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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나라이 임하옵시며” ejlqevtw hJ basileiva“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바른성경). 그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 기도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라는 간구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통치함에 영향을 끼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basileiva tou' qeou')라고 할 때는 네 가지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예수), 땅(영토), 백성, 주권(지배,통치)입니다. 왕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왕국으로, 왕되신 하나님/예수님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토로서 미래천국/낙원/현재 우리들이 거하고 있는 이 땅입니다. 물론 이 땅은 불신자와 같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입니다. 주권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실현되고 있을까? 사도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했습니다(마3:2). 천국이 임박했음을 증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후에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도, 예수님도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실현되고 있습니까? 사단과 귀신을 쫓아냄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을 대적하고 귀신을 쫓아냄으로 인해서 천국의 실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마12:28). 예수님의 사단을 대적한 것은 천국의 현재면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전파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었습니다. 누가복음16:16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선지자(구약성경)는 구세대입니다. 이 구세대가 새로운 세대와 대칭이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복음의 선포’(eujaggelivzetai)입니다. 복음 선포는 이사야 40:9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선포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크게 소망했던 실현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기도자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전도와 선교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넓혀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임무입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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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5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3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2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1 |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Agiasqhvtw to; o[nomav sou: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르라고 지어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단순한 명칭입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을 지목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이름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에게 이름이 없다면 혼란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굉장히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의 @Agiasqhvtw는 aJgiavzw(거룩하게 하다)의 명령 과거 수동태로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완전한 실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는데, 두 가지 의미를 함축(significant)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는 행동을 하실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길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거나 여김을 받게 됩니다.
힐(D. Hill)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긴다는 말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높인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로메아어(Krnst Lohmeyer)는 ‘주기도가 기원하고 있는 성화는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상반되는 감각적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림을 뜻한다. 왜냐하면 존재와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봉사하는 천사와 같이 행위를 존재에, 그리고 존재를 행위에 일치시키는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모든 인간적, 역사적 존재가 고양되고, 그리하여 완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행위와 언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인에게나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 불경하게 느끼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쁘게 비쳐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언어(words)와 행동(action)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딸들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비쳐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산위의 동네이며,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 언어, 한 행동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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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4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2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1 |
올바른 기도 (0) | 2010.01.10 |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Pavter hJmw'n oJ ejn toi'" oujranoi'": 사람이 하나님을 모두 이렇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만 부를수 있는 호칭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든지, 안했든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만의 특별한 권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의 특별한 권리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것으로 묘사함은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떤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도 바다도, 우주가 모두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태양계도, 은하계도, 아주 먼 은하군단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온 우주와 온 누리가 그분의 섭리 안에 들어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과 같이 종교가 다른 지역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칩니다. 하나님의 영향력은 어디에도 미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공간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더 섬겨야 하며 경외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합니다. 그분의 엄위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말할 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무조건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며,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유기를 받고, 죽어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에베소서3:14,15을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살든지, 영원히 멸망을 당하고 있든지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왕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아버지와 자녀관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친밀함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와 무한히 가까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란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겠다는 친밀함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무한하게 있음을 나타내고 무엇이든지 간구할 수 있는 근거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알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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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3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1 |
