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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조상을 통해서 오심(마태복음1:1-2)
세상에서의 신화(myth)나 전설들은 실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신라의 박혁거세나 고구려의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든지, 견훤이 지렁이로부터 시작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창시자가 나오자마자 걸어서 일곱발자국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대하게 만들고자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어떤 다른 동물에서 왔다가 다시 다른 동물로 가는 예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믿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보다 더한 초자연적인 출생도 할 수 있습니다. 천상에서 갑자기 오실 수도 있고, 천사의 모습으로 와서 얼마든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대로 오시려고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수태는 인간적인 방법의 일부를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그리스도까지는 수천 년의 갭이 있었지만 그 갭을 뛰어넘어서 출생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원래는 갈대아 우르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됩니다. 당시의 세상은 아브라함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처처에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속을 이루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나안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그의 후손을 낳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아들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갖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전혀 수태시키지도, 수태할 수도 없을 상황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후에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어서야 어렵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가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여러 시험을 겪게 하십니다. 아브라함 100살 때 겨우 낳은 아들을 모리아에 인신제사를 해야 하고 당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통한 구속계획은 좁고 협착하게 계획하셨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하셨습니다. 그것의 순종함도 체크하셨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같은 성정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달랐습니다. 사는 방법도, 신앙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아들입니다. 더구나 유다는 가나안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사실 야곱이나 유다를 보면 우리들이 왜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쓰신 것을 보면 이미 이방의 구원은 아브라함 때에 예견된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이삭, 야곱, 유다는 장자들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장자들은 무시되었습니다. 즉 메시야의 혈통에 포함될 사람들은 나이로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의 공로나 어떤 장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선택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 (0) | 2009.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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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다말·베레스·헤스론·람 (0) | 2009.11.18 |
복음서 저자들이 묘사한 예수그리스도 (0) | 2009.11.15 |
마태복음족보와 기독교윤리 (0) | 2009.11.14 |
마태복음족보와 누가복음족보 (1) | 2009.11.13 |
복음서 저자들이 묘사한 예수그리스도(마1:1, 막1:1, 눅1:1-3, 요1:1-3)
복음서 저자들은 네 명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입니다. 두 명은 사도이고, 두 명은 사도가 아닙니다. 마태는 전직(前職)이 세리입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 겸 통역자이며, 초대교회의 핵심인물입니다. 누가는 수리아의 안디옥의 출신으로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직(前職)의사였습니다.사도요한은 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요13:23). 이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묘사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로 묘사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를 했습니다. 왕은 족보를 지녀야 하기 때문에 마태복음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인간은 족보를 지녀야 하기 때문에 누가복음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종은 족보가 필요 없기 때문에 족보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족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습니다.
성경의 각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문학적 장르(genre/형식)인가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1세기 시대 유대의 그레코 로만(Greco-Roman)의 역사·문화적 상징세계(symbolic world)의 틀 속에서 이야기형식(narrative)으로 되어 있습니다. narrative의 형식은 그레코-로만(Greco-Roman) 문학양식을 따라 사람들의 생애에 따른 전기, 인물, 그들의 역사행적, 회상록 등을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신학적문서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구약-유대인의 성경(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하시는 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과 이적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죄에서부터 구원하신다고 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마가복음의 장르 역시 narrative형식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묵시적 관점도 첨가했습니다. 즉 마가는 세상은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 인간과 귀신 사이의 전장(戰場)으로 보았습니다. 세상이 사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응당 해방되어야 합니다. 강한 자는 더 강한 자에 의해 타도되어야 합니다. 어둡고 위험한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으려면 세상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서의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의 종으로 일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장르 역시 narrative형식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사회에서 소외당한 가난한 자, 여자, 사마리아인,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며, 성령에 대한 언급들도 자주 등장하고, 구원사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 구원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매우 강조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선지자적 기능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누가는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인자’, ‘종’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하여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의 장르 역시 narrative형식입니다. 요한복음은 표적과 강론을 통해 예수가 유대의 메시아, 즉 구약을 성취하신 약속된 구원자이심을 보여 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10:30)로 제시함으로써 그분을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빛 가운데 거하도록 장려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계시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어떠한 하나님을 믿으며, 어떻게 그 믿음을 확정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4복음서는 각각 다르게 예수그리스도를 묘사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사자(Lion)복음) 대상이 유대인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소(Ox)복음) 대상이 로마인입니다. 누가복음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사람(Man) 대상이 헬라인(전세계)입니다. 요한복음은 전능한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독수리(Eagle)복음) 대상이 모든 나라입니다.
유다·다말·베레스·헤스론·람 (0) | 2009.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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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족보와 기독교윤리(마1:1-16)
‘윤리’라는 말은 헬라어 “e[qo"”(에토스/관습)에서 유래했습니다. ‘윤리’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기준’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윤리학이란 “성경과 기독교적 확신에 준하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도덕은 ‘한 사람이 실제로 자신의 신념대로 살고 행동하는 것’이고, 윤리학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윤리는 ‘하나님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윤리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윤리는 규정적입니다. 의무론적입니다.
