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4)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10.01.11
    모형적인 주의 기도
  2. 2010.01.10
    올바른 기도
  3. 2010.01.09
    에베소교회에게 명령하시는 주님
  4. 2010.01.09
    바른 구제
  5. 2010.01.08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6. 2010.01.07
    원수를 대하는 태도
  7. 2010.01.06
    보복에 관하여
  8. 2010.01.05
    열정이 없었던 라오디게아교회 1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의 기도”는 모형적인 기도였습니다. 주기문은 공동기도문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모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 분

기 도

내 용

의 미

서언

기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의 성호를 부름

하나님께 관한기도

제1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 이름이 찬양받기를 간구

제2간구

나라이 임하옵시며

천국이 속히 이르기 원함

제3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간구함.

인간에

관한기도

제4간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간구함.

제5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 용서를 간구함.

제6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유혹에서 구원을 간구함.

결 언

송 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의 응답을 간구함.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간구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섯 간구들(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간구합니다. 첫 세 간구는 아버지의 이름과 그의 나라, 그의 뜻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세 간구는 일용할 양식, 죄용서, 악한 자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들을 위한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사 세 간구와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를 위해서 세 간구인데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다섯 번째 · 여섯번째 간구), 우리의 현재의 필요를 위해서 네 번째 간구,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여섯 번째 간구입니다. 우리들의 것만 아니라 형제들의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도문에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돈이 필요 없는 어떤 대형교회는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영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상당히 신령한 것 같은 말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을 초월한 것 같은 말입니다. 자신들은 돈이 있을 만큼 있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처럼 설교하지만 실상은 틀렸습니다. 기도문부터 매일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육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양식과 용서를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하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2010.01.13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2010.01.12
올바른 기도  (0) 2010.01.10
바른 구제  (0) 2010.01.09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2010.01.08
And

올바른 기도(마태복음6:5-8)

신앙이란 사람 개개인들의 살기 위한 행동과 마음가짐입니다. 즉 신앙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본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행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도 역시 ‘보이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이 필요해서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과시형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은 기도의 시간을 정해두었습니다. 다니엘 같은 경우는 오전과 오후와 밤에 기도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서는 이 기도시간을 맞추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여건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회당이나 거리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 어디서나 기도를 하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들은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을 택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정죄했습니다. 이미 그러한 행동으로 이들도 자기들의 상을 사람들로부터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신앙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은밀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하셨습니다.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입니다. 기도실을 따로 두고 기도했다고 광고를 하면 바리새인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생각과 마음의 자세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또한 화려한 美辭麗句(미사여구)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미사여구가 아니라도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외식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자꾸만 나타내려고 합니다.

오늘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신을 나타내려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이나 했다고 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교회가 이런 것은 세계제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간증하는 사람들 등으로 교회는 점점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거의 축복 일색이요, 세속화된 과시들이 너무나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버린 것들을 주워서 그것을 보석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을 좀먹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2010.01.12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2010.01.11
바른 구제  (0) 2010.01.09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2010.01.08
원수를 대하는 태도  (0) 2010.01.07
And

에베소교회에게 명령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1-7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의 뜻은 반드시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로 ‘Noah’란 뜻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Abraham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름과 함께 숫자도 성경에서는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7’이란 숫자는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도 이러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즉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로부터 교회사에 나타난 일들이 이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일곱 교회의 양상이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는 로마총독이 지배하는 아시아의 속주입니다. 오늘날 터키의 서부지방입니다.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가 사마리아, 이두메, 유대지방을 다스리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교회는 바울사도 때부터 순회하던 순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에베소(Ephesus)에서 북쪽으로 약 60km를 가면, 서머나(Smyrna)입니다. 더 북쪽으로 60km 지점에 버가모(Pergamum)입니다.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70km를 가면 두아디라(Thyatira)입니다. 다시 남쪽으로 40km를 가면 사데(Sardis)입니다. 사데에서 동남동으로 48km 이동하면 빌라델비아( Philadelphia)가 나오고, 남동쪽으로 60km지점에 라오디게아(Laodicea)가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소아시아 지방의 역사, 지리, 경제, 문화를 환히 알고 그것을 토대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1절에서 3절 그리고 6절을 보면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오늘 첫 번째로

