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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마태복음26:36-46)

예수님은 평소에 많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있을 때 기도했으며(눅11:1), 혼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요12:27). 산에서 기도했습니다(마14:23, 막6:46, 눅6:12, 28).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눅5:16).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요11:41,42). 그러나 가장 힘들게 기도한 곳은 겟세마네였습니다(마26:36-44, 막14:32-35, 눅22:41-44). 평소에도 기도를 하실 때 혼자서였지만,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열한제자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여기 앉아 있으라고 했습니다(36절). 그리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시면서 괴로워하셨습니다(ajdhmonei'n). 슬퍼하셨습니다(lupei'sqai). 그리고 세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이니, 너희들은 여기에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36-39절). 예수님은 거기에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내용이 처절했습니다. ‘만일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하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39절). 한숨을 돌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마음은 기도하고 싶었지만,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41절).

두 번째 주님은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처음과 비슷했습니다. 주님이 마셔야 할 잔을 피하게 할 수 없으면,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다가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역시 제자들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한밤증이어서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 번째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동일한 내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즉 도저히 이 잔을 피할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자고 쉬라. 그러나 이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린다고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유다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인성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인간입니다. 인간적인 내적인 마음을 가졌습니다. 배신당하심을 느꼈고,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는 무척 괴로워하셨습니다. 슬퍼하셨습니다. 절대로 같이 하겠다고 했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주님과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마시는 잔은 여인의 후손 혼자서 마셔야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마시는 잔은 단순한 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에게 주는 진노의 잔이었고, 저주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받는 잔은 구원의 잔입니다. 제자들이 마시는 잔이나, 오늘 이 시대에 우리들이 마시는 잔들이 모두 구원의 잔입니다. 주님께서 마신 진노의 잔의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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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할 제자들의 약속(마태복음26:31-35)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갈 때에 제자들이 자신을 모두 버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목자를 치는데, 양의 떼가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31절). 하지만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로 간다고 하셨습니다(32절). 이때 베드로가 주님께 말했습니다. 제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33절).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참으로 말하는데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한다고 했습니다(34절). 이에 베드로가 다시 한 번 맹세를 합니다. 내가 주님과 같이 죽겠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35절).

스가랴13:7을 보면 “칼아 깨어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내 목자, 내 동료인 그 사람을 대항하여 그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 손을 작은 자들 위에 돌이킬 것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13:7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에서는 목자를 치는 자가 누구라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목자를 치라는 명령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하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목자를 치라는(hk;n:/때리다, 죽이다)분이 여호와이십니다. 그런데 작은 자들 위에 돌이킬 것(bWv/슈브)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들에게 지우는 짐은 단순한 개인의 짐이 아닙니다. 제자들만의 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짐입니다. 따라서 제자들과 베드로의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릴 힘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짐을 져야하는 것은 인간들의 죄 때문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짐을 지러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이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절대로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제자들의 의도와 달랐습니다. ‘버리다’(skandalivzw/스칸달리조)는 ‘실족케 하다, 범죄케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스칸달론(함정)에서 유래했으며, ‘덫을 놓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실족(범죄)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약속과 맹세는 참으로 무기력합니다. 목숨 앞에 무너지고, 권력 앞에 무너지고, 돈에 무너져 버립니다. 아무리 맹세하고 다짐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제자들의 무기력함을 이미 아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떻게 넘어질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회개의 실마리를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어떻든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십니다. 제자들을 확신시키시는 말씀입니다. 즉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허투루 들었겠지만, 후에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허둥대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소명 받은 제자들은 다시 그 소명을 확신시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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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으로 가신 예수님(마태복음26:30)

예수님과 열한 제자들은 찬송하면서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월절 식사 때의 찬송은 주로 시편115편-118편입니다.