윤리적인 관념이나 도덕적인 관념으로 볼 때에 족보에 있는 여인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다말의 남편 엘이 죽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의 법으로 시동생 오난과 동침하지만 여호와의 목적에 악을 행하여 죽습니다. 다시 시동생 셀라에게 시집을 가려하나 나이가 너무 어립니다. 유다가 다말에게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셀라도 죽을까 염려가 되어서 다말과 떼어 놓으려 한 말입니다. 따라서 셀라가 장성해도 k말에게 주지 않겠다는 속셈입니다. 이에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고 임신하게 됩니다. 물론 유다는 그가 다말인지 몰랐습니다(창38:1-30).
라합(1:5)은 그 직업이 기생입니다. 유대인들은 라합의 직업을 여관주인이라고 하지만 히브리서 11:31을 보면 그 직업이 기생(povrnh)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중요한 정보제공을 합니다. 물론 자신의 가족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그래서 자신의 가족을 살립니다. 후에 라합은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립니다.
룻(1:5)은 출신이 모압 족속입니다. 모압족속의 유래는 창19장에 있습니다. 도저히 유대에 그 이름이 오를 수 없는 여지입니다. 그런데 역시 그리스도예수의 족보에 올라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로 나오는 밧세바는 성경에서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두고서 다윗과 동침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게 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역시 족보에 올랐습니다.
기독교윤리와 이 세상의 윤리는 다릅니다. 세상의 윤리로 기독교윤리를 잣대질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라합이 거짓말 한 것은 세상의 윤리에는 어긋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즉 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윤리여야 합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세상의 윤리이지 하나님의 윤리일 수 없습니다. 신명기7:2, 16절을 보면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1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진멸(!~yrIj}T' !rEj}h'; haharem taharim/하하렘 타하림)으로 “바치고 또 바치라”는 말로 “죽이고 또 죽여서 바쳐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아주 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두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세상윤리의 잣대로 잴수는 없습니다. 세상윤리는 이러함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반드시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너희들이 올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전부 신전창녀로 만들고 남자는 모두 무당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윤리마저 그들이 바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윤리와 세상윤리가 상충될 때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윤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네 여인들의 윤리를 세상윤리로만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을 통해서 오심 (0) | 2009.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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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족보와 누가복음족보(마1:1-16;눅3:23-38)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요람→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여고냐→스알디엘→스룹바벨→아비훗→엘리아김→아소르→사독→아킴→엘리웃→엘르아살→맛단→야곱→요셉’으로 총40명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요셉→헬리→맛닷→레위→멜기→얀나→요셉→맛다디아→아모스→나훔→에슬리→낙개→마앗→맛다디아→서머인→요섹→요다→요아난→레사→스룹바벨→스알디엘→네리→멜기→앗디→고삼→엘마담→에르→예수→엘리에서→요림→맛닷→레위→시므온→유다→요셉→요남→엘리아김→멜레아→멘나→맛다다→나단→다윗→이새→오벳→보아스→살몬→나손→아미나답→아니→헤스론→베레스→유다→야곱→이삭→아브라함→데라→나홀→스룩→르우→벨렉→헤버→살라→가이난→아박삿→셈→노아→레멕→므두셀라→에녹→야렛→마할랄렐→가이난→에노스→셋→아담→하나님으로 총77명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76명입니다.
똑같아야 할 족보가 왜 사람숫자도 틀리고, 순서도 틀릴까? 마태복음의 첫14명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이 두 족보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족보의 이름들이 서로 다르고, 마태는 생략을 많이 했습니다. 마태의 족보는 한 문단에 14(2x7)인씩 3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하향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상향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대상이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그 대상이 전 세계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비롯해서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메시야인 예수님은 인류에게 중요한 분이시고 인류는 바로 하나님자신에게서 유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록한 것입니다.
