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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에 대한 주님의 명령(마태복음19:10-12)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차라리 혼인을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를 물었습니다. 독신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인을 해서 산다는 것은 여러 어려움을 수반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독신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타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성불구자인 사람이 있고, 사람이 스스로 만든 성불구자도 있으며,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성불구자가 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1012절).
당시 쿰란공동체는 한 여자와의 교제를 통하여 부정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였습니다. 철저하게 계급적인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不淨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포기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본을 로마 카톨릭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녀들은 결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독신생활을 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더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신생활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어떤 특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높은 경지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경과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제도화된 독신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결과입니다. 성경은 결혼생활을 지지합니다(창1:27,28, 2;24, 9:7, 24:67, 시127:3,4 128:3,8, 요2:1-11, 엡5:22-33, 딤전5:14).
엡5:22-33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 24 …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 27 …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혼을 금지하기 위해서 독신생활을 장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 대신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봉사할 사람들만 독신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결혼을 금하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결혼금지를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바울과 같이 평생 독신으로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같이 결혼을 하여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나 로마-카톨릭의 독신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생활입니다. 주안에서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제도화로서 결혼을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의적인 금욕생활이나 독신생활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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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
민수기1:1-19
우리나라는 인구조사를 5년 만에 한 번씩 실시합니다. 이때 각종조사가 행해집니다. 인구조사뿐 아니라 주택 등 여러 가지가 조사되어 국가의 정책에 반영합니다. 더불어서 우리 신자들의 숫자도 헤아리게 됩니다. 그래서 5년 전에 비해서 신자들의 수가 늘었다느니, 또한 줄었다느니를 가늠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종교든지 하나씩 기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기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맞을 거라 생각하여 해당부처나 해당기관에서 자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도 이점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세마음대로, 지도자들 마음대로 조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궁금하다고 해서 백성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불렀습니다. 1절에서 4절을 보면
1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찌니 3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4매 지파의 각기 종족의 두령 한 사람씩 너희와 함께 하라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여호와의 인구조사 명령(1-16).
모세는 성막을 세운지 4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민1:1, 출40:17). 이 때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2년째 되던 해 둘째 달 첫날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전1446년에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주전1445년 2월 1일에 모세가 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지시사항을 내리시려 할 때에는 반드시 모세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도착한지 10개월 반 되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자 20살 이상을 헤아리라고 하셨습니다. 전쟁에 나갈만한 남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라 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사람은 모세이지만 아론과 함께 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 지파 가문의 지도자도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명단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5절에서 15절을 보면 “르우벤지파에서는 엘리술, 시므온지파에서 슬루미엘, 유다지파에서 나손, 잇사갈지파에서 느다넬, 스불론지파에서 엘리압, 요셉 자손에게서는 에브라지파에 엘리사마, 므낫세지파에서 가말리엘, 베냐민지파에서 아비단, 단지파에서 아히에셀, 아셀지파에서 바기엘, 갓지파에서 엘리아삽, 납달리지파에서 아히라”입니다.
이들이 모세와 함께 국세조사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조사한 숫자와 아홉 달 전에 조사한 숫자가 같습니다(민1:46; 출38:25-26; 60,3550명). 이스라엘은 아홉 달 전에 생명의 속전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출30:11-16, 38:25-26). 이 때 사람의 머릿수대로 한 사람당 반 세겔씩의 속전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때 계산된 숫자가 60,35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조사하라고 하였습니까?
이에 대해 Calvin은 이스라엘이 약속된 땅을 소유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Keil과 Delitzsch는 민수기의 인구조사는 이미 헤아린 숫자를 저희의 가족과 종족에 따라 공문서에 기록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60,3550명은 이스라엘의 전 숫자가 아닙니다. 즉 애굽에서 구원받은 숫자는 아닙니다. 명단에 작성된 사람들은 20세 이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노인과 20세 이하와, 여자들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숫자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모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누락도 없이 모두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시내산으로 데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전쟁에 나갈만한 남자를 헤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앞세워서 전쟁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이스라엘을 반드시 동참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무장한 군인이 되라 하신 것입니다. 온 백성이 하나의 군대가 되라는 것입니다. 국론이 분열되지 않도록 하나로 뭉치게 하셨습니다.
