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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로마서4:13-17)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o}" par j ejlpivda ejp j ejlpivdi ejpivsteusen/호스 파라 엘피다 에피 엘피디 에피스테우센/이사람이(아브라함) 소망할 수 없는 중에 소망을 가지고 믿었다.

 

믿다/pisteuvw/pisteûo는 고전 헬라어문헌에서 신뢰하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으로서 불가능의 상태는 현재의 어떤 것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의학적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들,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 홍해가 갈라진다든지(14:21-23), 태양이 뒤로 돈다든지(10:12), 하늘에서 약300만 명분의 만나가 40년간 꾸준히 내린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하다든지 할 때 우리들은 불가능에 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동양에서 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까지 생각은 하고 있지만, 사람들로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가능(impossible)에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에는 맞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임, 정확히 말하면 사라의 불임은 불가능입니다. 사라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어쩌면 막연한 꿈일 수 있습니다.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일도 소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능한 것들을 사람들은 소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전혀 소망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에게 자녀를 가진다는 것은 꿈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신 사람의 은혜입니다. 전혀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것, 하나님의 사람들만 가능합니다. 무엇으로 소망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불가능해서 전혀 소망할 수 없는 것들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이나 되어서 자기의 몸이 이미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사라의 ()도 이미 불임상태로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이 전혀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주실 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소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믿음이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바울사도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을 오늘 우리의 믿음도 똑같이 의로 여기신다고 논증했습니다. 아브라함만 의로 여기신것만이 아니라 의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예수님 사역의 두 정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지심과 부활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은 인간의 죄의값을 대신 치룬 것입니다. 칭의의 전제조건인 순결상태의 획득을 위한 것입니다. 부활은 칭의(외롭다하심)의 선포자로서의 등장을 위한 하나님편의 약속이행입니다. 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And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로마서4:13-17)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언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보여준 믿음과 신뢰, 신임 그리고 복종 때문에 온 것입니다.

 

창세기12:1-3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3절을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들만의 조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아브라함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11:30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어떠한 자녀도 없었습니다. 자녀가 없다는 것은 대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대가 끊어지면 후손이 없기 때문에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무가치하고 무능한 인간일 뿐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하고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재형성입니다. 민족들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소망대로의 소극적인 부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다 큰 목적들을 향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궁극적인 이유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총에 다만 응답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총과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으로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일 뿐입니다.

 

언약/ejpaggeliva/epanggellîa/에팡겔리아는 무조건적으로 만들어진 약속입니다. 에팡겔리아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뜻했습니다. 에팡겔리아는 약속뿐만 아니라 약속한 것의 성취 모두를 의미했습니다. 무능하고 무가치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모든 족속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통한 은총밖에 없습니다. 행위나 공로는 선택한 사람들의 구원에 아무런 기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에 구원에 행위가 개입이 된다면 하나님의 은총은 사라져버립니다.

And

구원이 유대인에게만이냐?(로마서4:9-12)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사람은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버린 인간으로서는 어떤 방법이 없었습니다. 창세기3장에서 이미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림으로서 어떻게 할 바도 몰랐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색해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그런 것들이 소위 종교적인 제의들이나 신화들입니다. 이런 것들로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데도 사탄의 계략으로 사람들은 속아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라고 사람들을 끝없이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과 우주의 주관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소위 종교의 창시자들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그런데 대등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교리는 어떻습니까? 표준적인 유대의 교리는 오직 할례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은 깊이 뿌리가 박혀서 초대교회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서 조차도 민족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15:1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할례에 대해서 말할만합니다. 왜냐하면 할례 그 자체에 구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우주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인간의 기원이 600만 년 전이라고 하든지, 우주폭발이 몇 백억 전이라고 할 때에 단위가 100억 또는 100만년입니다. 정확한 기원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럼에도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14:1).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의 할례와 의로 여김을 받았던 때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의롭다고 선포된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는 99살 때였습니다.

창세기17:24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아브라함과 같은 날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스마엘은 13살이었습니다.

