일제도(마태복음12:1-8)
안식일논쟁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주님과 안식일 논쟁을 하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무척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1-2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일언지하에 잘못되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과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할 때 안식일에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었음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전보다 자신이 크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들이 알았다면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토라는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대대로 전수되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선지자들에게, 선지자들은 그 율법을 산헤드린에게 전수했습니다. 전수된 율법은 성서해석을 통하여 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라고 했을 때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할 일들을 정확히 규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세분화시키다보니까 안식일에 밀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먹은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까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한 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이들은 랍비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율법과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의 전통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들의 전통을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성전보다 크신 분이 여기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fact)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은 무죄였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유죄였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정죄하고, 자신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놓았기 때문입니다. 밀을 자른 것은 전혀 노동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범한 것은 오히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바리새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빼버리고 자신들의 잘못된 교리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이들은 자신들만 완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를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 의가 버려야 할 의인데, 이미 사장(死藏)된 의인데 그것을 내세우고 있으니 한심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가 곧 안식일입니다.
여호와의 종 (0) | 2010.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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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안식일 논쟁 (0) | 2010.03.14 |
하나님을 아는 지식 (0) | 2010.03.12 |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결국 (0) | 2010.03.11 |
불쌍한 세대 (0) | 2010.03.10 |
하나님을 아는 지식(마태복음11:25-27)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예수님)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위 명석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숨기고, 순수한 자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했습니다(25절).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26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아는 자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소원대로 계시 즉 말씀을 믿는 자 밖에는 모든 사람들이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27절).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사9:6; 요1:1). 그리고 사람이십니다(마1:18-25, 눅2:5-7). 칼케톤회의(주후451) 이후로 그리스도의 이성교리(二姓敎理)를 공인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세 가지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상에 오시기 전의 영원하신 신분인 ①선재적신분(先在的身分, 일시적 인적 존재의 ②지상적 신분(地上的身分), 그리고 승귀와 영광의 ③천적인 신분(天的身分)입니다.
선재적인 신분(요1:1-3)은 이 땅에 성육신하기 이전의 신분으로 제2위신 성자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의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비하의 신분이란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적위엄을 포기하시고 잠시 종의 형체로 인성을 취하신 신분입니다. 이것은 최고 율법수여자이신 분이 율법의 요구와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최고의 율법 수여자이셨던 분이 그의 백성을 위해 언약적이고 형벌적인 의무들을 면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율법 아래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는 법적으로 우리의 죄들에 대해 책임을 지셨습니다. (1)성육신 (2)고난 (3)사망 (4)장사 (5)음부에 내려가심입니다.
승귀의 신분(昇貴身分)이란 신인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시고 율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신 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선하신 기쁨에 참여하며, 이에 합당한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오르신 것입니다. 승귀는 부활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순수하고 겸손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무언가를 믿고 있기 때문에 믿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을 귀가 완전히 막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뜻대로 해야 영생을 얻습니다.
계속되는 안식일 논쟁 (0) | 2010.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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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안식일제도 (0) | 2010.03.13 |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결국 (0) | 2010.03.11 |
불쌍한 세대 (0) | 2010.03.10 |
세례요한의 질문 (0) | 2010.03.09 |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결국(마태복음11:20-24)
어떤 지역보다 많은 은혜를 받은 지역이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예수님이 책망(ojneidivzw)하셨습니다(20절). 그 지역들이 대표적으로 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였습니다. 이들 지역은 예수님이 기거하는 곳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어떤 지역보다 은혜를 많이 받은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지역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하신 말씀은 후에 반드시 그 지역이 회개치 않으면 멸망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지역을 두로와 시돈지방과 비교하셨습니다(21절). 두로와 시돈은 거만하며, 돈에 미친 자들입니다. 잔혹하게 유대인들을 노예로 팔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베풀었다면 벌써 회개했으리라는 것입니다. 가버나움, 벳새다, 고라신 등의 지역은 주님께로부터 특권을 누리면서도 전혀 회개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판 날에 오히려 두로와 시돈이 견디기가 훨씬 쉬우리라는 풍자를 하십니다.
가버나움이 과연 높아질 것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가버나움이 하늘까지 높아지기를 바라지만, 음부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가버나움에 베풀었던 권능을 소돔에게 베풀었다면, 아마도 오늘까지 소돔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들 지역이 매우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마땅히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전혀 회개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후기에야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기거하시면서 어려운 사람들이 오는 대로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을 위해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의 세상을 위해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행위라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병은 고치면서 그보다 귀한 것은 소홀하게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잠깐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영원은 끝없음입니다. 시간상으로 봐서 어떤 것에 투자를 해야 할지 쉽게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미래세상은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육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도록 장치를 하셨는데, 곧 성경입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에 인생을 보이게 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죽음이 오기 때문에 반드시 회개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인생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척이나 안타깝더라는 것입니다.