시편115편 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2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

시편116편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2 그 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117편 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찌어다 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118편 1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찌로다

시편115편은 현존해 계시며 살아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주의 이름의 영광을 찾으라고 간청하는 시입니다. 시편116편은 죽음에서 피한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찬송시입니다. 시편117편은 하나님의 왕국으로 그의 백성들을 초대하는 시입니다. 시편118편은 새 성전 봉헌식 때 축제의 시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신 것입니다. 그것도 자원하심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죽을지 번연히 알면서 그 길을 가려하십니까? 없습니다. 또한 미래를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아셨습니다. 이 길 말고는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P.D.의 말대로 움직이는 탈렌트처럼 움직이고 계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1.1km지점의 해발 814m의 산입니다. 감람산 아래로는 기드론 시내가 흐르는 여호사밧 골짜기가 있습니다. 감람산 서쪽 기슭에 겟세마네동산이 있습니다. 감람나무가 무성하게 있어서 감람산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을 모두 싹 쓸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에 그렇게 하지를 못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시어 죄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을 찾으셨는데 곧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죄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죄 없으신 아들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서 나심은 바로 이것을 행하시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려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이지만 십자가 고난의 길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의하여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은 필연적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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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을 제정하심(마태복음26:26-29)

예수님은 열 한 제자와 함께 유월절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들어서 축복하셨습니다(eujloghvsa"). 그 축복하신 떡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떡이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26절). 또 잔을 가지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잔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 잔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 하셨습니다(27절). 주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마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제29장은 성찬(Of the Lord's Supper)에 관해서 말을 합니다.

1항.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그가 잡히시던 날 밤에, 그의 몸과 피로 세우신 성례, 곧 성찬을 제정하여, 그의 교회에서 세상 끝날 까지 지키도록 하셨는데, 이는 그가 죽으심으로 자신을 친히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을 영구히 기념케 하시고, 참 신자들에게 그 희생이 주는 모든 은혜들을 보증하시며, 그 안에서 그들이 영적인 양식을 먹고 성장케 하시며, 그들이 그에게 마땅히 행해야 되는 의무들을 보다 충성스럽게 이행케 하시며, 그들이 그와 더불어 갖는 교통과 그의 신비한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 상호간에 갖는 교통의 매는 줄과 보증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고전11:23-26; 10:16,17,21; 12:13)고 했습니다.

제2항. 이 성찬 예식을 행할 때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실제로 바쳐지거나, 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희생 제물이 실제로 드려지는 것도 아니다(히9:22,25,26,28). 다만 이 성찬 예식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스스로 자신을 드린 그 희생을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찬미를 영적으로 봉헌하는 것에 불과하다(고전11:24-26; 마26:26,27).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의 희생 제사인 소위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선택자들의 모든 죄를 위한 유일한 희생 제물이 되시고 유일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히7:23,24,27; 10:11,12,14,18).

제3항. 주 예수께서는, 이 의식을 행함에 있어서 그의 사역자들을 택정하시어 이 예식에 대한 자신의 말씀을 일반 회중에게 선포케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축사하게 하시고 그렇게 축사하여 그것들을 거룩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다른 일반 떡이나 포도주와 구별하게 하시고, 떡을 들어 떼게 하시고, 잔을 들게 하신 후에 떡과 잔을(자신들이 나눌 뿐만 아니라) 수찬자(受餐者)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고전11:23-26). 그러나 그 예식이 거행되는 시간에 회중 가운데 참예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에게도 나누어 주지 못하게 하셨다(행20:7; 고전11:20).

제4항. 사적(私的)인 미사, 즉 성례를 사제(司祭)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서 혼자 받는다든지(고전10:6), 또는 잔을 일반 회중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는다든지(막14:23; 고전11:25-29), 떡과 포도주에게 절을 한다거나 숭배할 목적으로 높이 치켜들거나, 아니면 가지고 돌아다닌다거나, 혹은 겉치레만의 종교적인 용도를 위하여 그것들을 남겨 두는 일이 있다고 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이 예식의 본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예식을 제정하신 본래의 뜻에도 어긋난다(마15:9).

제5항. 이 성례에 사용되는 외형적인 요소들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용도를 위해 정당하게 구별되어 있는 까닭에 이 요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 관계는 참된 것이지만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요소들은 때로는 그것들이 나타내고 있는 것들의 이름으로 불린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불린다(마26:26-28). 그렇다 해도 그것들은 실체와 본질에 있어서는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떡과 포도주로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고전11:26-28; 마26:29).

