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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디모데전서1:1-2/ 2019.12.29
2019년도 불과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작정하기도 전에 시간은 흘러서 연말이 되었습니다. 번쩍하는 소리와 함께 지난 12개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역시 다람쥐쳇바퀴 돌듯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아마도 지루하고 애매한 mannerism에 빠져서 살아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국내외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수처법, 선거법 Fast Track, 대북제재 등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소식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소망을 걸 것이 너무나 많은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귀와 입을 막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첫 번째로
I.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1a).
Haydn이 작곡한 천지창조(The Creation) oratorio가 있습니다. Haydn은 만년에 oratorio를 3년 걸려서 완성하였습니다. 전 연주시간이 1시간 50분의 대작입니다. 영국의 여류시인 Lidliey(
Thomas Lidliey/1733-1795)가 구약성경의 창세기와 John Milton의 Paradise Lost 실락원 을 바탕으로 쓴 대본에 의한 작품입니다. 전곡은 3부로 나뉘어, 제1부에서는 천지창조의 제1일부터 제4일까지, 창궁(蒼穹)과 물, 산과 강, 해와 달과 별이 될 때까지, 제2부는 제5일과 제6일, 물고기와 새, 곤충과 짐승, 그리고 인간의 탄생까지, 제3부는 낙원에서 노는 아담과 이브의 즐거운 모양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곡의 연주회를 바로 앞두고 불행하게도그만 병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지휘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지창조는 다른 지휘자에 의해서 연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Haydn은 연주회장 한쪽에서 지켜볼 따름이었습니다. 그 장엄한 연주와 선율에 너무나도 감격한 청중들은 곡이 끝난 후 일제히 기립박수를 했습니다. 이때 지휘자는 모두 앉으십시오. 이 귀한 곡을 작곡하신 분은 바로 Haydn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께서 지금 저기에 앉아 계십니다. 청중들은 Haydn을 향하여 다시 열렬한 갈채를 보내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Haydn은 공손하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이곡을 작곡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교만한 사람은 99%가 내 노력이라고 말하고 1%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착각합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돌덩이와 나무로 쪼거나 깎거나 부어 만든 것들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구원은 세상에서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두고 써먹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의 어려움에서 구원받는다하고 고통 속에서 구원받는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포괄적으로 생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구원이란 말이 이 세상에서는 그 뜻을 제대로 말하지를 못합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참되게 사용되는 곳은 교회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사람들을 전도하여 구원시키기 원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보다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전도라는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을 사용하여(고전1:21) 구원의 방편을 주신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하신 은혜로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전도의 미련한 것은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리석게 보이는 전도의 수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입니다. 통상 전도라고 하면 전도지를 가지고 사람을 찾아가 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khvrugma/kêruigma는 포고, 선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는 개인적이든 대중적이든지 말씀의 선포입니다. 길가에서나, 학교, 강의실, 강단 그 어디에서든 그리스도의 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만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사도행전16:31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어떤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받습니다.
‘구원 받는다’는 말은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애가 항상 불안하고,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에 늘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죽을 때까지 우리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구원자는 고통 받는 우리들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에 구애 없이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 구원자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제거하시고, 자유하게 하십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자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것은 다윗이지만, 그를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들을 단 300명으로 이기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가 비를 오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지, 다윗이나, 기드온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의 육신적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몇 년 더 살기 위해 병을 고쳤다고 하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육신 못지않은 영혼입니다. 우리의 큰 원수는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사람들을 위협하는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정복하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탄의 나라를 접수하러 2000년 전에 오셨습니다. 그가 오셔서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영혼도 구원받고 우리들의 삶도 구원받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은 세 때(시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과거·현재·미래의 구원입니다. 그 첫 번째가 과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롬8:3-5).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한 거래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로 거래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과거에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즉 구원은 우리의 현재적인 삶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구원을 얻습니다(롬5:10).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됩니다. 예수님께 우리가 연합되므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 그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들을 우리가 받습니다. 그를 믿을 때 우리의 삶이 진보됩니다. 그를 믿을 때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의 어려움을 알아줍니까? 친척입니까? 형제들입니까? 친구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황제 Augustus를 사람들은 평화를 가져온 구원자로 찬양했습니다. 오늘에는 어떻습니까? 트럼프나 시진핑이 통일의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구주 예수님께서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모든 삶들과 그 후의 모든 생애를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사람들이 구원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이단들과 거짓 자들이 우리의 구원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리라고 확신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받습니다. 성결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완전케 됩니다. 이런 미래를 로마서 8:18-39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34누가 정죄하리요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영원한 사망의 골짜기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옥/gevenna/gêenna은 단순하게 땅 감옥이 아닙니다. gêenna는 !NOhiA@b, yGE/ghêben-hinhôm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입니다. 애곡의 골짜기입니다. 이 골짜기에서 아이들이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왕하16:3; 21:6). 이 골짜기는 황소의 형상을 한 우상 Moloch의 팔이 불로 달구어졌을 때 어린아이들을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던져진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에서 그렇게 불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공스런 희생제사가 요시야 왕에 의해 폐지된 이후 이곳을 혐오했습니다(왕하23:10). 이곳을 모든 종류의 쓰레기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동물, 처형되었으나 매장되지 아니한 범죄자들의 시체를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gêenna는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두 번 죽어야 합니다. 육신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습니다. 왜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우리와 너무나 친숙한 죄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육적인 죽음과는 달리 영적인 죽음은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데 곧 지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적인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새로운 삶을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거절하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원하지 않지만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지옥은 소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지옥은 계속해서 죽고 또 죽는 곳입니다. 거기는 사랑이 없습니다. 긍휼이 없습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곳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곳입니다. 지옥은 회개가 없으며, 울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며, 기도의 효과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지옥의 형벌을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생의 삶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영생까지 구원하심을 잊지 말고 오직 그를 의지하고 예배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한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1절과 2절을 다시 보면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II.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1b).
