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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계명④(출애굽기20:8-11)
너는 거룩히하라 안식 일(날) 을 기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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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안식일 즉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의 휴식에서 의미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영적 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자기들의 일을 버려둔 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일정한 날을 제정하여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듣고, 의식을 행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종들 및 다른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에게 안식할 날을 주어 노동으로부터 얼마간 휴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은 이중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차원적 근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완성입니다(창2:1-3). 이차원적 근거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입니다(신5:15). 이러한 이중적 근거로 인해서 구약시대 안식일은 신약시대에 주일로 승화됩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신구약이 동일합니다. 안식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는 다른 어떤 계명에서도 이보다 더 엄하게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민15:32-36:참조, 출31:13, 35:2).
우리는 주일(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시도록 전적으로 쉬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포기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육적 욕구들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도모하는 모든 활동으로부터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함으로써(히13:12), 사도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히4:9). 주님께서는 제7일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마지막 날에 임한 그의 안식의 완성을 묘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평생 동안 안식일에 대한 끊임없는 명상을 통하여 이러한 완성을 동경하게 함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유대 인들에게 안식을 신중히 생각하도록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단지 육체적인 노동을 중지하는 것만으로서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날이었음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구약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은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남아 있습니다(1). 말씀을 듣고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정해진 날에 한 자리에 모입니다(행2:42). 종들과 일꾼들에게 일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왜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키는가?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고집하며 지킴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제대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느 누구도 이 날의 준수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것이 장래 일의 그림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골2:17).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영적인 것들의 그림자로 유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그만큼 흐리게 하였습니다. 고대인들이 안식일을 신중한 고려 없이(우리가 부르는 바와 같이)주일로 대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대의 안식일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의 목적과 성취는 주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그림자를 종국으로 몰고 간 바로 그 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그림자 의식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즉 과거의 안식일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주일로 대치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이것을 변경하지 못합니다.
제4계명④(출애굽기20:8-11)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안식일 즉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의 휴식에서 의미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영적 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자기들의 일을 버려둔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일정한 날을 제정하여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듣고, 의식을 행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종들 및 다른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에게 안식할 날을 주어 노동으로부터 얼마간 휴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은 이중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차원적 근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완성입니다(창2:1-3). 이차원적 근거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입니다(신5:15). 이러한 이중적근거로 인해서 구약시대 안식일은 신약시대에 주일로 승화됩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신구약이 동일합니다. 안식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는 다른 어떤 계명에서도 이보다 더 엄하게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민15:32-36:참조, 출31:13, 35:2).
우리는 주일(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시도록 전적으로 쉬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포기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육적 욕구들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도모하는 모든 활동으로부터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함으로써(히13:12), 사도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히4:9). 주님께서는 제7일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마지막 날에 임한 그의 안식의 완성을 묘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평생 동안 안식일에 대한 끊임없는 명상을 통하여 이러한 완성을 동경하게 함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유대 인들에게 안식을 신중히 생각하도록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단지 육체적인 노동을 중지하는 것만으로서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날이었음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구약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은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남아 있습니다(1). 말씀을 듣고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정해진 날에 한 자리에 모입니다(행2:42). 종들과 일꾼들에게 일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왜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키는가?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고집하며 지킴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제대로 하고 있다고 주장합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느 누구도 이 날의 준수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것이 장래 일의 그림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골2:17).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영적인 것들의 그림자로 유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그만큼 흐리게 하였습니다. 고대인들이 안식일을 신중한 고려없이(우리가 부르는 바와 같이)주일로 대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대의 안식일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의 목적과 성취는 주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그림자를 종국으로 몰고간 바로 그 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그림자 의식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즉 과거의 안식일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주일로 대치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이것을 변경하지 못합니다.