I. 에베소교회를 칭찬하시는 주님(1-3,6)

로마제국시대에 아시아의 총독관저는 버가모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원로원들이 직무를 맡기 위해서 들어오는 첫 도착지가 에베소였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거기에 에베소에는 달의 여신 다이아나(Artemis)의 신당이 있었습니다. 이 신당은 고대의 7대불가사의 중 하나였습니다. 주전 29년에 그 신전의 일부가 로마의 여신과 로마황제숭배를 위해 주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시리아의 안디옥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중해 동쪽의 세 개의 큰 도시였습니다.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 신당은 아시아의 은행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인구만 해도 22,5000명이나 되는 거대한 항구였습니다. 따라서 에베소는 로마제국 내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이 갈구하는 돈이 풍성하였습니다. 우상의 세력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황제숭배우상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입지는 좁고 좁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어떤 칭찬을 받았습니까? 내가 네 행위들(e[rga)을 안다(oi\da)는 것입니다. 네가 많이 수고(kovpon)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uJpomonhvn)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더욱 악한 자들을 교회에 불러들이지 않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에베소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기를 ‘내가 사도라’했을 때 진짜 사도인지, 가짜인지 시험해서 가짜인 것을 드러낸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찬할 것이 또 있는데, 너희 교회가 내 이름을 위해 참고(uJpomonhv), 견디는 것을(ejbavstasa") 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게으르지 아니한 것(ouj kekopivaka")을 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복음적인 교회였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무척이나 인내한 교회였습니다. 구별된 거룩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의 가르침대로 하려 하는 정통교회였습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견딜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민주적인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많은 시련이 겹치고 겹쳤습니다. 그럼에도 에베소교회는 참된 교리를 지키는데 열정을 다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는데 지치지 않았습니다. 과거 바울이 세운 교회답게 바울의 권면을 충성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거짓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뭐라 말하십니까? ‘내가 안다.’(oi\da)입니다. 당시 도미티안(Domitianus)의 치하에 있었던 에베소 교회는 심하게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칭찬했습니다. 칭찬 한 것이 한두 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해를 받은 것을 알고,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계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들의 칭찬하실 점을 찾는다면 무엇을 찾을까요? 우리의 어떤 점을 칭찬하실까요? 에베소교회만큼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만일에 에베소교회만큼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하시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너희가 사람 많은 교회를 두고도, 작은 교회인 예수촌교회에 온 것을 안다. 너희가 나의 교회인 예수촌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있음을 내가 알고 있다. 너희가 나의 교회를 위해서 밤낮 수고함을 내가 알고 있다는 칭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에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핍박 속에서 주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의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가짐입니다. 죄안에 있는 우리들의 마음때문입니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는 마음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는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머리되신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누가 와서 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여러분이 하나 될 때 모든 인생사가 풀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작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자는 세상에서 만족한 삶을 삽니다.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지금 주님께서 여러분의 헌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바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바로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서,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서, 여러분의 교회를 위해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의 장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4절과 5절, 7절을 보면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II.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4,5,7).

사람들의 역사에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왕들은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국민들의 마음을 읽으면 바르게 정치할 수 있는데 국민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옳은 말을 듣지 않고 실패의 길로 갑니다.

