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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의 결과

예레미야애가1:1-6

 

1789714일에 France 국민들은 심히 분노했습니다. 도저히 국민들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가난하고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초호화생활을 했습니다. 국민들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황제 궁은 먹을 것이 넘쳐났습니다. 이때 France의 황제는 루이16(Louis XVI)였으며, 왕비는 마리 앙뜨와네뜨(Marie Antoinette d'Autriche)입니다. 사람들이 빵을 달라고 했을 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해서 유명합니다. 분노한 France 농부들은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했습니다. 죄수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감옥을 파괴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루이16세 치하의 France정부는 극도로 부패했습니다. 엄연히 의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의가 없는 의회였습니다. 175년간이나 한 번도 회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Roman-Catholic과 귀족들이 토지를 모두 소유했습니다. 귀족들은 정부와 교회, 군대의 높은 직위를 모두 독점했습니다. 그리고도 세금은 내지 않았습니다. France 인구의 95%가 농민이었는데, 5%Roman-Catholic과 귀족들이 농민들을 착취했습니다. 이에 농민들은 더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내 농민들이 봉기하였습니다. France 국민들은 1793121일에 루이16세를 단두대에 처형했습니다.

 

어느 나라나 어떤 시대이건 간에 국민들의 뜻을 모르는 군주나 왕들은 국민들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왕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국민들이 철저하게 외면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말씀하신 것들을 거절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1절을 보면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본래는 열국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예레미야애가에 들어서서 읽자마자 나오는 詩句는 매우 슬픈 내용의 詩句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적나라하게 비교해놨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본래는 열국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이제는 과부 같고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오늘 첫 번째로

 

I. 하나님과 같이 했었던 예루살렘(1a).

 

중심(center)이란 말은 한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많은 점들의 초점(Focus)입니다. 그래서 중심이 되기를 사람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의 경제중심은 New York입니다. 세계의 정치중심은 Washington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분쟁중심은 중동입니다. 따라서 중심이란 항상 어떤 것의 핵심입니다. 사건의 한 가운데가 중심입니다.

 

우주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현재 우주의 넓이가 150억 광년내지 200억 광년이라고 합니다. 이 거리가 얼마인가? 빛이 1년간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합니다. 1광년은 9,4670,7264,0000km입니다(지구둘레4,6250km). 지구둘레를 24693463바퀴를 도는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왕복을 22119328598번 하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150억 광년이라고 하는 거리는 상상이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 안에 별들이 약 1000x1000=1022개입니다. 그 속에 지구라는 별이 하나님나라의 중심별입니다.

 

지구라는 별이 별 속에서 그리 크지 않습니다. 태양 속에 지구를 130만개 넣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Antares라는 별이 있습니다. 이 별 속에 태양을 6,400만 개나 넣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Hercules의 별자리 가운데 있는 어떤 별은 1억 개의 안타레스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보다 더 큰 별 EpsilonHercules 별자리 가운데 있는 수 백 만개의 별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비교해 볼 때 지구라는 별은 정말 작고 작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별들의 중심이 지구라는 것입니다. 그 지구의 중심이 유대라는 것이며, 그 중심이 예루살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행복했었습니다. 과거 예루살렘은 항상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예루살렘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도 함부로 예루살렘을 비웃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바로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세상은 신비의 지역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안의 사람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입니다. 그들의 열심이 예루살렘을 번영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머리가 예루살렘을 번영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국가관이 예루살렘을 번영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애국심이 예루살렘을 번영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번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전의 예루살렘을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시적으로 읊조립니다.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라고 좋았던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도 이스라엘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이스라엘을 막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430년간 애굽을 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까? 바로의 권위 때문이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압제했기 때문에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바로 빠져나왔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바로 보내주었습니다. 하나님과 전쟁을 해보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보낸 군사들은 전사들이 아니었습니다. 곤충부대였습니다. 파충류였습니다. Superman보내지 않았습니다. Batman도 아니었습니다. 007도 아니었습니다. 자그마한 파충류와 곤충들과 파리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들한테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상 애굽을 나와 도착한 곳이 홍해 앞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매일 새벽마다 만나가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예루살렘이 든든해졌습니다. 지구상의 철옹성이었습니다. 누구도, 어떤 나라도 예루살렘을 건들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을 觀念的으로 믿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관념이란 현실에 의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을 삶의 수양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의 수행을 위해서 알지 못할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념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제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무엘상1:3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일반 세속역사뿐 아니라 구속역사를 다스리는 전능하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믿어야 합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실제로 믿어야 합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믿어야 합니다.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도우신 하나님, 이삭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실제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며, 성령을 믿는 믿음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에 있고, 세상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한 중심에 있습니다. 큰 별 보다 중요하고 태양보다 중요하다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셔야 합니다.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골리앗을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골리앗은 너무 커서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골리앗이 너무 커서 빗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보여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현 난국을 우리는 타개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이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120년 후에 있을 일을 믿은 것이지,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지 현실을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같이했던 예루살렘은 해가 질 줄을 몰랐습니다. 다음으로 1절에서 6절을 보면

 

1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2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3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4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5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예레미야는 망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슬프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II.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1b-6).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 허초희(許楚姬/許蘭雪軒1563-1589)의 곡자(哭子)라는 시가 있습니다.

 

去年喪愛女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哀哀廣陵土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天才詩人 許楚姬/許蘭雪軒27살에 夭折했습니다. 삶도 그의 시만큼이나 崎嶇했습니다. 그러한 許蘭雪軒이 두 아이를 잃은 슬픔을 시로 적은 것입니다. 절절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글로 나타낸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하는데,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 어디에 이 슬픔을 표현하겠습니까? 정말 슬프고 또 슬플 것입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는 듯 한 詩句입니다.

