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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마태복음16:24-28)
어떤 단체든지 정관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통솔하려면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규칙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왜냐하면 규칙에 그 단체에 필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사형수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오만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즉 자기와의 싸움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수많은 일들을 자기와의 싸움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수많은 요소들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기부인, 즉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가벼운 십자가조차도 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순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에 대한 원리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원리는 자신의 목숨을 어떻게 귀하게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목숨을 아주 귀하게 여깁니다. 이 목숨을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일생을 바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떨어지면 모두 끝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위해서 사람들은 한 없이 비겁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생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귀한 줄 알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이 세상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의 추종자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1세기부터 시작된 로마의 박해는 1차 박해(64-96년), 2차박해(98-249년), 3차 박해(249-313년),기간에 엄청난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후로도 현재까지 엄청난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의 방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권력이 성도들을 죽인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각오와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각오와 신앙을 예수님이 요구하십니까? 생명 때문입니다.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즉 이 세상의 삶에서 탈피한 성경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과 삶을 좇아가는 것은 곧 생명을 영원히 포기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영원한 삶은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왕권을 가지고 사람들을 심판할 때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인 구원에 대해서 심층 생각해야 하며, 구원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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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무슨 말씀입니까?(마태복음16:21-28/21-23)
제자들은 기분들이 좋았습니다. 자신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바라던 메시야가 바로 자신들의 스승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좋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분께서 자신들의 스승이라고 하니 생각만 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은 후,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일 후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하루 안에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것과 같았습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하실까? 능력이 없으면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만한 능력이면 어떤 것도,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텐데 꼭 그래야만 할까? 제자들은 저마다 깊이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베드로는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결과, 주님께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렸습니다. 결코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 고했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베드로를 칭찬했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수난을 당해야 한다고 했는데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심히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의 하시는 일을 베드로가 강하게 막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가 주님을 실족하게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로마카톨릭이 생각하는 베드로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왜 하늘의 보좌를 비워놓고서 이 땅에 들어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그것은 마귀를, 사탄의 나라를 폭파하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망을 죽이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에 제사제도가 생겼습니다. 속죄제를 모형적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일을 막은 것입니다. 왜 막았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일, 즉 인정을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프로젝트를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진로를 스승과 제자라는 인정으로 막은 것입니다. 실상은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베드로를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에서 항상 하나님의 생각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되기가 쉽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구원의 문을 닫게 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면 그 일이 곧 사탄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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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고백(마태복음16:13-20)
가이샤라 빌립보(Kaisavreia Fivlippo")의 이름을 가진 도시가 팔레스타인에 두 개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데가볼리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중 하나로, 다메섹 남서쪽 약 80㎞ 지점, 헬몬 남쪽의 경사가 심하고 경치가 좋은 산간 지방입니다. 알렉산더 이후 헬라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모여 들었을 때 그들은 그곳을 전과 같이 신성시하여 그 판(Pan)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그것을 파네이온(Paneion)이라 불렀으며, 그 지역을 파네아스(Paneas)라고 했습니다. 헤롯1세는 그 당시의 유대인과 로마인을 달래는 이중정책을 하고, 그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이 도시를 자기의 영지로 준 사실을 기념하여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분봉왕 빌립은 황제의 영광을 기리며, 이 성읍을 더욱 아름답게 단장하고 해안 지역의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빌립보를 덧붙였습니다. 그 후 아그립바Ⅱ세가 이곳은 네로를 경하하는 의미에서 이곳을 ‘네로니아스’(Neronias)라 호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로 인식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물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의 한 선지자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누구로 인식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su; ei oJ Cristov", oJ uiJo;" tou' qeou' tou' zw'nto").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께서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처럼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반석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교회의 기초를 놓지 않습니다. 사도들 전체가 교회의 토대입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세우신 것이 아니라 그들 전체를 선택하시고 신앙과 진리를 가르치셔서 교회의 교사들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자신의 인격의 토대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 토대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죄를 묶거나 풀어주는 일을 합니다. 이 일들은 지상의 세대전체에 걸쳐 지속될 것이며, 주님은 이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로마 카톨릭처럼 세속권과 영적인 권한을 가지고, 사람을 탄압하고 죽이라고 권세를 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로마카톨릭을 위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자신의 토대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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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교훈들(마태복음16:5-1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6절). 이들의 누룩은 어떤 누룩입니까? 이들의 누룩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인본주의적인 교훈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교훈(누룩) :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들로부터의 신앙이 출발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얻는 의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모세율법 외에도 각종 구전 전승을 정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권위 있고, 영감 된 것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은 상충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당시 민중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중과 밀착된 그들의 잘못된 교리는 그리스도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이상하리만치 율법에 집착했습니다. 이들의 교훈은 신학적인 면보다 윤리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인본주의자들의 교리가 윤리적인 것들을 강조합니다. 이들이 그랬습니다.