창세기17:25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 삼세이었더라

아브라함과 같은 날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자들과 돈으로 산 모든 남자들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17: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15:18),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의로 여김을 받은 때는(15:6), 아직 이스마엘은 잉태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15:2-3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창세기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William Hendriksen에 의하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선포된 순간과 할례를 받은 때 사이는 적어도 14년이라는 기간의 갭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유대인들은 할례를 들고 나옵니다. 그 의도는 자신들만 하나님의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도 구원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어떤 행위에 의해서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자기의 의를 들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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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범한 다윗의 예(로마서4:1-8)

 

마태복음1:1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예수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소위 위인이라고 할 경우에 그의 전기들을 보면 엄청나게 과장되어 있습니다. 위인전을 쓰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서 과장이 더 될 수도 있고, 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 많은 인간을 거의 신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유대인들이 다윗과 아브라함 생각하기를 자신들의 신앙에 맞추어 생각합니다. 자신들을 높이려고 아브라함과 다윗을 모델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도 인간인지라 범죄와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윗이 전장에 나가 있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큰 죄였습니다. 간음죄와 더불어 살인죄까지 저질렀습니다. 그 죄를 성경은 절대로 작지 않다고 말합니다.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다윗은 후방에서 범죄 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다가(사무엘하11:1-27), 나단 선지자가 지적한 후에야 인정합니다(사무엘하12:1-12). 그때 다윗이 말합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죄를 범하였노라ytiaf;j;/hātā’tî 는 내가 하나님의 봉신왕(封臣王)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하고 그릇행하여 마땅히 죽어야 할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크게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 ‘하타나 신약성경에서 ’ ‘하마르티아는 영원히 죽어야 할 죄입니다. 둘 다 과녁에서 빗나갔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갔다는 말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고등비평학자들은 정경 안에서 정경을 찾고자 애씁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성경 밖의 관점과 기준으로 접근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짜 말씀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주로 고등비평학자들이 말하기를 창세기3장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병원학적(aetiological) 전설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합니다. 사람들은 왜 옷을 입는가? 뱀은 왜 배로 다니는가? 왜 사람들은 뱀을 싫어하는가? 등을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고대 셈계신화들에서 찾고자 합니다. 즉 성경의 類比(유비analogy)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Payne). 성경에서 죄를 찾지 않으면 그것은 죄일 수 없습니다. 죄는 어디로 간곳없이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인간의 의만 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신이 되고 영웅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원래 를 의미하는 aJmartiva/hamartîa는 고전헬라어문헌에서 심각한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표적(과녁)을 벗어나는 것, 잘못, 실수하는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다aJmartavnw/hamartâno는 창을 표적을 향하여 던졌는데 적중하지 못하고 빗나가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단어 군들은 헬라에서 큰 실수나 적극적인 범죄보다는 하찮은 것들의 실수나 실패를 말할 때 썼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심각한 것을 묘사할 때 하마르티아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는 거의 인격화되었습니다. 죄가 대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그 수중에 가진 사악하고 인격적인 능력으로 묘사했습니다. 죄가 관념적으로 특별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편적입니다.

 

로마서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로마서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갈라디아서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요한일서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죄가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에 감염되고, 어떤 사람은 피해가는 병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죄는 단지 돌발적이나 발작적인 발생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상태입니다.

 

aJmartiva/hamartîa사람을 그 수중에 쥐고 있는 힘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 아래’/uJpo; aJmartivan/huipô hamartîan 있습니다. Barclay는 예로서 아이는 그 아버지 아래있고, 군대는 그 지휘관 밑에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 아래, 죄의 힘에, 죄의 지배 가운데있다는 것입니다(3:22, 3:9).

 

죄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ejbasivleusen/ebasîlleusen)이라고 했습니다(5:21). ‘바실류스을 의미하는 헬라어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왕 노릇 한다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을 사로잡습니다(aijcmalwtivzontav/aichmallotîzontâ)로마서7:23. 이 말은 전장에서 포로를 사로잡는데 사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죄는 인간 속에 거합니다(7:17,20). 죄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죄는 단순히 인간에게 지배력을 가지는 외적인 힘이 아니고 적이 나라를 점령하는 것같이 인간을 점령하여 그 존재의 본질이나 중심, 핵심에 침입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인간이라고 하면 죄와는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즉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한다면 절대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고백하기를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시편32:1,2)

 