혹자들은 마태복음의 족보는 요셉이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일 것이라고 하지만, 만족한 답변은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누가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나타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는 메시야이고, 그래서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고, 누가는 예수를 인간의 대표로서 다윗/아브라함/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소망자로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묘사한 예수그리스도 (0) | 2009.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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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과 예수그리스도(마태복음1:1-16)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3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5절), “···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5절),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
예수님의 족보에 다윗과 아브라함이 들어가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등장 하는 것은 획기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정상유대인들이 아닙니다. 다말은 가나안사람입니다(창38:1-20).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라합은 역시 가나안의 여리고사람입니다. 직업이 기생입니다(수2:1-21). 룻은 모압사람입니다(룻1:4). 창세기에 보면 모압은 근친상간의 족속이었습니다(창19:30-38).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부정한 여인입니다(삼하11:1-5). 이러한 여인들이 거룩하신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유다 때에 가서는 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을 다말이 이어주었습니다. 라합은 가나안에 살다가 이스라엘을 적극 도왔습니다. 룻 역시 보아스를 만나 오벳을 낳았습니다. 밧세바는 솔로몬을 낳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교보다 거룩함의 종교인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러한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 뜻을 모른다면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Calvin은 마태복음1:3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자기비하(exinanitio)의 시작이다(빌2:7).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족보를 티끌만한 범죄나 수치의 자국이 없이 깨끗하게 보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낮추고 종의 형태를 취하여 사람도 아닌 벌레,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시22:7)가 되시며 마침내에는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하기 위해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당시의 족보에서 부정한 출생의 사람도 조상으로 삼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미인을 찾고, 순수를 찾으며, 정의를 찾고, 깨끗함을 찾아도 사람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정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더러운 사람들뿐입니다. 어쩌면 위의 부정한 여인들보다 더럽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왕의 모습으로, 때로는 이스라엘의 처음조상의 모습으로 그리고 비하적인 모습으로 오기 위해서 연약할 뿐만 아니라 더러운 모습의 사람들을 조상으로 둔 것입니다. 우리같이 더럽고 나쁜 사람들을 위해서 천한 인간의 조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을 더러운 자리에 던져버릴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아낌없이 죽이는 자리에까지 내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족보와 기독교윤리 (0) | 2009.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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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마태복음1:1-16)
“···예수의 계보는 ···아브라함의 자손···”(1절),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2절), “···아브라함으로부터···”(17절).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무려 약 4100년간의 gap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의 관계를 성경은 무수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예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8:58) 약 4100년간의 시간을 뛰어넘은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예수님의 인성으로 하면 아브라함이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다만 성경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습니까?
그 의도는 새로운 인간을 길러 즉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여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방법을 거절하여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구원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인류전체를 다루었으나, 그 시대에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인류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선택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데라 때 아브라함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데라가 하란에 주저앉았을 때 다시금 아브라함을 불러서 지시하십니다. 창12:3을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로써 인간의 구원계획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00살에 이삭을 낳는 등 순탄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맥이 거의 끊어질 상태가 한 두 번이 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성경대로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는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심을 이 세상에 알리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예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입니다.
마태복음족보와 누가복음족보 (1) | 2009.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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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예수그리스도(마태복음1:1-16)
“다윗의 자손이요···”(1절),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6절),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17절).
사무엘하 5장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삼하5:1-3). 다윗은 엘리제사장 때 빼앗긴 언약궤를 찾아오려합니다(삼하6:1-2). 그러나 언약궤를 모시는 과정에서 우(愚)를 범합니다. 언약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어야 하는데 수레에 싣고서 모시다가 웃사가 즉사합니다(삼하6:6-7). 그리하여 언약궤는 오벳에돔의 집에 석달 간 있었는데 그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삼하6:11).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오벳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시온산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런 후에 다윗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천막에 있는 것이 여간 죄송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단선지자에게 성전을 건축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나단은 좋아서 즉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쁘게 생각하시며 허락하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전건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삼하7:5-7). 하지만 이때 하나님은 “다윗의 위가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7:13)고 하셨으며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솔로몬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성전을 건축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이방의 신까지 섬겼기 때문입니다.
“영원히”라는 세 번 반복된 표현은 솔로몬의 시대를 초월한 말씀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영원함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영원히”라는 표현에는 먼 훗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는 성전인 자신의 몸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됨으로써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한 약속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실현된 것입니다(히1:6). 이사야9:7을 보면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성취로 눅1:32에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1:1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왕의 계보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인류의 제와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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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의 신분(마태복음1:1-16)
“신분”(state)이란 사전적 의미는 “개인이 속하는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 또는 법률상 사람의 일정한 지위나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세 가지 신분이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선재적 신분,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서 성육신하신 비하의 신분,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높아지신 우주의 주권자로서의 승귀의 신분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자하나님이라고 말하고(사9:6; 요1:1),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마1:18-25); 눅2:5-7) 인간이라고도 말합니다. 교회는 매우 오래전부터, 특별히 칼케톤회의(주후451) 이후로 그리스도의 이성의 교리를 공인하였습니다. 칼케돈회의는 잘못된 견해들을 막기에 노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The Deity of Christ)은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의 본성입니다. 자신이 구속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본성에 참여해야 하고, 모든 악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의 순종과 고난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엄성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의 속성을 지니고 계셔서, 신적직분과 대권(大權)이 그리스도에게 속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에 관해 말한 것들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해 말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The Humanity of Christ)은 먼저 창세기3:15의 원시복음에 타락한 인류에게 여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구속될 소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원시복음에서 메시야 개인이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는데 정한 기한이 찰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는데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중보자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하고,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반드시 무죄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적신분은 곧 이 세상에 오시기전의 신분으로서 성자하나님의 신분입니다(요1:1-3). 비하의 신분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적위엄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로 인성을 취하셔서, 최고의 율법수여자이신 자신이 율법의 요구와 저주 아래 있게 된 신분입니다. 승귀(昇貴)의 신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시고 율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선하신 기쁨에 참여하며, 이에 합당한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오르신 것입니다. 승귀는 부활, 승천, 하늘로의 귀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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