사두개인의 교훈(누룩) : 바리새인에 비해서 사두개인들은 자진해서 헬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민족의 자유를 위한 마카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사장을 돕는 종교적인 관리이면서도 철저하게 비종교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에 비해서 수가 적었지만 영향력이 컸고 부유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을 어느 정도 지배했으며, 합리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세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으며, 나머지 전승문서들의 권위는 부인했습니다. 내세, 부활, 영적인 세계,천사와 마귀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도 없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교훈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쁜 일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들의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누룩은 사람을 실속 없이 팽창시킵니다. 하나님이보실 때 견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당시 교회 안에서 포악스럽게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을 가르치되 자기들의 그릇된 교리를 섞어 가르쳤습니다. 건전하고 온전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습니다. 문제가 이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가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름 있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경계해야 할 누룩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워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한다면 그는 이미 끝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성경을 빙자해서 자신의 일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인본주의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0) | 2010.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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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보이시기를 거절하신 예수님(마태복음16:1-4)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지난번에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다가 거절을 당하자(마12:38-40), 이번에 재차 그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나 선지라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었는데도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1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들이 최소한 하루의 일기는 예측하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면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2-4).
마태복음12:38-40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지만, 실상은 많이 다릅니다. 그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질문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같이 질문한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노선이 전혀 다릅니다. 예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내세를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어울린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는 너나 할 것 없이 한 패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국회에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미디어법을 불법으로 통과하여 나라가 부끄럽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한 야당이 여당과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노선이 다릅니다. 그런데 미디어법에 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한 것입니다. 참 묘한 분위기입니다. 국민들의 70%가 반대하는 미디어법을 그들이 기어이 통과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헌재에 제소되어 있는 건을 압박하기 위해 여당에서는 문제없다는 말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오신 하나님께 항상 반기를 들었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철저하게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인본주의신앙으로 발전해갔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덧칠을 한 그림 같았습니다. 이 사람이 와서 원래 그림에 덧칠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 와서 그림에 덧칠을 했습니다. 도무지 그림을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 그림에 덧칠을 했습니다. 후에는 그림인지 먹칠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의 그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하라는 계명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과거에 섬겼던 하나님의 말씀도, 주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하고 음란했습니다. 세상의 술에 깊이 취했고, 마귀의 잔에 춤추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들과 같이 강퍅하지 않아야 하며,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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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명을 먹이신 예수님(마태복음15:32-39)
지난번에는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마14:13-21). 몰론 여자와 아이외에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무려 사흘을 함께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준비했던 식량은 이미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집에 가다가 길에서 기진할 것을 우려하셨습니다(32절). 이번에도 제자들은 ‘광야인데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만큼의 떡을 구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33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이 몇 개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확인결과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였습니다(34절). 예수님은 지난번처럼 무리들을 식사대형으로 앉혔습니다(35절). 예수님은 그것들을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36절). 한사람씩, 열씩, 백씩, 천씩 거기 있는 무리들 전체가 그 떡과 생선을 먹었습니다. 37절을 보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차게 거두었습니다. 먹은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이었습니다(38절). 예수님은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마가단 지역으로 가셨습니다(39절).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자칫 대충 읽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독(多讀)보다 정독(精讀)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5000명(여자와 아이를 제하고)과 4000명(여자와 아이를 제하고)을 비교하여 먼저번보다 숫자가 적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반복해서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주님의 기적은 풍성합니다.