심판은 무엇입니까? 판결입니다. 어떤 사람을 놓고서 행적을 살펴 그에 상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언제 받습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이미 받습니다. 그리고 대 심판 때 더욱 가혹한 심판을 당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해서 고집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면 그 영혼은 영원히 하나님께 배척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안식일제도 (0) | 2010.0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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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0) | 2010.03.12 |
불쌍한 세대 (0) | 2010.03.10 |
세례요한의 질문 (0) | 2010.03.09 |
계속된 갈릴리 사역 (0) | 2010.03.08 |
불쌍한 세대(마태복음11:16-19)
예수님은 이 세대를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애석해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고집은 세서 사는 길을 알려주어도 듣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조금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살 길을 찾지 못함에도 마치 찾은 양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창조하셨던 주님으로서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결혼놀이와 장례놀이 하는 아이 같다고 비유했습니다(16절).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며 슬퍼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17절).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해서 요한을 먼저 보냈는데 요한이 최저음식을 먹으니까 귀신이 들렸다 했습니다(18절).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과 같지 않아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며, 나쁜 사람들과 친구를 하는 사람이라고 폄하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시장에 아이들이 많이 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시장에서 결혼식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했습니다. 이때는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이때쯤 되면 아이들이 지쳤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 일부는 결혼식 놀이를 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그렇게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들은 마음이 변해서 그러면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근거해서 사람들이 요한의 애곡에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메시지로 회개하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왔더니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대는 요한의 애곡에도 가슴을 치지 않고 나의 피리 소리에도 춤을 추지않는 세대라고 평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복음을 외쳐도 전혀 듣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맞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옳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절대적으로 맞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불쌍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놀이’를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의 미래 세상에 대해서 ‘My Way’를 외쳐서는 안 됩니다. 피리를 불 때 춤을 춰야 하고, 곡을 할 때 슬퍼해야 합니다. 즉 주의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이 실수하더라도 복음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My Way’를 지향할 처지가 아닙니다. 미래 세상에 대해 확신이 없으면서 큰소리 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내 앞에 있을 때 바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0) | 2010.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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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결국 (0) | 2010.03.11 |
세례요한의 질문 (0) | 2010.03.09 |
계속된 갈릴리 사역 (0) | 2010.03.08 |
메시야에 대한 반응들 (0) | 2010.03.06 |
세례요한의 질문(마태복음11:2-15)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의견들이 많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감옥은 헤롯궁전의 한 부분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제자를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왜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까? 이것은 세례요한의 실수였습니다. 헨드릭슨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이해하기를 형벌과 멸망을 베푸실 자로 나타냈습니다(마3:7,10, 눅3:7,9). 그러나 요한이 놓친 것은 그가 예언한 멸망이 현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성취되리라는 것을 놓쳤습니다. 즉 요한은 현재와 미래를 보지 못한 것이라 했습니다. 권성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칼빈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그가 바로 메시아이심을 확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천둥처럼 사람들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대체적으로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면 세상이 심판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날’ 즉 ‘여호와의 날’은 ‘멸망의 날’로 생각을 했습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기를 아마도 세례요한보다 못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 같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으며, 계명을 어기는 사람같이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약간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그만큼의 이적을 베푸는 분이라면 능히 로마도 제압하고 불법을 과감히 제거해야 하며, 로마의 식민정권을 해방하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의한 정치인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이사야35:5과 61장의 일부를 인용하여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가 도래하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선지자들이 증거 했던 말들입니다. 누구보다 이것을 잘 아는 세례요한이었지만 잠간 실수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실족(skandalivzw)을 지적하시면서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했습니다. 즉 메시아를 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침노한다는 말은 세례요한 때부터라고 하셨는데, 힘이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천국을 빼앗지 못한데 반하여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을 침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세례요한의 영향력은 크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예수님을 알기를 윤리적인 삶이나 말씀하고, 기복적인 신앙만 말씀하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들어야 한다는 비밀의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결국 (0) | 2010.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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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세대 (0) | 2010.03.10 |
계속된 갈릴리 사역 (0) | 2010.03.08 |
메시야에 대한 반응들 (0) | 2010.03.06 |
예수님의 명령/주님을 영접하는 복 (0) | 2010.03.05 |
계속된 갈릴리 사역(마태복음11:1)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여러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저희 여러 동네(갈릴리)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떠나셨습니다(1절). 요 몇 년 사이에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이유가 여러 가지입니다. 생계 때문이 아니고, 악성루머, 또는 사회에 대한 이슈에 대한 죽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공통적인 것은 도저히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회에서 견디기 어려워 생을 마감하면 괜찮을까? 성경은 자살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1.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삼손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 스스로 죽었습니다(삭16:29-30). 블레셋에 잡혀 있을 때 블레셋을 죽이기 위해서 자살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죄로 인해서 자살했습니다. 시므리는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목숨을 끊었습니다(왕상16:18-19). 굴욕과 반역자로 죽는 것을 면하기 위해 아히도벨은 자살했습니다(삼하17:23). 자신의 한 일을 후회로 인하여 유다는 자살했습니다(마27:3-5, 행1:18).
