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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대하는 태도(마태복음5:41-48)
유대인들은 이웃을 동족에게만 국한시켰습니다. 개종한 사람들도 이웃의 범위에 넣었습니다. 그 외는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원수였고, 죄수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웃은 사랑하고(ajgapavw), 원수는 미워하라(misevw)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한 사람에게 모두 햇빛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비 또한 구분하지 않고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끼리 사랑하면 무슨 상(misqov")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리들도 자신들끼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만 문안(ajspavzomai)하면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이와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같이 온전(tevleio")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분류하는 장벽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들의 지파는 열두 지파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와 베냐민 지파여야 했습니다. 같은 이스라엘이라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치지 않았습니다. 아예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리나 창기를 가장 더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국경 넘어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웃을 확대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이웃이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도 저주를 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였습니다.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똑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면 타국으로 영토가 정확합니다. 도경계를 넘어 살면 호남이냐 경남이냐 하고, 학교출신별을 따집니다. 민족, 혈연, 지연, 학연, 당파 등이 세상의 발전을 막고 있습니다. 어쩌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원수보다 더 멀리 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패를 갈라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좌파다 우파다 교회가 나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생각을 너무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원수관계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원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 났다고 네편, 내편 가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의 국제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나라에만 국한시키려 했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원자이지, 유대인만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복에 관하여(마태복음5:38-42)
전자공학도였던 이란 여성 아메네 바흐라미(31)는 5년 전 커다란 갈색 눈 양쪽을 모두 잃었습니다. 아름답던 얼굴도 흉측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자신을 stalking하던 남성이 청혼을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얼굴에 뿌린 황산 때문입니다. 20일 CNN방송에 따르면 ‘바흐라미’는 2002년 대학에서 알게 된 ‘마지드 모바헤디’의 구애에 2년간 시달렸습니다. 그는 수시로 그녀에게 매달리거나 협박하며 만남을 요청했고, “결혼 요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2004년 11월 어느 날, ‘바흐라미’는 퇴근길에 ‘모바헤디’로부터 황산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쥐며 울부짖었지만 때가 늦었습니다. 얼굴은 물론이고 손과 팔에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바흐라미는 법정에서 “내가 당한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그의 두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슬람 샤리아법은 가해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되갚음을 해주는 방식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이란 법원은 ‘바흐라미’의 요구대로 ‘모바헤디’의 눈을 멀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이 3일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습니다.
동상동해법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일반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법입니다. 출애굽기 21:24,25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24:20의 “파상은 파상으로”, 신19:21의 “생명은 생명으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언뜻 생각나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일을 억제하기 위해서 정해 놓으신 민사법정의 율법입니다. 구약성경은 “네가 부당한 일을 당하였거든 언제라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라” 는 뜻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네가 직접 보복할 것이 아니요 공적으로 공의가 시행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에 호소하여 개인적인 보복과 분풀이를 정당화했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하신 말씀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뺨을 치고자 하는 대적의 의도도, 나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것도,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것도, 내게 꾸고자 하는 의도도 모두 예수님께서 당시의 관습된 것들을 깨트리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대적하면 천국의 자녀들은 보호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에서는 惡과 毒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악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멈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우고 보복하는 것보다 참아야 하고 양보해야 하며, 봉사와 희생이 어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새 흔히 서울의 어떤 대형교회들 목사들 말처럼 교회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의 삶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보복금지나 무저항주의의 삶이 아니라 악으로 선을 이기는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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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 없었던 라오디게아교회
요한계시록3:14-22 2009.11.29
사람들이 어떤 일들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손해를 보는 예가 많습니다. 특히 더운 열대지방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산에 나가기만 하면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먹을 것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잘살지 못하는 나라가 많습니다. 이런 나라들을 추운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이들이 가서 누리게 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이와 비슷한 교회가 있습니다. 14절에서 19절을 보면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성경을 기록한지 2000년이 지난 오늘 읽기만 해도 라오디게아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I. 열정을 가지라고 하신 예수님(14-19).
