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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Pavter hJmw'n oJ ejn toi'" oujranoi'": 사람이 하나님을 모두 이렇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만 부를수 있는 호칭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든지, 안했든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만의 특별한 권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의 특별한 권리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것으로 묘사함은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떤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도 바다도, 우주가 모두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태양계도, 은하계도, 아주 먼 은하군단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온 우주와 온 누리가 그분의 섭리 안에 들어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과 같이 종교가 다른 지역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칩니다. 하나님의 영향력은 어디에도 미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공간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더 섬겨야 하며 경외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합니다. 그분의 엄위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말할 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무조건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며,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유기를 받고, 죽어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에베소서3:14,15을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살든지, 영원히 멸망을 당하고 있든지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왕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아버지와 자녀관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친밀함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와 무한히 가까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란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겠다는 친밀함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무한하게 있음을 나타내고 무엇이든지 간구할 수 있는 근거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알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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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3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1 |
올바른 기도 (0) | 2010.01.10 |
바른 구제 (0) | 2010.01.09 |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의 기도”는 모형적인 기도였습니다. 주기문은 공동기도문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모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 분 | 기 도 | 내 용 | 의 미 |
서언 | 기원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하나님의 성호를 부름 |
하나님께 관한기도 | 제1간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하나님 이름이 찬양받기를 간구 |
제2간구 | 나라이 임하옵시며 | 천국이 속히 이르기 원함 | |
제3간구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간구함. | |
인간에 관한기도 | 제4간구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일용할 양식을 간구함. |
제5간구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죄 용서를 간구함. | |
제6간구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유혹에서 구원을 간구함. | |
결 언 | 송 영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기도의 응답을 간구함. |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간구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섯 간구들(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간구합니다. 첫 세 간구는 아버지의 이름과 그의 나라, 그의 뜻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세 간구는 일용할 양식, 죄용서, 악한 자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들을 위한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사 세 간구와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를 위해서 세 간구인데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다섯 번째 · 여섯번째 간구), 우리의 현재의 필요를 위해서 네 번째 간구,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여섯 번째 간구입니다. 우리들의 것만 아니라 형제들의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도문에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돈이 필요 없는 어떤 대형교회는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영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상당히 신령한 것 같은 말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을 초월한 것 같은 말입니다. 자신들은 돈이 있을 만큼 있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처럼 설교하지만 실상은 틀렸습니다. 기도문부터 매일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육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양식과 용서를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하라 하셨습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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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2 |
올바른 기도 (0) | 2010.01.10 |
바른 구제 (0) | 2010.01.09 |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 2010.01.08 |
올바른 기도(마태복음6:5-8)
신앙이란 사람 개개인들의 살기 위한 행동과 마음가짐입니다. 즉 신앙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본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행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도 역시 ‘보이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이 필요해서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과시형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은 기도의 시간을 정해두었습니다. 다니엘 같은 경우는 오전과 오후와 밤에 기도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서는 이 기도시간을 맞추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여건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회당이나 거리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 어디서나 기도를 하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들은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을 택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정죄했습니다. 이미 그러한 행동으로 이들도 자기들의 상을 사람들로부터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신앙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은밀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하셨습니다.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입니다. 기도실을 따로 두고 기도했다고 광고를 하면 바리새인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생각과 마음의 자세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또한 화려한 美辭麗句(미사여구)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미사여구가 아니라도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외식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자꾸만 나타내려고 합니다.
오늘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신을 나타내려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이나 했다고 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교회가 이런 것은 세계제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간증하는 사람들 등으로 교회는 점점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거의 축복 일색이요, 세속화된 과시들이 너무나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버린 것들을 주워서 그것을 보석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을 좀먹고 있습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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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1 |
바른 구제 (0) | 2010.01.09 |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 2010.01.08 |
원수를 대하는 태도 (0) | 2010.01.07 |
바른 구제(마태복음6:2-4)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동을 지적하면서 그 예로 구제와 금식,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가 신앙의 척도는 아닙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예로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절대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구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했습니다. 내가 구제한다고 나팔을 불어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미 이들이 구제한 상을 다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외식(uJpokrithv"/휘포크리테스)란 원래 극장가에서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즉 연기자가 마음에도 없는 것을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기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악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실제 행동이 아닙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위해서 배역이 맡겨졌을 뿐입니다. 선한 역, 악한 역이 맡겨져서 그대로 할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빵이 필요한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당시에 구제는 각자 능력껏 구제 기금을 부담하는 “종교적인”단체에 의해서 했습니다. 이 구제기금은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보충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지를 위한 기부금이 회당에서 공개되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공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으로 구제를 위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내용은 없고, show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상할 근거를 남겨두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그들은 주는 체 하였으나 실상은 받고자 했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구제는 다른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하느냐? 자기 자신이 구제를 하고도 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허영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5위 안에 드는 재벌들이 연말연시에 기부를 할 때 겨우 1억을 하면서 방송에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제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월드비전이나 유니세프 등의 구제가 나팔을 부는 구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난민들인 불우한 사람들이 구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제할 마음은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구제하는 척은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구제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구제, 자기가 구제를 함으로 영광을 가로채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연극 같은 구제는 본인에게도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조차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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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기도 (0) | 2010.01.10 |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 2010.01.08 |