2. 자살한 사람들은 아비멜렉(삿9:56), 삼손(삿16:29-30), 사울과 그의 병기 든 자(삼상31:4-5, 대상10:4-5), 아히도벨(삼하17:23), 시므리(왕상16:18), 유다(마27:5, 행1:18)입니다.
3. 성경에서는 자살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9:6). 우리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고전6:19), 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출20:13). 때가 되면 주께서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4:6-8, 18).
4. 자살을 원했던 사람들을 보면 유다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렘 8:3). 모세도 죽음을 원할 때가 있었습니다(민11:15). 엘리야 같은 대선지자도 죽기를 구했습니다(왕상19:4). 욥이 환란에 처하여 죽기를 간구했습니다(욥3:6-11,
7:1-3, 15-16, 10:1). 요나가 육체의 고통을 당함으로 죽음을 원했습니다(욘4:8).
삶의 여러 정황이 우리들을 힘들게 합니다. 죽어 버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만큼 심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받음으로 그것을 이기지 못해서 고금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살을 좋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살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구절은 살인하지 말라(출20:13)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목숨이나 내 목숨을 끊는 것은 살인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똑같이 공범들입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잔인하고 못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귀한데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은 극악한 살인자들입니다. 자살을 한 사람도 잘못이겠지만, 자살로 몰고 간 사람들이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불쌍한 세대 (0) | 2010.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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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질문 (0) | 2010.03.09 |
메시야에 대한 반응들 (0) | 2010.03.06 |
예수님의 명령/주님을 영접하는 복 (0) | 2010.03.05 |
예수님의 명령/주님께 합당한자 (0) | 2010.03.04 |
메시야에 대한 반응들(마태복음11:1-12:50)
1. 배척의 시작 11:2-30
가. 세례요한에 대한 배척 11:2-15
나. 친척들의 배척 11:16-19
다. 고라신,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배척 11:20-24
라. 내게로 오라 11:25-30
2. 바리새인들의 배척 12:1-50
가.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12;1-8
나. 안식일의 병고침에 대한 논쟁 12:9-13
다. 바리새인들의 암살 음모 12:14-21
라. 바리새인들의 성령모독 12:22-37
마.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 12:38-45
바. 예수와 참 동역자 12:46-50
세상의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서 너무나 몰랐으며,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자신들을 지으신 주님을 모른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1장과 12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를 보내려고 교육을 시키신 후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지 않은, 반응들입니다. 12장의 반응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적대의 반응입니다. 11장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그분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을 장터 아이들 비유를 통해 다루고,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표적을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을 다룬 다음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천국 메시아를 수용한다고 하시면서 메시야의 초청으로 끝냅니다. 12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이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은 것을 계기로 유대인들과 안식일논쟁이 벌어진 사건부터 다룹니다.
메시아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11장은 불수용의 반응을 지적한 다음 메시아에게 겸손하게 나아오는 것이 바른 반응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12장은 적대의 반응을 지적한 다음 메시아가 전하신 성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기로 마음먹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자들은 도무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습니다. 바로처럼 망할 때까지 계속합니다. 마치 악에 중독된 사람들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질문 (0) | 2010.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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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갈릴리 사역 (0) | 2010.03.08 |
예수님의 명령/주님을 영접하는 복 (0) | 2010.03.05 |
예수님의 명령/주님께 합당한자 (0) | 2010.03.04 |
예수님의 명령/신앙고백 (0) | 2010.03.03 |
예수님의 명령/주님을 영접하는 복(마태복음10:40-42)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제자들/성도들)들을 영접(decovmeno")하는 자 곧 받아들이는 자는 나(예수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40절). 뿐만 아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받아들이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며,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받아들이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41절). 또한 어떤 사람이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적은 자(하찮게 여기는 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는 그 사람이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2절).
제자들이 가는 길이 꼭 핍박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활동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복음이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자주장사 루디아나 바울사도가 갈 때마다 자신의 집을 기거하게 하고, 자신의 집을 교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보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로 알고 선지자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했는데, 선지자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대우하고 예우한 사람이 선지자가 받는 상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의인을 대접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어떤 하찮은 사람에게 제자의 이름으로 정말 하찮은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다하더라도 보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신분고하를 무척이나 따집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를 철저하게 따집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전반에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는 상대적인 약자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 세상입니다. 현재 용산참사가 왜 일어났습니까? 인권을 생각하지 않은데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데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가난한 사람들을 마녀 사냥하듯이 쫓아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의 특색입니다.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특성은 엘리트들은 엘리트대로 살기를 바라는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보다 사람들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를 돕는 자들도 보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주님의 이름으로라든지, 제자들의 이름으로라든지 하나님의 일에 관련된 일에는 반드시 보상을 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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