착하다고 하는 것들에 우리가 점수를 많이 줍니다. 왜냐하면 사회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질이 많은 것을 사람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착하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또한 너무나 물질이 많으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6ㆍ25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인민군들이 집집마다 사람들을 찾으려고 뒤지고 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밭에 쌓아놓은 짚더미에 숨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 집에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에게 착하게 대한다고 숨은 곳을 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는 모른 체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물질을 놓고서 많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져도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점은 무엇입니까? 물질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도 강과 해안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했습니다. 주전133년에 로마의 순회재판소가 설치됨으로 해서 전략적으로, 행정상으로, 상업적으로 번창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은행을 예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는 유난히도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주후 17년에 소아시아에 대규모 지진이 있었습니다. 사데와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를 강타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 도시에 복구비를 어느 정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60년에 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로마황궁은 복구비를 전액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능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라오디게아사람들은 너무나 부자라 사람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편안하다보니 신앙이 미지근했습니다. 얼마나 미지근했습니까? 역겨울 정도로 미지근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다른 것들은 모두 있었는데 물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돈 많은 라오디게아는 물 부족을 위해서 수도관을 통해 다른 도시로부터 물을 끌어왔습니다. 남쪽으로 16km나 되는 골로새지방에서 찬물을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로 오는 동안에 물이 역겹게 미지근하였습니다. 북쪽으로 11km 지점에 히에라폴리스에서 뜨거운 온천물을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에 오는 동안에 역시 역겨울 만큼 미지근한 물이 되었습니다. 물은 차갑든지 뜨겁든지 해야 마실 수 있습니다. 미지근하면 마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한 이유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열심을 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믿음을 채근하십니다.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열정을 가지라’(zhleuvw/젤류오)는 말로서 조금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똑같은 단어를 사도행전7:9에서는 “시기하다”로 썼습니다. 남을 시기하듯이 신앙생활에 열정을 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4에서는 “투기한다”로 ‘젤류오’를 썼습니다. 남을 투기하듯이 신앙에 열정을 내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어떤 열정을 가져야 합니까? 라오디게아교회는 세상의 부요함에 잔뜩 빠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라고 했지만, 주님은 최고로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양모와 의류사업으로 좋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벌거벗었다고 했습니다. 안약의 공장이 있었던 그들은 좋은 눈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소경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신앙의 열정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돈이 많다고 했지만, 너희 영혼은 무척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너희영혼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희영혼의 눈은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먼저 너희들이 가난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토해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부요해보지 않아서 부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면 신앙생활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5:2에서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죄를 깨닫고 절망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물질이 부요하면 영적으로도 부요한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고 있으면, 천국으로 이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좀 착하게 살면, 천국으로 이어지는 줄 압니다. 몸이 편안하면 신앙생활이 둔해집니다. 먹고살기가 편안해지면, 신앙생활이 게을러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열정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찬물과 뜨거운 물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지근한 물은 마시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흐리멍텅함은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됩니다. ‘토해버리리라’는 뜻은 극도로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미지근한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부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열정은 모닥불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열정을 지펴야 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열정으로 뒤엎었습니다. 무한한 신앙의 열정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활할 타오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활활 타오릅시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합시다. 우리가 반드시 열정적인 신앙을 소유하십시다.
오늘 두 번째로 19절에서 22절을 읽어봅시다.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II. 회개하라고 하신 예수님(19-22).