왜 이스라엘을 무장시키십니까?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진군해야 했습니다. 애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의 몫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의 행동여하에 가나안에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면 들어갈 수 있고, 갈 수 없다면 못 갔습니다. 이것이 곧 순종의 훈련이었습니다. 가고 못 가고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까? 인간의 자율에 맡겼음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하고 안하고는 이스라엘의 의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느냐 하는 관건이 곧 이스라엘에게 달린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숙제였습니다. 감나무 밑에 누워서 떨어지는 감을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감을 따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과정과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으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우리들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전쟁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장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무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무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부 비밀무기입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보이지 않습니다. 의의 가슴막이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미사일 공격을 하더라도 우리의 몸을 뚫지 못합니다. 믿음의 방패 역시 적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불화살을 비 오듯 쏟아 부어도 따뜻할 뿐입니다.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무장입니다. 예배 안에는 이 세상과 싸울 무기가 다 들어있습니다. 적들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볼 때에 혼비백산합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갑니다. 기도할 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달아납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기도했던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면 대답하고, 무엇을 지시하면 즉시 시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불러서 인구조사를 해서 문서에 기록하라 하셨습니다. 이 지시에 모세와 아론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7절에서 19절을 보면
17 모세와 아론이 지명된 이 사람들을 데리고
18 이월 일일에 온 회중을 모으니 그들이 각기 가족과 종족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그 명수를 의지하여 자기 계통을 말하매
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
II. 여호와의 명령대로 계수한 모세(17-19).
세계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때입니다. 1945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오키나와 전에서 일본군이 14,00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에 비해 미국군은 1,2520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일본군은 무려 미군의 희생자 10배가 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군도 태평양전선에서 최대희생자를 낸 전투였습니다. 전쟁은 명령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전쟁에 참여하면 죽을 줄 뻔히 압니다. 그런데 이들이 죽을줄 알면서도 참전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조국에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104개의 악기가 화음을 맞춥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 장엄하고 기가 막힌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악기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절제하며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연주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휘자의 sign이 있는데 연주를 하지 않는다면 그 오케스트라 전체가 욕을 먹습니다. 심벌즈가 나와야 할 때 지휘자가 웅장한 첼로에게 sign을 주었는데 나오지 않는다면 지휘자는 순전히 폼으로 있는 것입니다.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연주해야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많고 연주자가 많아도 지휘자의 sign에 맞추어서 연주해야 좋은 오케스트라입니다.
17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움직입니다. 지명된 열 두 사람을 모세와 아론이 취했습니다. 그리고 2월1일에 모든 회중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20세 이상의 남자들을 등록합니다. 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시내 광야에서 그들의 수를 헤아렸습니다. 20세도 안되었는데 건장하다고 넣는다든지 20세가 넘었는데도 재력가의 아들이라고 뺀다든지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했습니다.
성도들의 권세가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고 믿었을 때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3장1절부터 8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세시에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에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앉아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우리를 보아라’ 그리고 ‘나사렛 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잡아일으키니까 그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잡아일으킬 때에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절대로 못 걷습니다.’ 하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앉은뱅이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일어나 걸었습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이미 장사까지 끝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도착해서 무덤 문을 굴려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시니까 낙원에 있던 나사로의 영혼이 즉시 돌아왔습니다. ‘아니 나 죽었는데요’ ‘마지막 부활 때나 살수 있는데요’했다면 나사로는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시니까 ‘녜’ 하고 죽었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힘을 여러 곳에서 찾습니다. 힘이 나올만한 곳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각방으로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세 있는 자들을 찾아서 그들의 힘을 빌려보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돈을 벌어보려고 합니다. 혹자들은 자신의 특기를 찾아 계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삼위하나님께서 만물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특히 성부하나님께서 그의 권세를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인간을 위해 이 땅에 메시야로 예수께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적인 주권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예수님께 가자 예수님께 각종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절름발이를 고치셨습니다(마9:8).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막1:27), 파도를 잔잔케 하셨습니다(막4:39-41).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아버지하나님이나 할 수 있는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신적인 권세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왕이시자 머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서 능력을 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습니다. 모든 병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약한 것들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하는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독사가 물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쳤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열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열쇠를 잠그면 하늘에서도 잠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열쇠로 열면 하늘에서도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순종하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1941.12.7에 진주만이 기습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미국의 FBI는 진주만 근처를 배회하는 일본 어선들은 스파이선 이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동양선교사로 있다가 귀국한 월터저드도 일본이 전쟁준비에 광분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같은 날 저드박사는 마네아폴리스에 있는 한 교회에서 또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당국에서는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주만이 기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사람의 도움 없이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실 때는 사람의 순종 없이는 혼자서 하지 않으십니다. 복된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준비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복된 땅에 들어가려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성도들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여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혼에 대한 주님의 명령(마태복음19:3-9)
바리새인들 정확히 말하면 마귀의 사주를 받고 있었던 자들이 주님을 시험코자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들로 인해서 그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합당하느냐는 것입니다(3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남자)이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한다. 이들은 한 몸이 되었다. 이런 것을 너희들이 읽지 못했느냐? 그러므로 이제 그들(남자와 여자)는 둘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한 몸(sa;rx miva)이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다. 사람이 이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4-6절)이에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끌어왔습니다. ‘모세는 이혼할 때에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하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모세가 너희들의 완악함을 인해서 이혼증서를 주라고 한 것이지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불문율이 9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내어버리면 안 되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1위라고 합니다. 내려잡아도 3위 이내의 ranking입니다. 좋은 것은 1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나쁜 것들만 자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 이혼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 바른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코자(peiravzw)함이었습니다. 좋은 의도로 가르침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들이 이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생각하고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신명기24:1을 보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이혼을 하고자 할 때 수치스런 일이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치스런 일’(rb;D: tw"r][,)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엄격한 바리새학파인 샴마이학파는 모세가 말한 ‘수치스러운 일’은 간음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샴마이학파들은 간음 이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학파인 힐렐학파는 모세의 율법을 확대해석했습니다. ‘수치스런 일’을 아내가 밥을 태워도 수치스런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여자보다 못생겨도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에 이혼의 조건이 성립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은 힐렐학파의 해석을 많이 따랐습니다.