원수를 대하는 태도 (0) | 2010.01.07 |
보복에 관하여 (0) | 2010.01.06 |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마태복음6:1)
5장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유대의 랍비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해서 가르쳤습니다(5). 살인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21). 사회와 가정문제인 간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27). 이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31). 서원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33). 원수 갚는 것에 대해서 가르쳤으며(5:38), 이웃과 원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쳤습니다(5:43). 조상들의 유전과 랍비들의 가르침으로 가르쳤지만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참신앙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참 신앙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6장부터는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를 예수님이 대조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의를 행하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전시하기 위한 의는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한 의가 아니라 꾸밈없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점에서 잘못 행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전시효과만을 노렸습니다. 모든 행동이 계산된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과 주의와 칭찬만 받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행동으로 인해서 상(misqov"/보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받으면(言語로라도), 하나님께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말로라도 보상을 받으면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을 말살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의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참 신앙적인 마음이 없이 외식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진정한 의는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행위만 남았는데 그것이 신앙처럼 정형화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展示效果를 굉장히 노립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향상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려고만 하고,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득을 보지 못하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실적을 체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어디를 어떻게 도왔네, 어떤 교회를 돕고, 어떤 단체를 돕고 있네, 하고 광고하면 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상을 기대하고, 하늘의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상은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세상의 상보다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원수를 대하는 태도(마태복음5:41-48)
유대인들은 이웃을 동족에게만 국한시켰습니다. 개종한 사람들도 이웃의 범위에 넣었습니다. 그 외는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원수였고, 죄수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웃은 사랑하고(ajgapavw), 원수는 미워하라(misevw)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한 사람에게 모두 햇빛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비 또한 구분하지 않고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끼리 사랑하면 무슨 상(misqov")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리들도 자신들끼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만 문안(ajspavzomai)하면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이와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같이 온전(tevleio")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분류하는 장벽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들의 지파는 열두 지파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와 베냐민 지파여야 했습니다. 같은 이스라엘이라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치지 않았습니다. 아예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리나 창기를 가장 더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국경 넘어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웃을 확대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이웃이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도 저주를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였습니다.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똑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면 타국으로 영토가 정확합니다. 도경계를 넘어 살면 호남이냐 경남이냐 하고, 학교출신별을 따집니다. 민족, 혈연, 지연, 학연, 당파 등이 세상의 발전을 막고 있습니다. 어쩌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원수보다 더 멀리 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패를 갈라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좌파다 우파다 교회가 나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생각을 너무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원수관계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원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 났다고 네편, 내편 가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의 국제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나라에만 국한시키려 했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원자이지, 유대인만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복에 관하여(마태복음5:38-42)
전자공학도였던 이란 여성 아메네 바흐라미(31)는 5년 전 커다란 갈색 눈 양쪽을 모두 잃었습니다. 아름답던 얼굴도 흉측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자신을 stalking하던 남성이 청혼을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얼굴에 뿌린 황산 때문입니다. 20일 CNN방송에 따르면 ‘바흐라미’는 2002년 대학에서 알게 된 ‘마지드 모바헤디’의 구애에 2년간 시달렸습니다. 그는 수시로 그녀에게 매달리거나 협박하며 만남을 요청했고, “결혼 요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2004년 11월 어느 날, ‘바흐라미’는 퇴근길에 ‘모바헤디’로부터 황산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쥐며 울부짖었지만 때가 늦었습니다. 얼굴은 물론이고 손과 팔에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바흐라미는 법정에서 “내가 당한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그의 두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슬람 샤리아법은 가해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되갚음을 해주는 방식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이란 법원은 ‘바흐라미’의 요구대로 ‘모바헤디’의 눈을 멀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이 3일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습니다.
동상동해법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일반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법입니다. 출애굽기 21:24,25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24:20의 “파상은 파상으로”, 신19:21의 “생명은 생명으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언뜻 생각나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일을 억제하기 위해서 정해 놓으신 민사법정의 율법입니다. 구약성경은 “네가 부당한 일을 당하였거든 언제라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라” 는 뜻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네가 직접 보복할 것이 아니요 공적으로 공의가 시행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에 호소하여 개인적인 보복과 분풀이를 정당화했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하신 말씀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뺨을 치고자 하는 대적의 의도도, 나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것도,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것도, 내게 꾸고자 하는 의도도 모두 예수님께서 당시의 관습된 것들을 깨트리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대적하면 천국의 자녀들은 보호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에서는 惡과 毒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악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멈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우고 보복하는 것보다 참아야 하고 양보해야 하며, 봉사와 희생이 어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새 흔히 서울의 어떤 대형교회들 목사들 말처럼 교회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의 삶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보복금지나 무저항주의의 삶이 아니라 악으로 선을 이기는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 2010.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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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대하는 태도 (0) | 2010.01.07 |
맹세에 관하여 (0) | 2010.01.05 |
이혼에 대하여 (0) | 2010.01.04 |
간음에 대하여 (0) | 2010.01.03 |
맹세에 관하여(마태복음5:33-37)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맹세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머리로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스냐? 노냐? 확실한 의사표시를 하라고 했습니다.
레위기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수가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신명기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남을 악담하고 험담하는 것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말을 신중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을시에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에 맹세의 법이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명령’이 ‘헛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를 주께 지키라’로 변질되었습니다. 원래 맹세는 서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관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사이의 맹세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금하심으로 구약의 맹세를 보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으로 맹세하거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게 맹세하는 것을 덜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로, 땅으로, 예루살렘으로, 성전으로, 제단으로 맹세하였습니다. 즉 덜 중요하기 때문에 차등을 두고자 함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구속력이 있는 맹세, 구속력이 덜한 맹세, 구속력이 전혀 없는 맹세로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성전이나 제단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기를 하는 사람들은 진짜처럼 행하려 합니다.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원칙일진데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화자를 믿게 하려고 맹세를 끄집어냅니다. 맹세하는 대신 철저하게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모든 맹세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맹세를 금하시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의 맹세, 지키지도 않으면서 남발되는 맹세를 하지말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거짓과 속임수가 없는 신실한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약속들을 남발하는 것이 아닌 진실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