이집트의 바로를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로자신의 생애에서 그러한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무수한 개구리가 육지로 상륙했습니다. 이가 생기고, 불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항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팔아도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완전히 망했습니다. 이집트의 전쟁무기가 한 순간에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군인들이 홍해에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에게 칭찬을 하신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책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책망한다는 말은 ‘꾸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를 대적한다’(kata;/속격)는 뜻입니다. 잠시 불러다놓고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대적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듣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호적에서 빼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th;n ajgavphn sou th;n prwvthn ajfh'ka". ‘너희가 그 처음 그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에 있었던 처음의 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책망사항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서 Hendricksen은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행위와 수고,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나 수고 그리고 인내는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족의 내무장관인 아내가 남편과 아들들을 위해서 소문이 날 정도로 충성과 열의를 다 한다 해도 거기에 사랑의 결핍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에 대해서 세밀한 부분까지 살피는 것은 임무와 책임감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성도가 교회에 잘 출석하고 헌금과 기타 교회의 모든 규례를 잘 지킬 수 있는 것은 첫 믿음 때 가졌던 주님께 대한 헌신의 열정이 없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좋은 점을 많이 가진 자는 또한 그만큼 잘못된 점도 많이 가질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다 주시하고 계신다. 에베소교회의 잘못된 점은 그들의 사랑과 열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사랑과 열심 그 자체에서 떠나거나, 그것들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처음에나타내었던 사랑의 강렬한정도를 잃었다는 것이다. 열정이 전보다 식어졌다는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설립한지 40년이 넘었습니다. 설립했던 사람들은 모두 주님께 간 것입니다. 사도요한의 시대 에베소교회는 그 후의 세대였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부모가 가졌던 열렬한 열정이 없었습니다. 복음을 처음에 대했던 열정(passions)이 없었습니다. 처음의 자발적인 활동의 열정(passions)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선대들이 가졌던 그리스도를 위한 사명감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열정(passions)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열정(passions)이 없어졌습니다. 모두 열정(passions)이 없이 의무와 책임감으로만 일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여러 면으로 첫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일 중심으로 하면 주님의 사랑에 대한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복음화 시킨다고 동분서주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무감만 있다면, 주님에 대한 열정(passions)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무의미한 신앙생활에서 첫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같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잘 나가는 야구선수들은 원래부터 기술이 좋아서 홈런을 치고 안타를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엄청난 연습벌레들입니다. 날마다 셀 수없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습한 결과 어떻습니까? 홈런을 치고 안타를 치고 도루를 합니다. 팀의 발전에 월등하게 기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수들은 팀에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한 몫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열정이 없는 에베소교회에게 세 가지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전의 사랑의 열정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정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열정이 지금은 없는 것을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네 촛대를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너의 교회에서 떠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에베소교회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에베소교회의 촛대는 옮겨져 버렸습니다. 회교도들에 의해서 에베소교회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에베소교회 수km 안에 한 개의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만 생명의 과실을 먹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에덴에 숨겨두셨던 영생하는 과실을 먹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점은 계속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으로 꽉 차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열정으로 꽉 차 있도록 날마다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시는 주님을 믿고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생활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주변이 우리를 속이고 압박하더라도 오직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And

바른 구제(마태복음6:2-4)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동을 지적하면서 그 예로 구제와 금식,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가 신앙의 척도는 아닙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예로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절대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구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했습니다. 내가 구제한다고 나팔을 불어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미 이들이 구제한 상을 다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외식(uJpokrithv"/휘포크리테스)란 원래 극장가에서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즉 연기자가 마음에도 없는 것을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기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악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실제 행동이 아닙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위해서 배역이 맡겨졌을 뿐입니다. 선한 역, 악한 역이 맡겨져서 그대로 할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빵이 필요한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당시에 구제는 각자 능력껏 구제 기금을 부담하는 “종교적인”단체에 의해서 했습니다. 이 구제기금은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보충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지를 위한 기부금이 회당에서 공개되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공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으로 구제를 위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내용은 없고, show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상할 근거를 남겨두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그들은 주는 체 하였으나 실상은 받고자 했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구제는 다른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하느냐? 자기 자신이 구제를 하고도 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허영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5위 안에 드는 재벌들이 연말연시에 기부를 할 때 겨우 1억을 하면서 방송에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제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월드비전이나 유니세프 등의 구제가 나팔을 부는 구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난민들인 불우한 사람들이 구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제할 마음은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구제하는 척은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구제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구제, 자기가 구제를 함으로 영광을 가로채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연극 같은 구제는 본인에게도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조차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2010.01.11
올바른 기도  (0) 2010.01.10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2010.01.08
원수를 대하는 태도  (0) 2010.01.07
보복에 관하여  (0) 2010.01.06
And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마태복음6:1)

