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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대접하라(마태복음7:12)
요새는 옛날과 달라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봉사정신으로 궂은일이나 어려운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생활수준이나 국민들의 봉사정신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받고서 봉사한다는 것은 이미 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동에 속한 일입니다.
Jeremy Bentham(1748-1832)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낳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원리를 정립했습니다. 바로 공리주의(Utilitarianism)입니다.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을, 최대한도로 많은 쾌락과 최소한도로 적은 고통이라는 양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의 모든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일을 하면서 충분히 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합니다. 세상적인 대접은 그래서 무섭습니다. 무엇을 주면 꼭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대가성이 있는 것입니다. 뇌물성이 있습니다. 이런 대접이라면 두려워서 받을 수 없는 대접입니다.
정치적인 뇌물이 그렇습니다. 줄때는 몰래 주지만, 대가가 있기 때문에 불리하다싶으면, 전부 진술하게 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대접은 일상생활입니다. 손님을 친절하게 맞아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것은 좋은 풍습이었습니다. 유대사회는 이미 자신들이 나그네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대접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보다 더 강조했습니다.
대접은 권리와 의무가 아닙니다, 타인에 대한 우리들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타인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많이 챙기는 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반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관심도 가지고, 살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의 제자들과 전도자들이 이후로 닥칠 박해와 출교를 예상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보다 먼저 대접한다는 것은,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우선한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생각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은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대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시대로부터 발생되어 확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부터 모든 것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살고 죽어야 하는 우리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 없습니다. 먼저 남을 대접하는 것, 먼저 남을 생각하는 것, 모두 주님의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공리주의적인 종교들, 공리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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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라(마태복음7:7-11)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서 생활필수품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있으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의식주는 짐승들과는 다릅니다. 질이 있는 의식주생활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으로 한다고 해도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은혜의 방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세례/성찬),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구할 것을 요구하시는 주님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하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우리가 부족할 때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곧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것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너희는 구하라(Aijtei'te). 구한다는 것은 겸손과 필요에 대한 의식입니다. ‘구하라’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응답을 전제하는 믿음이 구하는데에 있습니다.
너희는 찾으라(zhtei'te). 찾는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성경을 읽고 상고하며(요5:39), 모이기를 힘써야 하며(히10:25),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마7:21,24,25).
너희는 두드리라(krouvete).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위에 참는 것을 더한 것입니다. 사람은 문이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하지만 구하는 것도 인내, 찾는 것도 인내, 두드리는 것도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않는 기도는 요행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인내하고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9절에서 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 중에 자기의 아들이 떡을 달라고 했을 때 떡 비슷한 것을 줄 사람이 있겠으며, 생선을 달라고 했는데 생선 비슷한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povso") 하늘에 계신 전능자께서 자기 자식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줄때까지입니다. 응답될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반드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방편을 주셨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자녀 된 우리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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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거부하면 주지 마라(마태복음7:6)
거룩한 것과 진주를 주지 말라(Mh; dw'te). 무엇에게,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발로 밟고 찢어 상할까 염려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지혜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국한시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격 없고 속된 멸시자들에게는 복음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전하지 말라’와 ‘전하라’는 말은 충돌합니다. 더구나 개나 돼지를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 머리에 개나 돼지라고 써있지도 않을뿐더러 어떠한 표식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유대인들 가운데서 거리의 개는 천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개들은 몸집이 크고 흉하게 생겼으며, 사나웠습니다. 이 개들은 떠돌이 개로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는데 음식물 찌꺼기나 쓰레기 더미 주변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개들을 부정하고 더럽게 생각했습니다(잠26:11, 벧후2:22, 계22:15). 그것들은 위협적이고(시22:16,20), 울부짖고 으르렁거리며(시59:6), 탐욕스럽고 파렴치했습니다(사56:1). 아주 천대들 받았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먹히는 것은 사람에게 내린 하나님의 특별한 저주의 한 증표.였습니다(왕하14:1, 16:4).
