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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대하여(마태복음5:31-32)

오늘날 가족사에 이혼만큼 그 수치가 많은 건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19세기부터 국제에 문을 연 이후로 가장 외국의 영향을 받은 것 중의 하나가 이혼입니다. 이혼은 지구상에 결혼이 생긴 이래로 가장 역사가 깊은 가정사중의 하나입니다. 최근에도 삼성의 이재룡 씨와 임세령 씨의 이혼은 위자료가 5000억원이라는 데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예인들은 끊임없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민영-이찬, 명세빈, 이혜영-이상민, 김국진, 채정안, 장호일, 지누-김준희, 김진표, 이승환-채림, 오현경, 신은경, 고현정 등 이외에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이혼을 쉽게 합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사람을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즉 mind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31절을 보면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아내가 싫어지면 이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주기만 하면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탈무드에는 남성은 원하는 수만큼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탈무드법에서는 부부가 이혼하려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Shammai학파와 Hillel학파 간에 신명기24:1에 대한 해석상의 이견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이들은 “수치스런 일” ‘unseemly thing’이란 ‘사물의 적나라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Shammai학파는 이것을 남편은 아내에게서 자기에게 불충실한 것을 발견한다면 이혼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Hillel학파는 ‘못마땅한 것’ ‘anything unseemly’으로 해석하여 ‘아내는 음식만 망쳐놓아도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R. Akiba는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했을 때 이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혼에 대한 말씀은 건전한 가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성스러운 것으로 자유롭게 풀어지지 않도록 아름다운 끈으로 묶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이혼사유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혼인으로 맺어진 자기 아내가 이혼 후에 다른 사람과 맺어짐으로 해서 간음하게 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현재의 도덕적관념의 해이에 대한 상태를 반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있는 자를 질책하시고, 무죄한 자를 변호하시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존엄성과 불가침성을 지지하셨습니다. 당시의 잘못된 결혼에 대한 관념을 단번에 무너뜨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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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에 대하여(마태복음5:27-30)

우리나라의 헌법은 前文과 10장 130조와 부칙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헌법에서 정하는 규정들은 모두 행위이지, 생각들이 아닙니다. 내가 살인을 해야겠다 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행위의 살인만 처벌을 받습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역시 간음을 직접 행한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했습니다. 마음으로 아무리 간음을 해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간음(moiceuvw/commit adultery)은 moicov"(간음하는 자, 간부)에서 유래했으며, ‘모이큐오’는 ‘여자를 유혹하다, 강간하다’로 중간태에서는 ‘유혹을 당하게 하다’ 수동태에서는 ‘간음하도록 유혹받다’라는 의미입니다. 비유적으로는 ‘-에 불순물을 섞다’입니다. 간음은 주전2000년경부터 법률에 이미 처벌받았습니다. 아내에게는 모든 형태의 혼외 성관계가 금지되었습니다. 아내는 가족과 씨족의 총화에 대한 진정한 보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음을 행함으로써 아내는 자신의 결혼을 깨뜨리고 씨족 전체의 총화를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유부녀와 성관계를 가질 때 즉 다른 사람의 질서를 깨뜨릴 때만 간음죄로 인정했습니다. 남자는 첩을 둘 수 있었으며, 창녀와 성관계를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헬라와 로마 법률하에서 여자의 경우에 간음은 중벌로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결혼윤리는 점차 완화되었습니다. 도시, 항구들, 그 중에서도 고린도에서 매춘이 성행했습니다. 동방의 사교는 종교상의 매춘을 채택했습니다. 여사제와의 성관계는 제식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신성에 참예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히에로스 가모스(신성한 결혼)라는 말로 일컬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간음하지 말라’(ouj moiceuvsei")는 말을 들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행동에 옮겨진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도 내면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마음의 간음 금지된 대상을 열망하는 모든 욕심을 금지하라고 하십니다. “음욕을 품는다”는 말은 “음욕을 품기 위해서”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이고 정당한 성생활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금지된 성(음란·호색)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29절30절을 보면 그 처벌내용이 나오는데 과장법을 사용하십니다. 즉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죄가운데로 유혹하는 것들은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죄로 인도하는 것들은 반드시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사회적인 사악한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신자들은 맹렬하게 싸워야 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몸은 주님께서 값으로 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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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대하여(마태복음5:21-26)

예수님께서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사랑’에 관하여 ‘그러나 나는’으로 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5:22,28,32,34,39,44).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라는 말을 자칫하면 “모세와 조상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보아서 구약성경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옛사람들’이란 다른 사람들입니다. 후기 유대문헌들에서 보면 힐렐과 샴마이 등은 이스라엘에 유명한 랍비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옛선조’로 불렀습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구전적으로 해석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을 ‘옛사람들’이라 했고, 성경만큼 신봉했습니다.