5장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유대의 랍비들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해서 가르쳤습니다(5). 살인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21). 사회와 가정문제인 간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27). 이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31). 서원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5:33). 원수 갚는 것에 대해서 가르쳤으며(5:38), 이웃과 원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쳤습니다(5:43). 조상들의 유전과 랍비들의 가르침으로 가르쳤지만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참신앙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참 신앙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6장부터는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를 예수님이 대조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의를 행하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전시하기 위한 의는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한 의가 아니라 꾸밈없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점에서 잘못 행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전시효과만을 노렸습니다. 모든 행동이 계산된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과 주의와 칭찬만 받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행동으로 인해서 상(misqov"/보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받으면(言語로라도), 하나님께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말로라도 보상을 받으면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을 말살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의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참 신앙적인 마음이 없이 외식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진정한 의는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행위만 남았는데 그것이 신앙처럼 정형화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展示效果를 굉장히 노립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향상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려고만 하고,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득을 보지 못하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실적을 체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어디를 어떻게 도왔네, 어떤 교회를 돕고, 어떤 단체를 돕고 있네, 하고 광고하면 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상을 기대하고, 하늘의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상은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세상의 상보다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바른 기도  (0) 2010.01.10
바른 구제  (0) 2010.01.09
원수를 대하는 태도  (0) 2010.01.07
보복에 관하여  (0) 2010.01.06
맹세에 관하여  (0) 2010.01.05
And

원수를 대하는 태도(마태복음5:41-48)

유대인들은 이웃을 동족에게만 국한시켰습니다. 개종한 사람들도 이웃의 범위에 넣었습니다. 그 외는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원수였고, 죄수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웃은 사랑하고(ajgapavw), 원수는 미워하라(misevw)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한 사람에게 모두 햇빛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비 또한 구분하지 않고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끼리 사랑하면 무슨 상(misqov")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리들도 자신들끼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만 문안(ajspavzomai)하면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이와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같이 온전(tevleio")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분류하는 장벽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들의 지파는 열두 지파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와 베냐민 지파여야 했습니다. 같은 이스라엘이라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치지 않았습니다. 아예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리나 창기를 가장 더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국경 넘어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웃을 확대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이웃이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도 저주를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였습니다.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똑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면 타국으로 영토가 정확합니다. 도경계를 넘어 살면 호남이냐 경남이냐 하고, 학교출신별을 따집니다. 민족, 혈연, 지연, 학연, 당파 등이 세상의 발전을 막고 있습니다. 어쩌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원수보다 더 멀리 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패를 갈라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좌파다 우파다 교회가 나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생각을 너무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원수관계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원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 났다고 네편, 내편 가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의 국제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나라에만 국한시키려 했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원자이지, 유대인만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른 구제  (0) 2010.01.09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2010.01.08
보복에 관하여  (0) 2010.01.06
맹세에 관하여  (0) 2010.01.05
이혼에 대하여  (0) 2010.01.04
And

보복에 관하여(마태복음5:38-42)

전자공학도였던 이란 여성 아메네 바흐라미(31)는 5년 전 커다란 갈색 눈 양쪽을 모두 잃었습니다. 아름답던 얼굴도 흉측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자신을 stalking하던 남성이 청혼을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얼굴에 뿌린 황산 때문입니다. 20일 CNN방송에 따르면 ‘바흐라미’는 2002년 대학에서 알게 된 ‘마지드 모바헤디’의 구애에 2년간 시달렸습니다. 그는 수시로 그녀에게 매달리거나 협박하며 만남을 요청했고, “결혼 요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2004년 11월 어느 날, ‘바흐라미’는 퇴근길에 ‘모바헤디’로부터 황산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쥐며 울부짖었지만 때가 늦었습니다. 얼굴은 물론이고 손과 팔에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바흐라미는 법정에서 “내가 당한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그의 두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슬람 샤리아법은 가해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되갚음을 해주는 방식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이란 법원은 ‘바흐라미’의 요구대로 ‘모바헤디’의 눈을 멀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이 3일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습니다.

동상동해법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일반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법입니다. 출애굽기 21:24,25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24:20의 “파상은 파상으로”, 신19:21의 “생명은 생명으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언뜻 생각나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일을 억제하기 위해서 정해 놓으신 민사법정의 율법입니다. 구약성경은 “네가 부당한 일을 당하였거든 언제라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라” 는 뜻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네가 직접 보복할 것이 아니요 공적으로 공의가 시행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에 호소하여 개인적인 보복과 분풀이를 정당화했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하신 말씀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뺨을 치고자 하는 대적의 의도도, 나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것도,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것도, 내게 꾸고자 하는 의도도 모두 예수님께서 당시의 관습된 것들을 깨트리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대적하면 천국의 자녀들은 보호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에서는 惡과 毒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악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멈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우고 보복하는 것보다 참아야 하고 양보해야 하며, 봉사와 희생이 어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새 흔히 서울의 어떤 대형교회들 목사들 말처럼 교회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의 삶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보복금지나 무저항주의의 삶이 아니라 악으로 선을 이기는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  (0) 2010.01.08
원수를 대하는 태도  (0) 2010.01.07
맹세에 관하여  (0) 2010.01.05
이혼에 대하여  (0) 2010.01.04
간음에 대하여  (0) 2010.01.03
And