찬송가 세월이 흘러가는데(485/534장)의 작시자인 넬슨 목사(D. Nelson)는 방대한 농장과 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연설을 들었습니다. 넬슨은 그 연설에 감명을 받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노예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당시에는 영농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노동을 노예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넬슨은 노예제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운동에 앞장서다보니까 이웃에 있는 농장주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넬슨 목사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 정보를 들은 넬슨은 3일 동안 숲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매다가 미시피강 가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서 넬슨은 “유유히 흐르는 강 건너편은 자유로운 땅이 있다. 그곳에는 굶주림과 고통이 없다”는 시상이 떠올라 찬송이 작시되었습니다. 소망은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디모데는 나이도 어리고, 약간 소심했지만, 하나님과 바울에게 충성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이 소망은 바울의 소망이고, 디모데의 소망이며, 또한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으려 합니다. Platon은 소망을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향한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현재의 삶을 초월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은 헛된 소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Zeus가 소망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사람들 역시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Augustus가 소망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종교는 헛된 소망입니다. 숨이 떨어지자마자 영원한 사망의 곳에 가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곳은 option이 없는 곳입니다. “나 안 갈래요” “나 가기 싫어요.”가 아닙니다. 자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곳으로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망과는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베푸신 일에 대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헛된 기대가 아닙니다. 두려운 예상을 전혀 나타내지 않습니다. 항상 어떤 좋은 것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인간의 태도여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이 객관적인 유익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갈5:5, 골1:5, 딛2:13). 우리가 믿고 바라는 소망의 특징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의 내용은 자기중심적이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소망의 근거는 선행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신 역사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의 본질은 좋은 소망입니다. 헛되거나 요행으로 오는 소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에 우리의 소망은 없습니다. 물질에 소망을 두었을 때, 나이라는 것이 그 소망을 제거합니다. 이 세상의 지식에도 우리의 소망은 없습니다. 이 역시 나이가 두었던 그 소망을 제거합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에게도 우리의 소망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바벨탑을 쌓은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의 소망은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있다고 하는 세상의 희망은 막연한 바람입니다. “이루어졌으면”하는 것이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다릅니다. 우리의 소망은 막연한 꿈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 같은 확신에 찬 기대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제사장들이 갈멜산에서 제물 태우기로 신앙을 가리자고 했습니다. 바알 제사장들은 85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단신이었습니다. 바알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지지와 왕의 후원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나 홀로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game은 끝이었습니다. 엘리야가 100% 패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바알 제사장들이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으로라도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먼저 바알제사장들에게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850명의 제사장들이 뛰고 난장을 쳤지만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한 마디 말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이때 바알의 제사장들에게 ‘불’은 희망사항이었습니다. 막연하고 막연한 기대였습니다. “불이 내려 와야 할 텐데”하는 기대감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이 내려올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불이 내려올 확실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마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동행하셔서 확실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불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잡신들이 불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확실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떠나라 하셨을 때 소망을 붙잡았습니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도박하듯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확실히 신뢰할만한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우리들의 소망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망을 가져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시71:14). 시편138:7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께 소망을 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믿는 소망은 헛된 기대감이 아닙니다. 약속한 것에 대한 확실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언급하는 소망은 우리에게 유익한 소망입니다(갈5:5). 이 소망은 우리에게 확실성을 제공하기 위하여 세 가지가 같이 갑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소망이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들에게 확실성을 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사랑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 사랑입니다.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믿음과 사랑이 무익한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소망이 무익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확실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에서도, 경제계에서도,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우리의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소망을 우리가 꽉 붙잡읍시다. 우리에게서 소망이 달아나지 않도록 꽉 붙잡읍시다. 우리의 살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사무엘하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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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로마서4:18-25)
