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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역(마태복음4:23-25)
예수님의 일하심은 ‘말씀’과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교훈(didavskw)과 선포(khruvssw)이고 일은 치료(qerapeuvw)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삽시간에 온 수리아에 퍼졌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나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 이로 인해서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th'" basileiva"/그 나라)을 전파하셨습니다. 천국복음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받은 사람들 속에 인식되어집니다. 그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나라와 이념을 초월하게 됩니다. 한 교회를 이루어 저들의 조직체를 발전시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미치게 합니다.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권이 이미 그 마음속에 공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17:21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6:10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의미가 그 뜻입니다. 비록 현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는 들어가기 쉽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왕으로 모실 때 온전한 그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kuvrio") 모시는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못 고치시는 병이 없었으며, 너무 어려워 못 고치실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확증하여 주고(요14:11), 그 이적들은 예수가 예언에 말씀한 바 참메시야이심을 보여줍니다(사35:5). 또한 이적들은 천국이 이미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전의 선지자들의 사역과 다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과도 다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하십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불과 같았습니다.
제자선택/네 어부(마태복음4:18-22)
예수님으로부터 먼저 부름을 받은(deu'te) 사람은 네 어부였습니다. 시몬·안드레·야고보·요한입니다. 이들의 출신지는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데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갈릴리 해변에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4:18). 이들은 두 쌍이었습니다. 두 형제들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있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세례요한도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서기관도, 모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교량역할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①요1:35-51, ②마4:18-22, 막1:16-20, ③눅5:1-11, ④마9:9-13 막2:13-17, 눅5:27-32, ⑤마10:1-4, 막3:13-19, 눅6:12-16 이상과 같이 다섯 차례입니다. ①의 부르심은 주후27년 2월경에 안드레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②의 부르심은 1년 뒤 주후28년 2월경으로 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 등이 요1:35-51의 부르심에 이어 확신을 가졌습니다. ③의 부르심은 시몬과 안드레가 그물을 덤지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그들이 직업을 떠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이전까지 함께 했습니다. ④의 부르심은 세리마태의 부르심입니다. ⑤의 부르심은 열두 제자 전체의 부르심입니다.
제자들 중 베드로는 성급한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항상 사람들을 인도하여 예수께 데려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맨 먼저 순교합니다. 요한은 사랑받는 제자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어쨌든 12제자들은 별로 사람들의 눈에 차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유명한 세계선교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사도들이 됩니다.
제자란 그리스도를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마10:37).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마10:38). 제자란 자기 소유를 포기해야 합니다(막10:28, 눅14:33).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합니다(눅14:26). 항상 말씀에 거하고(요8:31),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요15:8). 제자의 임무는 복음전파입니다(마10:7/막16:15/행1:8). 신자의 인도입니다(마9:36,37,38). 귀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마10:8).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마28:19). 그리스도의 모든 분부를 지키게 해야 합니다(마28:20).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전파해야 합니다(행5:42).
오늘날 제자들은 많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분부에서 많이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정말 주님의 제자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가 너무나 세속화가 되어서 제자도는 점점 실종되어갑니다. 제자들이 모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회개명령(마태복음4:17)
예수님은 시험 후에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전파(khruvssein)는 “회개”입니다. “너희는 회개하라”Metanoei'te입니다. 세례요한도 유대 광야에서 외친 말이 “회개하라”입니다. 왜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를 외쳤습니까? 당시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의 방법대로 산다고 자화자찬(self-admiration)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했습니까?
회개 naham(!j'n:)은 “후회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LXX은 나함을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로 번역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나함은 ‘후회하다’로 약 40회, ‘위로하다’라는 의미로 약 6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나함은 성질의 변화, 마음의 변화, 목적의 변화, 또는 행위의 변화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의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후회를 언급할 때 사용했습니다.