돼지들은 개와 마찬가지로 천하고 불결한 짐승으로 간주했습니다. 구약성경은돼지를 먹지 못할 부정한짐승들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레11:7, 신14:8).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가증한 것이었습니다. 탕자가 들에 가서 돼지를 치게 한 것은 그의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입니다(눅15:15,6).
우리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이유는 복음이 구원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개나 돼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개나 돼지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즉 복음을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개나 돼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단들이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옳다고 끝까지 우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개나 돼지보다 더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복음이 마이동풍이요, 우이독경입니다. 이들은 전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개나 돼지들(타락한 멸시자들)에게 복음을 금하시는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조롱거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모독하고, 업신여겨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 전하는 일들을 그만두지 않을까이며, 값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모독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까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합니다. 그래서 값이 없는 것입니다. 왜 복음은 값없는 가치를 지녔습니까?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몇 사람도 아닌 수십억의 사람들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가치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올바른 비판(마태복음7:1-5)
我田引水라는 말은 자기 논에 물 대기라는 뜻으로,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도 아전인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니까 비판이란 단어의 잣대를 들이대어 전혀 비판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못본 체 하며 진실과 거짓, 선과 악에 대한 것을 분별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남들에 대해서 혹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세리는 아주 나쁜 자들이다.” “창기 역시 나쁜 사람들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할 자들이다”라고 조상들의 유전으로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의 혹평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인인 줄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무조건 혹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과 예수님은 이들을 비판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신앙생활을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행하면 천국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판단의 기능을 금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못된 병폐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의 죄만 본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이지 못한 왕이 신하들이나 백성들의 도덕성이 나쁘다고 지적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교통규칙을 날마다 어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준법정신을 외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은 제7계명을 어기면서 성도들에게 그 계명에 충실하라고 하면, 그 말씀이 먹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검찰이나 법관이 깨끗하지 못하면서 남을 재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우리들이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선자가 되면 타인의 잘못은 돋보기로 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은 간과해버립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들은 신앙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소외되어 버립니다. 하나님 편에도 사람들 편에도 설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분별을 하고 비평을 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혹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단들에게는 혹평이상의 비판을 가해야 합니다. 그 외에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판은 바르게 하되 자신도 살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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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6:25-34)
염려라는 것은 인간들이 죄를 지은 이래 지금까지 계속된 인간들을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염려 merimnavw/merimnao는 mevrimn/merimna(불안스러운 두려움)에서 유래한 말로 “염려하다”입니다. merimnao는 고전 헬라어문헌에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돌보다’ 어떤 것을 ‘염려하다’나 ‘주의 깊은 관심을 가지다’. 어떤 것에 ‘집중하거나 열중하다, ~을 얻으려고 노력하다, 분투하다’ ‘어떤 것에 대한 걱정스러운 기대, 어떤 것을 직면하거나 당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염려(걱정)하는 것’ ‘심사숙고하다, 탐문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은 무거운 짐이 가해지면 자신은 무기력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에 처한 것으로 상상합니다. 염려로써 인간은 자기가 당면한 것으로부터 최선을 다하여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5,31,34절).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세 곳 모두 mh(하면 안 되므로)v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절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염려하지 않아야 할 예문을 말씀하십니다. 26절을 보면 공증의 새를 보라하셨습니다. 새는 경작하지 않는데,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르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새들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염려해서 키를 늘린 사람이 있느냐?(27절) 옷 때문에 왜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꽃은 길쌈도 아니하고, 수고를 하지 않아도 옷을 입히신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의 지위와 영광도 백합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은 지금 있는 피조물들에게 은혜를 입히신다는 말씀입니다. 당장 태워질 들풀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데 너희들은 크고 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들은 염려대신 하나님의 나라(basileiva)와 의(dikaiosuvnh)를 찾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람들이 아버지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데 쓸데없는 걱정으로 불안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게 된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못할 때 사실상 걱정합니다. 염려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을 해서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염려라는 것은 사실상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분명히 있는데, 이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믿음으로 생각지 못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에 너무나 집착하지 않아야 할뿐만 아니라, 필요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줄을 믿는 것이 성도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한님의 선하심과 섭리하심을 적극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면 주지 마라 (0) | 2010.0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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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창세기1:1-5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水星입니다. 수성은 대기층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수성은 지구보다 7배나 많은 태양열을 176일 동안이나 같은 면에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태양광선이 수직으로 쬐는 지점의 온도는 347℃나 됩니다. 그러나 밤엔 영하 170도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공기층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양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별이 金星입니다. 수성은 지구보다 3배나 작은 데 비해 금성은 지구와 체적이 비슷합니다. 금성의 기온은 약 480℃도입니다. 금성 표면은 아주 뜨겁고 건조합니다.