성경은 다른 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법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하나님나라의 일반적인 체계입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삶에 대한 완전한 규칙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영광된 삶에 대한 확실한 약속 등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만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무죄상태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청교도인 John Flavel은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나은 삶의 방식이 무엇이고, 가장 고상한 경험이 무엇이며, 가장 편안하게 죽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한 설교는 두 세대를 잇는 다리역할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오늘의 시대를 연결시키는 가교역할을 설교가 합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을 설득합니다.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이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다고 지루하고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득함은 수백년 내지 최소한 천년 이상을 잘못된 율법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번 머리에 어떤 것을 새겨버리면 그것을 지우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오래도록 뇌리에 박혀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인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념을 고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類比/유비라는 말은 맞대어 비교하는 뜻입니다. 바울사도는 당시 아브라함과 바울시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천 년 전의 아브라함과 오늘의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만 의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바울시대도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의로 여기심 받은 그대로 똑같이 대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의 예수님과는 더욱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도 과거로 치부되지 않습니다. 遡及適用소급적용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을 뛰어넘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 범죄 함을’paraptwvmata hJmw'n/파랖토마타 헤몬에서 범죄/paravptwma는 ‘진리나 정도에서 벗어남 또는 이탈함’입니다. ‘파랖토마’는 비유적으로 인간을 타락시키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위치를 상실하게 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어코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의도에서 심히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그 범죄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하나님께서 내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에서 건짐을 받지 않았다면,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건짐을 받았습니다. 건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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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의 전체구조는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인간의 비참, 둘째, 구원, 셋째, 감사생활이다. 이러한 구성은 제1문과 2문의 대답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제1문에서는 생사 간에 있어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 대답으로 제시된 것이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의 생사 간에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데 있음이라고 하였다. 제2문은 이러한 ‘위로’를 발견하기 위하여 몇 가지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 대답으로 세 가지를 아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그 세 가지란 앞서 언급한 3부분의 주제인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비참과 그 죄에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 방법을 다루었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된 자가 그 은혜에 대하여 반응하는 모습으로 감사하는 생활을 제시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책은 총129개의 질문과 대답으로 엮어졌으며, 특히 제1문은 교육과정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을 통하여 배우는 전체 교육목표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1문의 물음에 대답을 알려주기 위하여 128개의 질의와 답변이 계속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런 뜻에서 볼 때, 제1문은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서 전 내용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칼빈이 제시했던 제네바 요리문답서와 비교해 볼 때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데, 칼빈이 그의 요리문답서 첫 질문에서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대답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 중심의 요리문답서로 인식되는 반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생사 간에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 대답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된, 구원을 얻는 일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의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내용구성으로 제1부 인간의 비참은 제1문-11문 사이에 전개되고 있는데, 여기 담고 있는 내용은 인간이 죄 가운데 처하게 됨으로써 죄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크고 비참한 것인지를 일깨우고 있다. 특히 그러한 사실의 근거를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도록 해주고 있다. 역시 계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 된 모습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며, 죄로 인하여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법인 계명은 언제나 양심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제2부는 인간의 구원에 대해 다루었다. 역시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그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알도록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대하여 믿음으로 고백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다루어진 내용은 사도신경을 중심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믿고 의지해야 할 신앙의 근본교리 임을 밝혀 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제26-28문까지가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가르침이요, 제29-52문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가르침이며, 53-64문까지는 하나님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다루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제65-85문까지 구원의 교리와 관련하여 성례에 관한 가르침이 다루어졌으며, 그 안에서 제65문-68문은 거룩한 성례에 관하여, 69문-74문은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제75문-85문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하여 다루었다.
