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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는 자들의 복(마태복음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Makavrioi oiJ dediwgmevnoi e{neken dikaiosuvnh" o{ti aujtw'n ejstin hJ basileiva tw'n oujranw'n.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순교당한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막6:25-27). 다음으로 스데반집사입니다(행6:60). 그리고 야고보입니다(행12:2).

①베드로(Peter)는 전승에 의하면 논란이 많지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②안드레(Andrew)는 60년경 헬라의 도시 바드라(Patras)의 통치자인 에게아테스(Aegeates)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③세베대의 아들 야고보(James)는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당했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④요한(John)은 폴리캅, 파피아스, 이그나티우스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으며, 로마에서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지움을 당했다고 합니다. ⑤빌립(philip)은 히에라폴리스에서 기둥에 매달려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⑥바돌로매(Bartholomew)는 아르메니아의 도시인 알바노폴리스나 우르바노폴리스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⑦도마(Thomas)는 도마는 봄베이 근처의 인도 해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⑧마태(Matthew)는 에디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형의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⑨알패오의 아들 야고보(James)는 순교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⑩다대오(Thaddaeus)는 에데사의 샤바르샤르 지방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⑪가나안인 시몬(Simon)은 바대의 콜키스 지방에서 순교를 당했는데 톱으로 켜임을 당했습니다. ⑫사도바울은 68년경 로마에서 네로의 통치시에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⑬맛디아는 확실한 순교를 모릅니다.

이후로 많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성도들은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초대교회시대, 중세시대, 근세시대를 막론하고 현재까지 핍박을 받은 사람들과 순교를 당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까?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의를 말합니다. 성도들은 악한 일을 거부합니다. 선을 지키려 애를 씁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원한과 분노를 삽니다. 그러 인해서 박해를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한 자들은 항상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하십니다. 비참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천국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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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들의 복(마태복음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Makavrioi oiJ eijrhnopoioiv, o{ti aujtoi; uiJoi; qeou' klhqhvsontai.

복이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전쟁들은 중재자들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공격했을 때에도 미국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중재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개입하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시와 오바마가 똑같이 우려만 나타냈지, 중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론이 심히 분열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 댓글만 달면 무조건 좌빨이라고 몰아붙이는 언론들과 극보수들로 인해서 나라가 분열되어 있습니다. 현정권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좌익빨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가 나서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재는커녕 대형교회들 모두 정권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중소형교회들만 중재에 나서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전쟁중지기구는 UN(United Nations)입니다. 이 기구는 전쟁방지와 평화유지를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증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활동은 크게 평화유지활동·군비축소활동·국제협력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UN본부에 강대국들이 잘 협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국제질서도 정의롭게 지켜지지 않습니다.

일본은 전 세계를 향해 남의 영토를 과거부터 잔인하게 유린했습니다. 그러다가 2차대전에서 대패했습니다. 그러나 패전 후에도 아직 그 망령을 버리지 않습니다. 일본은 현재 우리나라와 러시아, 중국을 상대로 영토분쟁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영토분쟁이지 남의 땅을 자기의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중국·대만과 분쟁중인 땅은 조어도(釣魚島/대만에서는 釣魚台列嶼), 러시아와 분쟁중인 땅은 사할린입니다. 이 문제도 국제사회에서 중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 즉 사람들을 화해를 중재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했습니다. 평화에 대한 열정을 가진 자들, 할 수 있는 한 모든 다툼을 피하고 분쟁을 수습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투는 것을 화해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했습니다.

그러나 정녕 화평케 하는 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불화를 예수님으로 중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화평케 하기 때문입니다.

And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마태복음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Makavrioi oiJ kaqaroi; th'/ kardiva/, o{ti aujtoi; to;n qeo;n o[yontai.