사람들은 종교를 생각할 때 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마다, 가장 좋은 곳에 가게 하는 것이 ‘착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해야 좋은 곳에 갈수 있지, 착하지 않으면 갈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들은 이 말에 긍정할지라도, 우리들은 ‘아니요’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의 진리는 헝클어져 버립니다. 성도들은 어떤 종교보다 착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마크가 윤리라고 정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칸트(Immanuel Kant)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그리고 슐라이어마흐(Friedrich Schleiemacher)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 하시고’ ‘윤리적인 문화 안에 내재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삶에서 종교적 부분을 하나의 특별한 영역으로 분리하려 했습니다. Kant는 ‘도덕’, Hegel은 ‘지성’, Schleiemacher는 ‘직관’이었습니다. 즉 이것이 없으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후로 사람들은 기독교를 성경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하고 사람들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후로 이들 신학자들로 인해서 기독교가 점점 세속화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가 시대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이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철학자들이 말하는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코기토 에르고 숨’(Cōgitō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심할 이유가 있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러면 자신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의심할 수 있어도 그것들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해야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없이는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입니다. 이 말의 뜻을 알면 무서운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맞지 않으면 성경이라도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으면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돈을 많이 가지거나 지식을 많이 가지거나 하면, 갑자기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특히 돈이 풍성하면 성경이 시시해집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돈이 많아지더라도 이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책망 받은 사항이 무엇입니까?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도 착해, 마음도 착해, 물질도 착해, 더 착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자신만만했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려고 손을 내밀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이들의 말이 모두 틀렸습니다. 그들의 실상은 모든 것들이 부족했습니다. “비참했습니다.” “가련했습니다.” “궁핍했습니다.” “그들은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유하게 할 금 곧 신앙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입을 흰 옷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증거를 사라고 했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안약 즉하나님의 용서함을 바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빨리 회개하고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셨습니다. 너희들이 회개하고 문밖에 나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너희들이 산다는 것입니다. 20절과 22절을 보면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Holman Hunt의 ‘세상의 빛 되신 그리스도’(The Light of the World/1904작/1827- 1910)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헌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는 문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많은 비평가들이 작품평을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헌트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걸작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한 가지 잘못된 데가 있습니다. 헌트 당신은 문에 손잡이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걸 당신이 빠트린 것입니다.’ 헌트는 ‘그건 실수가 아닙니다. 손잡이는 문 안쪽에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일이 술술 잘 풀려갈 때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몰려올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성공했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보시기에 성공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성공한 사람이 정녕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클레이의 예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살았는데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그만 죽었습니다. 이 부자도 예수는 믿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의 안내로 자기가 거할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고 있는 중에 여러 아름다운 저택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멸시하고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저 정도니 나는 어떨까?’하고 잔뜩 기대하고서 자신이 거할 집을 안내받았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정말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이의제기를 했답니다. 그러자 그 앞에 그 여인의 행적이 자동으로 떴습니다. 우리는 네가 보낸 물질로 네 집을 지었단다.
우리가 현 세상에서 물질로 생활을 부유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동시에 영혼을 메마르게 하기는 쉬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몸은 아끼면서 영혼은 아끼지 않습니다. 몸을 위해서는 초고층 빌딩도 아깝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사하라사막에 있는 줄을 모릅니다. 몸을 위해서는 최고급 음식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서는 차가운 물 한 컵도 생각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영혼을 과연 생각할까요? 그 아름다운 몸이 무덤에 들어가 한줌 흙으로 변한다는 것을 생각할까요? 만일에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후의 삶들이 숙연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열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도도 열정적으로 하고, 말씀도 열정적으로 들으며, 신앙생활도 열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먹자는 말씀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루 세끼를 우리와 같이 먹었습니다. 아침은 간단히 포도주에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었다고 합니다. 점심은 집에서 먹지 않고 있는 곳에서 간단히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은 다릅니다. 그 날 중에 가장 잘 차려먹습니다. 일도 끝났습니다. 시간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야기도 하며 식사시간을 보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먹을 것이다’할 때 저녁식사시간(deipnevw)을 말합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리고 지난 것들을 회개하면, 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우리와 함께 주님께서 같이 오래오래 먹겠다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 회개하는 신앙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맹세에 관하여(마태복음5:33-37)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맹세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머리로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스냐? 노냐? 확실한 의사표시를 하라고 했습니다.