제3부는 감사에 관한 주제로서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된 자가 세상의 삶에서 구원의 주인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었다. 제86-129문까지의 내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제86-115문까지는 십계명의 내용이 다루어졌고, 제116-129문까지는 주기도문의 내용이 감사생활이라는 맥락에서 다루어졌다. 이러한 이해는 종교개혁시대에 제시된 루터나 칼빈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서는 십계명과 주기도문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역시 루터와 칼빈의 신앙의 가르침의 구조를 합쳐 놓은 모습(연합정신의 반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사도신경, 성례의 가르침, 십계명, 주기도문 등이 그 중심내용을 삼고 있기 때문인데, 특이한 점은 루터나 칼빈의 것처럼 그 내용자체를 주제로 직접 하나하나 문답의 형식으로 풀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죄, 구원, 감사라는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였고, 안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그리고 그리스도인 됨의 실존적인 삶의 가르침(윤리)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리적 관계에서 볼 때에도 그 어떤 전통적인 신조나 교리서에서처럼 신론에서 종말론까지의 교리적 내용을 순서대로 나열한 형식을 취하지 않고 여러 다양한 질문과 대답의 관계에서 다양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는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서가 만들어진 동기에서 더 잘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의 교리적 논쟁의 종식을 위한 것이 이 책의 저술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기독교와 신앙진리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 증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리적 범주에서 쉽게 이해하여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삶에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내용적으로 교리와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도 실제는 신앙적 삶에 목표를 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먼저 제1장의 주제가 뜻하는 것처럼 인간의 상태가 죄 가운데서 그 비참이 얼마나 큰지를 깨우치기 위해 제3문과 4문에서 율법의 가르침을 다루었고, 율법이란 인간 스스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율법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 율법의 두 가지 기능을 적용시키고 있다. 첫째는 죄 인식 수단으로서의 율법이해요, 두 번째는 죄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실현해야 할, 윤리적 책임으로서 다시 율법(하나님의 법)을 필요로 하는 적용이었다. 그 때문에 제3부의 주제는 감사로 표현되었고 십계명과 기도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가르침을 다루게 된 것이다. 즉 이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제2문 (0) | 2020.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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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제1문 (0) | 2020.01.25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저술동기와 역사 (0) | 2019.12.23 |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현재 평화와 안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영원히 누리고 만끽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매순간 평화가 당신을 떠나고 있을 때, 그것이 다시 당신에게 임하리라는 소망이 없다면, 그것은 다시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시작하는가가 중요한 것 핍박이 아니라 어떻게 끝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William Gurnal
저술동기와 역사
이 책은 1563년 독일 중남부지역의 고도(古都)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서 출판된 책이다. 원래 이 도시는 독일 팔쯔(Pfalz)지역의 수도였으며, 그 지방 성주였던 프리드리히3세의 후원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가 만들어졌다. Friedrich III(프리드리히3세/1463.1.17.-1525.5.5)는 독일의 작센 지방의 선제후(1486-1525년)로 있던 인물이다. 선제후(選帝侯)란 신성로마제국에서 1356년에 황금문서에 의하여 독일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이다. 선제후는 백작, 공작, 대공과 같이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위계상 신성로마제국의 봉건제후들 가운데 왕 또는 황제 다음이었다. 프리드리히3세는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마르틴 루터를 적극적으로 보호한 인물이다. 마르틴 루터의 신학에는 그다지 찬성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교황과 황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를 끝까지 보호했기 때문에 후대에 der Weise(The Wise) 현자(賢子) 또는 현명공(賢明公)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적자가 없고 서자들만 있었기에 사망 후 선제후 직위는 동생 요한이 물려받는다. 후임 작센 선제후 동생 요한 1세과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적극적으로 루터주의로 돌아섰기 때문에 작센 선제후령은 신성로마제국 내 개신교세력의 중심이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Heidelberg Katechismus는 1563년 독일 Heidelberg에서 출판되었다. Friedrich III세의 후원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Friedrich III세는 Heidelberg 요리문답서 작성에 최초의 후견자였다. Friedrich III세는 당시 개신교 출신의 아내를 맞이하였다(마르크 그래핀 마리아). 그녀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로 전향하였으며, 정부의 지도자가 된 후에 종교개혁 내면에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지했다. Luther파와 Calvin파 사이의 신앙교리에 관한 논쟁이었다. 첨예하게 맞서기도 하여 신앙고백의 논쟁을 중지하고 가르침의 통일과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꾀할 목적으로 Luther파와 개혁파교회 모두에게 유효한 연합적인 성격을 띤 신앙문답서를 만들게 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교회의 연합정신이 반영된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의 저자는 하이텔베르그 대학의 교리학 교수였던 Z. Ursinus이다. 그는 Philip Melanchthon이 있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남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등 여러 개혁파 신학자들과 대화했다. 제네바에서는 John Calvin을 사귀게 되었고 성만찬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Calvin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는 1561년 선제후 Friedrich III세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수로 불림을 받게 되는데, 처음에 설교자를 위한 훈련소 책임자로 있다가 1562년 동 대학의 교리학 교수가 되었다.
