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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복(마태복음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Makavrioi oiJ praei'", o{ti aujtoi; klhronomhvsousin th;n gh'n.
“복들이 있다. 온유한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땅들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prau?"’“온유한”은 헬라어문헌에서 ‘사물, 동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써졌습니다. 사물에 관해서는 ‘진정시키는, 온화한’(진정제, 온화한 말),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인’ ‘유순한’(길들인 유순한 짐승;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 사람에 관해서는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즐거운’ 것으로 잔인하고 매정하고 독한 것의 반대입니다. ‘온유한’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사람,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LXX인역본에서는 히브리어 아니(억압받는, 가난한,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의 역어와 아나우(가난한, 겸손한, 온유한)의 역어로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란 토지 재산이 없는 사람으로서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권리를 빼앗기고, 하나님께서 물려주신 풍성한 유업을 수탈당했습니다. 그들은 불법적인 착취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니’의 편이십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심판자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은 오직 이 사실을 신뢰하며, 이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축복선언에 나타납니다. 이 축복선언은 억눌리고 멸시 당하며, 마치 가나안 정복 이전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장래에 하나님의 땅의 통치의 상속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을 말하는지를 알 것입니다.
우리는 온유하다고 하면 굽신굽신하고 무조건 낮은 자세를 취하며, 줏대 없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유한 것은 줏대 없는 것도 아니고, 연약한 것도 아닙니다.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참아내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저희들은 착취를 당했습니다. 버림을 당했습니다.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참아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도저히 땅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가 저희들에게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것을 참으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천국의 법은 역설적인 법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겼습니다. 가난함이, 애통함이, 온유함이 이 세상(kosmos)에서는 손해일 것 같은데, 그 반대로 뒤집었습니다. 도저히 복을 받을 것 같지 않은데, 복을 받으며, 복을 받을 것 같은데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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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의 복(마태복음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Makavrioi oiJ penqou'nte", o{ti aujtoi; paraklhqhvsontai.
“복들이 있다. 애통하는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penqevw’슬퍼하다는 ‘pevnqo"’(고통스러운 사실이나 사건,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것)으로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을 Matthew Henry는 영적인 사건에 대한 슬픈 고뇌와 우리자신의 죄를 위한 참회의 애통, 타인의 고통을 동정하는 애통이라 했습니다. Calvin은 애통은 비참할 뿐만 아니라 이 슬픔으로 덕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William Hendrikson은 자신의 영적파탄을 깨닫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찰나에 있는 자들이지만, 육신의 고통을 포함한 수많은 삶의 역경을 제외시킬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최근 용산참사의 비극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악한들에 의하여 가족을 잃은 슬픔들도 언론을 통해서 인지했습니다. 날마다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들은 고통하고 있습니다. 쪽방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하루저녁을 잠들기 위해서 박스 안에서 추운 잠을 재촉하는 사람들, 중병에 걸렸는데 수술비가 없는 고통, 당장 이사를 해야 하는데 방을 얻을 돈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개발에 묶여서 당장 나갈 돈이 없어도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서 당장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사람들, 한 조각 빵을 얻어먹기 위해서 피를 토하는 경쟁을 해야 하는 사람들 등 우리주위의 고통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러 가지 우리를 고통케 하는 요인들이 날마다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람들을 대하는데, 배반하는 사람들, 우리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고통, 작은 교회를 운영하며 말일이면 월세걱정을 해야 하는 고통들, 기도는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고통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고통은 거의 영적인 것이 아니고 육신적인 것들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통이 영적인 것들이라면 이러한 고통들은 예수님께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이다, 육적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포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아버지께 죄를 졌다”는 고통하는 마음을 가진 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위로“parakalevw”는 ‘소환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을 우리의 고통의 장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의 장소에 하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0) | 2009.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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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하면 복 (0) | 2009.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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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하면 복(마태복음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Makavrioi oiJ ptwcoi; tw'/ pneuvmati, o{ti aujtw'n ejstin hJ basileiva tw'n oujranw'n.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들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왜냐하면 저희 것이다. 그 천국이.” 여기에서 복이 있다는 말씀을 현세적인 복으로 즉각 해석하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5:3에서12절까지 “o{ti” ‘왜냐하면/hoti’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 그리고 유대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가난이란 있어야 할 것들이 없는 상태로, ‘죄를 깨닫고 절망한 상태’입니다. 가난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부귀를 하나님이 명하시면 즉시 비울 수 있는 사람들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비천하게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가난을 자각하게 된 자들입니다. 즉 자신의 비참과 결핍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기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가난은 저주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교만한 마음과 성질을 버리지 않는 자들이 많으므로 재앙을 겸손히 받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보호를 기다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복(makavrio")은 mavkar(행복한)에서 유래한 말로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들로부터 놓여 자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물질이 가난하다고 마음까지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은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절망으로 깨어지고 산산조각 나고,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고,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에게 항복하는 자가 가난한 자입니다.
