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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인 성도들(마태복음5:14-16)
소금과 같이 예수님은 JUmei'" ejste to; fw'" tou' kovsmou.“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일단 우리는 신앙의 조명을 받으면 빛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손에 들고 다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오솔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fw'"/phos는 헬라어문헌에서 Homer 이래로 ‘빛, 광채(광휘)’이며, 햇빛, 횃불, 불빛, 시각, 새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비유적으로 ‘생명의 빛’, 즉 ‘생명 자체’를 의미하였으며, 또한 빛나는 어떤 것으로 구원, 행복, 승리와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주는 자도 포스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진리와 그 지식, 선(행)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하나님나라의 백성들로부터 비쳐나오는 영적인 계시를 언급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우주의 빛이며, 모든 질서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천국의 시민들은 이 같은 복들을 부여 받은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복들을 저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편들이라는 사실을 뜻한 것입니다. 빛을 소유한 자들은 빛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신자들은 집합적으로는 “빛”이고 개체적으로는 “빛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소금이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이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주안에서의 빛과 소금입니다(엡5:8).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치료자입니다. 그 누구도 빛과 소금이 스로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빛을 세상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악합니다. 얼마나 악하냐? 공의가 없습니다. 대신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적은 나라이고 큰 나라이고 간에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가 온통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습니다. 미래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사회도 불의의 사회였습니다. 현대사회도 불의의 사회입니다. 미래사회도 불의의 사회입니다. 이런 상태에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빛과 소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선한 행실을 드러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이 세상(ton kosmon)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된 빛이 아니어도, 우리들은 주안에서의 빛으로 세상에 비추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특성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은 눈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빛이 빛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며, 산위의 동네요, 등경위의 등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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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인 성도들(마태복음5:13)
산상수훈은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궁극적인 법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나는 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도덕적인 영역의 말씀들입니다. 즉 윤리적인 예화들입니다.
소금의 예화는 신자들의 독특한 영향력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Calvin은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 맛을 내게 하는 것이 성도들의 사명이라 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한줌의 소금은 그 맛을 널리 확산한다고했습니다. 누룩과 같이 서서히 불가항력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William Hendrikson은 부패를 방지하고 지연시켜 주는 방부제로서의 기능과 맛을 내주는 부차적인 기능도 한다고 했습니다. 정훈택교수 역시 소금은 세상의 악을 막고 세상의 존재 의미를 보존하는 방부제 역할이라 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JUmei'" ejste to; a{la" th'" gh'":“너희는 (그) 세상의 (그) 소금이다.” “만일(ejavn)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그것은 더 이상 아무데도 쓸모가 없으므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이다”(바른성경) 우리는 여기에서 소금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도들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도들의 본분을 잃어버리면 더 성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실천사항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무리들 모두 성도일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향력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백성들의 영향력을 말씀하십니다.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영향력입니다. 소금은 방부제가 아닙니다. 독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부제가 아닙니다. 다만 방부성을 가졌습니다. 방부성을 가졌다는 것은 毒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금은 부패의 확산을 막는 것입니다.
사회에 퍼져 있는 악을 그리스도인이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악한 사람들에게 영향은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악을 치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선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생활이 악한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소금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소금이 되어라”의 미래형이 아닙니다. ‘나는 - 이다’(eijmiv)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복수인 “너희는 - 이다”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으로서 이미 우리 안에 방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방부성을 잃었느냐 가지고 있느냐 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의 존재는 무척이나 필요한 상태입니다. 물론 세상은 그것을 까맣게 모르지만 악이 만연된 사회에서 소금인 우리들의 방부성은 점점 확산되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맛 잃은 소금으로서 세상에 밟히는 성도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영향을 주는 방부성 소금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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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의 복(마태복음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Makavrioi ejste, o{tan ojneidivswsin uJma'" kai; diwvxwsin kai; ei[pwsin pa'n ponhro;n kaq j uJmw'n yeudovmenoi, e{neken ejmou'. “복이 너희에게 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너희를 대항하여 온갖 악담을 할 때에는”
‘욕설’과 ‘모욕’은 상대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중상’역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술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 때문에(e{neken ejmou') 온갖 악담과 박해, 거짓말, 술수를 해서 너희들이 욕을 먹는다면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어디를 가나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 하나님만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문제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사람들에게는 황제숭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카톨릭에게는 자신들의 잘못된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은 동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섞이지 않았습니다. 즉 흰색과 검정색을 섞으면 회색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흰색이었습니다. 절대로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교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어디를 가든지 새로운 지역들의 문화와 생활과 종교가 동화되었습니다. 로마카톨릭의 교황 비오11세(재위1922.2.6일-1939.2.10)는 1935년 공자 존경의식을 허용했습니다.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를 허용하였습니다. 비오12세는 1939년 ‘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제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이러다보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문화와 종교적으로 따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간 화합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큰 문제가 됩니다. 이로 인해 그들 말대로 독선의 종교요, 독불장군의 종교로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워싸여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이 엄청 많지만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굽히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잘못해서 욕을 먹기도 하지만 박해성의 비난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오직 말씀 안에서 행하고 모욕을 받는다고 하면 얼마든지 그 모욕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절대 굴하지 말고 말씀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빛인 성도들 (0) | 2009.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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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는 자들의 복(마태복음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Makavrioi oiJ dediwgmevnoi e{neken dikaiosuvnh" o{ti aujtw'n ejstin hJ basileiva tw'n oujranw'n.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순교당한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막6:25-27). 다음으로 스데반집사입니다(행6:60). 그리고 야고보입니다(행12:2).