1562년 Friedrich와 정부는 모든 예배상황을 위해 지역 교회에 새로운 교회질서를 세우려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교리적 논쟁의 화해와 교회의 통일을 위해 신앙교육서를 만들게 하였고,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의 가르침을 이 책을 통하여 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기로 신앙의 책 집필을 Ursinus에게 위임시켰다. Ursinus는 323개의 질문과 대답으로 된 독일어로 만들어진 것과 108개의 문답인 라틴어로 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129개의 문답을 가진 요리문답서 원본은 라틴어의 번역본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 이러한 기획을 하이델베르그 교회의 신앙교육 위원회로부터 진지한 조언과 자문을 받아 수정, 개선하게 되었는데 이 일에 Friedrich 제후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자문위원회의 구성에서 중요역할을 했던 다른 신학자는 Caspar Olevianus이다. 그는 1536년 Trier에서 출생하였고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위그노파(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를 가리킴. 스위스사람을 뜻하는 독일어 아이트게놋세(Eidgenosse)의 프랑스어 식 사투리인 에뇨(Eignot)와 제네바의 동맹당 당수 브장송 위그(Bezanson/Besançon Hugues)의 성을 합친 것) 교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Roman-Catholic의 도시에서 개혁사상에 의한 설교가로 활동했는데 대주교의 군사적 힘에 의해 추방당하였고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바로 하이델베르그 지역 개혁파교회 목사로 취임하여 신앙교육서 작성에 교회를 대표하는 자문위원이 되었다. Friedrich와 교회 자문위원회는 종교개혁 시대에 나타난 여러 신앙교육서들과 Luther파의 신앙고백서 기도문 등을 참조하였으며 Calvin의 제네바 요리문답서(신앙고백서들은, ‘제네바요리문답(Geneva Catechismus, 1536/1541)’ ‘쮜리히신조(Zurich Consensus, 1549)’ ‘제네바신조(Geneva Consensus, 1552)’ 등이 있다)는 하이텔베르그 요리문답서가 탄생하는 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앙교육서의 내용(교리)과 교수 방법적으로 크게 힘입었다. 이러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1563년 1월 중에 여러 날 계속된 회의를 통하여 읽혀지고 의논되었으며 큰 수정 없이 승인되었다. 1563년 1월 19일에는 Friedrich의 머리말이 실린 책이 인쇄되었는데 ‘Friedrich 성주의 땅 팔즈 지역의 교회와 모든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요리문답서 또는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란 제목이었다. 그 아래에 성주의 글이 실렸다. 그 후 1563년 3월에 첫 견본들이 교회의 실제적 사용을 위하여 제공되었다.
요리문답서의 초판은 성만찬과 Roman-Catholic의 미사와 구별에 대한 가르침이 제80문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Olevianus의 권유로 Friedrich성주는 1563년 책의 새 출판에서 이 질문을 첨가하도록 권고했다. 이미 출간된 첫 해 동안에 요리문답서는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어 두 개의 라틴어로, 두 개의 화란어와 독일어로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약 2세기 안에 세계 각국의 모든 언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첫 판은 예배와 가정예배에서의 사용을 위한 ‘기도문’이란 부록을 달고 나왔는데 옛날 취리히와 제네바의 교회법 중 일부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요리문답서와 주기도문은 1563-1564년 겨울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인쇄되었으며 1563년 여름에 수정되고, 1564년 전국 지방교회의 예배에서 사용하도록 팔즈의 새 교회법에 명시하였다. 문답서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반복되는 주일예배 시에 낭독하게 하였고 또한 주일 오후예배에 매주 이 책이 몇 문항씩 신앙교리를 해설하는 설교내용으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학교공부와 유아세례자 입교반공부에서 사용함으로 재빨리 교회와 그의 구성원이 애독하는 신앙의 책으로 알려졌다.
반세기 후 30년 동안 진행된 종교전쟁으로 당시 팔쯔 지역이 다시 Roman-Catholic의 소유로 넘어 갔을 때 개혁파교회 목사들이 그 곳에서 쫓겨났고 여러 교회는 10년, 어떤 곳에서는 20년 이상 개혁교회가 지향했던 예배를 더 이상 행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팔즈의 많은 지역 주민들이 개신교 특히 개혁교회의 신앙을 존속하려고 가족예배에 이 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루드비히 14세가 새로 팔쯔지역을 점령했을 때와 그 후에 연이어 개신교지역교회에 온갖 압력이 가하여졌으나 개혁교회들은 이 책을 진귀한 보물처럼 귀히 여기고 보존했다. 요리문답서는 팔쯔를 넘어 재빠르고 비밀리에 다른 개혁파 교회에 전달되었다. 이미 1568년과 1571년에 그 신앙교육서는 화란의 개혁파 교회와 니더라인(Niederrhein)에 있는 독일교회에 전해졌고 얼마 후에는 헝가리와 현재 루마니아 북부 지방인 지벤뷔르겐과 폴란드 지역의 개혁교회까지 전수되었다. 이 밖에도 몇몇의 독일, 스위스교회에도 전해졌으며 베른(Bern)지역 교회들에서도 교회들이 자신들의 옛 신앙교육서들을 대신하여 이 책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화란 사람들이 이주해 갔거나 선교사로 갔던 북미와 남아프리카 등에서도 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가 신앙의 책으로 채택되어 사용되었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제2문 (0) | 2020.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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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제1문 (0) | 2020.01.25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0) | 2019.12.26 |
행복감이란 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마음. 또는 그런 느낌입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아이들의 주관적 행복감을 조사했습니다. 조사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행복감 성적이 71.6점이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였습니다. 1위는 Greece였습니다. 114.2점으로 우리나라보다 40점 이상이나 높았습니다. 주관적 행복감은 건강 만족도, 학교생활 만족도, 주관적 행복도로 조사했습니다. 이에 비해 학업열망, 교육 참여 등 교육열의는 2위였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부모나 사회의 요구에 따라 거의 맹목적으로 학업성취를 높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이들은 건강이나 취미활동 등은 아예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생활만족도는 거의 zero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면 해결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제구조나 정치적인 구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사람들이 현재보다 수입은 배나 많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출은 배나 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휘발유 값이 최소한 1000원은 인하해야 합니다. 통신비도 현재보다 1/3수준이어야 합니다. 전기요금도 1/3수준이어야 합니다. 그 외 생활지출비 등이 역시 1/2로 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꿈은 그냥 꿈일 뿐입니다. 매우 요원하기만 합니다. 즉 밝은 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인 유대에 미가 시대도 그랬습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정치지도자들과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과 백성들이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다와 예루살렘이 혼란했습니다. 1절 상반 절을 보면
유다 열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I. 어두운 세상 안에 서 있는 우리들(1a).