학개 개관
서론
학개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깊은 회의(skepsis)에 빠져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귀환하면 모든 것이 순탄하게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귀환하고 성을 쌓고, 성전을 건축하려하자 대적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 성전재건공사 방해공작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상황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 이때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전공사를 하도록 촉구한다.
1. 저자
학개(yG'j')는 ‘축제’라는 뜻이다. 곧 학개가 이스라엘의 절기들 중의 한 시기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1) 1:1, 2:1,10,20의 내증과 에스라 5:1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2. 저작 연대
학개의 사역은 1:1에 기록된 대로 다리오 왕 2년(주전520년/521년)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유대인이 포로에서 돌아온 뒤(주전538년), 대략 16년이 지난 후이다. 학개는 2차포로들이 귀환한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백성들에게 성전공사를 하도록 설교를 통해서 촉구했다. 학개의 설교는 네 번으로 그 기간은 대략 4개월 정도이다.2) 학개서는 주전 520년 8-12월경에 주어진 본문이다.
1:1 다리오왕 2년 6월1일(주전 520년 8월29일)
2:1 다리오왕 2년 7월 21일(주전(520년 10월17일)
2:10 다리오왕 2년 9월24일(주전520년 12월18일)
2:20 다리오왕 2년 9월24일(주전520년 12월18일)
3. 저작의 목적
학개의 임무는 성전을 재건축하도록 격려하는 일이었다. 백성들은 “건축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12)고 했다. 학개는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돌이키라고 했다(1:5,7). 그들이 열심히 노력할지라도 그 결과가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1:6,9-11). 이유는 언약의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중요시한 ‘그들의 집’(판벽한 집)에 대한 우선권에 도전을 주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 건설’ 인 성전 건축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18)이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전달했다.3)
학개의 메시지는 액션명령이었다. 포로에서 귀환한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여러 가지 이유들로 백성들은 자득자의하고 있었다. 생활도 근근이 생계를 꾸려 나갔기 때문에(1:6) 행복하지 않았다. 이때 학개는 역경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렸다. 그들의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가하도록 요청함으로써 무관심과 자기만족으로부터 그들을 일깨웠다. 학개는 더 나아가 여호와와, 성전재건에 충성을 다하고 여호와가 축복하는 새 시대에 대한 지속적인 기대를 잃지 않을 것을 권고하였다. 성전과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여호와의 임재와 메시아 소망)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였다. 간단히 말하면,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왕국의 보다 큰 증거를 예기하는 포로 후기 공동체를 위한 신앙의 필수적인 단계였다. 성령은 공동체가 선지자의 도전에 반응한 태도는 참신한 것이었다. 합리주의와 자기정당화와 자기방식을 주장하는 태도는 사라졌다. 대신 그들은 행동으로 그들의 죄를 인정했다. 하나님의 영이 지도자들과 남은 자들의 마음에 역사하였기 때문이다.4)
4. 신학적인 가치
하나님의 성전, 나라 / 학개가 왜 성전건축을 하라고 했을까? 교회를 호화롭게 지으라고 했을까? 성전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곳이 없어서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개서는 종교적이라기보다 역사적이나 이 책은 포로기 이후의 유다 지역에서 발달한 제의와 특별히 영적인 문제와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선지자는 백성의 빈곤을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무시와 관련시켰으며 둘째와 넷째(2:1-9; 2:20-23)에서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말론적 소망을 되풀이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구약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장소가 바로 성전이라고 했다(신14:23-25). 이 성전은 솔로몬을 통해서 건축되었고 다시 포로에서 돌아온 후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기를 원하셨다. 성전의 회복은 하나님의 나라와 언약의 회복으로 이해된다(겔40-48장; 렘31장).