제6항. 신부가 축사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바뀐다고 하는 교리(일반적으로 '화체설'이라고 불리운다.)는 성경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일반 상식과 이성에도 모순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리는 성찬의 본질을 뒤엎는 것이요, 여러 가지의 미신과 조잡한 우상 숭배의 원인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한 요인이 되고 있다(행3:21; 고전11:24-26; 눅24:6,39).

제7항. 합당한 수찬자들은 이 성례의 가견적 요소를 외형적으로 받을 때에(고전11:28) 또한 내면적으로는 믿음으로 받으며 물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에서 오는 모든 은혜를 받으며 또한 먹는다. 그러나 성찬을 받는 그 때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또는 밑에,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루터교의 공재설). 그렇지만 그 가견적 요소들을 그 의식에 참예하는 신자들이 그들의 외적 감각에 의해 알아보는 것처럼 실제적인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고전10:16). 8. 비록 무지하고 사악한 사람이 이 성례의 외적 요소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 요소가 의미하는 바의 것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례에 합당치 못하게 참예함으로 해서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지어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지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교통을 갖기에는 부적합함으로 주의 상(床)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며, 그들이 무지하고 불경건한 상태에 있는데도 이 거룩한 성찬 예식에 참여하거나(고전11:27-29; 고후6:14-16)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는 때에는(고전5:6,7,13; 살후3:6,14,15; 마7:6) 그리스도에 대하여 큰 죄를 반드시 짓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떡과 포도주의 잔은 성취된 십자가 죽음의 결과로 제자들이 참여하게 될 구원의 축복을 내다보는 언약의 복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죄용서를 위해서 부어지는 언약의 피입니다.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출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와 죄용서를 보장하고 약속하는 새언약(렘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과 많은 사람들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죽음에 쏟아 부으신 여호와의 종(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에 관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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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심(마태복음26:20-25)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1일전입니다. 밤에(저물 때) 예수님이 유월절식사를 하시기 위해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이 식탁은 제자들과 다시는 같이 먹을 수 없는 마지막 식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아는 사실이었습니다(20).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서로 심히 근심했습니다. 많지도 않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다는 사실에 그들은 무척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질문을 합니다. ‘주여 접니까?’ 왜냐하면 혐의를 벗어야 함은 물론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냐고 물은 것입니다.

Hendrikson은 이에 세 가지 질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건전한 자기 의심과 혐오스런 위선의 질문,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의 질문입니다.

건전한 자기의심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의 반응과 질문입니다(22).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이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만 못하다는 것입니다(23,24절). 이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무척 황당했었습니다.

위선의 질문은 모든 것을 숨긴 질문입니다. 가롯 유다 한 사람의 질문입니다. 번연히 알고도 ‘랍비여 내니이까?’ 가룟 유다는 이 질문을 하기 위해 많이 머뭇거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문할 수도, 안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질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어린 아이와 같은 질문은 ‘주여 누굽니까?’ 베드로의 독촉을 받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요13:23-30). 베드로가 요한에게 묻습니다. 요한이 주님께 묻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요13:26절).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회개할 기회도 많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성찰할 기회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음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이 지상에서 사셔야 했습니다. 고난 받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창3:15/사53장/시22편 등).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가셔야 했습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을 뻔했다가 한없이 낭떠러지로 추락한 것입니다. ‘주여 내니이까?’ 전능한 주님 앞에서 물어보는 뻔뻔함은 아마도 자신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제주님의 고난은 가속도가 더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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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만찬 준비(마태복음26:17-19)

무교절의 첫날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유월절을 어디에서 드실 것을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의 만찬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17절).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18절).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키신 대로 유월절을 예비했습니다(19절). 무교절은 본래 니산월(종교력1월/민간력7월)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니산월 14일인 유월절 저녁부터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13일경부터 미리 집안의 모든 누룩을 제거했습니다. 따라서 ‘무교절의 첫날’이란 니산월 13일로 목요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체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공적으로 지키기 전날 유월절 의식을 하셨습니다. 마태는 유월절에 쓸 양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유월절 양은 며칠 전에 잡은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14:13에 의하면, 예수님의 지시는 제자 중 두 사람에게 내려졌습니다. ‘아무에게’도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막14:9-13).

