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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돌판(출애굽기32:15-20)

모세는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계명을 받느라고 40주야를 산에 있었습니다(출24:18). 이제 계명을 받고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진멸하시겠다는 뜻을 모세의 중재로 돌이키신 은혜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양 손에는 증거판이 있었습니다. 그 증거판은 두개였습니다. 그 판의 양면에는 글씨가 써 있었습니다(15). 그 판은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에 새기신 것입니다. 돌판을 가지고 이미 약속을 어긴 이스라엘을 향해서 내려오는 중입니다. 내려오다가 모세는 여호수아를 만났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내려올 때까지 산에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무리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영문을 모르기 때문에 모세에게 싸우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미 하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소리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18). 싸우는 소리도 아니고, 승전가도 아니며, 노래하는 소리라 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보기 전에는 몰랐었는데 그들을 보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습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자 눈이 뒤집힐 정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십계명의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버렸습니다. 당연히 그 돌판은 깨졌습니다(20). 모세는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루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물에 뿌렸습니다.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21). 모세의 이렇게 함을 카일·델리취는 주석하기를 “그 의도는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죄와 그 결과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죄가 물과 함께 그들의 내장 속으로 부어졌는데 그것은 마치 간음의 혐의가 있는 여인이 저주의 물을 마셔야 했던 것과 같다(민5:24). 그들이 그 죄를 담당해야 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라고 했습니다.

죄는 오염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금송아지의 회오리에 휩쓸렸습니다. 또한 죄는 신속성이 있습니다. 금방 진 전체에 퍼졌습니다. 죄는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책감이 문제였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나무 뒤에 숨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어디론가 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숨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죄값을 받아야 했습니다. 모세가 없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면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니면 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묻지 않고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들면 그것은 자력의 종교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만들 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이방같이 만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방의 신들처럼 하나님을 취급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죄였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멈출줄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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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욥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

욥기1:1-22

모든 사람들의 꿈은 재물이 많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물이 많으면 인생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좋은 곳에서 좋은 집을 짓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도시들은 늘 번창하고 있습니다. 예로 미국의 首都(수도)도 아니면서 유명한 도시가 New York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미국의 수도가 어디냐고 물으니까, 바로 말하기를 New York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중국의 수도는 Beijing입니다. 그러나 Hongkong이 더 유명합니다. 왜 이들의 도시가 수도보다 더 유명합니까? 돈이 많이 유통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은 때로 실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돈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건강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수천억 원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일 년 365일을 병원에 누워있다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이 제일이리고 말합니다. 돈도 있고, 건강하지만, 또한 자녀가 없다면 또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돈이 많아도 물려줄 사람이 없으면 그것도 불행입니다. “다 쓰고 죽으면 되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바로 불행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단 돈이 있어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자녀들이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자들은 첫째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있어야 하며, 건강해야 하고, 돈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1절에서 5절을 보면

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I. 바른 생활의 욥(1-5)

우리나라에도 바른 생활하신 분들이 역사적으로 많습니다. 그중에 백범 김구 선생님을 꼽을 수 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고 말한 그의 말은 유명합니다. 임시정부를 총지휘하며 오직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서 바르게 산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스 땅에 있는 욥은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욥의 profile을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해서 완벽(!T;/tâm/순전), 정직(rv;y:/yâshar),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r/raʽ')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아들딸이 총 열 명입니다. 재산 또한 거부입니다. 양이 7000마리입니다(105억원/150만원). 낙타가 3000마리입니다(240억원/800만원). 소가 1000마리입니다(35억원/350만원). 암나귀가 500마리입니다(13억원/260만원). 대충계산해도 393억 원이 넘습니다. 당시 중동에서 이렇게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여기에 부동산과 다른 것들을 계산하면 아마도 1000억 원 이상 될 것입니다. 욥은 동방에서 소문난 거부였습니다. 재산이 이렇게 많으면 가족관계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가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화목했습니다. 누가 생일잔치를 해도 모두 모여서, 함께 잔치를 했습니다. 정말 이상적인 가족관계까지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돈이 많고 이상적인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도 좋았습니다. 아들딸들이 잔치를 하게 되면 신앙에서 벗어날 수가 많습니다. 이 문제를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했습니다. 욥은 잔치가 끝나면, 항상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혹 자녀들이 잔치 중에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만큼 사는 모습이 철저했습니다. 욥은 재난을 당할 어떠한 짓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못한데, 성경은 욥이 완벽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아마도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거의 신앙이 밑바닥입니다. 신앙이 있으되 노리개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모든 것을 다 갖추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아 멋진 신자였습니다. 욥은 완벽했습니다. 아들딸이 많은 유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습니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고난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고난과 환란을 당할만한 조건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면 욥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동방에 욥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로 인해서 욥과 아들딸들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잘살았다고 기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받아야 할 근거와 원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에게도 고난이 찾아오더라는 것입니다. 6절에서 12절을 보면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II. 하나님의 자랑을 받는 욥(6-12).

