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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교회에 대한 태도(사도행전4:23-31)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40세 된 남자를 고쳐주고는 예루살렘종교권자들에게 잡혀서(4:2), 그들과 논쟁하던 일, 그리고 조금도 그들에게 밀리지 않았던 일, 또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놓아주었던 일 등을 사도들의 공동체에 와서 모두 보고했습니다. 殺氣騰騰(살기등등)하고 氣勢騰騰(기세등등)하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던 말을 모두 교회공동체에 알렸습니다. 그러자 사도들과 교회는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모인무리들이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왜 그들이 공동체에 복귀해서 기도했습니까? 다른 제자들과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둘 보다는 셋이 낫고, 셋보다는 열이 나은 공동체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는 미래를 위한 교회로 점점 발전해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갈 준비를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사도들이나 초대교회는 박해 때마다 예루살렘공동체(초대교회)에 모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교회에 모여 같이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야고보 순교이후에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할 뻔 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해방되었을 때에 역시 교회에 복귀하여 보고를 합니다.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는 사도바울이 선교여행이 끝난 후에 꼭 예루살렘교회에 와서 보고를 합니다.1 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고 베드로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교회에 와서 선교보고를 합니까? 그곳에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그곳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구심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이외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어떤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세우셨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교회도 아니고 사역자도 아닙니다.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주님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1 나요섭. “예루살렘교회의 초기모습”『사도행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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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힘(사도행전4:23-31)

안디옥에서 태어난 John Chrysostom(/!Iwavnnh" Xrusovstomo"요한 크리소스텀)이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였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감독이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뛰어난 설교자였습니다. 또한 고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세세한 신학논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크리스천의 실천적 삶의 원리들을 설교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397년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궐석(闕席)이 되자 그곳 사람들이 크리소스톰을 안디옥에서 납치하다시피 데려와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세운 것은 그 당시 그의 높은 명성과 평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고위직이라고 죄를 덮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황후는 감정을 상하였고, 지방성직자들은 크리소스톰이 너무나 엄격하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 크리소스톰을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백성들이 크리소스톰을 지지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황제는 그 반응에 놀라서 다시 그를 불렀습니다.

교회의 힘이 무엇입니까? 건물입니까? 아니면 성도들의 숫자입니까? 아니면 목회자의 知名度(지명도)입니까? 아니면 敎勢(교세)입니까? 과연 현대의 성도들은 건물을 보고 교회를 가며, 성도들의 숫자로, 목회자의 유명도로, 목회자의 지명도, 그리고 교세의 형편을 따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교회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착각하고 교회끼리 경쟁하며, 성도들 간에 서로 원수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관입니다.

사도들을 종교권자들이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위협하고(아마도 다시 이러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는다 했을 것임) 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들을 구류할 어떤 근거가 없었습니다. 어떤 변명할 근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기각한 것입니다. 교회에 막강한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루살렘의 종교권자들은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일인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잡아눟을 수 없었습니다. 체포영장 발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들이 공공의 적도 아니었습니다. 병이 있는 사람들을 고쳐준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일 밖에 없습니다. 사기를 한 것도 아니고, 소요를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아무 힘없는 이들을 누가 보호해줍니까? 사자 같고 이리 같은 저들의 칼날을 누가 피하게 하십니까? 세상과 사단의 무기는 강력합니다. 총과 칼입니다. 그럴듯한 교리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누가 막아주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들을 누가 막아주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호하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세상이 칼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폭탄으로, 막아주시고, 세상이 총을 가지고 있으면 미사일로 막아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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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령에 대한 교회의 자세(사도행전4:13-22)

사도베드로와 사도요한은 두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과 예루살렘의 실권자들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18-20) 그러나 예루살렘의 종교권자들에게는 이러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명령입니다(행4:18).