회개 shuib(bWv)는 ‘(되)돌아 가(오)다, 회복하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약 1,000회 이상 사용했습니다. 성경에는 회개가 인간의 책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수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렘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렘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 ‘회개/슈브’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악에서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 metanoevw는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 회심하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서 metanoevw는 ‘나중에 알아차리다’ ‘마음(mind)을 바꾸다, 다른 견해를 채택하거나 받아들이다, 감정을 바꾸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 한탄하다’입니다. 하지만 헬라사회는 인간의 전 삶의 철저한 변화나 회심, 돌아옴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LXX에서 메타노에오는 하나님에 관해서(삼상15:29 렘18:8 욜2:13-15 암7:3,6), 인간에 관해서(렘8:6,13:19) ‘나함’의 니팔형을 번역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LXX인역 용법을 따르지 않고, 슈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메타노에오를 사용하였습니다. 현재의 있는 삶(하나님을 떠나 있는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대로 있으면 영원히 멸망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똑같습니다. 같이 해야 합니다. 유대인이라고 회개를 안 해도 영생을 얻지 않습니다.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은 그 삶이 도덕적이라고 회개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영생과 영멸을 구분 짓습니다. 회개하는 자는 천국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관건입니다.
가버나움의 예수님(마태복음4:12-16)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2:1). 헤롯으로 인해 애굽으로 피하였습니다(2:14).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2:23). 유대광야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3:16).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에서 지독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4:1-11). 시험이 끝나고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잡힘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는 나사렛과 가버나움에서 사셨습니다. 갈릴리의 삶에서도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의 삶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는 삶이었습니다. 이사야9:1,2절을 보면 “1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라고 했습니다.
“요단강 저편”, “해변 길”,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는 지역 “스불론 땅”, “납달리 땅”, “요단강 저편”, “해변 길” “이방의 갈릴리”는 이 지역은 ‘흑암에 앉은 백성’으로, 또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습니다. 수 세기동안 이 지역은 북으로부터 수리아, 아람, 앗수르 등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교적인 환경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도덕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부패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어려움을 모두 다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이 그 곳에 정착하셨습니다. 그래서 ‘흑암’이 ‘빛’으로 되었습니다. 전혀 빛을 받지 못한 지역이 이제는 가장 밝은 빛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제 후로는 누구도 갈릴리를 흑암의 지역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낙담과 절망가운데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지역은 이제 더 이상 흑암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갈릴리 같은 지역이 엄청 많습니다. 미개발지역으로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남미 등이 있습니다. 이교적인 지역이 많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유럽 등 전 세계에 걸쳐서 미개발지역과 이교지역, 그리고 미전도지역이 있습니다. 이런 곳이 모두 ‘흑암의 지역’입니다. 태양은 있고, 밤이 대낮같이 훤해도 흑암의 지역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흑암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지식이 많고 전등을 환하게 켜놓는다 하더라도 흑암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흑암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흑암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가장 밝은 빛으로 탈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험(마태복음4:8-11)
첫째시험은 인간의 먹는 것으로 시험했습니다. 40일을 굶주리고 가장 연약할 때에 사탄이 적시에 공격하였습니다(3-4절). 두 번째 시험으로는 예수님을 능력자로 전락시키려 했습니다. 성전을 예배의 처소가 아닌 능력행하는 장소로,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 성경을 모두 시험코자 했습니다. 세 번째로 마귀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거기에서 마귀는 순식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Calvin은 마귀의 이 짓은 미친 짐승처럼 우리를 매료하는 대상에 질질 끌려 다니는 육신의 욕망과는 대조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또한 마귀의 이 시험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하나님의 손이 아닌 다른데서 찾게끔 하는 시험이라 했습니다. 사탄의 이 시험은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넘어지는 시험입니다. 여기에는 목사도, 평신도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싸우는 것이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 앞에 자기과시를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펼쳐보였습니다. 사람들마다 공간획득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 평의 땅이라도 가지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백악관을, 청와대를, 엘리제(프랑스)를 못 들어가서 안달입니다. 너도나도 그곳에 들어가려고 피를 튀기는 싸움을 합니다. 3.3㎡당 2억1,100만원을 호가하는 땅이라면 사람들이 기를 쓰고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시험을 한 것입니다. 천하만국을 보였다는 것은 예수님도 별 수 없는 인간임을 반드시 밝히려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공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것을 마치 제 것인 양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마귀의 이 시험은 예수님을 넘어지게는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갈등을 하게는 했을 것입니다(마26:39). 한 마디로 마귀는 굳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느냐? 차라리 면류관을 선택하도록 하여 구속주가 아님을 선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도 성경을 인용해서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하셨습니다(4,7,10).