올바른 기도 (0) | 2010.01.10 |
바른 구제 (0) | 2010.01.09 |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의 기도”는 모형적인 기도였습니다. 주기문은 공동기도문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모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 분 | 기 도 | 내 용 | 의 미 |
서언 | 기원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하나님의 성호를 부름 |
하나님께 관한기도 | 제1간구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하나님 이름이 찬양받기를 간구 |
제2간구 | 나라이 임하옵시며 | 천국이 속히 이르기 원함 | |
제3간구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간구함. | |
인간에 관한기도 | 제4간구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일용할 양식을 간구함. |
제5간구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죄 용서를 간구함. | |
제6간구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유혹에서 구원을 간구함. | |
결 언 | 송 영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기도의 응답을 간구함. |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간구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섯 간구들(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간구합니다. 첫 세 간구는 아버지의 이름과 그의 나라, 그의 뜻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세 간구는 일용할 양식, 죄용서, 악한 자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들을 위한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사 세 간구와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를 위해서 세 간구인데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다섯 번째 · 여섯번째 간구), 우리의 현재의 필요를 위해서 네 번째 간구,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여섯 번째 간구입니다. 우리들의 것만 아니라 형제들의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도문에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돈이 필요 없는 어떤 대형교회는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영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상당히 신령한 것 같은 말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을 초월한 것 같은 말입니다. 자신들은 돈이 있을 만큼 있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처럼 설교하지만 실상은 틀렸습니다. 기도문부터 매일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육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양식과 용서를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하라 하셨습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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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2 |
올바른 기도 (0) | 2010.01.10 |
바른 구제 (0) | 2010.01.09 |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 2010.01.08 |
올바른 기도(마태복음6:5-8)
신앙이란 사람 개개인들의 살기 위한 행동과 마음가짐입니다. 즉 신앙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본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행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도 역시 ‘보이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이 필요해서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과시형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은 기도의 시간을 정해두었습니다. 다니엘 같은 경우는 오전과 오후와 밤에 기도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서는 이 기도시간을 맞추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여건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회당이나 거리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 어디서나 기도를 하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들은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을 택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정죄했습니다. 이미 그러한 행동으로 이들도 자기들의 상을 사람들로부터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신앙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은밀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하셨습니다.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입니다. 기도실을 따로 두고 기도했다고 광고를 하면 바리새인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생각과 마음의 자세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또한 화려한 美辭麗句(미사여구)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미사여구가 아니라도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외식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자꾸만 나타내려고 합니다.
오늘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신을 나타내려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이나 했다고 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교회가 이런 것은 세계제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간증하는 사람들 등으로 교회는 점점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거의 축복 일색이요, 세속화된 과시들이 너무나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버린 것들을 주워서 그것을 보석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을 좀먹고 있습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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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1 |
바른 구제 (0) | 2010.01.09 |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 2010.01.08 |
원수를 대하는 태도 (0) | 2010.01.07 |
에베소교회에게 명령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1-7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의 뜻은 반드시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로 ‘Noah’란 뜻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Abraham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름과 함께 숫자도 성경에서는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7’이란 숫자는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도 이러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즉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로부터 교회사에 나타난 일들이 이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일곱 교회의 양상이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는 로마총독이 지배하는 아시아의 속주입니다. 오늘날 터키의 서부지방입니다.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가 사마리아, 이두메, 유대지방을 다스리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교회는 바울사도 때부터 순회하던 순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에베소(Ephesus)에서 북쪽으로 약 60km를 가면, 서머나(Smyrna)입니다. 더 북쪽으로 60km 지점에 버가모(Pergamum)입니다.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70km를 가면 두아디라(Thyatira)입니다. 다시 남쪽으로 40km를 가면 사데(Sardis)입니다. 사데에서 동남동으로 48km 이동하면 빌라델비아( Philadelphia)가 나오고, 남동쪽으로 60km지점에 라오디게아(Laodicea)가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소아시아 지방의 역사, 지리, 경제, 문화를 환히 알고 그것을 토대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1절에서 3절 그리고 6절을 보면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오늘 첫 번째로
I. 에베소교회를 칭찬하시는 주님(1-3,6)