하나님의 성령 / 성령은 하나님의 왕국의 계속성을 확정한다. 성령의 함께하심으로 이미 그들에게 회복은 증표로 주어졌다. 특히 2:4-5에 세 번의 ‘강하게 하라’(히/하자크)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강조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종국적인 역사로 회복하시지만 그들의 백성들과 함께하심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는 이러한 새 언약은 세계화(이방민족들에게도 성령이 오실 것임)와 대중화(차별 없이 남녀노소에게 임하는 성령)를 통해서이다.5)
결론
오늘날 교회에서 교회를 건축하려면, 학개서를 본문으로 정한다. 하나님께서 성전건축을 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맞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학개서에서 성전건축을 독려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귀환한 후에도 예배중심, 성전중심, 즉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려고 하지 않았다. 성전재건공사를 하라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성전이 우리들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우선순위를 확정해야 한다. 즉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실현과 계획을 우선적으로 하기보다는(14) 하나님의 성전(18)과 나라 회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학개서는 교회 건축 때에 강조되고 설교되는 정도가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이 즐겨 설교했던 능력의 말씀이다(사보네롤라 존 낙스 등). 이 말씀은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우선권을 두라고 명하신다. 우리들이 계속 인지해야 할 것은 약속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성취의 실현을 앞당기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1) 레이몬드 딜러드·트렘퍼 롱맨,『최신구약개론』박철현 옮김 (경기: 크리스챤다아제스트, 2003), 645.
2) 이학재,『구약성경에서 배운다』, 495.
3) 이학재,『구약성경에서 배운다』, 497.
4) 반 게메런,『예언서 연구』김의원·이명철 옮김 (서울: (주)엠마오, 2004), 324-326.
5) 이학재,『구약성경에서 배운다』, 498-499.
산상설교(마태복음5:1-2)
산상설교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서 7장에서 끝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Thompson Bible은 산상설교를 구분하기를
1. 팔복 1:1-l2
2. 빛과 소금의 비유 5:13-16
3. 하늘나라의 새 법 5:17-48
가. 예수는 율법의 완성 5:17-20
나. 살인에 관하여 5:21-26
다. 간음에 관하여 5:27-30
라. 이혼에 관하여 5:31,32
마. 맹세에 관하여 5:33-37
바. 무저항에 관하여 5:38-42
사. 사랑에 관하여 5:43-48
4. 하늘나라의 새 생활 6:1-7:6
가. 자선에 관하여 6:1-4
나. 기도에 관하여 6:5-15
다. 금식에 관하여 6:16-18
라. 금전에 관하여 6:19-34
마. 판단에 관하여 7:1-6
5. 천국에 들어가는 길 7:7-27
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7:7-11
나. 황금률 7:12
다. 좁은 길과 넓은 길 7:13,14
라. 거짓 가르침과 참 가르침 7:15-20
마. 천국 가기 위한 참 길 7:21-23
바. 두 건물의 비유 7:24-27
6. 설교에 대한 응답 7:28,29
정훈택은 세부분으로 구분했습니다. ①서론부: 복 있는 사람들(5:3-16) ②본론부: 천국의 규범(5:17-7:20) ③결론부: 하나님의 뜻을 따름(마7:21-27).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권세 있는 가르침을 우선적으로 부여하셨습니다. 이 설교는 28년경 봄 어느 날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에(눅6:12), 12제자를 선택하신 후에,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산상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상설교는 두 시대의 다리를 잘 놓아야 합니다. 2000년 전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잘 분석해서 현대의 청중들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2000전의 의미와 현대적인 의미로서는 다리 놓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원문의 뜻을 그 당시의 세계에서 파악하여 현대에 같은 의미로 전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마태복음4:23-25)
예수님의 일하심은 ‘말씀’과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교훈(didavskw)과 선포(khruvssw)이고 일은 치료(qerapeuvw)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삽시간에 온 수리아에 퍼졌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나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 이로 인해서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th'" basileiva"/그 나라)을 전파하셨습니다. 천국복음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받은 사람들 속에 인식되어집니다. 그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나라와 이념을 초월하게 됩니다. 한 교회를 이루어 저들의 조직체를 발전시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미치게 합니다.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권이 이미 그 마음속에 공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17:21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6:10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의미가 그 뜻입니다. 비록 현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는 들어가기 쉽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왕으로 모실 때 온전한 그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kuvrio") 모시는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못 고치시는 병이 없었으며, 너무 어려워 못 고치실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확증하여 주고(요14:11), 그 이적들은 예수가 예언에 말씀한 바 참메시야이심을 보여줍니다(사35:5). 또한 이적들은 천국이 이미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전의 선지자들의 사역과 다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과도 다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하십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불과 같았습니다.