항상 교회는 두 명령에 대해서 어디가나 들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이미 받은 명령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받은 명령은 나라에 따라서 사회적인 현상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랐습니다. 초대교회시대, 교부시대, 중세시대, 종교개혁시대, 근세교회시대, 현대교회시대 모두 두 명령을 들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명령은 듣지 않으면 바로 제재가 옵니다. 기독교국가가 아니거나, 기독교국가라도 잘못된 통치자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제제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두 사이에서 항상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태동 때부터 두 명령의 사이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종교권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문제로 예수님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황제숭배사상으로 많은 성도들이 순교까지 했습니다. 교부시대에는 조용하다가 로마-카톨릭의 잔인한 박해가 100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교황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음이었습니다. 500년경부터 시작된 로마-카톨릭은 근 1000년간 종교개혁시기까지 칼과 총으로 포교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종교재판에 회부시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이슬람권이 정복했을 때에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전파된 기독교도를 한 사람 한사람 현상금을 걸어놓고 체포해 죽였습니다.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에서 기독교를 아예 박멸시킬 요량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 이후에도 이 세상은 할 수만 있으면 기독교를 박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루살렘의 실권자들의 말에 베드로와 요한은 정면반박을 했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자세입니다. 세상의 명령이 하나님말씀에 위배될 때는 과감하게 정면으로 반박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탄없이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대형교회들이 정부의 편을 드는 것, 세속화된 것 등을 볼 때 한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명령을 우리들이 받았을 때, 하나님의 명령에 상치되는 것은 물어볼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정답을 말함과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의 약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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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세상의 요구(사도행전4:13-22)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들도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홍보효과를 노리고자 광고를 냅니다. 예를 들어 ◯◯◯◯회사가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를 광고에 게제하고 내보냅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타 종교인들이 방송국에 항의를 합니다. 종교편향에 치우쳐서 방송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선교를 목적으로 광고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스포츠선수들이 경기에서 선전한 후 경기장에서 cere·mony를 합니다. 기독교선수들은 주로 기도로 cere·mony를 합니다. 역시 이것을 다른 종교인들이 보고 방송국에 항의를 합니다. 그런 모습은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수들에게도 그런 뜻을 전하기도 합니다. 종교편향이라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3차 분열을 초래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세계교회협의회)는 언뜻 들으면 교회일치운동(敎會一致運動/ecumenical movement)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교파나 교단을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도의 일치결속을 도모하는 세계교회운동·교회합동운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WCC는 이름만큼 세계적이나 세계적이지 못한 일들을 합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도록 전도하는 것은 신구약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며, 신앙은 역사적 경험적 열매로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불교를 믿으나 힌두교를 믿으나 어떤 것을 믿어도 천국에 간다는 잘못된 이론을 펴고 있습니다.

로마인이야기를 쓴 일본인 시오노나나미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저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 내부에서 유대교를 고수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다른 민족에게 유대교를 포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기독교의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교는 남에게 포교하는데 열성을 보이지 않는 반면 기독교도는 포교에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손에 쥔 종교권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위협한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위협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요구, 아니 교회에 대하 사단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다양합니다. 항상 이중성을 추구하는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거나,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성도들을 위협합니다.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 이들의 경계사항입니다. 양상만 다를 뿐 오늘도 내일도 이것은 계속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이런 요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끝 날 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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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는 산헤드린(사도행전4:13-22)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는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그들을 체포한 죄명은 불법집회였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부활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도를 전한 것이 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잡아놓고 보니 審問(심문)할 말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막힘없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본래 베드로와 요한을 학문 없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조리 있게 말하고, 베드로와 요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틀림없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너무나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병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더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을 공회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과거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새롭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sunevdrion/sanhedrin)은 예루살렘최고의회기구였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로마의 세나투스(Senatus/원로원회의)의 번역어로서 법정, 의회를 가리켰습니다. 70인 역본과 유대 헬레니즘 문헌에서 산헤드린은 히브리어 d/s(çôwd/쏘드/의논, 회의/잠언11:13), tm'(/math/마트/사람), @yDI(dîyn/딘/심판/잠22:10), lh;q;(카할/집회/잠 26:26)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산헤드린은 유대의 산헤드린과 같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역사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 적이 별로 없습니다. 포로기 후에 유대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지배했습니다. 제사장 신분의 귀족들과 여러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예루살렘에 원로회의를 구성했습니다. 그 회의의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의회는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Ⅲ세의 칙령에 의해 게루시아(gerousia/원로회의)로 칭했습니다. 그러나 이 의회는 하스몬 왕가에 의해서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76-67년에 여왕 알렉산드라 치하에서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그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의회에 대해 최초로 사용된 것은 로마황제 가비니우스(Gabinus, 주전57-55) 통치 아래 있을 때입니다. 가비니우스는 팔레스타인을 5개의 산헤드린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후 씨저에 의해 예루살렘 회의는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구성은 71명의 의원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중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시대와 사도시대에 이들은 이름에 걸맞게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구였지만(자신들의 생각에), 하나님을 오히려 배반한 기구로서 ‘산헤드린’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관용어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시대에 끝까지 교회를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귀가 좋아하는 짓들만 골라서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들도 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가 되지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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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사도행전4:5-12)