지구에서 벗어난 火星 역시 대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교차가 매우 큽니다. 태양빛을 수직으로 받는 적도 지방에서 낮에는 25℃ 정도이지만 저녁에는 -85℃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성의 평균온도는 -60℃ 정도입니다.
따라서 수성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금성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화성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木星에서도, 土星에서도, 天王星, 海王星, 冥王星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어떤 별에서도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춥고 더운 지역이 있지만, 그 나름대로 모두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별입니다. 그래서 외계에서 온 UFO를 봤다고 하지만, 쓸데없는 망상에 불과합니다. 외계에는 생명체가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r<a;h; taew] !yIm'V;h' tae !yhi=la> ar:B; tyviarEB]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I.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1).
말도 안 되는 우주의 기원설이 Big-Bang 이론입니다. 빅뱅이론은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모든 은하가 한 곳에 모이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그 순간을 ‘태초’라는 것입니다. 그 때 우주는 밀도가 엄청나게 크고 무지막지하게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주의 모든 물질이 한 점에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빅뱅 우주론은 그 상태에서 ‘큰 빵’하고 대폭발을 일으켜 팽창우주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양도 나오고 달도 나왔으며, 지구도 그리고 모든 별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지구가 고온의 가스덩어리에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고온기원설(高溫起源說)이 있고, 태양을 둘러싼 두터운 가스와 우주먼지로 형성되었다는 저온기원설이 있습니다. 상상하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론들을 들고 나와서 발표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이론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그 이론들을 사람들이 믿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죄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지식은 어리석은 지식입니다. 가장 좋은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저들의 말대로라면, 모든 별들에 생물이 살아야 합니다. 화성에서도 목성에서도 수성에서도 생물들이 살아야 합니다. 특히 지구의 위성인 달에서는 최소한 생물들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별에서도 생명체가 살 수 없습니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달에도 생명체가 없습니다. 낮에는 250℃까지 올라가고, 밤에는 -120℃까지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제외한 별들은 대기층이 없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높아지고, 밤에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공기층이 80km나 됩니다.
이 공기층과 태양과의 적당한 거리에 지구가 있기 때문에 생물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지구만 유독 태양과의 거리가 적당한 거리일까요? 이것은 천문학적으로도, 우연발생설도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더라도 터무니없는 가설이기 때문에 믿을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세계가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심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은 우연입니다. 그들의 신은 자연입니다. 그들의 신은 밝혀지지 않은 과학입니다. 그들의 신은 세상입니다. 그들의 신은 마귀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하나님을 잊으려 한 것입니다.
창세기1:1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면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 창세기 논증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쓸데없는데 마음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피조물들에게 집착합니다. 그들은 자연을 사고하면서 찬양하는 데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서,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그렇다고 시인하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다른 소리를 합니다. 우연히 이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빵”하는 폭발음과 함께 우주가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만 동물들에게 필요한 산소가 있을까요? 왜 식물들에게 필요한 이산화탄소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빅뱅이론자들은 은하가 폭발해서 우주가 형성되었다고 했는데, 그 은하계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연히 은하계가 생겼습니까? Big-Bang 理論者들은 참 편리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니 말입니다. 그래서 과학도 일종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우연히’라는 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들의 신은 ‘우연히’입니다. 매우 잘못된 신입니다.