레위기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수가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신명기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남을 악담하고 험담하는 것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말을 신중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을시에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에 맹세의 법이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명령’이 ‘헛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를 주께 지키라’로 변질되었습니다. 원래 맹세는 서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관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사이의 맹세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금하심으로 구약의 맹세를 보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으로 맹세하거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게 맹세하는 것을 덜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로, 땅으로, 예루살렘으로, 성전으로, 제단으로 맹세하였습니다. 즉 덜 중요하기 때문에 차등을 두고자 함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구속력이 있는 맹세, 구속력이 덜한 맹세, 구속력이 전혀 없는 맹세로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성전이나 제단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기를 하는 사람들은 진짜처럼 행하려 합니다.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원칙일진데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화자를 믿게 하려고 맹세를 끄집어냅니다. 맹세하는 대신 철저하게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모든 맹세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맹세를 금하시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의 맹세, 지키지도 않으면서 남발되는 맹세를 하지말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거짓과 속임수가 없는 신실한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약속들을 남발하는 것이 아닌 진실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혼에 대하여(마태복음5:31-32)
오늘날 가족사에 이혼만큼 그 수치가 많은 건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19세기부터 국제에 문을 연 이후로 가장 외국의 영향을 받은 것 중의 하나가 이혼입니다. 이혼은 지구상에 결혼이 생긴 이래로 가장 역사가 깊은 가정사중의 하나입니다. 최근에도 삼성의 이재룡 씨와 임세령 씨의 이혼은 위자료가 5000억원이라는 데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예인들은 끊임없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민영-이찬, 명세빈, 이혜영-이상민, 김국진, 채정안, 장호일, 지누-김준희, 김진표, 이승환-채림, 오현경, 신은경, 고현정 등 이외에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이혼을 쉽게 합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사람을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즉 mind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31절을 보면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아내가 싫어지면 이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주기만 하면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탈무드에는 남성은 원하는 수만큼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탈무드법에서는 부부가 이혼하려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Shammai학파와 Hillel학파 간에 신명기24:1에 대한 해석상의 이견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이들은 “수치스런 일” ‘unseemly thing’이란 ‘사물의 적나라한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Shammai학파는 이것을 남편은 아내에게서 자기에게 불충실한 것을 발견한다면 이혼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Hillel학파는 ‘못마땅한 것’ ‘anything unseemly’으로 해석하여 ‘아내는 음식만 망쳐놓아도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R. Akiba는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했을 때 이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혼에 대한 말씀은 건전한 가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성스러운 것으로 자유롭게 풀어지지 않도록 아름다운 끈으로 묶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이혼사유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혼인으로 맺어진 자기 아내가 이혼 후에 다른 사람과 맺어짐으로 해서 간음하게 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현재의 도덕적관념의 해이에 대한 상태를 반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있는 자를 질책하시고, 무죄한 자를 변호하시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존엄성과 불가침성을 지지하셨습니다. 당시의 잘못된 결혼에 대한 관념을 단번에 무너뜨리셨습니다.
간음에 대하여(마태복음5:27-30)
우리나라의 헌법은 前文과 10장 130조와 부칙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헌법에서 정하는 규정들은 모두 행위이지, 생각들이 아닙니다. 내가 살인을 해야겠다 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행위의 살인만 처벌을 받습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역시 간음을 직접 행한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했습니다. 마음으로 아무리 간음을 해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간음(moiceuvw/commit adultery)은 moicov"(간음하는 자, 간부)에서 유래했으며, ‘모이큐오’는 ‘여자를 유혹하다, 강간하다’로 중간태에서는 ‘유혹을 당하게 하다’ 수동태에서는 ‘간음하도록 유혹받다’라는 의미입니다. 비유적으로는 ‘-에 불순물을 섞다’입니다. 간음은 주전2000년경부터 법률에 이미 처벌받았습니다. 아내에게는 모든 형태의 혼외 성관계가 금지되었습니다. 아내는 가족과 씨족의 총화에 대한 진정한 보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음을 행함으로써 아내는 자신의 결혼을 깨뜨리고 씨족 전체의 총화를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유부녀와 성관계를 가질 때 즉 다른 사람의 질서를 깨뜨릴 때만 간음죄로 인정했습니다. 남자는 첩을 둘 수 있었으며, 창녀와 성관계를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헬라와 로마 법률하에서 여자의 경우에 간음은 중벌로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결혼윤리는 점차 완화되었습니다. 도시, 항구들, 그 중에서도 고린도에서 매춘이 성행했습니다. 동방의 사교는 종교상의 매춘을 채택했습니다. 