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종교들이 하나같이 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좋은 곳(?)에 간다고 자신 있게 생각하고, 가르칩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하다못해 조상을 섬김으로 내세를 자신하고 있습니다. 불교, 유교, 로마-카톨릭, 힌두교, 이슬람교, 그리스정교회 등이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런 사람들과 그런 종교들에게 구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운전을 하려면 운전면허가 있어야 합니다. 비행기를 조종하려면 역시 면허가 있어야 합니다. 免許(면허)란 법령상의 용어입니다. 일반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행위를 특정한 경우에 허가하거나, 특정한 권리를 설정하는 행정행위입니다. 이것을 어기고 운전을 한다거나 조산을 한다거나 하면 법의 제재를 받습니다. 운전면허 없이 운전을 하면 구속을 당하거나 벌금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운전을 하고 싶다고 자신의 자동차를 끌고 도로에 나가면 무면허운전입니다.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다고 면허 없이 비행기를 끌고 날면 법의 제재를 받습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하나님께서 면허를 내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면허가 전혀 없습니다. 다른 사람으로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천하에 어떤 인간이 사람을 구원시킬 수는 없습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주신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 심취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만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결별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4:16을 보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6:1-2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창세기11장을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고는 하나님으로부터 흩어짐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여호와 앞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신 여호와 앞을 떠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떠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면서 여호와를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 곳곳에 흩어졌습니다. 아세아, 유럽,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흩어진 1세대나 2세대는 그래도 여호와를 알만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길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자신들에게 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 중에서 조금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점점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내세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형상, 동물의 형상, 상상한 것들의 형상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구원한다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신화를 만들고,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그런 것들이 사람을 구원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이외에 면허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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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자들의 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사도행전4:5-12)


11절을 보면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시편118:22을 인용하여 예루살렘성전의 종교권을 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건축가들은 누구이며, 모퉁이는 또 누구입니까? 베드로전서2:6을 보면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9:33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둔다…’고 했습니다. 이사야28:16에는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되풀이되고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시편118:22에서 다윗은 자신이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거부당한 일을 탄식하는 시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합니다. 다윗은 지배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건축자라 부르고, 자기 자신은 그 건물의 모든 무게를 받치고 있는 머릿돌이라고 부릅니다(Calvin).


우리는 모퉁이라고 하면 왠지 정상이 아닌 곁가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퉁잇돌은 건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를 이루는 핵심부위입니다. 이 돌을 기초로 두 개의 중심 되는 건물 벽을 연결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엡2:16-22). 시편118:22은 십자가에서 죽음 당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세에서 수난을 당하시고 배척을 묘사하기 위하여 인용된 구절입니다. 건축자들은 직접적으로는 유대민족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그러나 애초에 순서에도 들지 못한 사람들, 즉 세리, 창기나 죄인들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오히려 영광의 자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따라서 건축자들을 딱 잘라서 유대인, 모퉁이를 이방인으로 여기면 성경을 잘못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모퉁잇돌입니다. 모퉁이 돌이 없으면 집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곧 교회의 기초석이 모퉁이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여러 유형으로 비유를 합니다. 교회의 머리, 기초석, 반석, 거치는 돌, 모퉁이의 돌, 중보자, 보증인, 신랑, 의사, 유언자, 문, 하나님의 종, 사자, 참된 만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건축자들은 가장 견고하고 강한 돌을 모퉁이 돌로 삼는 것을 고려할 때, 모퉁이 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견고함과 강하심, 그리고 영구성을 감안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이끌리어 옛날과 달리 담대하게 모퉁이 돌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 미래의 사람들, 현재의 모든 사람들이 모퉁이 돌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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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훼방하는 사람들(사도행전4:1-4)

복음은 항상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항상 세상의 훼방을 받았습니다. 사단은 교회의 전진을 매우 싫어합니다. 따라서 사단은 세상과 대적들을 충동시켜 교회를 대적하게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후에도 지금까지도 교회를 대적하며, 성도들을 대적합니다. 악한 영들의 능력과 행위는 성경에 무수하게 많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활동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접촉합니다. 사단은 자연과 인간의 마음속을 작용하는 존재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선과 악을 대조시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진리를 비틀어서 왜곡하여 대조시킵니다. 하나님과 사탄을 同級(동급)으로 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을 상층구조에 놓습니다. 그러나 사단마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단지 심판 때까지 이들이 발악을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아무리 발악을 하지만, 하나님의 통제와 허용에 의해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작용은 자연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단은 인간들의 자유와 책임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능력은 탁월합니다. 인간들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이끌린 다고 말해지고, 악의 영들은 불순종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도록 권고를 받습니다.

악한 영들의 행위에 너무나 사람들이 과장된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풍, 화재, 질병 등과 같은 자연적 재난들뿐만 아니라 모든 슬픈 일들을 그 영들에게 귀속시키고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들과 함께 언약 속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탄으로부터 잠시 초자연적 능력을 받고 그 대신에 자신의 영혼을 그에게 저당 잡히는 조건으로 사탄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모든 기독교 국가들의 업적을 무력화시켰던, 무수한 요술과 마술들은 바로 이 생각에 근거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조차 어린아이들을 비롯한 무수한 남녀가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자 다시 5000명쯤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경찰을 동원하여 사도들을 잡아가두었습니다. 이틀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체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도를 전함입니다. 즉 복음전함을 싫어한 것입니다. ‘싫어하여’diaponevw/디아포네오)는 ‘디아’(diav/ 때문에)와 ‘포노스’(povno"/노동)에서 유래한말로 diaponouvmenoi/남성, 복수, 동사로 ‘그들이 심히 불쾌하게 여겨’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잘 섬긴다고 하는 작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심히 훼방한 것입니다. 복음을 훼방하는 사람들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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