로마제국시대에 아시아의 총독관저는 버가모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원로원들이 직무를 맡기 위해서 들어오는 첫 도착지가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거기에 에베소에는 달의 여신 다이아나(Artemis)의 신당이 있었습니다. 이 신당은 고대의 7대불가사의 중 하나였습니다. 주전 29년에 그 신전의 일부가 로마의 여신과 로마황제숭배를 위해 주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시리아의 안디옥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중해 동쪽의 세 개의 큰 도시였습니다.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 신당은 아시아의 은행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인구만 해도 22,5000명이나 되는 거대한 항구였습니다. 따라서 에베소는 로마제국 내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이 갈구하는 돈이 풍성하였습니다. 우상의 세력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황제숭배우상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입지는 좁고 좁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어떤 칭찬을 받았습니까? 내가 네 행위들(e[rga)을 안다(oi\da)는 것입니다. 네가 많이 수고(kovpon)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uJpomonhvn)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더욱 악한 자들을 교회에 불러들이지 않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에베소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기를 ‘내가 사도라’했을 때 진짜 사도인지, 가짜인지 시험해서 가짜인 것을 드러낸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찬할 것이 또 있는데, 너희 교회가 내 이름을 위해 참고(uJpomonhv), 견디는 것을(ejbavstasa") 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게으르지 아니한 것(ouj kekopivaka")을 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복음적인 교회였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무척이나 인내한 교회였습니다. 구별된 거룩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의 가르침대로 하려 하는 정통교회였습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견딜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민주적인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많은 시련이 겹치고 겹쳤습니다. 그럼에도 에베소교회는 참된 교리를 지키는데 열정을 다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는데 지치지 않았습니다. 과거 바울이 세운 교회답게 바울의 권면을 충성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거짓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뭐라 말하십니까? ‘내가 안다.’(oi\da)입니다. 당시 도미티안(Domitianus)의 치하에 있었던 에베소 교회는 심하게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칭찬했습니다. 칭찬 한 것이 한두 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해를 받은 것을 알고,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계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들의 칭찬하실 점을 찾는다면 무엇을 찾을까요? 우리의 어떤 점을 칭찬하실까요? 에베소교회만큼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만일에 에베소교회만큼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하시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너희가 사람 많은 교회를 두고도, 작은 교회인 예수촌교회에 온 것을 안다. 너희가 나의 교회인 예수촌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있음을 내가 알고 있다. 너희가 나의 교회를 위해서 밤낮 수고함을 내가 알고 있다는 칭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에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핍박 속에서 주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의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가짐입니다. 죄안에 있는 우리들의 마음때문입니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는 마음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는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머리되신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누가 와서 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여러분이 하나 될 때 모든 인생사가 풀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작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자는 세상에서 만족한 삶을 삽니다.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지금 주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바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바로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서,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서, 여러분의 교회를 위해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의 장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4절과 5절, 7절을 보면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II.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4,5,7).
사람들의 역사에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왕들은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국민들의 마음을 읽으면 바르게 정치할 수 있는데 국민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옳은 말을 듣지 않고 실패의 길로 갑니다.
이집트의 바로를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로자신의 생애에서 그러한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무수한 개구리가 육지로 상륙했습니다. 이가 생기고, 불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항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팔아도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완전히 망했습니다. 이집트의 전쟁무기가 한 순간에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군인들이 홍해에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에게 칭찬을 하신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책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책망한다는 말은 ‘꾸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를 대적한다’(kata;/속격)는 뜻입니다. 잠시 불러다놓고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대적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듣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호적에서 빼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th;n ajgavphn sou th;n prwvthn ajfh'ka". ‘너희가 그 처음 그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에 있었던 처음의 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책망사항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서 Hendricksen은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행위와 수고,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나 수고 그리고 인내는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족의 내무장관인 아내가 남편과 아들들을 위해서 소문이 날 정도로 충성과 열의를 다 한다 해도 거기에 사랑의 결핍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에 대해서 세밀한 부분까지 살피는 것은 임무와 책임감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성도가 교회에 잘 출석하고 헌금과 기타 교회의 모든 규례를 잘 지킬 수 있는 것은 첫 믿음 때 가졌던 주님께 대한 헌신의 열정이 없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좋은 점을 많이 가진 자는 또한 그만큼 잘못된 점도 많이 가질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다 주시하고 계신다. 에베소교회의 잘못된 점은 그들의 사랑과 열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사랑과 열심 그 자체에서 떠나거나, 그것들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처음에나타내었던 사랑의 강렬한정도를 잃었다는 것이다. 열정이 전보다 식어졌다는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설립한지 40년이 넘었습니다. 설립했던 사람들은 모두 주님께 간 것입니다. 사도요한의 시대 에베소교회는 그 후의 세대였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부모가 가졌던 열렬한 열정이 없었습니다. 복음을 처음에 대했던 열정(passions)이 없었습니다. 처음의 자발적인 활동의 열정(passions)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선대들이 가졌던 그리스도를 위한 사명감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열정(passions)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열정(passions)이 없어졌습니다. 모두 열정(passions)이 없이 의무와 책임감으로만 일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여러 면으로 첫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일 중심으로 하면 주님의 사랑에 대한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복음화 시킨다고 동분서주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무감만 있다면, 주님에 대한 열정(passions)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무의미한 신앙생활에서 첫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같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잘 나가는 야구선수들은 원래부터 기술이 좋아서 홈런을 치고 안타를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엄청난 연습벌레들입니다. 