여사제와의 성관계는 제식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신성에 참예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히에로스 가모스(신성한 결혼)라는 말로 일컬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간음하지 말라’(ouj moiceuvsei")는 말을 들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행동에 옮겨진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도 내면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마음의 간음 금지된 대상을 열망하는 모든 욕심을 금지하라고 하십니다. “음욕을 품는다”는 말은 “음욕을 품기 위해서”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이고 정당한 성생활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금지된 성(음란·호색)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29절30절을 보면 그 처벌내용이 나오는데 과장법을 사용하십니다. 즉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죄가운데로 유혹하는 것들은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죄로 인도하는 것들은 반드시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사회적인 사악한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신자들은 맹렬하게 싸워야 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몸은 주님께서 값으로 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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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대하여(마태복음5:21-26)
예수님께서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사랑’에 관하여 ‘그러나 나는’으로 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5:22,28,32,34,39,44).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라는 말을 자칫하면 “모세와 조상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보아서 구약성경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옛사람들’이란 다른 사람들입니다. 후기 유대문헌들에서 보면 힐렐과 샴마이 등은 이스라엘에 유명한 랍비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옛선조’로 불렀습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구전적으로 해석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을 ‘옛사람들’이라 했고, 성경만큼 신봉했습니다.
첫 번째로 살인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저희들이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말하지 아니하고 유보하여 두거나 강조하지 않은 이면에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희들이 조상의 유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완전히 제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살인의 원인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제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예가 22절에 있습니다. 형제에게 분을 내고, 형제를 욕하는 것까지 지옥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즉 살인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들 곧 이웃들에게 분을 품고, 욕하는 것도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살인의 원인까지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살인만 죄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살인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드시는데 살인할 마음을 품고 제단에 예물을 드려서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분을 삭이고, 화해를 한 다음에 예물을 드려야 받는다는 것입니다. 송사를 받은 사람은 혐의가 있기 때문에 그 혐의를 벗으려면 송사를 건 사람과 급히 화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재판정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재판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살인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인을 하고, 공권력을 동원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책임자들도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뺏고도 잘했다고 합니다. 파렴치한들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더구나 죽은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잘 살지도 못하고, 공권력에 의하여 쫓김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공권력이 그들을 죽였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의 정치마당에서 살인이 저질러졌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외형적인 것에 치우친 나머지 내면적인 것은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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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태복음5:17-2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무시하고 폐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plhrw'sai)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점일획이라는 말은 성경글자의 아주 작은 획을 말합니다. 일점(ijw'ta e}n)은 히브리어의 가장 작은 문자인[y]‘요드’이고 일획(miva keraiva)은 헬라어 [i]‘이오타’입니다. 즉 구약성경의 아주 작은 말씀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있는 내용을 새롭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신 그 말씀을 예수님이 깨버릴 리가 없습니다. 저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공격하는 무기로 율법을 폐한다 했지만,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이 성경적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영역을 뒤바꾸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바꾸어버렸고, 사회적인 영역으로 바꾸었습니다. 율법의 내면적인 영역이 아니라 외형만을 준수하면 죄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손으로만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인죄를 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간음하지 않으면,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하는 말씀의 배경이 그들의 이러한 생각을 깨버린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구약성경을 깨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치우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적인 것을 깨버리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빼버리고 가르치는 자는 결코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버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자기들 스스로 만든 의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의는 천국과 관련이 없었습니다. 내적으로 만족시켜야 하는 ‘의’ 곧 심령을 만족시켜주는 의가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겉으로만 보이는 의가 아니라 내면을 만족시키는 의, 하나님께서 나온 의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내면의 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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