지금까지 욥을 비추던 camera가 천국을 비쳐주고 있습니다. 천상의 회의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불러놓고 세상의 일들을 지시하시는 곳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상의 회의장에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단도 끼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어디를 돌아다녔느냐” 사단은 “여기 끼웃 저기 끼웃”하며 돌아다녔다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야, 다니는 중에 내 종 욥을 자세히 보았느냐, 그렇게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 봤어? 또 나를 그렇게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을 본 일이 없지?” 그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단이 뭐라고 말합니까? “주께서 잘 해주시니까 그렇지요. 주신 걸 뺏어보십시오. 바로 주님의 면전에서 욕할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망설임 없이 바로 사단에게 욥을 치시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하지만 욥의 목숨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사단은 떠났습니다. 욥에게로 간 것입니다. 욥을 괴롭히고 하나님께 욥의 불신앙을 보여주고자 간 것입니다.

본 6절에서 12절의 내용을 욥은 절대로 모릅니다. 사단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을 욥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탄만 알 뿐입니다. 욥은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사단이 욥을 치기 전에 사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알려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바로 알려주었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욥아 이런 일이 있으니 어떻게든 견뎌라’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의문사항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이 어떻게 사단(@f;%C;h'/sâtân/슥3장/대상21:1)이 하나님의 천상회의장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경에서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대적자로 행동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세계에는 하나의 사탄과 다수의 귀신들(daimovnia)이 있습니다. 원래 귀신들도 거룩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타락해서 자기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악령의 타락을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신 때와 인간이 유혹을 받아 타락하게 된 사건(창3장)사이에 일어났다고 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반대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신자들이 잘되는 꼴을 못 봅니다. 항상 괴롭히고 찢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분쟁에는 항상 사탄이 끼어있습니다.

사단이 거룩한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왕상22:19-22(····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슥3장(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계12장(하늘에 ···· 이적이 보이니····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에도 나오는데 마치 가룟 유다가 제자들 가운데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이 하나님께 불만인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멸망시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계획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성도들을 반대하는 것이 사단의 본업이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편재(omnipresence)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편재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에게 욥을 매우 자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욥을 인정하셨으면 1-5절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셨습니다.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사단에게까지 하셨습니다. 사단은 욥의 예배를 볼 때마다 눈에 가시였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욥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천상회의에서 욥과 하나님을 떼어 놓을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사단은 생각할 때 욥이 가진 것을 모두 뺏으면, 즉시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아무리 그렇게 할지라도 욥이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본인들이 잘못해서 받는 고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법을 어기고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 가서 “왜 이렇게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은 하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고난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시험입니다. 저 신앙이 진짜인가? 짝퉁인가? 저 눈물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고난이 닥치는 것입니다. 욥기를 기록한 사람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욥 같은 경우는 성경을 보아서 알겠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욥같이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극악무도한 사람이 겪어야 할 재앙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렇게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날 천상회의가 문제입니다. 천상회의에서 하나님이 욥을 자랑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욥은 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어느 정도입니까? 벼락천둥치고 지진이 일어나며 세상 고통을 혼자 모두 겪는 듯한 고통을 겪습니다. 13절에서 22절을 보면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III.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받는 욥