복이 있다. 그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이 무엇일까?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 무엇일까? 어떤 종교들의 사람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이 청결일까? 무소유로 사는 것이 청결일까? 이 세상(ton kosmon)을 살려면 약삭빨라야 합니다. 간교해야 삽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정직하게 행동하며, 표리부동하지 않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Calvin). 육적인 정욕(sexual desire)과 세상적인 정욕에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들이 천국을 본다는 것입니다(Matthew Henry).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Heart)은 밖으로 open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인 말고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잘 때에도 깨어 있습니다(아5:2). 이 마음을 악인들은 자신의 소욕을 자랑합니다(시10:3). 자기 마음을 미련하게도 믿습니다(잠28:26). 악인들은 간교한 마음을 밖으로 드러냅니다(렘23:26). 그러나 이러한 마음들을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해를 입습니다. 이러한 사람일수록 겉으로는 자신을 선한 인상을 남기려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를 속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기도할 마음을 갖습니다(삼하7:27, 대상17:2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습니다(민29:7). 하나님 앞에서 성급한 마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전5:2). 왜냐하면 지혜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세가,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가장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왕의 실정(misgovernment)함으로, 다른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그 직분을 사무엘이 수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가 불러 모은 7명의 아들들이 전부 인줄 알았습니다. 사무엘은 장자 엘리압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용모와 신장이 너무나 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압→아비나답→삼마→···· 등 7명이 모두 지나갔지만 없었습니다. 이새는 여덟째아들 다윗은 아예 참석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찾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외모와 자격을 봅니다. “저 외모로 과연 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실수를 합니다. 외모와 마음은 정비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우리들은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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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는 자의 복(마태복음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Makavrioi oiJ ejlehvmone", o{ti aujtoi; ejlehqhvsontai.

복들이 있다. 불쌍히 여기는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외세로 로마에 압제를 받고, 내적으로 헤롯가의 폭력아래에서 소외되어 오직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둔 사람들에게 위로와 복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동일하게 오늘의 양극화 사회에서 서로 자기 살길을 찾아 권력의 종으로, 재벌의 종으로, 맘몬의 시녀로 전락하여 살아가는 때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복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긍휼(ejlehvmwn)히 여긴다는 말은 ‘동정심이 있는’의 뜻입니다. 본문에서 “긍휼히 여김”은 그 동기가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 구절에서 동사는 수동태(ejlehqhvsontai/동사,직설,미래,수동,3인,복수)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7절부터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도덕심과 인간의 마음자체를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인에 대한 용서의 정신입니다. 세상에서는 외부적으로 고통이 없는 평화를 누리는 자들을 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들의 고통을 참을 준비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자신의 것으로 삼아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눅10장)이 이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강도는 어떤 사람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피해를 입은 사람을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지극히 돌보았습니다. 그는 강도만난 자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오늘날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개발과 정권의 희생을 당한 용산의 철거민들, 이 시간에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지도자를 잘못 만나 IMF로 인해서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들, 그리고 여러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현재 국가에서 소외를 당했고, 사회에서 소외를 당했으며, 교회에서도 소외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어떤 것이 복이 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너무나 우리들이 세상의 것만 사랑하고 있지 않은 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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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마태복음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Makavrioi oiJ peinw'nte" kai; diyw'nte" th;n dikaiosuvnhn, o{ti aujtoi; cortasqhvsontai.

복들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다.

의(dikaiosuvnh)는 히브리어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의 번역어입니다. 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길(way)에 관한 교훈이 의입니다.

소위 사람들은 쉽게 어떤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하지만, 의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의인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는 의입니다. 따라서 轉嫁(전가)된 의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선행을 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선행을 쌓는다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해야 칭의의 의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마저도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예레미야2:22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행이라는 것 자체가 별것이 아닙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림과 목마름은 대유법표현/강조법입니다. ‘주림’과 ‘목마름’은 필수적인 것의 부족한 상태입니다. 한가로운 잉여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데 섭취를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들은 그러면서도 정당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 그들의 정당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로 애굽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가나안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가기전의 상황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재산이 많아졌기 때문에 자주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서로 분가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롯은 아브라함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었습니다. 그러자 롯은 제일 좋은 땅을 모조리 골랐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나머지의 땅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복을 주시고 롯은 필경 그 땅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탄식을 들어주십니다. 우리들의 올바른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반드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십니다. 굶주린 자에게 채워주시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인내하면서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좁고 협착한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배부르게 하심을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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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복(마태복음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Makavrioi oiJ praei'", o{ti aujtoi; klhronomhvsousin th;n gh'n.