제3계명③(출애굽기20:7)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셨습니다. “망령되이”(라샤우)는 “공허, 헛됨, 허무, 거짓”를 의미하며 구약성경에서 50회이상 나온다. “샤우”는 물질적 혹은 도덕적으로 비실질적이고 비실제적이며 무가치한 어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상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곧 여호와의 이름(즉 그의 명성)을 “헛되게” 거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는 것은 신성 모독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가볍게, 경솔하게, 혹은 기계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일컫는다”는 말도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의 의미는 ac;n:/nâsâ’ 로서 “들어올리다, 가지고 가다”라는 의미로 구약성경에서 약 650회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헛되게 들어올려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레 19:12을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고 무가치한 대상에 적용하여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거짓맹세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맹세도 금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름을 허위와 거짓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저주, 마술, 요술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리고 키(왜냐하면)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죄없다 하지 않으리라”입니다. 무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면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맹세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이 맹세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맹세는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나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이 되는 경우에는 치명적인 오점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당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오늘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매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매사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십계명②(출애굽기20:4-6)
제1계명은 우상예배를 금지한 것입니다. 제2계명은 형상예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제1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를 떠나서는 다른 어떤 신도 상상하거나 가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2계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떤 종류의 신인지 그리고 어떤 영광을 받아야 할 것인지를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 우상숭배를 가장 극악한 잘못이라고 정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두 부분으로 첫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의 인지 감각에 예속시키거나 또는 그를 어떠한 형태로든지 감히 표시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둘째는 어떠한 우상도 우리가 종의 이름으로 숭배하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금지사항이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를 나타내는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방신들의 형상을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하늘에 있는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땅에 있는 형상을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물속에 있는 형상을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땅 아랫것의 형상을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어떠한 형상이라도 만들어서 그것에게 경배하거나 예배를 하면 안됩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위협적인 말씀입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자신인 받을 영광을 다른 신에게 양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사42:8, 48:11). 어떤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을 관용하시지 않습니다(출 34:14).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만큼 미워하는 자에 대한 분노는 극렬하십니다. 아비들의 죄를 삼,사대까지 기억하시고 형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과 관련해서는 아비들의 죄를 자녀들에게 삼사대까지 형벌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비를 수천대에 이르도록 보여주십니다. 인류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러기에 그 안에서는 죄와 악이 전달됩니다. 죄의 저주이며 악의 형벌인 죄악들도 전달됩니다.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또는 자기를 낳아준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성격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또한 그 아비들의 죄를 당해야 하며 속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운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 실 뿐입니다. 그는 죄인이 형벌을 통해 반성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곧 형벌의 심판을 거두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여 주셔서 수 천대까지 자비를 펴시는 분이십니다(34:7).
여호와의 십계명①(출애굽기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외에는” l[' 은 전치사로 “~을 넘어서”로서 “나를 넘어서, 나에게 덧붙여서”이다. 문자적으로는 “너는 나를 넘어서 다른 엘로힘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탁월하게 되며 또한 완전한 권능을 그들 위에 행사하게 되기만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영광된 신성을 감소시키거나 모호하게 하는 모든 불경건과 미신을 우리가 멀리하라고 분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되고 열성적인 경건함으로 그를 경배하고 찬양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소유와 동시에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을 “모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다른 신들을 두는 것을 금지하시면서 그분이 의미하신 것은 그에게 속한 것을 다른 것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돌려지도록 명하십니다. 따라서 이방신을 멀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기위하여 참 종교가 우선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날조된 신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요구하시는 경배를 단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영광의 극히 작은 부분일지라도 제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앞에”라는 말은 죄를 더욱 가증스럽게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 대신에 우리가 만든 것을 대치할 때마다 그분께서는 질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현재의 권세와 은혜로서 자신이 택한 백성을 감찰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은밀한 일까지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우상들이나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들은 마음에서 첫 번째 자리를 하나님의 자리로 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2번 3번 자리라도 다른 신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에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 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1계명은 하나님의 唯一神을 선포하신 계명입니다. 多神敎的 偶像崇拜와 汎神論的 哲學思想을 단호히 배격한 것입니다. 또한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십니다. 인간들이 헛된 우상사상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도 신이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오직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십니다.
