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강해.하나님은혜'에 해당되는 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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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사도행전4:23-31)
헤롯(@Hrwvdh")家(가)는 예수님과 사도시대에 유대에서 세력을 휘둘렀던 왕가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네 명의 헤롯이 있습니다. 이두매의 안티파테르(Antipater)의 아들 헤롯대왕, 이 자의 말년에 세례요한과 그리스도께서 탄생했습니다(마2:1 눅1:5). 그는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마2장).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대왕과 사마리아 여인 말다케 사이의 아들로서 세례요한을 참수한 경박하고 관능적이었으며 사악하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1세(Herod Agrippa I)는 누가에 의해 Herod이라고만 불리며 요세푸스는 Agrippa라 부릅니다.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두 황제 갈리굴라(Caligula)와 글라우디오(Claudius)의 그늘에 점차 왕의 칭호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전역의 통치권을 획득했습니다. 이 자가 세베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킨 자입니다. 헤롯 아그립바Ⅱ세(Herod AgrippaⅡ)는 Herod Agrippa I세의 아들이며, 그의 부가 죽었을 때 17세였습니다. 48년에 Claudius Cesar로부터 칼키스(Chalcis)의 통치권을 부여 받았으며, 유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및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 감독권을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헤롯가는 교회에 대해 항상 악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대적자로, 박해자로 나옵니다. 헤롯은 빌라도와 더불어 교회의 대적자였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이후에 무능한 총독으로 전락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것은 유대인들의 시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18절).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보낸 메시지를 통하여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9절). 그리하여 빌라도는 유월절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7절).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할 때 그는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사형언도를 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했습니다(24절).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 대해서 심히 정죄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죽이려고 기획재판까지 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인데 왜 빌라도가 사도신경에 등재되어 후세에까지 계속 정죄를 당하는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그리스도의 최종 수난에 관계된 여러 인물들 가운데 빌라도의 이름만 기록된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38)은 말하되 ‘그는 어찌하여 재판관으로서의 본디오 빌라도 아래 고난 받으셨는가? 그가 무죄하시되 오히려 세속재판관에 의해 정죄(定罪)를 받으신 것은 그것에 의해 우리를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엄한 심판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게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적 사실성이 매우 특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 가는 길의 여러 계단들의 하나인 빌라도의 정죄를 전기적(傳記的)인 묘사함에 관심두지 않고, 이 수난의 구원적 의의에 두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죄의 용서와 영원히 사는 것으로 결론하는 그 신경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하여 이름을 기록한 것은 관원 빌라도가 아니라 로마사람 재판관 빌라도였습니다. 그의 재판권은 하나님의 주신 바로서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을 선언한 후에 사형을 선고함으로 그의 죽으심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이지만 빌라도는 단지 세속재판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요구(사도행전4:13-22)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들도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홍보효과를 노리고자 광고를 냅니다. 예를 들어 ◯◯◯◯회사가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를 광고에 게제하고 내보냅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타 종교인들이 방송국에 항의를 합니다. 종교편향에 치우쳐서 방송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선교를 목적으로 광고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스포츠선수들이 경기에서 선전한 후 경기장에서 cere·mony를 합니다. 기독교선수들은 주로 기도로 cere·mony를 합니다. 역시 이것을 다른 종교인들이 보고 방송국에 항의를 합니다. 그런 모습은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수들에게도 그런 뜻을 전하기도 합니다. 종교편향이라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3차 분열을 초래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세계교회협의회)는 언뜻 들으면 교회일치운동(敎會一致運動/ecumenical movement)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교파나 교단을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도의 일치결속을 도모하는 세계교회운동·교회합동운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WCC는 이름만큼 세계적이나 세계적이지 못한 일들을 합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도록 전도하는 것은 신구약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며, 신앙은 역사적 경험적 열매로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불교를 믿으나 힌두교를 믿으나 어떤 것을 믿어도 천국에 간다는 잘못된 이론을 펴고 있습니다.