날마다 셀 수없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습한 결과 어떻습니까? 홈런을 치고 안타를 치고 도루를 합니다. 팀의 발전에 월등하게 기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수들은 팀에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한 몫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열정이 없는 에베소교회에게 세 가지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전의 사랑의 열정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정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열정이 지금은 없는 것을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네 촛대를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너의 교회에서 떠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에베소교회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에베소교회의 촛대는 옮겨져 버렸습니다. 회교도들에 의해서 에베소교회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에베소교회 수km 안에 한 개의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만 생명의 과실을 먹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에덴에 숨겨두셨던 영생하는 과실을 먹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점은 계속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으로 꽉 차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열정으로 꽉 차 있도록 날마다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시는 주님을 믿고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생활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주변이 우리를 속이고 압박하더라도 오직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른 구제(마태복음6:2-4)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동을 지적하면서 그 예로 구제와 금식,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가 신앙의 척도는 아닙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예로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절대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구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했습니다. 내가 구제한다고 나팔을 불어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미 이들이 구제한 상을 다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외식(uJpokrithv"/휘포크리테스)란 원래 극장가에서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즉 연기자가 마음에도 없는 것을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기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악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실제 행동이 아닙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위해서 배역이 맡겨졌을 뿐입니다. 선한 역, 악한 역이 맡겨져서 그대로 할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빵이 필요한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당시에 구제는 각자 능력껏 구제 기금을 부담하는 “종교적인”단체에 의해서 했습니다. 이 구제기금은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보충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지를 위한 기부금이 회당에서 공개되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공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으로 구제를 위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내용은 없고, show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상할 근거를 남겨두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그들은 주는 체 하였으나 실상은 받고자 했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구제는 다른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하느냐? 자기 자신이 구제를 하고도 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허영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5위 안에 드는 재벌들이 연말연시에 기부를 할 때 겨우 1억을 하면서 방송에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제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월드비전이나 유니세프 등의 구제가 나팔을 부는 구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난민들인 불우한 사람들이 구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제할 마음은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구제하는 척은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구제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구제, 자기가 구제를 함으로 영광을 가로채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연극 같은 구제는 본인에게도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조차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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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마태복음6:1)
5장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유대의 랍비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해서 가르쳤습니다(5). 살인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21). 사회와 가정문제인 간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27). 이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31). 서원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33). 원수 갚는 것에 대해서 가르쳤으며(5:38), 이웃과 원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쳤습니다(5:43). 조상들의 유전과 랍비들의 가르침으로 가르쳤지만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참신앙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참 신앙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6장부터는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를 예수님이 대조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의를 행하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전시하기 위한 의는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한 의가 아니라 꾸밈없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점에서 잘못 행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전시효과만을 노렸습니다. 모든 행동이 계산된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과 주의와 칭찬만 받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행동으로 인해서 상(misqov"/보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받으면(言語로라도), 하나님께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말로라도 보상을 받으면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을 말살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의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참 신앙적인 마음이 없이 외식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진정한 의는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행위만 남았는데 그것이 신앙처럼 정형화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展示效果를 굉장히 노립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향상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려고만 하고,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득을 보지 못하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실적을 체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어디를 어떻게 도왔네, 어떤 교회를 돕고, 어떤 단체를 돕고 있네, 하고 광고하면 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상을 기대하고, 하늘의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상은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세상의 상보다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