찬송 470장을 부르면 참으로 편안합니다. 내 평생이 순탄한 길 같습니다. 이 찬송을 듣노라면 모든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이 이 찬송을 작사하고 작곡한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는 가사에서 그 평안함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을 作詩한 H. G. Spafford 교수는 시카고 대화재사건 때 재산을 전부 잃었습니다. 그와 가족들은 살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유럽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Spafford는 화재로 타버린 무디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 남았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네 딸을 먼저 배에 태워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배가 대서양에서 영국 배와 충돌했습니다. 그 배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226명)이 다 죽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이 찢어질듯 했습니다. 가슴이 저미는 듯 했습니다. 그야말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 Spafford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바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으로 극복하고 1873년에 이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나자마자 욥의 집에 큰 사고가 터졌습니다. 그날도 아들딸들이 큰 아들 집에서 잔치를 했을 때입니다. 한 종이 보고하기를 시바인 들이 종들을 모두 죽이고 소와 나귀를 다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13-15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종이 보고하기를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과 종들이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16절). 또 다른 종이 갈대아 사람들이 세 때로 와서 약대를 빼앗아가고 종을 죽이고(17절), 그리고 열 명의 자녀들이 잔치하는 집을 덮친 태풍으로 인해서 열 명의 아들딸들이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18-19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모두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의 뜻대로, 범죄(af;j;)하지 않았습니다. 꼴사납게 하나님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20-22절).

욥은 하루 만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아들딸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욥의 재산이 가축만 약 380억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없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은 다 내려놓았습니다. 아니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욥은 조용히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하나님께 직접 원망하지 않고, 돌려서 불평을 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당장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이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점점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우스(Uz/에돔의 남쪽, 아리비아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라는 땅은 이스라엘 땅밖의 지역입니다. 그러나 욥은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어떤 고난입니까? 욥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는 고통이지, 욥이 잘못해서 형벌로 당하는 고통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욥의 경우를 통해서 인간의 고난이 꼭 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고난이 옴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에게 고난과 환란이 올 때 우리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왜 내가 고통당하지? 저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벌일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고통을 당하지 하고, 豫斷(예단)해버립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를 보니 고난이 꼭 잘못해서 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고난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고난은 신자들을 성숙하게 하는 선생입니다. 고난의 연단을 통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부족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인간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입니다. 모세는 40년을 미디안에서 고난당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까지 13년의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고난의 쓴잔을 마시지 않고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고난은 신비이며, 우리들과 뗄 수 없는 관계요,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욥의 고난 즉 우리들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우기 위한 고난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생이 성숙되지 못하고, 신앙 또한 자라지 못합니다. 우선 성도들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전보다 강한 믿음을 가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욥처럼 하나님과 사단의 가운데에서 샌드위치적인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사단은 우리를 아예 밟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복된 자리에 올려놓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섭리하심을 우리는 모릅니다. 욥기는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가는 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사람이 가장 복되지 않은 곳에 내려가도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가장 복된 자리에서 가장 저주된 자리에 떨어져도 범죄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제시합니다. 가장 큰 자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의 자리에 떨어져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을 무력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또한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삶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를 찾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생의 것을 위해서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것만을 추구한다면, 종교적인 용어로 기복종교(祈福宗敎)가 됩니다. 이것도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하나님처럼 섭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믿기 때문에 때로는 사탄에게 허용된 시험을 하십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신자들의 파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탄은 우리들을 참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있는 한 사탄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사탄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은혜만 열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시험하도록 내주는 것은 욥을 자랑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욥을 원숙한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고통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特攻隊(commando)는 특수임무나 기습공격을 실시하기 위하여 특별히 편성된 特殊部隊입니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반복훈련과 인내, 그리고 죽음의 계곡을 몇 번이나 넘는 훈련을 거친 후에야 임무수행에 들어갑니다. 그 훈련과 인내가 바로 고난입니다. 우리의 최고선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들로부터 받는 최고의 영광은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서 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첩경이요, 우리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며, 고난 후에는 하나님이 더 높은 위치에 우리를 올려놓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의 선생이며, 우리를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크레인입니다. 우리를 더 높이 올려놓는 스승과 크레인인 고난을 기쁨으로 받읍시다. 고난 저 너머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쁨을 기대하면서 고난에 임합시다. 많은 기쁨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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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기도(출애굽기32:10-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10)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으로,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창12:2).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모두 죽이시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은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숨이 모세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모세는 지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중재적인 임무를 맡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속과 멸망을 그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모세가 출세를 하느냐 아니면 이스라엘을 위하느냐가 모세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중재자로 부르신 자신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그대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노를 거두사 죄지은 백성을 멸하시지 말라고 간구하였습니다(시106:23). 모세는 그의 백성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내놓았습니다(32).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래서 모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모세의 기도가 없었다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그냥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11-13절을 보면 모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11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자비를 호소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을 말씀드렸습니다(11절). 애굽 사람의 눈에 보여주었던 그의 영광을 말씀드렸습니다(12절). 족장들에게 보여주었던 약속들을 탄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가운데 들어날 그의 영광을 위해서도 공의보다는 자비를 베푸셔야 한다고 간구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다고 했습니다(카일·델리취). 모세는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실성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체면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의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언약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언약만 붙잡으면 우리는 살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우리를 살립니다.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우리 인생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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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를 준비하시는 하나님