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사도가 類比유비로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구원을 행위나 윤리, 자기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려 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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삯과 은혜(로마서4:1-8)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이냐?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을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차이, 그리스도인과 이교도의 차이, 목사들 상호간의 차이, 신학자들 간의 차이 등 많습니다. 4절을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일을 하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행위, 공력에 의한 칭의를 좋아하고 지지합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을 보는 관점부터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리새파의 교리로 철저하게 훈련이 된 사람들입니다. 바르게 훈련이 되었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이들은 철저하게 행위와 율법만을 강조합니다. 율법도 성경대로의 율법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위한 율법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공력에 의한 칭의의 대표적 인물로 아브라함을 내세웁니다. 유대교의 랍비들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아브라함은 그의 당대에 유일한 의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룩한 민족의 조상으로 선택되었던 주된 이유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있다고 그들은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공력에 의해 쉐키나(Shekinah/빛나는 구름/출24:15,16)를 불러들여 장막에 머무를 수 있게 하였던 일곱 사람들 중의 첫 번째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교리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3살에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할례와 율법을 豫期的으로 수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의가 완전케 되었다고 합니다. 외경 므낫세의 기도는 더 과장된 의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오 주님, 의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당신을 향하여 죄를 범하지 않았던 의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지 아니하시고 죄인인 저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셨나이다” 또한 주전2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경 유빌리(Jubilees)서는 족장들의 약점을 극소화합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에 대한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 완전하였고 평생 동안에 의안에서 즐거워하였다?(23:10)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하는데 저들은 이토록 행위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만큼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만들어놓고는 자신들을 거기에 대입시켰습니다. 의인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의인의 육신적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행위로 인해서 간다고 생각하면 과연 누가 가며, 어떤 사람이 가야 할까요? 아마도 한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겨주시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은혜로 습득하는데 하나님의 칭의없이(은혜없이) 본인들이 자격을 취득하겠다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바울사도의 논증은 4절에 일하는 자들은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한 보수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십니다. 경건치 않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까? 불의한 우리를 의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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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로마서4: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4:1-3)

 

흔히 지성이 있다. 종교성이 있다. 종교인이다.’라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 행위입니다. 그들 조상들의 가르침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또는 과거의 철인들이나 명사들의 가르침을 좇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거기에 매료되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나 소위 말해서 凡人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곧 유명해집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을 그렇게도 끔찍이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평하고 존경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이지, 어떤 것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5:6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창세기15장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중요한 진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장에서는 믿음과 계약이라는 것을 병행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무자한 상태에서 말씀에 의해 부름을 받습니다.

 

창세기11: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창세기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라함의 여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들을 약속합니다. 그의 나이 75이나 되었지만 자녀 하나 없는 상태에서입니다. 그런데 그 불임은 15장에 와도 계속됩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약속만 있었지, 여전했습니다. 결국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데, 희망을 품고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삶의 정황들이 약속과는 많이 어긋납니다. 많이 뒤틀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童話처럼 바로 이루어지거나 나타나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많이 실망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성장합니다.

 

창세기15:1을 보면 아브라함이 두려워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왜 두려워했습니까? 14장을 보면 롯을 구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그들이 아브라함을 반격할지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날마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두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창세기15:2-3 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대답입니다.

 

창세기15:4-5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약속을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그의 의로 여기십니다.

 

창세기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다arey:/yārē’/야레는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성경에서는 두려움의 감정, 존경이나 경외, 의로운 행동이나 경건이라는 영역의 단어입니다. 두려움에 관한 예들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의 불을 보고 두려워했을 때입니다.(5:5). 또한 유대인들이 블레셋인들의 동원소식을 듣고서 미스바에서 두려워했을 때 야레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복합적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연합국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 이 나이 먹도록 자식하나가 없어서 종에게 모든 것들을 물려줄 것을 생각하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는 말씀입니다. 방패란 말할 것도 없이 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상급/rk;c;/sākār/사카르, 임금, 보수라는 뜻입니다. 상급이란 당연히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일한 보수로 마땅히 받아야 할 삯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물입니다. 왕이 위험을 무릅쓰고서 자신의 일을 수행한 신실한 종에게 주는 특별한 표창이 상급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무자한 상태에서 맞서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상급은 희망입니다. 여러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믿음은 성취의 원인이 아닙니다. 만일에 믿음이 성취의 원인이라고 하면 상급이란 마땅한 보수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하루에 열 시간씩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더라이럴 경우에는 상급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에 속합니다. 이런 목사들, 이런 성도들이 더러 있는데, 이들은 자기의 의를 쌓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자기의 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대두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떤 업적이나 도덕적인 결단으로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즉 믿음을 인간의 공적이나 행위에 의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고, 내가 이렇게 했으니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자신의 어떤 행위를 내놓고 대드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고백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인간 피조물에게 새로운 미래를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Walter Brueggemann은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모든 主義(-ism)를 종결시킨다고 했습니다. 道德主義(moralism), 獨斷主義(dogmatism), 敬虔主義(pietism), 實存主義(existentialism), 實證主義(positivism), Marx主義(Marxism), 資本主義(capitalism), 人本主義(humanism) 등은 항상 현재를 통제하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는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현재를 통제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고 행하는 것은 약속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면 아브라함은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서 받아들여 의롭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성도들이나 하나님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삯이 아니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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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임을 내세우는 유대인들(로마서4:1-8)

 