Greece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깜깜한 밤에 소경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소경에게는 등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딪히면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소경이 등불을 켜고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등불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불이 간다.’라고 광고하는 다른 사람을 위한 등불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혔습니다. 이 때 소경이 자신 있게 한마디 합니다. “여보시오, 눈이 없소?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그 때 맞은 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등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라도 불이 이미 꺼져 있소.”
오늘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이 소경의 모습이 우리들의 시대와 大同小異합니다. 아주 어두운 시대입니다. 자신의 불들은 이미 꺼진지 오래인데, 문제가 생기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해서 현재 이런 꼴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있다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좌파는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고 강 우파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좌파를 먼저 척결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좌파는 이 나라의 50%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우파로 나누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미가시대 유대도 역시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미가는 유다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요담 왕은 유대의 14대왕이었습니다. 선한 왕으로서 분류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겼습니다(왕하15:32-36).
32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33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하스 왕은 요담의 다음 왕입니다. 아하스 왕은 악한 왕입니다. 우상숭배에 친앗수르 정책자였습니다(왕하16:1-16).
2아하스가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3···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8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반앗수르 정책을 편 왕이었습니다(왕하18:1-7).
3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히스기야 왕을 제외하고 다른 왕들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왕들이었습니다. 이목구비 번듯하고 왕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미치도록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다보니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요담과 아하스가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과, 여호와를 싫어하는 국제주의자들이었는데 인기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절대로 국제사회에 얼굴을 들이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국제화를 아예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왕들이 국제사회에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왜 국제연맹에 얼굴을 들이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당시에는 교역의 조건으로 자기들의 신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교역의 조건으로 다른 나라의 신들을 마구 들여왔습니다. 이 신도 수입하고 저 신도 수입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신들을 믿고 번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국제주의자이고, 우상을 섬기다보니 사회의 곳곳이 엉망이었습니다. 극악한 사회범죄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강대국들이 자신들을 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번영케 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아스다롯이 번영케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강대국들의 사신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강대국들의 우상을 극진히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색칠하고 금옷 은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우상의 제사장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제도를 본떠서 그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멀리 떠났습니다. 우상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사장들보다 계급이 높았습니다. 여호와의 제사장이 우상의 제사장들의 지시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유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일체 무시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니까 종교적인 생명력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모두 다 하나님의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죄만 저질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악한 죄를 저지르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직원들이 하나님의 길을 몽땅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버리면서도 안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길 때 안전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절대로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고도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들이 안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여호와의 도움 없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왕과 왕족들이 강대국들과 친하니까(Friendly)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왕이 강대국의 Friendly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안위는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이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조건 복되다고 광고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이 우리에게 비를 주고 풍년이 들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거짓 자들은 입만 열면 평강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복되다’였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이었습니다. 매우 잘못된 신앙이 이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Micah 때의 유대 지도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안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실은 없고 외형만 있었던 그들이 절대 안전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혼란의 시대에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비취는 빛을 보아야 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움에서도 우리는 빛을 보아야 합니다. 절망의 밤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비취는 빛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도래합니다. 사회정의에 무관심해버립니다. 교회 안에 거룩함(聖)과 속됨(俗)이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로인해 교회와 국가와 사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총체적으로 부패하게 됩니다. 결국 그 국가와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죄를 정화하기 위해서 Micah를 보낸 것입니다. Micah는 총체적으로 죄 속에 파묻힌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하기 위해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와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미5:4).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3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성도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Friendly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Friendly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의 Friendly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Friendly여야 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감히 주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온전해집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앞날이 밝습니다. 어둠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 내 신앙이 젖어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에게 미래가 있고, 미래가 밝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괴롭혀도 정말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지역 안에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 번 째로
II. 이 세상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1a).
Moresheth 사람 Micah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Samaria와 Jerusalem에 관한 묵시라.