에스더1:1-22

한때 애굽의 파라오가 될 번한 모세는 한 애굽 사람을 죽임으로 미디안으로 도망갔습니다. 다시는 애굽 땅을 밟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면서 애굽을 떠나 미디안으로 피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조국 히브리사람들과도 등지고 하루하루를 십보라와 같이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다시는 애굽이나 히브리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살리라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에 와서 꿈만 같은 세월을 지냈습니다. 애굽의 궁중생활보다 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0년이 가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조국 히브리도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나이도 먹어가고 몸도 쇠퇴해졌습니다. 60살이 지나고 70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에 아내와 더불어 미디안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되었습니다. 그렇게 80을 먹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호렙산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40년 전 그렇게 원하던 때는 오시지 않더니, 이제는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지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개구리를 준비하셨고, 파리와 모기와 이를 준비하셨으며, 우박과 독종 등을 준비하셨습니다. 모세는 빈손으로 가기만하면 되었습니다.

오늘 1절에서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준비하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이 일은 아하수에로왕 때에 된 것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 구스까지 일백 이십 칠도를 치리하는 왕이라 2당시에 아하수에로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3위에 있은지 삼년에 그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도의 귀족과 방백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4왕이 여러 날 곧 일백 팔십일 동안에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5이 날이 다하매 왕이 또 도성 수산 대소 인민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일 동안 잔치를 베풀쌔 6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7금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식양이 각기 다르고 왕의 풍부한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8마시는 것도 규모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하여 각 사람으로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9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부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10제 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하여 11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방백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12그러나 왕후 와스디가 내시의 전하는 왕명을 좇아오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중심이 불 붙는듯하더라

I. 아하수에로를 통하여 에스더를 준비하시는 하나님(1-12).

영어 속담에 “All water runs to the sea.”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모든 물은 바다로 흐른다.”는 속담입니다. 물은 깊은 계곡에서 나오든지, 아니면 조그만 여울에서 시작이 되든지 강을 거쳐서 바다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물이 바다로 흐르기 전에 강을 거쳐야 하는데 강은 웬만한 사람들도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삼천천은 모르지만, 만경강은 압니다. 마당천은 모르지만, 금강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들은 어깨를 으쓱이지만, 물이 강물에 남지 못하고 바다로 흘러갑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주관하는 것 같지만,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아하수에로는 주전486년에서 465년까지 21년간 Persia를 다스린 왕입니다. 이때에 유다는 1차로 귀환한 후 Persia에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주전536). 아하수에로는 인도에서 구스(Ethiopia)까지 127도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무려 60개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60개국을 통치하는 아하수에로는 Persia의 겨울궁전인 수산에서 왕에 오른 지 3년 만에 귀족들을 위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잔치의 규모는 초호화판이었습니다.