열정이 없었던 라오디게아교회

요한계시록3:14-22 󰋫 2009.11.29

사람들이 어떤 일들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손해를 보는 예가 많습니다. 특히 더운 열대지방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산에 나가기만 하면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먹을 것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잘살지 못하는 나라가 많습니다. 이런 나라들을 추운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이들이 가서 누리게 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이와 비슷한 교회가 있습니다. 14절에서 19절을 보면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성경을 기록한지 2000년이 지난 오늘 읽기만 해도 라오디게아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열정을 가지라고 하신 예수님(14-19).

착하다고 하는 것들에 우리가 점수를 많이 줍니다. 왜냐하면 사회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질이 많은 것을 사람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착하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또한 너무나 물질이 많으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6ㆍ25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인민군들이 집집마다 사람들을 찾으려고 뒤지고 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밭에 쌓아놓은 짚더미에 숨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 집에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에게 착하게 대한다고 숨은 곳을 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는 모른 체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물질을 놓고서 많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져도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점은 무엇입니까? 물질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도 강과 해안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했습니다. 주전133년에 로마의 순회재판소가 설치됨으로 해서 전략적으로, 행정상으로, 상업적으로 번창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은행을 예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는 유난히도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주후 17년에 소아시아에 대규모 지진이 있었습니다. 사데와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를 강타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 도시에 복구비를 어느 정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60년에 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로마황궁은 복구비를 전액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능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라오디게아사람들은 너무나 부자라 사람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편안하다보니 신앙이 미지근했습니다. 얼마나 미지근했습니까? 역겨울 정도로 미지근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다른 것들은 모두 있었는데 물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돈 많은 라오디게아는 물 부족을 위해서 수도관을 통해 다른 도시로부터 물을 끌어왔습니다. 남쪽으로 16km나 되는 골로새지방에서 찬물을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로 오는 동안에 물이 역겹게 미지근하였습니다. 북쪽으로 11km 지점에 히에라폴리스에서 뜨거운 온천물을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에 오는 동안에 역시 역겨울 만큼 미지근한 물이 되었습니다. 물은 차갑든지 뜨겁든지 해야 마실 수 있습니다. 미지근하면 마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한 이유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열심을 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믿음을 채근하십니다.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열정을 가지라’(zhleuvw/젤류오)는 말로서 조금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똑같은 단어를 사도행전7:9에서는 “시기하다”로 썼습니다. 남을 시기하듯이 신앙생활에 열정을 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4에서는 “투기한다”로 ‘젤류오’를 썼습니다. 남을 투기하듯이 신앙에 열정을 내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어떤 열정을 가져야 합니까? 라오디게아교회는 세상의 부요함에 잔뜩 빠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라고 했지만, 주님은 최고로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양모와 의류사업으로 좋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벌거벗었다고 했습니다. 안약의 공장이 있었던 그들은 좋은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소경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신앙의 열정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돈이 많다고 했지만, 너희 영혼은 무척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너희영혼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희영혼의 눈은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먼저 너희들이 가난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토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부요해보지 않아서 부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면 신앙생활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5:2에서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죄를 깨닫고 절망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물질이 부요하면 영적으로도 부요한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고 있으면, 천국으로 이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좀 착하게 살면, 천국으로 이어지는 줄 압니다. 몸이 편안하면 신앙생활이 둔해집니다. 먹고살기가 편안해지면, 신앙생활이 게을러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열정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찬물과 뜨거운 물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지근한 물은 마시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흐리멍텅함은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됩니다. ‘토해버리리라’는 뜻은 극도로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미지근한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부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열정은 모닥불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열정을 지펴야 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열정으로 뒤엎었습니다. 무한한 신앙의 열정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활할 타오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활활 타오릅시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합시다. 우리가 반드시 열정적인 신앙을 소유하십시다.

