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1479건
- 2010.01.24
- 2010.01.23
- 2010.01.22
- 2010.01.21
- 2010.01.20
- 2010.01.19
- 2010.01.18
- 2010.01.17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6:24)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는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주인 중에서 한 주인은 미워하고(misevw), 한 주인은 사랑하기(ajgapavw) 때문이고, 한 주인을 귀중하게 여기고, 한 주인을 소홀하게 여기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러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성도들이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하나님(qew'/)이 명사/여격/남성/단수입니다. 재물(mamwna/') 역시 명사/여격/남성/단수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어떤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재물을 포기할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재물에 기울어지면 하나님을 포기할 것입니다. 즉 최고의 것, 자기희생, 열정적인 충성을 두 주인에게 공히 나누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까? Calvin은 제자들이 탐욕을 멀리하여야 할 것을 경고한다 했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부를 숭상할 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소외되어 간다는 말씀을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자신들의 욕심을 동시에 순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 명의 장로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퇴임했고, 한 사람은 재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제대로 했느냐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정권보다도 공정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신대통령들보다 못했고,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신대통령이나 장로들의 대통령이나 money gate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재물(mammon)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313년에 공인되자 교회는 영적인 생명력이 급격히 저하되었습니다. 박해받는 입장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기독교가 정치화되었습니다. 기독교 실업인들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갈수록 영적인 생명력이 둔화되었습니다. 이럴 때 이집크 출신인 안토니(256-356)는 자신의 많은 재산을 팔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누이에게도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가서 평생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mammon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mammon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만큼 영적인 생명력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옛날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사람들, 현재 사람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mammon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바르게 보아라(마태복음6:22-23)
예수님은 눈을 몸의 등불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라 했습니다(22). 하지만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으로 인해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셨습니다. “성하다”aJplou'"는 뜻은 “천진난만한”이라는 뜻입니다. 나쁘다는 ponhrov"로서 “나쁜 상태에 있는, 사악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병든 눈으로 볼 때는 소경인 상태입니다. 소경이 아닌 상태에서 나쁘다는 말은 일부로 좋은 것을 보지 않는 눈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눈(@yI[')은 “눈, 샘물, 샘”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아인”은 눈 그 자체 이상의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인”은 전체 보는 과정과 나아가 이해하고 순종하는 전체과정을 나타냈습니다(렘5:21). 눈은 지식, 성격, 태도, 성향, 견해, 열정 및 반응을 표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눈은 인간의 내적 생각의 좋은 지표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눈(ojfqalmov")은 구약의 “아인”을 번역하는 말로서 시력의 기관(눈)을 의미했고(눅6:20), 눈의 기능은 형상을 파악하는 것입니다(마6:22-23). 예수님의 말씀은 눈의 도덕적 언급과 더불어 눈이 건전할 수도 있고 건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악하고 시기적인 눈이 있으며(마20:15, 막 7:22),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눈이 있습니다(요일2:16, 벧후2:14). 눈은 범죄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마5:29). 우리에게 있어서 눈은 감각적인 지각이 아니라, 영적인 지각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눈에 빛을 주십니다.
눈에 대해서 예수님은 몸의 등불이라 하셨습니다(마6:22-23, 눅11:34).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라고 했습니다(마7:3-5). 자신의 잘못을 먼저 회개하고 남을 정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범죄한 눈을 빼어 내버리고 했습니다(영적으로/마18:9).
눈을 밝히는 방법으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왕하6:17, 시119:18, 엡1:8). 하나님의 말씀이 눈을 밝혀줍니다(시19:8). 여호와의 지혜로 눈이 밝을 것이라 하셨습니다(전2:14).
우리들은 빛을 받아서 어떤 물체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것을 시사해줍니다. 즉 어떤 빛을 받느냐에 따라서 보여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예로 붉은 빛을 받으면, 우리의 눈이 붉은 빛을 보게 되고, 푸른빛을 받으면 보아야 할 것이 푸르게 보여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보려면, 어떤 빛을 받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이면서 세속적인 것만 본다면 신앙에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어서 마음의 눈을 소홀히 한다면, 바른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확실한 목표에 집중하려면 올바른 목표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의 쾌락만 추구한다면, 기독교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제대로 떠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길 때마다 주의해야 합니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695/예수촌교회
염려하지 말라 (0) | 2010.01.25 |
---|---|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1) | 2010.01.24 |
하나님을 향한 믿음/재물의 안정성 (0) | 2010.01.22 |
금식에 대하여 (0) | 2010.01.21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20 |
하나님을 향한 믿음/재물의 안정성(마태복음6:19-34)
19절에서 34장은 재물에 대한 것을 여러 각도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9-21은 재물의 안정성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22-23은 무엇을 보아야 바른 눈인가 하는 것이며, 24은 재물로 인해서 마음이 나누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34에서는 인생사에서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모두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물은 어디에 두어야 안전합니까? 예수님은 땅에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두지 말아야 할 이유로 좀과 동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두어야 할 이유로 좀이나 동록이나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부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Mh; qhsaurivzete uJmi'n qhsaurou;" ejpi; th'" gh'", 너희를 위하여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정어도 oujk이 아니라 Mh;를 사용하셨습니다. oujk은 보통의 부정어입니다. 그러나 Mh;는 “하면 안 되므로”라는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뉘앙스가 있는 단어입니다. 다음으로 긍정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정적으로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재산을 쌓아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땅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재산을 쌓는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하늘의 창고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은 이 땅의 복잡한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들의 관심과 열정을 하늘의 삶을 생각하는데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하나님의 영역을 창출하는 일들입니다.