오늘날 이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간음한 이외에는 이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혼율이 세계1위입니다. 물론 여권신장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혼사유가 거의 돈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부생활 때문입니다. 간음한 이외는 드뭅니다. 이로써 파생되는 문제들은 많습니다. 특히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혼으로 인해서 많은 자녀들이 가정이 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문제가 된지는 오래전부터입니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잘못된 성문화와, 잘못된 가족문화로 인해서 이 사회가 심히 병들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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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지방의 사역(마태복음19:1-2)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떠났습니다. 요단강건너 유대지경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부터 베뢰아 사역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곧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동안 세 번 이상 유대인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실을 전했습니다(요2:13, 5:1, 7:10).
요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요한과 달리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중 단 한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실만 전했습니다(마20:17, 막10:1, 눅9:51).
마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막10: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마가요한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까지의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10장 한 장에 수록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무려 아홉 장을 할애하였습니다(9:1-18:3). 반면에 마태는 두 장(마19~20)만 기록했습니다.
왜 이렇게 각 저자들이 똑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록했습니까? 성경의 저자는 여러 가지 원리에 의해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즉 ‘선택의 원리, 강조의 원리, 배열의 원리, 해석의 원리’입니다. 선택의 원리는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취사선택해서 기록했습니다. 당시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강조의 원리는 저자가 어떤 특정한 면을 부각시켜 그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건이 있어도 유독 어떤 사건을 강조하여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배열의 원리는 성경은 대체적으로 연대기에 기초해서 기록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특별한 배열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연대성을 초월합니다. 중요한 사건순서대로 배열하는 방식입니다. 해석의 원리는 자주 반복되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역시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역지를 갈릴리에서 유대로 향하시는데, 그 사이에 있는 베뢰아에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사람들을 고치러 오셨습니다. 소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독신에 대한 주님의 명령 (0) | 2010.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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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대한 주님의 명령 (0) | 2010.05.30 |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0) | 2010.05.28 |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0) | 2010.05.25 |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 (0) | 2010.05.23 |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는다면(마태복음18:23-35)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그 종들과 계산하려 하는 어떤 왕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임금에게 1,0000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갚을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 사람의 몸과 처와 자식들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했습니다. 이에 빚진 자는 애걸복걸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갚겠다고 헸습니다. 이를 본 왕은 그 빚진 자가 불쌍해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갚을 것 같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가 있었습니다.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서 목을 잡고 당장 갚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에게 빚진 자 역시 참고 기다리면 꼭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을 옆에서 본 관리들이 심히 민망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1,0000달란트를 탕감 받았는데 겨우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에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빚을 탕감해준 주인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모두 알려주었습니다. 주인은 그 사실을 조사한 후에 심히 괘씸했습니다. 당장 저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심리했습니다. 나는 네가 불쌍해서 그 많은 빚(1,0000달란트)을 탕감해주었거늘 겨우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주인이 즉시 이 사람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그 빚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달란트는 헬라의 화폐입니다. 당시 금 한 달란트의 무게는 약 30.4kg입니다. 1달란트는 약60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따라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20년의 품삯입니다. 1,0000달란트는 노동자의 20,0000년의 품삯입니다. 이렇게 거금의 빚을 탕감 받고도 겨우 100데나리온(석 달 열흘치의 임금)의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빚진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에게 빚진 것을 용서해 주신다면 우리는 이웃이 우리에게 빚진 것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잠재해있는 미움이란 그러한 것들을 잊어버리려 합니다. 일부러 잊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들을 용서한다면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하나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무질서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용서하기는 어려우나 성도들이라면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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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아니라 은혜로(마태복음18:21-22)
삼진아웃제도(three out change)가 있습니다. 행정기관이나 관공서, 기업 등에서 일정한 원칙을 정해 놓습니다. 그 원칙을 3회에 걸쳐 위반했을 경우 위반자에게 부과하는 일종의 벌칙입니다. 야구에서 타자가 스트라이크를 세 번 당하여 아웃되는 삼진에서 빌려온 제도입니다. 2001년 9월 현재 ‘삼진아웃제’라는 용어는 행정기관이나 기업 등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일상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2001년 7월, 경찰청이 새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이 ‘삼진아웃제’를 도입했습니다. 음주운전이 3회째 적발되면 무조건 운전면허가 취소됩니다. 면허 재취득 금지기간도 기존의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법은 3회 이상 어기면 가차 없이 처벌하는 법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야 합니까?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21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70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22절).