첫 번째로 살인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저희들이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말하지 아니하고 유보하여 두거나 강조하지 않은 이면에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희들이 조상의 유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완전히 제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살인의 원인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제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예가 22절에 있습니다. 형제에게 분을 내고, 형제를 욕하는 것까지 지옥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즉 살인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들 곧 이웃들에게 분을 품고, 욕하는 것도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살인의 원인까지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살인만 죄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살인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드시는데 살인할 마음을 품고 제단에 예물을 드려서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분을 삭이고, 화해를 한 다음에 예물을 드려야 받는다는 것입니다. 송사를 받은 사람은 혐의가 있기 때문에 그 혐의를 벗으려면 송사를 건 사람과 급히 화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재판정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재판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살인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인을 하고, 공권력을 동원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책임자들도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뺏고도 잘했다고 합니다. 파렴치한들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더구나 죽은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잘 살지도 못하고, 공권력에 의하여 쫓김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공권력이 그들을 죽였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의 정치마당에서 살인이 저질러졌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외형적인 것에 치우친 나머지 내면적인 것은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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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태복음5:17-2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무시하고 폐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plhrw'sai)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점일획이라는 말은 성경글자의 아주 작은 획을 말합니다. 일점(ijw'ta e}n)은 히브리어의 가장 작은 문자인[y]‘요드’이고 일획(miva keraiva)은 헬라어 [i]‘이오타’입니다. 즉 구약성경의 아주 작은 말씀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있는 내용을 새롭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신 그 말씀을 예수님이 깨버릴 리가 없습니다. 저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공격하는 무기로 율법을 폐한다 했지만,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이 성경적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영역을 뒤바꾸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바꾸어버렸고, 사회적인 영역으로 바꾸었습니다. 율법의 내면적인 영역이 아니라 외형만을 준수하면 죄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손으로만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인죄를 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간음하지 않으면,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하는 말씀의 배경이 그들의 이러한 생각을 깨버린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구약성경을 깨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치우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적인 것을 깨버리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빼버리고 가르치는 자는 결코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버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자기들 스스로 만든 의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의는 천국과 관련이 없었습니다. 내적으로 만족시켜야 하는 ‘의’ 곧 심령을 만족시켜주는 의가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겉으로만 보이는 의가 아니라 내면을 만족시키는 의, 하나님께서 나온 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내면의 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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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인 성도들(마태복음5:14-16)

소금과 같이 예수님은 JUmei'" ejste to; fw'" tou' kovsmou.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일단 우리는 신앙의 조명을 받으면 빛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손에 들고 다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오솔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fw'"/phos는 헬라어문헌에서 Homer 이래로 ‘빛, 광채(광휘)’이며, 햇빛, 횃불, 불빛, 시각, 새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비유적으로 ‘생명의 빛’, 즉 ‘생명 자체’를 의미하였으며, 또한 빛나는 어떤 것으로 구원, 행복, 승리와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주는 자도 포스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진리와 그 지식, 선(행)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하나님나라의 백성들로부터 비쳐나오는 영적인 계시를 언급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우주의 빛이며, 모든 질서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천국의 시민들은 이 같은 복들을 부여 받은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복들을 저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편들이라는 사실을 뜻한 것입니다. 빛을 소유한 자들은 빛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신자들은 집합적으로는 “”이고 개체적으로는 “빛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소금이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이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주안에서의 빛과 소금입니다(엡5:8).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치료자입니다. 그 누구도 빛과 소금이 스로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빛을 세상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악합니다. 얼마나 악하냐? 공의가 없습니다. 대신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적은 나라이고 큰 나라이고 간에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가 온통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습니다. 미래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사회도 불의의 사회였습니다. 현대사회도 불의의 사회입니다. 미래사회도 불의의 사회입니다. 이런 상태에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빛과 소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선한 행실을 드러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이 세상(ton kosmon)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된 빛이 아니어도, 우리들은 주안에서의 빛으로 세상에 비추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특성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은 눈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빛이 빛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며, 산위의 동네요, 등경위의 등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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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인 성도들(마태복음5:13)

산상수훈은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궁극적인 법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나는 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도덕적인 영역의 말씀들입니다. 즉 윤리적인 예화들입니다.