여호와의 십계명(출애굽기20;1,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2-17절까지의 말씀으로서 여호와의 10 계명을 말합니다. 십계명은 여호와께서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천사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자기 자신을 밝히는 여호와의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 여호와로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400년이나 종 되었던 집에서 250만의 사람들을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종되게 했던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내심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독립시킨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피를 흘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공로없이 해방시킨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계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의 전능성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다른 법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주 반복하셨습니다(29:25, 레 19:36, 23:43, 25, 38, 55, 26:13).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레 11:44, 18:2, 4, 30, 19:4, 10, 25, 31, 34, 20:7). “나는 여호와로라”(레 19:12,14,16,18)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인간들의 죄를 인간으로서는 누구나 사하지 못합니다. 다만 육신적인 죄는 제할 수 있으나 근본적인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아예 죄를 없애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얼마든지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의 어떤 신도 盜用하지 못합니다. 그의 전능하심도 도용하지 못합니다. 감히 그의 전능하심에 누구도 도전장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분은 세상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위대하시고 엄위하신 분을 모시고 있음에도 우리는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를 바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前轍을 밟지 않기 위해서 믿음으로 모든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고 믿음이 없이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능력없는 삶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있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임재(출애굽기19:16-25)
여호와의 말씀대로 제 삼일이 되었습니다. 시내산에 우뢰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번개가 번쩍번쩍했습니다. 빽빽한 구름이 산위에 자욱했습니다. 나팔소리가 심히 크게 울렸습니다. 이러다보니 진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두려워서 모두 떨었습니다(16절).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진중에서 나왔습니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산기슭에 섰습니다.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에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습니다. 연기가 얼마나 자욱한지 옹기점의 연기같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神話가 아닙니다. 童話도 아닙니다. 傳說이 아닙니다. 우화가 아닙니다. 250만 명의 이스라엘이 모두 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에 갈 때에 나팔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그 나팔소리는 길게 불었습니다. 점점 커졌습니다(16,19절). 傳令官의 외침이었습니다. 이 나팔이 자연적인 수단에 의한 나팔이었는지 천사들에 의해서 불려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팔소리가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 꼭대기에 강림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호기심에서 산으로 오르면 큰일이 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 올라오면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을 돌격할까 함이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내려가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여호와의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굉장한 은혜를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서 보이셨습니다. 아무도 허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세와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히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공개적으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였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이스라엘은 가차없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에서 모세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6:6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종을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오르지 못한 산에 모세는 오르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르고 싶어도 죽음으로 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에게 귀한 면류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를 통해서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부터 모세와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모세와만 상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둘러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종만을 예나지금이나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쓰임을 받기 위해 경건해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성결하라(출애굽기19:7-15)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일을 또 모세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말씀하겠다 하셨습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위신을 생각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모세의 체면을 세워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있는 가운데 모세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의 말을 영영히 믿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는 데에는 가로막힌 것이 있었습니다. 죄입니다. 죄가 인간들의 약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만날 때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들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唯一無二하십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와는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무이성을 출 15:11에서 확언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거룩한”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카도쉬’는 “따로 떼어둔” 혹은 “일상적인 용도로부터 철회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민족들의 종교에서는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예배와 관련된 물건들과 행위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사용되었던 반면,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적 예배에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또 다른 면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순결성 혹은 선하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악한 것에 의해 접촉되거나 더럽혀지지 않은 분이심을 말합니다.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든 악한 것들에 관여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聖潔해야 했습니다.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는 끝자락이라도 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죽음을 면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화목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도 없고 오직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대신 화목제물을 드리심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교제를 인함이십니다. 여호와와 우리와의 교제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우리는 그의 은혜를 입게 하기 위함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