베드로의 질문에는 숫자적인 용서였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도 숫자적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는 율법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은혜의 답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의 용서는 당시의 유대율법을 초과하는 용서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3회까지만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배에 한 번 더 용서하는 것으로 마땅히 칭찬을 받을만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을 계산하면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490번의 숫자적인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완전수를 말씀했습니다. 7과 10입니다. 그 둘을 곱했습니다. 거기에 또 완전수 7을 곱했습니다. 따라서 490번이 아니라 무한히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용서하라고 하지만, 그러한 일이 나에게 닥치면 말과 같이 쉽게 되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더구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내가 믿었던 사람이라면, 나를 배반한 사람이라면 더욱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비수처럼 가슴 깊이 꽂듯이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서운하게 한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더러 용서하라고 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로는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내 의지로는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도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용서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입니다. 오늘 잘못하고 와서 빌면 용서해주고, 내일도, 모레도, 열흘 후에도 계속 우리들은 용서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이 해야 할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용서, 참 하기 어려운 요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했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우리들이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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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마태복음18:19-20)
유대인들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율법연구를 할 때에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8절은 율법과 하나님대신 예수님이 들어서신 셈입니다. 이것은 5:21-22, 27-28과 1:23의 하반절, 28:18,20하반절을 상고하면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5:21-22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5:27-28 27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1:23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28:18,20 18…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0…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 천사가 요셉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약속은 성도들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고, 온 인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최소단위의 집단이 기도할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처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모일 때에는 언제나 그 모임을 주장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거기에 함께 하시며 그들이 시작하는 모든 일이 잘 되도록 해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자신을맡기는 자들에게 주님의 임재로부터 훌륭한 성과를 얻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원하는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우리들은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와 예배를 위한 신자들의 모임은 꼭 많이 모인다고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한, 주와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기초요 은혜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약속입니다. “여호와(“하나님” 또는 “나는”는 너희(“그들” “우리”) 가운데”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능력, 인도, 보호, 위로를 주심과 관련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즉 “돕고 위로하고 은혜를 베푸신다”것입니다.
이러므로 작은 교회 목회자도, 성도가 적은 교회라도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을 하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이 약속은 항상 살아 있어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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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aJmartavnw)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너만 가서 권고하라 하셨습니다. 만일에 그 권고를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라 했습니다(15절). 그런데 듣지 않았을 때는 두 어 명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공증을 하라 하셨습니다. 후에 다른 소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6절). 하지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17절).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그 일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역시 하늘에서도 풀 것이라 하셨습니다. 16:19의 말씀“…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의 말씀이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16장의 내용은 복음의 증진을 위한 말씀이고 그러나 본 절에서는 징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확실한 징계를 하여 교회에 유익이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18절). 주님은 이 말씀을 다시 확증하십니다. 징계의 문제로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19절). 주님은 또 첨언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반드시 거기에 주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미움이라는 것은 가히 살인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울 때는 정말 죽이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은 상대와 내가 성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상황에 상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 즉시 많은 사람에게 공개하고 싶을 것입니다. 범죄 했기 때문에 상대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범죄 한 것을 알면 먼저 단둘이 만나서 진지하게 사랑으로 권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졌다고 즉시 떠벌리지 말고 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들을 때, 2단계, 3단계, 4단계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권징은 사람을 처벌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을 얻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치리를 목적하지 말고 사람을 목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았을 때 교회의 유익한 편을 들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잘못했는데 치리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교회를 욕되게 하기 때문에 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너 나가라, 못나간다”가 아니라 말씀에 근거한 치리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을 얻는 치리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러한 치리방법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감정이 격해져서 치고받고 싸우다가 결국은 재판정으로 간 사건들이 수두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마저 놓치게 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에 경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설령 성도들이 죄를 졌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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