복들이 있다. 온유한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땅들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prau?"’“온유한”은 헬라어문헌에서 ‘사물, 동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써졌습니다. 사물에 관해서는진정시키는, 온화한’(진정제, 온화한 말),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인’ ‘유순한’(길들인 유순한 짐승;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 사람에 관해서는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즐거운’ 것으로 잔인하고 매정하고 독한 것의 반대입니다. ‘온유한’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사람,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LXX인역본에서는 히브리어 아니(억압받는, 가난한,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의 역어와 아나우(가난한, 겸손한, 온유한)의 역어로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란 토지 재산이 없는 사람으로서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권리를 빼앗기고, 하나님께서 물려주신 풍성한 유업을 수탈당했습니다. 그들은 불법적인 착취의 희생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니’의 편이십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심판자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은 오직 이 사실을 신뢰하며, 이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축복선언에 나타납니다. 이 축복선언은 억눌리고 멸시 당하며, 마치 가나안 정복 이전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장래에 하나님의 땅의 통치의 상속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을 말하는지를 알 것입니다.

우리는 온유하다고 하면 굽신굽신하고 무조건 낮은 자세를 취하며, 줏대 없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유한 것은 줏대 없는 것도 아니고, 연약한 것도 아닙니다.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참아내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저희들은 착취를 당했습니다. 버림을 당했습니다.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참아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도저히 땅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가 저희들에게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것을 참으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천국의 법은 역설적인 법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겼습니다. 가난함이, 애통함이, 온유함이 이 세상(kosmos)에서는 손해일 것 같은데, 그 반대로 뒤집었습니다. 도저히 복을 받을 것 같지 않은데, 복을 받으며, 복을 받을 것 같은데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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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의 복(마태복음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Makavrioi oiJ penqou'nte", o{ti aujtoi; paraklhqhvsontai.

복들이 있다. 애통하는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penqevw’슬퍼하다는 ‘pevnqo"’(고통스러운 사실이나 사건,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것)으로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을 Matthew Henry는 영적인 사건에 대한 슬픈 고뇌와 우리자신의 죄를 위한 참회의 애통, 타인의 고통을 동정하는 애통이라 했습니다. Calvin은 애통은 비참할 뿐만 아니라 이 슬픔으로 덕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William Hendrikson은 자신의 영적파탄을 깨닫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찰나에 있는 자들이지만, 육신의 고통을 포함한 수많은 삶의 역경을 제외시킬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최근 용산참사의 비극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악한들에 의하여 가족을 잃은 슬픔들도 언론을 통해서 인지했습니다. 날마다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들은 고통하고 있습니다. 쪽방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하루저녁을 잠들기 위해서 박스 안에서 추운 잠을 재촉하는 사람들, 중병에 걸렸는데 수술비가 없는 고통, 당장 이사를 해야 하는데 방을 얻을 돈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개발에 묶여서 당장 나갈 돈이 없어도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서 당장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사람들, 한 조각 빵을 얻어먹기 위해서 피를 토하는 경쟁을 해야 하는 사람들 등 우리주위의 고통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러 가지 우리를 고통케 하는 요인들이 날마다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람들을 대하는데, 배반하는 사람들, 우리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고통, 작은 교회를 운영하며 말일이면 월세걱정을 해야 하는 고통들, 기도는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고통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고통은 거의 영적인 것이 아니고 육신적인 것들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통이 영적인 것들이라면 이러한 고통들은 예수님께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이다, 육적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포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아버지께 죄를 졌다”는 고통하는 마음을 가진 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위로“parakalevw”는 ‘소환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을 우리의 고통의 장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의 장소에 하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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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하면 복(마태복음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Makavrioi oiJ ptwcoi; tw'/ pneuvmati, o{ti aujtw'n ejstin hJ basileiva tw'n oujranw'n.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들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왜냐하면 저희 것이다. 그 천국이.” 여기에서 복이 있다는 말씀을 현세적인 복으로 즉각 해석하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5:3에서12절까지 “o{ti” ‘왜냐하면/hoti’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 그리고 유대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가난이란 있어야 할 것들이 없는 상태로, ‘죄를 깨닫고 절망한 상태’입니다. 가난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부귀를 하나님이 명하시면 즉시 비울 수 있는 사람들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비천하게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가난을 자각하게 된 자들입니다. 즉 자신의 비참과 결핍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기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가난은 저주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교만한 마음과 성질을 버리지 않는 자들이 많으므로 재앙을 겸손히 받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보호를 기다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복(makavrio")은 mavkar(행복한)에서 유래한 말로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들로부터 놓여 자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물질이 가난하다고 마음까지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은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절망으로 깨어지고 산산조각 나고,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고,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에게 항복하는 자가 가난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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