당시에 이스라엘은 누구든지 쓸만한 공간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 가족이나 또는 그룹이 그것을 신성한 용도로 쓰고자 하면, 무료로 또는 유료로 내주는 것이 규례였습니다. 그런데 집주인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추종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일행에게 편의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때가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을 것입니다. 유월절이 제정된 것은 출애굽 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의미는 몰랐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출애굽의 유월절만 알았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유월절은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내 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속사업의 종결이기도 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수난의 시간은 바짝 돌아가고 있습니다. 유월절의 식사는 태풍전야입니다.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서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는 가룟 유다 등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다가오는 수난의 길을 묵묵히 맞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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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자 가룟 유다(마태복음26:14-16)

가룟 유다는 사도였습니다. 열 두 사도 중 마지막에 언급된 그는 제자들 중에 악명이 높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다고 말씀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와 가롯 유다는 사람들의 삷을 욕되게 하는 표현을 쓸 때 꼭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나쁘게 사용되거나 조롱거리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악한 죄이지만 특히 가룟 유다는 죄질이 더 나쁘고 중합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미미하게나마 구하려는 노력은 했지만, 유다는 과감하게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은 유다를 가장 비열한 모습으로 묘사하거나 표현했습니다.

14절에서 16절을 읽어보면 다른 제자들은 유다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사흘 전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은밀하게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유다가 태어났던 가룟(그리욧)은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였습니다. 사도로 택하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돈궤를 맡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가장 좋을 뻔한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심중에 배반을 꿈꾸었습니다. 수시로 돈 궤에 손을 댔습니다. 각 복음서 저자들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10:4/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26:14/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마26: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26:47/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마27: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막3: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막14:10/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막14:43/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눅6:16/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눅22:3/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눅22: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요6: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12: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13: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13:2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13:29/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요18:2/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요18: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행1: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행1: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유다는 사단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유다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유다의 배후에 유혹자가 있었습니다. 떡 조각을 건네받은 후(요13:2), 유다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단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단이 유다의 마음을 휘어잡았습니다.

26:1-5을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물론 사단이 사주한 것입니다. 이제 사단은 예수님의 최측근의 사람을 이용한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흥정을 합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들에게 넘겨주겠다. 너희가 얼마를 주겠느냐?’ 그들은 지체할 것 없이 은화 30을 달아주었습니다. 은화 삼십을 받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길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불쌍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천국에 갈 뻔했던 사람이 이제는 지옥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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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한 여자(마태복음26:6-13)

예수님의 일행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었을 때였습니다(6절). 예수님의 일행은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트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옥합은 매우 귀한 향의 옥합이었습니다(7절). 이것을 본 제자들은 매우 성질이 났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 매우 값나가는 향유였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9절을 보면 많은 값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옥합이 얼마나 비싼 화장품이길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까?

먼저 ‘나드’(navrdo")는 발레리아나'(Valeriana/쥐오줌풀)속(屬)에 속하는 향기로운 동인도산 식물의 줄기에서 채취한 값비싼 향유입니다. 이 식물은 날카로운 모양의 잎과 붉고 탐스러운 꽃이 곧은 줄기에 달려 있으며, 고대인들은 매우 값진 향유를 준비할 때 이 즙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막14:5을 보면 제자들이 옥합의 가격을 대충 이야기했습니다. 300데나리온 이상에 판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옥합은 직장에서의 1달 월급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300X10,0000=300,0000원 이상 되는 옥합입니다. 제자들은 옥합의 귀중함만 알았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녀가 옥합을 깨트린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이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이제 나는 항상 함께 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오히려 혼낼 일이 아니라 칭찬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0-13절).

기름을 부은 이 여인은 지상최대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의적인 상황을 마련했습니다. 여인(마리아)은 이번이 예수그리스도를 공경할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것을 받으셨습니다. 지상의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시는 예수님께서 한 달의 월급에 해당하는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음은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죽음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수난이 바로 임박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헌신은 슬픈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조금 후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이 여자의 한 일은 내 장례를 위함이니라’한 말씀을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하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이제 전 세계로 향하기 위한 걸음을 한 걸음씩 딛고 나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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