①베드로(Peter)는 전승에 의하면 논란이 많지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②안드레(Andrew)는 60년경 헬라의 도시 바드라(Patras)의 통치자인 에게아테스(Aegeates)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③세베대의 아들 야고보(James)는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당했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④요한(John)은 폴리캅, 파피아스, 이그나티우스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으며, 로마에서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지움을 당했다고 합니다. ⑤빌립(philip)은 히에라폴리스에서 기둥에 매달려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⑥바돌로매(Bartholomew)는 아르메니아의 도시인 알바노폴리스나 우르바노폴리스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⑦도마(Thomas)는 도마는 봄베이 근처의 인도 해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⑧마태(Matthew)는 에디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형의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⑨알패오의 아들 야고보(James)는 순교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⑩다대오(Thaddaeus)는 에데사의 샤바르샤르 지방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⑪가나안인 시몬(Simon)은 바대의 콜키스 지방에서 순교를 당했는데 톱으로 켜임을 당했습니다. ⑫사도바울은 68년경 로마에서 네로의 통치시에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⑬맛디아는 확실한 순교를 모릅니다.
이후로 많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성도들은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초대교회시대, 중세시대, 근세시대를 막론하고 현재까지 핍박을 받은 사람들과 순교를 당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까?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의를 말합니다. 성도들은 악한 일을 거부합니다. 선을 지키려 애를 씁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원한과 분노를 삽니다. 그러 인해서 박해를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한 자들은 항상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하십니다. 비참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천국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금인 성도들 (0) | 2009.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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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는 자의 복 (1) | 2009.12.24 |
화평하게 하는 자들의 복(마태복음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Makavrioi oiJ eijrhnopoioiv, o{ti aujtoi; uiJoi; qeou' klhqhvsontai.
“복이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전쟁들은 중재자들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공격했을 때에도 미국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중재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개입하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시와 오바마가 똑같이 우려만 나타냈지, 중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론이 심히 분열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 댓글만 달면 무조건 좌빨이라고 몰아붙이는 언론들과 극보수들로 인해서 나라가 분열되어 있습니다. 현정권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좌익빨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가 나서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재는커녕 대형교회들 모두 정권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중소형교회들만 중재에 나서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전쟁중지기구는 UN(United Nations)입니다. 이 기구는 전쟁방지와 평화유지를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증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활동은 크게 평화유지활동·군비축소활동·국제협력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UN본부에 강대국들이 잘 협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국제질서도 정의롭게 지켜지지 않습니다.
일본은 전 세계를 향해 남의 영토를 과거부터 잔인하게 유린했습니다. 그러다가 2차대전에서 대패했습니다. 그러나 패전 후에도 아직 그 망령을 버리지 않습니다. 일본은 현재 우리나라와 러시아, 중국을 상대로 영토분쟁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영토분쟁이지 남의 땅을 자기의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중국·대만과 분쟁중인 땅은 조어도(釣魚島/대만에서는 釣魚台列嶼), 러시아와 분쟁중인 땅은 사할린입니다. 이 문제도 국제사회에서 중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 즉 사람들을 화해를 중재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했습니다. 평화에 대한 열정을 가진 자들, 할 수 있는 한 모든 다툼을 피하고 분쟁을 수습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투는 것을 화해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했습니다.
그러나 정녕 화평케 하는 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불화를 예수님으로 중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화평케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의 복 (0) | 2009.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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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마태복음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Makavrioi oiJ kaqaroi; th'/ kardiva/, o{ti aujtoi; to;n qeo;n o[yontai.