왜 규모가 큰 파티를 얼었습니까? 아하수에로는 얼마 전에 이집트를 손에 넣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해서 왕국의 책임자들을 수산 궁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아하수에로는 헬라를 침공하기 위해 전략회의를 수산 궁에서 했습니다(주전483년). 그리스를 침공하기 위해 180일간 전략회의를 한 후에 정원에서 7일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만큼 아하수에로는 이 잔치를 매우 성대하게 계획해서 베풀었습니다. 왕국의 번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했습니다. 호화로운 휘장을 대리석 기둥에 매었습니다(6절). 잘 다듬어진 정원에 금의자, 은의자를 놓았습니다. 초청된 사람들을 거기에 앉게 했습니다. 술도 금잔으로 마시게 했습니다. 각종 술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셔도 먹어도 다함이 없는 잔치였습니다. 남자들만 잔치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후 와스디를 시켜서 부녀들까지 잔치를 하게 했습니다(9). 아하수에로는 곧 있을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면서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127도를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답게 잔치를 연 것입니다.

잔치를 연지 칠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술이 거나해진 아하수에로는 갑자기 왕후 와스디(yTiv]w"/vashithî/아름다운 여자)를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와스디가 ‘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왕후가 페르샤 왕비의 정복을 입고 나와서 그 아름다움(ypiy?/yōpî/요피)을 보이라고 일곱 내시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하수에로는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술이 들어가니까 “나같이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후 와스디를 기다렸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많은 찬사를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내시들이 와서 하는 말이 ‘와스디’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와스디가 왕명을 거절한 것입니다. 왕후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하일 뿐입니다. 백성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하수에로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왕후더러 오라고 했어도 열이 날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와스디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그 마음이 분노에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아가서나 에스더서를 읽으면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만 ‘아가서’에 한번 나오고(아8:6)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인데 하나님이나 여호와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가서나 에스더서가 당당히 정경에 들어갔습니다. 정경이 아닌 많은 위경들과 외경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데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데도 당당히 성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성경들에서도 하나님은 계신다는 것입니다. 계시되 하나님은 거의 숨어계십니다. 밖으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은 것뿐입니다.

성경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의도적(deliberate)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손(야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역사(history)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개입(intervention)하시지만, 우리의 삶속에서 이것을 체험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도저히 나타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옆에 계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모처럼 에스더서를 읽으려고 하는데 웬 잔치이야기입니까? 아하수에로의 수산 궁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뿐입니다. 아하수에로가 수산궁에서 party를 열었던 이야기입니다. 금잔으로 술 마시고, 잔치를 7일이나 합니다. 궁전 decoration 이야기이고, 호화로운 잔치 이야기입니다. 금의자, 은의자에 앉아서 먹고 마시는 이야기입니다. 술취한 아하수에로의 왕비 자랑하려는 이야기입니다. “뭐 이런 것이 있어?”하고 성경을 덮어버리면 큰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하수에로가 심히 분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오라고 하는데, 와스디는 못가겠다고 거부하는 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수에로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역사하시고 계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야단입니다. 우리와 전연 관계가 없는데 화들을 냅니다. 자기들이 우리를 보고 공연히 열을 냅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만하게 생겼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최종적으로 행동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그들의 신상에 변화가 옵니다. 우리를 최고의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올려놓게 됩니다. 그들이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더 높은 곳에 우리를 올려놓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13절에서 22절을 보면 불똥이 엉뚱하게 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왕이 사례를 아는 박사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 14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방백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15왕후 와스디가 내시의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명을 좇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꼬 16므무간이 왕과 방백 앞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 할뿐 아니라 아하수에로왕의 각 도 방백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17아하수에로왕이 명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부녀에게 전파되면 저희도 그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18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방백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19왕이 만일 선히 여기실찐대 와스디로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 중에 기록하여 변역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위를 저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20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무론하고 모든 부녀가 그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21왕과 방백들이 그 말을 선히 여긴지라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하여 22각 도 각 백성의 문자와 방언대로 모든 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방언대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II. 와스디를 통하여 에스더를 준비하시는 하나님(13-22)

사상 최대의 작전인 Normandy 상륙작전을 개시하기 전 연합군은 여러 가지 호재가 겹쳤습니다. 독일은 절대로 연합군이 Normandy로 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롬멜(Erwin Rommel 1891-1944)이 히틀러에게 Normandy 해안에서 기갑전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무시당했습니다. 그리고 연합군 측에서는 일기예보까지 정확히 관측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대충 관측했습니다. 더구나 Normandy에 20년 만에 오는 강한 폭풍이 D-1일(전날)에 몰아쳤습니다. 독일 측에서는 더욱 안심을 했습니다. “이런 날씨에 어떻게”하고 아주 안심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던 날(1944,6.6), Hitler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전날에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을 청할 때 절대로 깨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롬멜 장군도 부인의 생일을 맞아서 베를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선에서 기민한 지휘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전선이 급히 돌아가는데도 독일은 전혀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전선은 급히 돌아가고 있는데 누구하나 전선을 잡고 연합군과 싸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연합군측은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이 작전으로 Hitler는 전쟁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의 종전이 눈앞에 온 것입니다.