미가는 Moresheth사람입니다. Moresheth은 그다지 유명한 지역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백리 떨어진 지역입니다. 이 Micah에게 보여준 환상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미래였습니다. Micah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환상은 심판의 환상이었습니다. Samaria를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미1:2-7). Jerusalem을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1:8-16). Samaria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Jerusalem은 남왕국 유다의 수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Micah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신다고 통지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백성들이 와서 짓밟아도 침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안 들으시고, 모른 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을 심판하십니까?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최고 통치자는 하나님의 Friendly가 아니고 강대국의 Friendly였습니다. 왕족들은 왕의 Friendly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우상의 Friendly였습니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Friendly가 아니고 우상들의 열혈 Friendly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이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인데 거짓 자들은 사람들에게 거짓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걱정 없다’, ‘염려하지 마라’ ‘잘 될 것이다’ ‘절대로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우리를 좋아하는 Friendly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말들이 먹혀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자격증이 있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누가보아도 예루살렘의 선지자의 말이 맞겠지, 이름도 없는 Moresheth 출신 선지자가 맞겠냐는 것입니다. 서울에, 또는 대도시 그리고 이름 있는 목사가 그래도 낫지, 시골교회의 목사, 개척교회의 목사, 소형교회의 목사가 낫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지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방송설교 팡팡 나오고, 부흥회를 수백 번 인도한 목사인데,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복을 빌어도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급이 낮아도 새카만데 저런게 목사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목사들이 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양 말하고 생각하며, 자신들을 높입니다.
‘인지도’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알아보는 정도입니다. 과연 사람의 인지도를 얼마나 바르게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인지도를 어떻게 측정합니까? 신문과 방송이 측정합니다. 과연 신문과 방송이 정확하게 사람을 검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유명한 목회자들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들이 보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무부 장관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위장전입을 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했습니다. 국토해양부장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부동산 투기를 해서 엄청난 차익을 챙겼습니다. 이것이 인지도입니다. 그래서 인지도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미가는 Moresheth 사람이라 했습니다. 즉 인지도가 없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미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예루살렘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말씀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모하는 자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 살아 있는 자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 옵니다. 미가는 예루살렘에서 100리나 떨어진 이름 없는 선지자입니다. 이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어야 합니까? 믿지 말아야 합니까? 믿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인증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자들은 입만 열면 “축복”입니다. 그래서 “신년대축복성회, 축복교회, 축복기도회”등입니다. 입만 열면 ‘잘 될거야’, 입만 열면 ‘평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과 종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죽인다고 하신다’입니다. 그러니 인기가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성도들이 적은 것은 당연합니다. 이왕이면 교회가 긍정적이어야지 맨 날 “하나님이 너희들 가만 안 둔다.”고 하니, 교회를 가면 답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Micah 역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답답한 사람이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고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혼란의 시대에 말 한 마디라도 긍정적이어야지, 부정적으로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Micah의 예언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모두 부정적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예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와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탄탄대로에 올려놓을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유명한지, 근동에서 오므리 왕은 팔레스타인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할 만큼 유명했습니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외교적으로 탁월하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13절의 짧은 사적만 할애했습니다(왕상16:16-28). 아합은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했지만,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참으로 능력 있는 통치자였지만(오므리의 행한 …권세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16:27), 그는 사악한 통치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왕상16: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왕상16:26 …그가…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미가 6:16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성경과 선지자들은 오므리와 아합을 죽어야 할 자, 벌을 받아야 할 자로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죄인이기 때문에, 늘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기자들이며, 선지자이며, 선견자들의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아담의 타락이후로 ‘너희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마’입니다. ‘너희들이 이대로라면 가만두지 않겠다’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부정적인 말을 싫어합니다. 이왕이면 하나님께서 위로하는 말씀, 격려하는 말씀만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격려하는 것보다 살길을 택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3:16-24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을 왜곡하여 엉뚱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우리와는 전연 무관한 관계로 발전하고 맙니다. 왜 부정적으로 이름 없었던 모레셋의 작은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야김이 유다 왕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제사장들과 거짓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한 마디도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입만 열면 ‘심판’이었습니다. 늘 부정적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것입니다(렘27:6-11). 그러니 왕이며 방백들, 신하들이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적국과 목숨을 걸어서라도 싸워야 하지, 어떻게 항복을 할 수 있느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삯군목자들이 긍정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28:1-4절을 보면 거짓자 하나냐가 예례미야에 맞서서 유다 왕과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듣는 입장에서는 예레미야의 말보다 하나냐의 말이 훨씬 좋습니다. 품위가 있고 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변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냐의 긍정적인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부정적인 말이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었던 멍에를 부러뜨리자 하나님께서는 쇠멍에를 대신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짓을 말했던 하나냐를 그 해에 죽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은 긍정/affirmative이 아니고 믿음/faith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축복축복만을 외치는 사람들은 결코 성경의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도 말하고 심판도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편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예레미야를 변호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은 그 근거로 미가의 사역을 언급했습니다. 예레미야26:18을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를 죽이면 하나님의 재앙이 곧바로 임할 것이라 했습니다. 미가의 이 말에 히스기야는 크게 회개를 했습니다. 미가의 사역을 통해서 히스기야는 회개하고 또 근신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때 예루살렘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히스기야가 죽자 유다의 통치자들이 하나님께 바로 등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미가도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 했습니다. 미가의 말대로, 예레미야의 말대로, 이사야의 말대로, 선지자들의 말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주전586년에 망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연구하고 믿는 성경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말씀(A Word from Another World)입니다.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성경은 과학자들이 쓸데없는 연구를 하고 있는 우주 밖으로부터 온 말씀입니다. 우주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성경은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기록되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항상 견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할 때 항상 수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지 않을 때, 문제가 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을 때 우리들의 신앙은 곤두박질합니다. 오늘의 이 나라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가의 시대 곧 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해가는 시대와 똑같습니다. 나라의 통치자가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교회의 목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서 평강을 외치고 있습니다. 국무위원 중에 단 한 사람도 깨끗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범법자들입니다. 병역문제, 부동산문제, 자녀문제, 위장전입 등의 전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평강입니까? 안전입니까? 우리들의 경제 살리기입니까?