왜 우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야 합니까? 보물 있는 곳에 우리들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보화들(재물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들도 포함)을 땅에 묶어두는 것은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땅에 재산을 묶어두는 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땅에 묶어두면 일시적인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늘에 쌓아두면 영원하게 됩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중에만 있으면 그 이름조차 성경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궁중을 빠져나왔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보다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축복, 축복하면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보물을 쌓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사람들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보화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썩어질 것으로 썩는데 심지 않고, 썩을 것으로 썩지 않는 곳에 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1) | 2010.01.24 |
---|---|
바르게 보아라 (0) | 2010.01.23 |
금식에 대하여 (0) | 2010.01.21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20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9 |
금식에 대하여(마태복음6:16-18)
금식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금식(nhsteuvw)은 (nh'sti"/먹지 않는)에서 유래한 말로 ‘음식이 없다’입니다.
LXX에서 금식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한 준비로 행하였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에 금식했고(출34:28 신 9:9), 다니엘도 환상을 보기 전에 금식했습니다(단9:3). 금식은 큰 근심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개인적으로 행하여졌습니다(삼하12:16-23 왕상21:27 시35:13,69:10). 금식은 전쟁과 멸망의 위험이 임박해졌을 때(삿20:26 대하 20:3 에4:16 욘3:4-10 유딧4:9,13); 메뚜기 재앙 때(욜1장과 2장); 포로지에서 돌아왔을 때(스8:21-23); 속죄제의 때(느9:1); 그리고 끝으로 죽은 자를 애도할 때(삼하1:12), 국가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금식에는 기도가 수반되었으며(14:11-12 느1:4 스8:21, 스8:23), 특별히 회개의 기도가 따랐습니다(삼상7:6). 금식하는 사람은 애곡하는 자의 자세를 종종 취하였습니다(왕상21:27).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겸허한 자세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금식의 심오한 의미는 사라져 갔습니다. 점차 금식은 경건한 공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이들을 논박했습니다(사58:3-7 렘14:12).
예수님 당시의 자신들의 종교에 열심이었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매주 이틀씩의 금식일을 지키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SBⅡ 242이하). 요한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막2:18).
예수님은 외적 금식을 비난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하는 금식을 비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할 때 독특하게 했습니다. 얼굴을 일부러 씻지 않았습니다.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염을 쥐어뜯기도 했습니다. 물론 금식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고도의 전략을 사용한 것입니다. 남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보여주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야! 정말 경건하구나!” “애통하면서 금식하는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연극(drama)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금식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는 표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의 행위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소위 많은 교회들이 보여주기 위한 신앙행위를 강조합니다. “우리교회는 무엇무엇을 잘합니다.”라고 자랑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아닌 것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습니다. 선행이나 자기수양 등이 하나님이 아시면 사람들은 몰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전시효과도 있어야 하지만, 항상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신앙행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면 이미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show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보아라 (0) | 2010.01.23 |
---|---|
하나님을 향한 믿음/재물의 안정성 (0) | 2010.01.22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20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9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8 |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14-15)
주님의 기도 뒤에 이 구절이 붙는 것이 언뜻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4,15절은 12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로 빚과 관계가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toi'" ajnqrwvpoi" ta; paraptwvmata)용서하면(ajfivhmi) 하나님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만,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구원받은 사람이 할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과실(paravptwma)은 “곁에 떨어짐, 진리나 정도에서 벗어남 또는 이탈함, 실수, 잘못, 오해, 실책, 범죄, 잘못”을 의미합니다. 과실/파랍토마는 치명적인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5:15-20을 보면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여기에서 범죄가 곧 ‘파랍토마’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왔다는 것은 곧 아담의 범죄입니다. 즉 파랍토마는 과실/범죄입니다. 따라서 과실은 작은 어떤 허물이 아닙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하나님께 엄청난 큰 죄(1,0000달란트에 달하는 죄)를 용서받았다면, 너희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받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받는 사람은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최소한 성도라면 주 안에 있는 자기 형제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용서해야 할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서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용서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들의 화해는 곧 성도들과 성도들의 화해와 성도들과 일반인들의 화해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재물의 안정성 (0) | 2010.01.22 |
---|---|
금식에 대하여 (0) | 2010.01.21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9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8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7 |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세상은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o{ti sou' ejstin hJ basileiva kai; hJ duvnami" kai; hJ dovxa eij" aijw'na". ajmhvn. 왜냐하면 “o{ti”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와 그 권세와 그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hJ basileiva)는 어디를 말합니까?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약230여개의 국가가 있습니다. 이들 나라가 모두 통치자가 있습니다. 통치를 잘하든 못하든 통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나라들은 모두 자신들의 영역이 있습니다. 바다든지, 산이든지, 들이든지 국경이 모두 정해졌습니다. 그 영역을 넘으면 바로 경고를 합니다.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미사일로 격추를 시키거나 폭격한다는 경고음을 내보냅니다. 만일에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격추시키거나, 폭격해버립니다. 바로 자기들의 고유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약 162회 나옵니다. ‘왕권, 왕정’(눅1:33,22:29,19:12,15, 행1:6 고전15:24, 히1:6,11:33, 계17:12). ‘왕국, 왕토’(마4:8,12:25,24:7, 막3:24,6:23,13:8, 눅11:17,21:10). ‘하나님의 왕국(나라)’ ‘하늘나라’(마3:2,4:17,5:3,10,19). ‘하나님의 나라’(마12:28,21:31,21:43, 막1:15, 눅4:43,6:20, 요3:3, 행1:3,8:12, 롬14:17, 고전4:20). ‘아버지의 나라’(마13:43,26:29). ‘인자의 나라’(마13:41, 골1:13). ‘주의 나라’(딤후4:8, 벧후1:11).