아하수에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왕비인 와스디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60개국의 최고통치자입니다. 127도를 다스리는 제국의 왕입니다. 그런데 내 명령을 거부하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군데, 감히 내 성질을 건드려?”사실 아하수에로는 좋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아하수에로는 잔인하고, 사치하며 방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의 군대가 그리스로 진군하는 길이었습니다. 부유한 리디아 사람 Pythius라는 사람이 그의 군대를 친절히 대접하고 막대한 금액을 전쟁비용에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군대에 있는 자기 아들 다섯 명 중에서 장자만 제대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노후에 위안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는 이 장자를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사이로 군대가 지나가도록 명했습니다. 또한 폭풍이 헬레스폰트의 다리를 파괴하자 그 다리를 만든 자들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다를 징벌하고 묶기 위한 족쇄 몇 개를 집어 두라고 명하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거의 여색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아하수에로인만큼 “지가 왕비면 다냐, 내가 누군데”했습니다.

와스디 편에서도 참으로 아하수에로가 야속하게 느껴졌습니다. 술 취한 손님들 앞에 자신이 나간다고 하는 것은 왕이 잘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후로서의 위엄도 서지 않고, 아내로서의 위엄이 깎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해도 아하수에로의 잘못이 100%입니다. 와스디는 잘못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일하시고 계셨습니다.

아하수에로는 아하수에로 대로, 와스디는 와스디 대로 모두다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위엄에 큰 손상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왕명에 복종하지 않으면 통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반드시 수습을 하려고 했습니다.

아하수에로’에게는 7명의 책사가 있었습니다. ‘아하수에로’는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이미 덮어둘 사항도 아니었고, 덮어둘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므무간이 왕에게 조언했습니다. ‘와스디’가 왕에게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각 도의 방백에게도 잘못했고, 백성들에게도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오늘의 일을 제국의 귀부인들이 안다면, 남편들을 심히 멸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와스디’를 폐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즉시 조서를 내리되 후에라도 바꾸지 못할 법률대로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하수에로는 므무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는 전국 127도에 방을 내렸습니다. ‘와스디를 폐위하노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누가보아도 아하수에로의 잘못입니다. 그렇게 해서 ‘와스디’는 왕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아하수에로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왕비 자랑을 하려다가 일이 커져버렸습니다. ‘와스디’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왕명을 어긴 죄는 용서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하수에로는 술김에 사랑하는 ‘와스디’를 폐위시켰고, 와스디는 왕명 불복종죄로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연히 왕후의 자리가 비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하려고 길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와스디가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그 연유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왕후자리가 궐위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우주 밖’으로부터 온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우주도 초월하여 삼위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성 하나도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화성의 밖, 우주 밖으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온 성경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자 한자가 중요하고 단어마다 중요하고 모든 문장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바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가한 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필요 없는 말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한 의도로 기록된 성경이므로 쓸데없는 말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선택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당대에 일어난 일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적고 겁 많은 기드온은 기록했지만, 징기스칸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얍삭한 야곱은 기록했지만 그 땅의 왕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인간역사에서 위대하다고 해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와 와스디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잔치상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금잔으로 마셨느니, 금의자가 어떻고, 기둥이 어떤지 시시콜콜하게 기록했습니다. 와스디가 어떻게 폐위되었는지, 왜 폐위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레스의 귀환명령으로 기회를 잡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극히 적은 숫자였습니다. 약 5,0000명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신봉했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유대인들을 몰살코자 했습니다. 이때 에스더가 등장합니다. 궐위된 왕후자리에 유대인인 에스더가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들을 완전히 몰살할 계획을 사전에 제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무렇게나 왕후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그 자리는 이유 있는 자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에스더가 그 자리에 올라가야 유대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가 이유 있는 성깔을 부린 것이고, 와스디가 이유있는 자존심을 부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변을 돌아볼 때에 도무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좌로 보아도, 우로 보아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은 도우시는 것 같은데, 유독 우리들에게는 숨어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가 필요하실 때 정확히 오십니다. 모세는 죽음의 강인 나일강에 띄워졌지만 정확히 바로의 공주가 건졌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이 구덩이 속에 던졌지만 거기에 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잡으려고 내리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제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24시간 우리들을 관리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의지하는 자녀들에게 신실함을 보이십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들은 오늘 살아 있고,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오늘 우리들은 아직 살만합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들을 그의 오른팔로 안고서 인도하심을 인지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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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출애굽기32:7-9)