성도여러분, 창세기 1장1절이 믿어져야 성도입니다. 믿음(hn:Wma>; pivsti")은 하나님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출애굽기17:12을 보면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아론과 훌이 바치고 있는 한 모세의 손이 내려올 리가 없습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패하기 때문에 아론과 훌이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이 때 내려오지 않았다는 말을 “에무나”라 합니다. 신명기 32:4절을 보면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하나님은 진실(에무나)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로서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신 저신 중에 골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꼭 믿어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보는 이 꽃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창조주를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을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의 삶에 날개를 달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전망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날마다 솟아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2절에서 5절을 보면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II.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2-5).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이 말은 merism입니다. 하늘과 땅은 온 우주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연히 생겨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주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처음에 만드신 땅은 혼돈하고 무형적이고 무생명적이었습니다. 어떤 형체가 없었습니다.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보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태초의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태초의 혼돈한 물덩어리 위로 성령께서 운행하셨습니다(토브성경). 성령께서 혼돈한 상태를 안정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만드신 세상에 활기를 넣으시려 하셨습니다. 성령은 혼돈한 세상을 품으셨습니다.
3절을 보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yhila> rm,aYow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천지의 덩어리를 창조하신 것처럼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1: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이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없던 것이 생겼습니다. 있던 것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태초에 세계에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피조물들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시8:1). 세계의 피조물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들은 존재하는 사물들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에 처음 창조된 것은 빛들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r/a yhiy]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왜 빛을 먼저 창조하셨습니까? 빛은 모든 생물의 필요불가결한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빛에서 나오는 에너지나 온기로 말미암아 우주가 움직이고 식물이나 동물이 생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양을 만들기 전에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넷째 날에 만드신 태양으로 하여금 그 빛을 대체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태양이 없어도 빛을 비추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는 명령이 있자 어두운 혼돈과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빛을 좋다고 인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빛(r/a)과 어두움(&v,j)을 분리하셨습니다. 빛을 낮(!/y)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움을 밤(lyIl')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때쯤 우리들 머리에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넷째 날에 되어진 일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교체는 혼돈된 흑암덩어리가 회전하기 시작하자마자 생겼습니다. 이것은 태양계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은 잠간 동안에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이 세상에 차례로 채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원동력이신 빛을 만드셨습니다. 우주 어딘가에 빛의 재료가 있어서 그것을 끌어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그 능력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는 무엇이든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의지가 있자 폭풍이 멈추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의지가 있자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불치병인 소경의 눈을 여셨습니다. 창조주인 예수님이 이미 죽은 자를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수고 없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창조주를 우리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을 하시라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을 말씀한마디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재벌중의 재벌, 왕 중의 왕이신 분을 우리는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왕의 아들인데 마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틀을 깨 버립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 문을 통과하는 즉시 듣지 않거나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아로 살아가거나, 노숙자이거나, 종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창조주를 모시고 살면서 새롭게 태어납시다. 있게 하시는 말씀대로 우리가 살도록 합시다. 하나님께 우리가 기회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께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에 심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사야7장을 보면 한심한 왕이 있습니다. 아하스왕입니다. 당시의 주변 상황이 아하스를 심히 두렵게 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했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아하스는 사시나무 떨듯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서 나만 믿으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멀리에 있는 앗수르와 동맹하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유다는 앗수르에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누가복음5:18-19절을 보면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 채 메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옥상에서 지붕을 뜯고서 예수님계시는 곳에 중풍병자를 달아내렸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이 사람의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죄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약점은 하나님께 일하실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일하실 기회를 주시기만 하면 분명히 우리들의 생애가 놀랍게 번하게 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일하실 기회를 제거하는 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적은 것부터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러스킨은 “하나님께 이등석을 주는 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고, 교회가 원하는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그것이 좀 힘들고, 고달파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는 행복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교회가 작고 보잘것없어도 우리 성도들이 사람 많은 교회보다 믿음이 크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작지만 목회자인 저를 중심해서 하나님께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작지만 누구보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께 일하실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절대로 성도 여러분의 고집대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꼭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창조주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여러분의 일들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일 때에 우리들의 교회를 지키시고, 여러분의 가정에 은혜를 내리십니다. 