성도여러분! 형통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아닙니다. 긍정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긍정으로, 때로는 부정으로, 때로는 자비로, 때로는 심판을 사용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은 사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에도 인간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손길은 욥과 에브라임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경우에도 인간을 치는 야속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외적인 자비나 비참만 보고 사랑이나 미움을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깨끗한 자에게나 불결한 자에게나 다 똑같이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통의 태양은 과수원의 과일나무만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가시나무 위에도 내려쬡니다. 고난의 눈보라는 광야나 언덕의 불모지에만 몰아치는 것이 아닙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도 몰아칩니다. 아합과 요시야의 종말이 아주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동시에 임했습니다. 건강, 재산, 명예, 고난, 질병, 손해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차별없이 주어집니다. 모세는 불평한 대가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나발은 아브라함 못지않은 부자였습니다. 아히도벨은 솔로몬만큼 지혜로웠습니다. 도엑은 사울만큼 영화를 누렸습니다. 요셉은 바로와 함께 권세를 향유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 중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문만 잔뜩 지고 있다가 이 세상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때라도 길을 하나님께서 찾습니다. 성경에서 그 길을 찾습니다.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로마서4:13-17)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는 역사에 근거를 둔 신앙입니다. 교회는 역사적이지 이교들처럼 허무맹랑한 전설과 신화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간은 흐르면서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식은 하고 있지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구는 그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시속1600km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1600km로 자전하면서 시속 11만km로 태양을 공전합니다. 지구는 은하계를 시속 10만km로 가로지르는 태양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77만km로 움직이는 은하계 공전 궤도 안에서 움직입니다. 지구는 시속 216만km로 공간을 통과합니다. 24시간마다 우리는 9000만km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336억km의 공간을 여행합니다. 일 년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지만, 분명히 같은 봄은 아닙니다. 우리를 변하게 한 봄을 맞고 각 계절을 맞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때문입니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되 교리적 진술이나 신학적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과 언약관계의 이야기 가운데 계시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장들이 그들의 자녀들의 질문에 대답할 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신6:20) 하거든 다시 한 번 출애굽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위대한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전해진 것입니다. 즉 그것은 애굽과 광야에서, 다윗의 통치하에서, 솔로몬 당시의 문명 속에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그리고 마카비가(家)의 지도 아래 싸울 때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동일한 이야기의 모든 부분은 로마에서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와, 교회의 성장 및 확장과 개혁되어야 하고 사도들의 비전을 다시 가져야 하는 필요성과 더불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신비입니다. 복음의 신비는 간단한 진술로 한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시정(詩情)을 위해서 정통교리의 기하학적 해석을 잘못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잘못된 교리가 마치 정통교리인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행세를 할 때 교회의 건물로, 교세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시입니다. 즉 성령께서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역동적 여정 안에서 그 백성에게 활력을 줄 때, 성령의 맥박과 심장의 고동소리를 지닌 시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사를 망라하는 이 하나의 이야기에는 초점이 있다. Oscar Cullmann은 이것을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시간의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신앙의 불명예는 세속사의 다른 기간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이 수년간을 ‘전체시간’의 중심이며 표준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만물이 시작될 때 말씀은 이미 존재하였음을 이것에 못지않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이 시간을 습격한 실재이며(reality), 불확실한 전망의 그늘진 세계에 쳐들어 온 실제적이고 참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예수만을 강조하는 교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통로로 마리아를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우리 눈은 밝아지고 궁극적인 진리를 얼핏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다른 모든 경험들은 오직 이것과 관련하여 판단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수수께끼를 의미 있게 하는 참조표입니다. 그래서 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절정은-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있어서 그 끝이 아니라 중간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사도신경에서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는 만납니다. 바로 신앙의 세계밖에 있는 본디오 빌라도가 그리스도인의 주장의 신빙성을 위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억측이나 상상의 어떤 전설적 인물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높임을 받아야 하는가? 마리아인가? 예수님인가? 누가 크리스마스의 주인인가? 산타크로스인가? 예수님인가? 누가 교회의 주인인가? 성도들인가? 예수님인가? 우리들은 오늘 이것을 많이 잊고 있습니다.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님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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