2:1은 ‘그러므로’, 3:1은 ‘그런즉’, 4:1도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를 씁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깊은 골은 여간해서 메꿔지지 않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굴삭기로 산도 옮겨서 골짜기를 메울 수 있지만, 예전에는 깊은 골짜기를 메운다는 것은 상상에만 그쳤습니다. 그만큼 깊은 골은 메꾸기가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사용함에 있어서 극히 배타적이었습니다. 죄 지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성전은 여섯 구획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각 구획마다 한 단계씩 높은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결의 정도를 강조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에게 허용한 유일한 장소로서, 성전 경내 바깥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했습니다. 성전 벽은 90cm의 담으로서, 이방인들이 이를 넘어설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여인의 뜰은 이방인의 뜰보다 90cm 높은 곳으로서, 유대 여인들에게 출입이 허용되었으나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뜰은 3m가 더 높았으며, 유대 남자들이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의 뜰은 이스라엘의 뜰보다 90cm 위에 있었으며,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제사장의 뜰2.5m 위에 있었으며, 성소와 지성소라는 두 개의 구획으로 분리되었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방인들을 배제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선민으로 간주하고 다른 민족들과 구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뜰을 계급별로 나누고 출입을 금지하여 유대교 체제의 엄격한 신분 차별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공로를 심히 찬양하고 있습니다. 누가 조금 정의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일들(善行)을 하면 그 사람을 상당히 높이 평가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血緣과 地緣 그리고 學緣에 의해서 돌아가는 나라입니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데 副應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해도 깎아내리고 끌어내리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같은 출생을 해도 고난과 어려움을 안고 출발해야 하는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공력에 의한 구원을 옹호하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요새로서 아브라함을 내놓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지 바깥으로 굽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배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는 자신들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민과 특권으로 아브라함을 내세웠습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하면서 다른 말들을 내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인간의 공력에 의한 구원을 옹호하는 자들이 강력하게 내세우는 것이 자신들의 어떠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전면에 세웠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래? 과연 그럴까? 사도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꼭 유대인들만의 조상일까? William Hendriksen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뿐 아니라 이스마엘과 에돔 사람의 조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세기25:1-4 1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2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3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또한 아브라함은 로마서4장에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요지는 아브라함이 어떤 의미에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조상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꽉 막힌 사람에게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데 그 기간이 120년이었습니다. 현시대의 수명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기간입니다. 노아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120년이나 보았을 것입니다. 어디에 사용하려고 만드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반드시 노아가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로, 홍수심판 때 피할 배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노아가 무척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홍수라는 것을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아가 만드는 모습을 보고는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곤 어떤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20년의 오랜 기간에 배를 만들었지만, 홍수를 피한 사람은 열 명이 채 안되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왜 그들이 홍수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까? 꽉 막혔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절대로 홍수심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과거의 그들이나 大同小異합니다. 구원에 관한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현대 비 기독교인들이나 모두 같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수정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큰일입니다. 바로 수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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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브라함에 대한 견해(로마서4:1-25)

 

인류사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부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서 한 변법을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방법으로 모든 인간을 대하셨습니다. 즉 한 나라나 한 인물을 노아를 제외하고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불순종했을 때, 인류는 홍수로 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부름으로 이 세계적인 접근방식은 바뀌었습니다.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라 특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인간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개별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하심의 의도는 새로운 인간을 길러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여 나라를 선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역사 가운데서 그의 피조 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들을 구체화하시고, 계시하시며, 유효 있게 하시고, 법적으로 기반 닦으시고, 이행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도래는 하나님의 성품의 통합적인 구원사역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임하심은 인류의 구속사에 필연적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성경에서 또는 유대교사상에 있어서도 아주 큰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언약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역할을 아브라함이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믿음과 순종을 생생하게 인격화시킨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대한 유대인들과 우리와의 견해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견해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서 듣고 배운 것으로서,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육신의 조상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연코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논증은 모든 구원받는 자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신앙에 의해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란 율법과 이 세상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며 살아간 행위로 소위 말해서 착한 일을 말합니다. 이 착한 일을 쌓아두는 것, 즉 공적행위(功績行爲)를 말합니다.

오늘의 우리나라도 조상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소위 세간비를 세워서 우리조상 몇 대조 누구가 조선시대, 또는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높은 벼슬을 했다하여 족보를 만들어서 큰 산 높은 곳에 비석을 세웁니다. 사람들은 그 조상이 자신들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앞에 제사합니다. 즉 유명했던 조상들의 행적이, 오늘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이 유대교적사상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따논 당상(堂上)’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떼어 놓은 당상이 변하거나 다른 데로 갈 리 없다는 데서,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가만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후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동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입니다. 할례와 율법이 있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적인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할례와 율법 밖에 있기 때문에 언약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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