로마인이야기를 쓴 일본인 시오노나나미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저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 내부에서 유대교를 고수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다른 민족에게 유대교를 포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기독교의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한다. 그래서 유대교는 남에게 포교하는데 열성을 보이지 않는 반면 기독교도는 포교에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손에 쥔 종교권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위협한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위협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요구, 아니 교회에 대하 사단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다양합니다. 항상 이중성을 추구하는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거나,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성도들을 위협합니다.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 이들의 경계사항입니다. 양상만 다를 뿐 오늘도 내일도 이것은 계속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이런 요구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끝 날 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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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는 산헤드린(사도행전4:13-22)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는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그들을 체포한 죄명은 불법집회였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부활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도를 전한 것이 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잡아놓고 보니 審問(심문)할 말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막힘없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본래 베드로와 요한을 학문 없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조리 있게 말하고, 베드로와 요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틀림없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너무나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병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더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을 공회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과거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새롭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sunevdrion/sanhedrin)은 예루살렘최고의회기구였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로마의 세나투스(Senatus/원로원회의)의 번역어로서 법정, 의회를 가리켰습니다. 70인 역본과 유대 헬레니즘 문헌에서 산헤드린은 히브리어 d/s(çôwd/쏘드/의논, 회의/잠언11:13), tm'(/math/마트/사람), @yDI(dîyn/딘/심판/잠22:10), lh;q;(카할/집회/잠 26:26)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산헤드린은 유대의 산헤드린과 같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역사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 적이 별로 없습니다. 포로기 후에 유대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지배했습니다. 제사장 신분의 귀족들과 여러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예루살렘에 원로회의를 구성했습니다. 그 회의의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의회는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Ⅲ세의 칙령에 의해 게루시아(gerousia/원로회의)로 칭했습니다. 그러나 이 의회는 하스몬 왕가에 의해서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76-67년에 여왕 알렉산드라 치하에서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그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의회에 대해 최초로 사용된 것은 로마황제 가비니우스(Gabinus, 주전57-55) 통치 아래 있을 때입니다. 가비니우스는 팔레스타인을 5개의 산헤드린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후 씨저에 의해 예루살렘 회의는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구성은 71명의 의원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중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시대와 사도시대에 이들은 이름에 걸맞게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구였지만(자신들의 생각에), 하나님을 오히려 배반한 기구로서 ‘산헤드린’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관용어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시대에 끝까지 교회를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귀가 좋아하는 짓들만 골라서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들도 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가 되지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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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자들의 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사도행전4:5-12)
11절을 보면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시편118:22을 인용하여 예루살렘성전의 종교권을 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건축가들은 누구이며, 모퉁이는 또 누구입니까? 베드로전서2:6을 보면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9:33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둔다…’고 했습니다. 이사야28:16에는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되풀이되고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시편118:22에서 다윗은 자신이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거부당한 일을 탄식하는 시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합니다. 다윗은 지배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건축자라 부르고, 자기 자신은 그 건물의 모든 무게를 받치고 있는 머릿돌이라고 부릅니다(Calvin).
우리는 모퉁이라고 하면 왠지 정상이 아닌 곁가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퉁잇돌은 건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를 이루는 핵심부위입니다. 이 돌을 기초로 두 개의 중심 되는 건물 벽을 연결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엡2:16-22). 시편118:22은 십자가에서 죽음 당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세에서 수난을 당하시고 배척을 묘사하기 위하여 인용된 구절입니다. 건축자들은 직접적으로는 유대민족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그러나 애초에 순서에도 들지 못한 사람들, 즉 세리, 창기나 죄인들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오히려 영광의 자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따라서 건축자들을 딱 잘라서 유대인, 모퉁이를 이방인으로 여기면 성경을 잘못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모퉁잇돌입니다. 모퉁이 돌이 없으면 집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곧 교회의 기초석이 모퉁이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여러 유형으로 비유를 합니다. 교회의 머리, 기초석, 반석, 거치는 돌, 모퉁이의 돌, 중보자, 보증인, 신랑, 의사, 유언자, 문, 하나님의 종, 사자, 참된 만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건축자들은 가장 견고하고 강한 돌을 모퉁이 돌로 삼는 것을 고려할 때, 모퉁이 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견고함과 강하심, 그리고 영구성을 감안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이끌리어 옛날과 달리 담대하게 모퉁이 돌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 미래의 사람들, 현재의 모든 사람들이 모퉁이 돌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할 말 없는 산헤드린 (0) | 2015.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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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0) | 2015.0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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