5000명/마14:20,21: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4000명/마15:37,38: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남은 것을 거둔 것을 보아도 풍성합니다. 바구니(kovfino")는 어린아이는 들어가도 성인은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리(spuriv")는 성인도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행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잠시비우고서 낮아진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을 비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것, 사천 명을 먹이신 것도 생명을 살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생명을 살리는데 앞장을 서야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잘못된 교훈들 (0) | 2010.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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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호수가에서의 치료(마태복음15:29-31)
사람들에게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긍휼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는 교회가 맘몬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용산참사로 6명 사망, 쌍용차사태, 경인전철 공사 중 안전장치 미흡으로 철근이 무너져 5명이 사망하는 사건, 국회에서 여당이 조중동에 방송을 몰아주고자 날치기한 사건 등 무엇하나 제대로 돌아가며, 사람을 긍휼히 보지 않는 사건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상황이라도 냉정을 잃지 않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정권과 야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재정이 풍부하다보니 목회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심판의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전도해야 할 사람들을 심판하여 교회를 싫어하는 짓만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저명했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저질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긍휼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주변의 BY교회는 엄청난 건물에 엄청난 땅을 계속 사들이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하나같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모으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회자들, 작은 교회의 성도들을 빼앗기 위해 별별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단계별로 공부를 시키는 파렴치한의 대형교회들, 이들에게서 예수님의 긍휼의 냄새라고는 코를 아무리 청소하고 맡으려고 해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로 가셨습니다. 근처의 산에 올라가셔서 앉으셨습니다(29절). 그때 큰 무리가 예수님께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다리장애자들,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각색 병을 앓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은 모두 고쳐주셨습니다(30). 고침을 받은 그들은 벙어리가 말을 하고, 불구자가 온전해졌습니다. 절뚝발이가 걸었으며, 소경이 보게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보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잔인합니다. 성도라면 잔인하지 않아야 하는데 잔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천국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 정국은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정부요직에 앉은 사람들이 신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 어느 정부보다 잔인한 정부입니다. 사람을 때려잡습니다. 조금만 정부를 비판하면 잡아가둡니다. 어느 정부보다 민주화를 해야 할 정부가 독재정부를 세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잔인하니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이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심히 멍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가 긍휼을 버리고 권력과 손을 잡은 것은 심히 유감스런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표적보이시기를 거절하신 예수님 (0) | 2010.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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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명을 먹이신 예수님 (0) | 2010.05.05 |
베뢰아 사역/가나안여자의 믿음 (0) | 2010.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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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죄 (0) | 2010.05.01 |
베뢰아 사역/가나안여자의 믿음(마태복음15:22-28)
마태복음1:1-4:11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입니다. 4:12-20:34까지는 계속적인 사역입니다. 그 사역 중에서 4;12-15:20은 갈릴리사역이며, 15:21부터 20:34까지는 베뢰아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이방인의지역에 들어가셨습니다. 사역을 하러 가신 것이 아니라 쉬시려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쉴 수가 없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지만 이미 주님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입니다(21절). 지나가시는 길에 한 가나안 여자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마가복음7:26을 보면 이 여자는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헬라인이란 그리스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오히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릅니다(22).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이 소리를 지르니까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간구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몇 번 불러서야 예수님은 그 여인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 여인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녀요, 이방인들은 개라는 말씀입니다(26). 그러나 가나안의 여인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했습니다(27). 이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했습니다. 소원대로 네 딸이 귀신의 세력에서 놓였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믿음은 무엇입니까? 어찌 보면 이 사람은 당시로서 언약 밖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아브라함의 자녀였습니다. 육신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이 언약 밖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을 봐서 예수님은 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수로보니게 족속의 가나안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두로와 시돈지방에 가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믿음이라는 것은 인내를 요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갖은 말을 다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한결 같았습니다. 딸만 고친다면 어떤 수모도, 어떤 어려움도 다 겪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그 모든 것을 다 참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여인을 더욱 사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에 간절함과 인내가 묻어있지 않는다면 신앙생활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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