여호와께서 모세를 불러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네 백성이 부패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한 자가 모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들이 여호와 자기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이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주 의도적으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십니다. 마치 이들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백성인 것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모세도 이 점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11절에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전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아들”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는 여호와께서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호의적인 감정이나 뜻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전혀 타자의 입장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해낸 이스라엘이 더 이상 쓸모없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송아지는 비록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떠받치는 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살아있는 동물의 형상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사람들에게 신성이 부여된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창조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사람-만물의 질서를 뒤바꿔놓고, 하나님 자리에 송아지를 올려놓았습니다(롬1:2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심히 부패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32:8).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서 자기백성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였습니다. 돌보아 왔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떠났습니다. 이방 사람들처럼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모세를 사랑하셨습니다. 만일에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고 모세를 않았다면 그 즉시 심판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진노만 하셨지, 이스라엘을 전멸할 심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스라엘만큼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으심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영멸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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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출애굽기32:2-6)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하였습니다. 그들의 제안을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용기 있게 자신의 의지대로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을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더디옴에 따라 낙담한 백성들을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아론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살아있는 신앙의 길로 이끌어야 했습니다. 오직 위협적인 것에서 탈출하여 관심을 다른 대로 돌릴 수 있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너희 아내와 자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면 그들이 아까워서 가져오지 않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론의 오판이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아론에게 금장식품들을 빼어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한가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나와 시내산까지 왔는데 모세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앞으로 갈 길이 불안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세계에서는 모든 민족이 각각 자기의 신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신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들을 떠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도 그들을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론에게 요구한 것은 신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을 사람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눈에 보이는 신의 형상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보호하신다는 확실한 보증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음이 연약했던 아론은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송아지는 애굽의 Apis신을 모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금송아지가 애굽 신의 형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여호와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송아지를 다 만들었을 때 만들었던 자들이 그것을 백성들에게 넘겨주면서,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절일이라”하면서 이 절일을 번제와 화목제로 축하하면서 먹고 마셨습니다. 제사 음식과 스포츠와 춤까지 그들의 아피스 절일을 축하하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크게 기뻐하며, 소리치며, 교창하며 춤추면서(17-19) 그 절일을 축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앞에서 제사 음식을 먹었습니다. 다른 예식들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여호와를 배신한 부끄러운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실제로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준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을 고의적으로 파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여호와와의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애굽의 이교도 관습에 다시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기다리지 못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반한 예가 많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몸으로는 빠져 나왔지만 아직도 마음으로는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항상 세상에 마음이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철저하게 우리들이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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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출애굽기32:1)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지체하였습니다. 모세가 지체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장래를 위해서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는 400년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그들은 보내고 있었지만 40일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다른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아론에게 일어나라(쿰:명령형)고 했습니다.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옐크) 신(엘로힘)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론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24;14). 백성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하던 여호와께서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이 불타는 것처럼 빨갛게 된 것을 보고 모세가 불 가운데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이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아론이 능히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모세가 보이지 않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더라도 그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일어나면 만나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론과 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40일이 아니라 4개월을 기다린다고 하여도 그들은 인내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이들은 적의 침략도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해결되었습니다. 충분한 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모세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우상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이 자기들을 인도하고 보호할 줄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지체하시는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베풀어주신 일반적인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지체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녕 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생을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때로는 잊고 때로는 원망하는 愚를 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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