오늘 두 번째로 19절에서 22절을 읽어봅시다.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II. 회개하라고 하신 예수님(19-22).

사람들은 종교를 생각할 때 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마다, 가장 좋은 곳에 가게 하는 것이 ‘착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해야 좋은 곳에 갈수 있지, 착하지 않으면 갈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들은 이 말에 긍정할지라도, 우리들은 ‘아니요’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의 진리는 헝클어져 버립니다. 성도들은 어떤 종교보다 착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마크가 윤리라고 정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칸트(Immanuel Kant)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그리고 슐라이어마흐(Friedrich Schleiemacher)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 하시고’ ‘윤리적인 문화 안에 내재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삶에서 종교적 부분을 하나의 특별한 영역으로 분리하려 했습니다. Kant는 ‘도덕’, Hegel은 ‘지성’, Schleiemacher는 ‘직관’이었습니다. 즉 이것이 없으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후로 사람들은 기독교를 성경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하고 사람들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후로 이들 신학자들로 인해서 기독교가 점점 세속화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가 시대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이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철학자들이 말하는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코기토 에르고 숨’(Cōgitō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심할 이유가 있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러면 자신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의심할 수 있어도 그것들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해야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없이는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입니다. 이 말의 뜻을 알면 무서운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맞지 않으면 성경이라도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으면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돈을 많이 가지거나 지식을 많이 가지거나 하면, 갑자기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특히 돈이 풍성하면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돈이 많아지더라도 이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책망 받은 사항이 무엇입니까?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도 착해, 마음도 착해, 물질도 착해, 더 착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자신만만했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려고 손을 내밀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이들의 말이 모두 틀렸습니다. 그들의 실상은 모든 것들이 부족했습니다. “비참했습니다.” “가련했습니다.” “궁핍했습니다.” “그들은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유하게 할 금 곧 신앙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입을 흰 옷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증거를 사라고 했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안약 즉하나님의 용서함을 바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빨리 회개하고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셨습니다. 너희들이 회개하고 문밖에 나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너희들이 산다는 것입니다. 20절과 22절을 보면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Holman Hunt의 ‘세상의 빛 되신 그리스도’(The Light of the World/1904작/1827- 1910)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헌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는 문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많은 비평가들이 작품평을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헌트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걸작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한 가지 잘못된 데가 있습니다. 헌트 당신은 문에 손잡이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걸 당신이 빠트린 것입니다.’ 헌트는 ‘그건 실수가 아닙니다. 손잡이는 문 안쪽에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일이 술술 잘 풀려갈 때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몰려올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성공했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보시기에 성공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성공한 사람이 정녕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클레이의 예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살았는데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그만 죽었습니다. 이 부자도 예수는 믿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의 안내로 자기가 거할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고 있는 중에 여러 아름다운 저택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멸시하고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저 정도니 나는 어떨까?’하고 잔뜩 기대하고서 자신이 거할 집을 안내받았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정말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이의제기를 했답니다. 그러자 그 앞에 그 여인의 행적이 자동으로 떴습니다. 우리는 네가 보낸 물질로 네 집을 지었단다.

우리가 현 세상에서 물질로 생활을 부유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동시에 영혼을 메마르게 하기는 쉬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몸은 아끼면서 영혼은 아끼지 않습니다. 몸을 위해서는 초고층 빌딩도 아깝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사하라사막에 있는 줄을 모릅니다. 몸을 위해서는 최고급 음식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서는 차가운 물 한 컵도 생각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영혼을 과연 생각할까요? 그 아름다운 몸이 무덤에 들어가 한줌 흙으로 변한다는 것을 생각할까요? 만일에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후의 삶들이 숙연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열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도도 열정적으로 하고, 말씀도 열정적으로 들으며, 신앙생활도 열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먹자는 말씀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루 세끼를 우리와 같이 먹었습니다. 아침은 간단히 포도주에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었다고 합니다. 점심은 집에서 먹지 않고 있는 곳에서 간단히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은 다릅니다. 그 날 중에 가장 잘 차려먹습니다. 일도 끝났습니다. 시간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야기도 하며 식사시간을 보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먹을 것이다’할 때 저녁식사시간(deipnevw)을 말합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리고 지난 것들을 회개하면, 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우리와 함께 주님께서 같이 오래오래 먹겠다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 회개하는 신앙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