“복이 있다. 그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이 무엇일까?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 무엇일까? 어떤 종교들의 사람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이 청결일까? 무소유로 사는 것이 청결일까? 이 세상(ton kosmon)을 살려면 약삭빨라야 합니다. 간교해야 삽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정직하게 행동하며, 표리부동하지 않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Calvin). 육적인 정욕(sexual desire)과 세상적인 정욕에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들이 천국을 본다는 것입니다(Matthew Henry).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Heart)은 밖으로 open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인 말고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잘 때에도 깨어 있습니다(아5:2). 이 마음을 악인들은 자신의 소욕을 자랑합니다(시10:3). 자기 마음을 미련하게도 믿습니다(잠28:26). 악인들은 간교한 마음을 밖으로 드러냅니다(렘23:26). 그러나 이러한 마음들을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해를 입습니다. 이러한 사람일수록 겉으로는 자신을 선한 인상을 남기려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를 속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기도할 마음을 갖습니다(삼하7:27, 대상17:2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습니다(민29:7). 하나님 앞에서 성급한 마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전5:2). 왜냐하면 지혜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세가,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가장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왕의 실정(misgovernment)함으로, 다른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그 직분을 사무엘이 수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가 불러 모은 7명의 아들들이 전부 인줄 알았습니다. 사무엘은 장자 엘리압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용모와 신장이 너무나 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압→아비나답→삼마→···· 등 7명이 모두 지나갔지만 없었습니다. 이새는 여덟째아들 다윗은 아예 참석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찾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외모와 자격을 봅니다. “저 외모로 과연 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실수를 합니다. 외모와 마음은 정비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우리들은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박해를 받는 자들의 복 (0) | 2009.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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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는 자의 복(마태복음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Makavrioi oiJ ejlehvmone", o{ti aujtoi; ejlehqhvsontai.
“복들이 있다. 불쌍히 여기는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외세로 로마에 압제를 받고, 내적으로 헤롯가의 폭력아래에서 소외되어 오직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둔 사람들에게 위로와 복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동일하게 오늘의 양극화 사회에서 서로 자기 살길을 찾아 권력의 종으로, 재벌의 종으로, 맘몬의 시녀로 전락하여 살아가는 때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복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긍휼(ejlehvmwn)히 여긴다는 말은 ‘동정심이 있는’의 뜻입니다. 본문에서 “긍휼히 여김”은 그 동기가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 구절에서 동사는 수동태(ejlehqhvsontai/동사,직설,미래,수동,3인,복수)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7절부터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도덕심과 인간의 마음자체를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인에 대한 용서의 정신입니다. 세상에서는 외부적으로 고통이 없는 평화를 누리는 자들을 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들의 고통을 참을 준비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자신의 것으로 삼아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눅10장)이 이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강도는 어떤 사람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피해를 입은 사람을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지극히 돌보았습니다. 그는 강도만난 자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오늘날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개발과 정권의 희생을 당한 용산의 철거민들, 이 시간에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지도자를 잘못 만나 IMF로 인해서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들, 그리고 여러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현재 국가에서 소외를 당했고, 사회에서 소외를 당했으며, 교회에서도 소외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어떤 것이 복이 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너무나 우리들이 세상의 것만 사랑하고 있지 않은 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의 복 (0) | 2009.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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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 (0) | 2009.12.25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0) | 2009.12.23 |
온유한 자의 복 (0) | 2009.12.22 |
애통하는 자의 복 (0) | 2009.12.21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마태복음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Makavrioi oiJ peinw'nte" kai; diyw'nte" th;n dikaiosuvnhn, o{ti aujtoi; cortasqhvsontai.
“복들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왜냐하면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다.”
의(dikaiosuvnh)는 히브리어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의 번역어입니다. 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길(way)에 관한 교훈이 의입니다.
소위 사람들은 쉽게 어떤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하지만, 의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의인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는 의입니다. 따라서 轉嫁(전가)된 의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선행을 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선행을 쌓는다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해야 칭의의 의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마저도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예레미야2:22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행이라는 것 자체가 별것이 아닙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림과 목마름은 대유법표현/강조법입니다. ‘주림’과 ‘목마름’은 필수적인 것의 부족한 상태입니다. 한가로운 잉여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데 섭취를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들은 그러면서도 정당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 그들의 정당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로 애굽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가나안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가기전의 상황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재산이 많아졌기 때문에 자주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서로 분가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롯은 아브라함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었습니다. 그러자 롯은 제일 좋은 땅을 모조리 골랐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나머지의 땅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복을 주시고 롯은 필경 그 땅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탄식을 들어주십니다. 우리들의 올바른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반드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십니다. 굶주린 자에게 채워주시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인내하면서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좁고 협착한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배부르게 하심을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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