나라라는 개념은 영토가 있습니다. 그리고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중에서 한 개라도 빠지면 나라가 아닙니다. 모두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 통치자보다 위대한 나라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의 백성들이 있고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이 그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영토가 광활합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인간들이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의 권세는 영원히 이 땅에 미칩니다. 그의 영광은 이 땅에서나 천국에서 영원합니다. 그의 권세는 당장이라도 이 땅을 멸망시킬 능력이며,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실 능력입니다. 그것도 일 년이나 십년, 백년이 아니라 영원한 능력입니다. 그 나라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히 있음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힘없는 사람들처럼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의 은혜 안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의 사랑을 늘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의 나라를 위해서, 그의 권세를 찬양해야 합니다.
금식에 대하여 (0) | 2010.01.21 |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20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8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7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6 |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험(prirasmov")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우리를 시험에 절대 데리고 들어가지 않게 해주소서”입니다. 절대 않도록(mhv)을 사용하시면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에게 시험은 두려운 것이며, 괴로운 것입니다. 시험(prirasmov")는 peiravzw(시도하다, 시험하다, 유혹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페이라조”는 ‘어떤 일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해보다’ ‘노력하다, 분투하다, 떠맡다, 책임지다’와 ‘어떤 사람을 시험하다, 유혹하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짓지 않게 하십니다(약1:13). 사람이 스스로 시험에 빠져들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험할 정도로 세상과 가까운 연합할 때 시험에 빠져들게 됩니다.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불균형한 멍에를 맬 때 시험이 우리를 옭아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리감독하시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담을 악에 떨어뜨린 사탄은 가인을 넘어뜨렸고, 사람들을 극도로 타락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시험할 정도로 교활합니다. 그런 사탄에게 우리가 open되어 있습니다. 궂은 때나 좋은 때나 우리가 시험을 받기 마련입니다. 시험을 받는 원인 중 하나는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걸쳐서 육신과 부단한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시험을 받습니다. 많은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세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두 세력이 비슷하면 괜찮은데 비슷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역이 우세합니다. 육신의 영역이 우세한 사람은 시험에 빠질 확률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영역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영역이 우세하면 시험에 들 확률이 적습니다.
갈수록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언론매체를 통해서 특히 방송매체를 통해서 시험을 많이 받습니다. 눈으로 보게 하는 프로그램들이 이미 도를 넘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람의 딸들이 한껏 자신들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보여줄 것, 안 보여줄 것을 가리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을 가리지 않습니다. 할 짓, 안 할 짓을 가리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약과입니다.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세상의 것들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만큼 타락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시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도들도 세상과 밀접하게 가까이 있는 만큼 하나님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빠지면 우리들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20 |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9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7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6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5 |
모형적인 주의 기도(마태복음6:9-13)
“우리가 우리에게 죄(빚)지은 자를 사(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용서)하여 주옵시고” 여기에서 죄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죄“aJmartiva”가 아닙니다. 빚진 자(ojfeilevth")입니다. 나에게 채무를 진 자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빚을 진 자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진 빚을 용서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Calvin은 이러한 조건이 붙은 것은 누구든지 기도하는 자의 증오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에게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모든 모욕을 제쳐놓고 도장으로 찍듯이 우리 편에서의 사면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하려는 과정에서 우리가 형제들에게 지녀야 할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어떤 공로가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무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데도 우리들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죄 용서함은 하나님의 전유물입니다.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엡1:7)와 긍휼(마18:27), 자비(눅18:13)에 근거합니다.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해주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용서해주는 일 없이는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죄 용서함을 받는데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인간들은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복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라 하셨습니다. 보복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모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의외로 평강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웃과 평화해야 함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9 |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8 |
모형적인 주의 기도 (0) | 2010.01.16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5 |
모형적인 주의 기도 (1) | 2010.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