예수님은 세 번의 시험을 모두 성경에 호소하여 물리쳤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았지만, 넘어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계획을 일언지하에 무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말했습니다(4,7,
10절). 이것이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관건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다면 사탄은 전혀 우리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감히 나서지 못합니다. 결국에 마귀는 떠나고, 천사가 나아와서 수종을 들었습니다. 긴 금식 뒤에 예수님은 엄청난 시험을 받았지만 사탄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마태복음4:5-7)
첫 번째 시험에서 예수님을 이기지 못한 사탄은 두 번째 시험에서는 이기리라 생각했습니다. 만일에 질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 아예 예수님을 시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능력자로 전락시키려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망각하게 하는 오직(only) 능력만을 행하도록 전락시킬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범인들과 조금 다른 능력자로만 전락(downfall)하게 할 계획을 사탄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하고 예수님께 말을 던집니다. 사탄의 이 말은 상투적인 말입니다. 창세기3장을 보면 하와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응당 알면서도 사탄은 말을 던져봅니다. 예수님더러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의 가정을 두면서 그것을 증명해보라고 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능력을 베풀어 보라고 합니다. 난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기적을 베풀어주시면 좋은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황당하고 난감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을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그는 이미 능력자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예수님더러 능력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통의 인간으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능력 행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전혀 사탄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되는 것을 바라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탄은 성경을 시험하였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명하셔서 다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 성경, 하나님을 모두 시험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사탄이 인용한 성경은 시편 91:11,12절입니다. “11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에서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를 삭제하였습니다. 사탄은 항상 성경을 제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인용은 하면서 성경을 비틀어버립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신 성경마저 왜곡시키려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십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사탄의 계략에 휘말리기 쉽습니다. 따라서 계략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험(마태복음4:2-4)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oJ peiravzwn)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가장 힘들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셨기 때문에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가장 힘든 때 시험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 보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의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물질적인 것입니다. 육체적인 욕구였습니다.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시험한 것입니다. 온전히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인간적인 것이 있어서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었습니다. 먹지 않으면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마귀가 찾아온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더러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연약한 것을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주리신 것을 알았습니다. 즉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연약한 부분을 공격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떡에 매인 인간, 그래서 굶주림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연약한 인간으로 전락시키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떡으로만 사는 사람으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철저하게 연약한 별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담처럼 패배하지 않고 마귀의 시험으로부터 승리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 스스로 해결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를 불신하게 하려는 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신명기8:3을 인용하여 마귀를 대적한 것입니다. 사람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씀, 즉 창조적인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는 창조, 보전, 섭리하심 등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굳이 40일을 금식하며 주렸다 할지라도 마귀의 명령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능히 돌들을 떡으로 만들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창조와 보존하심과 섭리하시는 말씀으로 사는데 마귀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제 것도 아니면서 항상 하나님의 것을 도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떡으로만 사는 연약함에 젖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험 (0) | 2009.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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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시험(마태복음4:1)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신 이유를 Calvin은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40일 금식 이후에 예수님께서 하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며, 시험의 단련을 통해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예비적 훈련을 통해서 힘들고 탁월한 사명을 위한 무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신분 그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왕의 신분으로서 죄인의 신분을 취하십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3:13),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삼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신 그는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히6:20), 또한 예수님은 자기 몸을 대속적인 죽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 고난 중 하나가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부터 근처 고지로 이끌려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임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필요가 있으심을 아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그 시험(peiravzw)을 물리치고 능력을 갖추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로 가셨습니다. 이 광야는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 부스러기가 널려 있었습니다.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복이 몹시 심한지역이었습니다. 황량하고 쓸쓸한 불모지대였으며, 여기저기 띠엄띠엄 키가작은 잡목이 있을 뿐이없습니다. 그리고 뱀들이 기어다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광야에서는 마귀(diavbolo")가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있었습니다. 이 마귀는 아담을 타락시켰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들을 줄기차게 시험하고 넘어뜨렸으며, 타락시킨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었지만 인성을 입으셨기에 시험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비록 하나님이었지만, 인성을 가지신 몸이었기에 애정(마19:13), 동정(마23:37), 연민(마12:32), 노하심(마17:17), 감사(마11:25) 등을 수시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시험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험도 예수님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를 실패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철저하게 패배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시험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험을 모두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우리들의 시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시험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해결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100%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시험은 우리들에게 수시로 다가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은혜로 그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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