기억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에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에게 일하실 기회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하실 기회를 하나님께 드려서 은혜를 계속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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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냐, 재물이냐?(마태복음6:24)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는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주인 중에서 한 주인은 미워하고(misevw), 한 주인은 사랑하기(ajgapavw) 때문이고, 한 주인을 귀중하게 여기고, 한 주인을 소홀하게 여기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러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성도들이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하나님(qew'/)이 명사/여격/남성/단수입니다. 재물(mamwna/') 역시 명사/여격/남성/단수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어떤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재물을 포기할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재물에 기울어지면 하나님을 포기할 것입니다. 즉 최고의 것, 자기희생, 열정적인 충성을 두 주인에게 공히 나누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까? Calvin은 제자들이 탐욕을 멀리하여야 할 것을 경고한다 했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부를 숭상할 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소외되어 간다는 말씀을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자신들의 욕심을 동시에 순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 명의 장로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퇴임했고, 한 사람은 재임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제대로 했느냐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정권보다도 공정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신대통령들보다 못했고,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신대통령이나 장로들의 대통령이나 money gate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재물(mammon)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313년에 공인되자 교회는 영적인 생명력이 급격히 저하되었습니다. 박해받는 입장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기독교가 정치화되었습니다. 기독교 실업인들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갈수록 영적인 생명력이 둔화되었습니다. 이럴 때 이집크 출신인 안토니(256-356)는 자신의 많은 재산을 팔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누이에게도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가서 평생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mammon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mammon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만큼 영적인 생명력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옛날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사람들, 현재 사람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mammon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바르게 보아라(마태복음6:22-23)
예수님은 눈을 몸의 등불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라 했습니다(22). 하지만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으로 인해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셨습니다. “성하다”aJplou'"는 뜻은 “천진난만한”이라는 뜻입니다. 나쁘다는 ponhrov"로서 “나쁜 상태에 있는, 사악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병든 눈으로 볼 때는 소경인 상태입니다. 소경이 아닌 상태에서 나쁘다는 말은 일부로 좋은 것을 보지 않는 눈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눈(@yI[')은 “눈, 샘물, 샘”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아인”은 눈 그 자체 이상의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인”은 전체 보는 과정과 나아가 이해하고 순종하는 전체과정을 나타냈습니다(렘5:21). 눈은 지식, 성격, 태도, 성향, 견해, 열정 및 반응을 표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눈은 인간의 내적 생각의 좋은 지표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눈(ojfqalmov")은 구약의 “아인”을 번역하는 말로서 시력의 기관(눈)을 의미했고(눅6:20), 눈의 기능은 형상을 파악하는 것입니다(마6:22-23). 예수님의 말씀은 눈의 도덕적 언급과 더불어 눈이 건전할 수도 있고 건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악하고 시기적인 눈이 있으며(마20:15, 막 7:22),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눈이 있습니다(요일2:16, 벧후2:14). 눈은 범죄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마5:29). 우리에게 있어서 눈은 감각적인 지각이 아니라, 영적인 지각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눈에 빛을 주십니다.
눈에 대해서 예수님은 몸의 등불이라 하셨습니다(마6:22-23, 눅11:34).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라고 했습니다(마7:3-5). 자신의 잘못을 먼저 회개하고 남을 정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범죄한 눈을 빼어 내버리고 했습니다(영적으로/마18:9).
눈을 밝히는 방법으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왕하6:17, 시119:18, 엡1:8). 하나님의 말씀이 눈을 밝혀줍니다(시19:8). 여호와의 지혜로 눈이 밝을 것이라 하셨습니다(전2:14).
우리들은 빛을 받아서 어떤 물체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것을 시사해줍니다. 즉 어떤 빛을 받느냐에 따라서 보여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예로 붉은 빛을 받으면, 우리의 눈이 붉은 빛을 보게 되고, 푸른빛을 받으면 보아야 할 것이 푸르게 보여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보려면, 어떤 빛을 받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이면서 세속적인 것만 본다면 신앙에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어서 마음의 눈을 소홀히 한다면, 바른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확실한 목표에 집중하려면 올바른 목표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의 쾌락만 추구한다면, 기독교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제대로 떠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길 때마다 주의해야 합니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695/예수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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