소금의 예화는 신자들의 독특한 영향력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Calvin은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 맛을 내게 하는 것이 성도들의 사명이라 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한줌의 소금은 그 맛을 널리 확산한다고했습니다. 누룩과 같이 서서히 불가항력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William Hendrikson은 부패를 방지하고 지연시켜 주는 방부제로서의 기능과 맛을 내주는 부차적인 기능도 한다고 했습니다. 정훈택교수 역시 소금은 세상의 악을 막고 세상의 존재 의미를 보존하는 방부제 역할이라 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JUmei'" ejste to; a{la" th'" gh'":너희는 (그) 세상의 (그) 소금이다.” “만일(ejavn)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그것은 더 이상 아무데도 쓸모가 없으므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이다”(바른성경) 우리는 여기에서 소금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도들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도들의 본분을 잃어버리면 더 성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실천사항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무리들 모두 성도일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향력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백성들의 영향력을 말씀하십니다.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영향력입니다. 소금은 방부제가 아닙니다. 독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부제가 아닙니다. 다만 방부성을 가졌습니다. 방부성을 가졌다는 것은 毒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금은 부패의 확산을 막는 것입니다.

사회에 퍼져 있는 악을 그리스도인이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악한 사람들에게 영향은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악을 치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선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생활이 악한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소금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소금이 되어라”의 미래형이 아닙니다. ‘나는 - 이다(eijmiv)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복수인 “너희는 - 이다”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으로서 이미 우리 안에 방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방부성을 잃었느냐 가지고 있느냐 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의 존재는 무척이나 필요한 상태입니다. 물론 세상은 그것을 까맣게 모르지만 악이 만연된 사회에서 소금인 우리들의 방부성은 점점 확산되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맛 잃은 소금으로서 세상에 밟히는 성도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영향을 주는 방부성 소금이어야 합니다.

And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의 복(마태복음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Makavrioi ejste, o{tan ojneidivswsin uJma'" kai; diwvxwsin kai; ei[pwsin pa'n ponhro;n kaq j uJmw'n yeudovmenoi, e{neken ejmou'. 복이 너희에게 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너희를 대항하여 온갖 악담을 할 때에는

‘욕설’과 ‘모욕’은 상대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중상’역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술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 때문에(e{neken ejmou') 온갖 악담과 박해, 거짓말, 술수를 해서 너희들이 욕을 먹는다면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어디를 가나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 하나님만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문제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사람들에게는 황제숭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카톨릭에게는 자신들의 잘못된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은 동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섞이지 않았습니다. 즉 흰색과 검정색을 섞으면 회색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흰색이었습니다. 절대로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교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어디를 가든지 새로운 지역들의 문화와 생활과 종교가 동화되었습니다. 로마카톨릭의 교황 비오11세(재위1922.2.6일-1939.2.10)는 1935년 공자 존경의식을 허용했습니다.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를 허용하였습니다. 비오12세는 1939년 ‘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제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이러다보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문화와 종교적으로 따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간 화합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큰 문제가 됩니다. 이로 인해 그들 말대로 독선의 종교요, 독불장군의 종교로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워싸여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이 엄청 많지만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굽히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잘못해서 욕을 먹기도 하지만 박해성의 비난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오직 말씀 안에서 행하고 모욕을 받는다고 하면 얼마든지 그 모욕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절대 굴하지 말고 말씀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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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는 자들의 복(마태복음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Makavrioi oiJ dediwgmevnoi e{neken dikaiosuvnh" o{ti aujtw'n ejstin hJ basileiva tw'n oujranw'n.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순교당한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막6:25-27). 다음으로 스데반집사입니다(행6:60). 그리고 야고보입니다(행12:2).

①베드로(Peter)는 전승에 의하면 논란이 많지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②안드레(Andrew)는 60년경 헬라의 도시 바드라(Patras)의 통치자인 에게아테스(Aegeates)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③세베대의 아들 야고보(James)는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당했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④요한(John)은 폴리캅, 파피아스, 이그나티우스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으며, 로마에서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지움을 당했다고 합니다. ⑤빌립(philip)은 히에라폴리스에서 기둥에 매달려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⑥바돌로매(Bartholomew)는 아르메니아의 도시인 알바노폴리스나 우르바노폴리스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⑦도마(Thomas)는 도마는 봄베이 근처의 인도 해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⑧마태(Matthew)는 에디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형의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⑨알패오의 아들 야고보(James)는 순교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⑩다대오(Thaddaeus)는 에데사의 샤바르샤르 지방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⑪가나안인 시몬(Simon)은 바대의 콜키스 지방에서 순교를 당했는데 톱으로 켜임을 당했습니다. ⑫사도바울은 68년경 로마에서 네로의 통치시에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⑬맛디아는 확실한 순교를 모릅니다.

이후로 많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성도들은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초대교회시대, 중세시대, 근세시대를 막론하고 현재까지 핍박을 받은 사람들과 순교를 당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까?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의를 말합니다. 성도들은 악한 일을 거부합니다. 선을 지키려 애를 씁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원한과 분노를 삽니다. 그러 인해서 박해를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한 자들은 항상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하십니다. 비참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천국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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