제자선택/네 어부(마태복음4:18-22)
예수님으로부터 먼저 부름을 받은(deu'te) 사람은 네 어부였습니다. 시몬·안드레·야고보·요한입니다. 이들의 출신지는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데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갈릴리 해변에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4:18). 이들은 두 쌍이었습니다. 두 형제들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있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세례요한도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서기관도, 모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교량역할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①요1:35-51, ②마4:18-22, 막1:16-20, ③눅5:1-11, ④마9:9-13 막2:13-17, 눅5:27-32, ⑤마10:1-4, 막3:13-19, 눅6:12-16 이상과 같이 다섯 차례입니다. ①의 부르심은 주후27년 2월경에 안드레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②의 부르심은 1년 뒤 주후28년 2월경으로 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 등이 요1:35-51의 부르심에 이어 확신을 가졌습니다. ③의 부르심은 시몬과 안드레가 그물을 덤지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그들이 직업을 떠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이전까지 함께 했습니다. ④의 부르심은 세리마태의 부르심입니다. ⑤의 부르심은 열두 제자 전체의 부르심입니다.
제자들 중 베드로는 성급한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항상 사람들을 인도하여 예수께 데려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맨 먼저 순교합니다. 요한은 사랑받는 제자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어쨌든 12제자들은 별로 사람들의 눈에 차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유명한 세계선교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사도들이 됩니다.
제자란 그리스도를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마10:37).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마10:38). 제자란 자기 소유를 포기해야 합니다(막10:28, 눅14:33).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합니다(눅14:26). 항상 말씀에 거하고(요8:31),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요15:8). 제자의 임무는 복음전파입니다(마10:7/막16:15/행1:8). 신자의 인도입니다(마9:36,37,38). 귀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마10:8).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마28:19). 그리스도의 모든 분부를 지키게 해야 합니다(마28:20).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전파해야 합니다(행5:42).
오늘날 제자들은 많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분부에서 많이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정말 주님의 제자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가 너무나 세속화가 되어서 제자도는 점점 실종되어갑니다. 제자들이 모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회개명령(마태복음4:17)
예수님은 시험 후에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전파(khruvssein)는 “회개”입니다. “너희는 회개하라”Metanoei'te입니다. 세례요한도 유대 광야에서 외친 말이 “회개하라”입니다. 왜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를 외쳤습니까? 당시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의 방법대로 산다고 자화자찬(self-admiration)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했습니까?
회개 naham(!j'n:)은 “후회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LXX은 나함을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로 번역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나함은 ‘후회하다’로 약 40회, ‘위로하다’라는 의미로 약 6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나함은 성질의 변화, 마음의 변화, 목적의 변화, 또는 행위의 변화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의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후회를 언급할 때 사용했습니다.
회개 shuib(bWv)는 ‘(되)돌아 가(오)다, 회복하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약 1,000회 이상 사용했습니다. 성경에는 회개가 인간의 책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수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렘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렘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 ‘회개/슈브’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악에서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 metanoevw는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 회심하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에서 metanoevw는 ‘나중에 알아차리다’ ‘마음(mind)을 바꾸다, 다른 견해를 채택하거나 받아들이다, 감정을 바꾸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 한탄하다’입니다. 하지만 헬라사회는 인간의 전 삶의 철저한 변화나 회심, 돌아옴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LXX에서 메타노에오는 하나님에 관해서(삼상15:29 렘18:8 욜2:13-15 암7:3,6), 인간에 관해서(렘8:6,13:19) ‘나함’의 니팔형을 번역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LXX인역 용법을 따르지 않고, 슈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메타노에오를 사용하였습니다. 현재의 있는 삶(하나님을 떠나 있는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대로 있으면 영원히 멸망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똑같습니다. 같이 해야 합니다. 유대인이라고 회개를 안 해도 영생을 얻지 않습니다. 헬라인들 즉 이방인들은 그 삶이 도덕적이라고 회개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영생과 영멸을 구분 짓습니다. 회개하는 자는 천국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관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