 

예레미야애가도 이처럼 시로 구성되었습니다. 슬프다(hk;yae/ekah/에카) 시작하는 예레미야의 글은 일정한 형식에 의해서 기록했습니다(acrostic).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예루살렘의 이전의 정경과, 망하고 난 정경을 바라보는 듯합니다. 과거에는 찬란했던 지구의 중심이요, 우주의 중심이었던 곳이 이제는 마치 거름더미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전 세계에서 귀빈이었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노숙자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했다는 슬픈 노래입니다. 어째서 세계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레미야는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선지자로 살았습니다. 유다를 위해서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는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예레미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친애굽파, 친앗수르파로 나누어 싸움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무슨 말만 하면 반민족주의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그들이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심판은 닥쳐오고 있는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심판이 임박했다” “그러니 빨리 전하라그래서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러면 유대는 예레미야의 말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자꾸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전하고, 그리고 쫓겨나고, 맞고, 갇힘을 당합니다. 그렇게 40년간을 반복합니다. 예레미야의 irony는 듣지 않는 자들에게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만 유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도 전했습니다. 하박국도 전했습니다. 요엘도 전했으며, 아모스도 전했습니다. 그 외 여러 선지자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전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너희들은 세계 제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된다(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는 것입니다. 빼어난 민족이 되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성전 준공식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나를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자들만 남겨두고 모두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성도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입니다. 불신앙이 모든 죄의 기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사람들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청지기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걸립니다. 어떠한 것이 그 말씀에 brake밟습니까? 물이 포도주가 될 리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포도주를 파는 곳에 가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교인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치상으로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물을 항아리에 채웠습니다. 채운다음에 예수님께 그래도 최소한 항아리마다 포도한광주리씩은 넣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없으면 한 송이씩이라도. 그래야 포도주가 되든지 말든지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성은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제동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니 될 리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되는데 그것을 우리가 하지 못합니다. 순종하면 우리의 신상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가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는 목사의 말도 믿지 않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그 모습 그대로 우리들의 생활상에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믿은 그대로 우리들의 생활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사실 성경이 요구하는 예배생활 참 힘이 듭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의 신앙생활은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귀합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귀하게 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보자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습니까?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오늘과 내일과 미래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많이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신앙생활만 요구합니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사는 것, 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신앙생활만 하자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항상 불투명합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신앙으로 투명하게 보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도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37을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하나님에게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의 의도에 다가가야 합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기 어렵지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좁은 길로 가라고 했습니다. 가는 길은 협착하고 힘이 들지만 그 끝은 우리들이 원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좀 불편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내일을 위해서입니다. 오늘을 위하고 내일을 위해서입니다.

 

다큐멘터리영화에서 인도네시아 어떤 섬에 희한한 종족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돼지를 기른 다음 날을 정해서 모두 한 번에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상당히 많은 돼지인데 한 번에 잡아먹고 일 년 내내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재 편하고 다음은 곤란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현재는 곤란하지만 다음의 편함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여호와는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불순종에 대해서 가차 없이 행하시는 분입니다. 자비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은 순종의 대가로 상을,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대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의 가는 것을 지도하십니다. 우리의 서는 것을 지도하십니다. 그리고 소망의 항구에 이르게 하십니다. 신명기28:1-14은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받을 복을 말했습니다. 28:15-68까지는 불순종했을 때 받을 저주를 말했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우리가 고를 수 있으나 그 결과까지는 고를 수 없음을 아시고 순종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에 순종하며,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And

예루살렘의 멸망 원인

예레미야1:1-3

 

우리나라에서 4대강공사는 100% 잘못된 공사였습니다. 4대강공사에서의 dam은 강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4대강의 dam 말고 일반 dam은 그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dam은 많은 물을 저장하는 곳입니다. dam은 우기에 많은 물을 저장했다가 건기에 물을 사용하게 합니다. 과거에 사람들이 적을 때는 dam이 없어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dam은 생명수를 저장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dam은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건설부터 튼튼하게 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건설 후에도 정기적으로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dam이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dam의 관리를 맡은 자는 철저하게 순시를 하면서, 댐에 이상이 있나 없나 살펴야 합니다. 만일에 댐에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생겼다면 즉시 이를 보수해야 합니다. 즉시 보수하지 않으면 조그마한 구멍이었던 것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상태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들이 지난 5공화국과 6공화국 시절에 엄청 많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dam들이 붕괴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조그마한 구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점점 그것이 커버려 나중에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니다 싶은 구멍들은 우리가 미리미리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발생하면 즉시 막아야 합니다. 조그마한 틈을 막지 못할 때, 후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1절과 2절에 예레미야서의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I.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1,2)

 

동물들은 저마다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합니다. 벌과 나비들은 날개나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짐승들은 소리로서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합니다. 물고기들도 몸으로 또는 소리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대체적으로 말과 글로서 합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로서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말들은 중요성이 내재합니다.

 

말은 누가 했느냐에 따라서 듣는 자의 행동이 결정됩니다. announcer가 아무리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그 말에 우리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사람들의 말은 듣습니다. 직장의 상사라든지, 나와 거래하는 사람들이라든지, 가족들의 말은 듣습니다. 즉 우리를 통제하는 사람들의 말은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 간에 경제적인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운전 중에 교통경찰이 음주측정을 할 때는 두말없이 응해야 합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안 불겠다.고 하면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제하는 사람들의 말은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도 들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필히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하셨습니다(1:28). 노아에게는 다시는 지구를 덮을 홍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8:21). 아브라함에게는 내 말만 따르라 그러면 너는 복 받는다”(12:1-3)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을하면서,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이 제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성경 곳곳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하는 조건을 수없이 달고 있습니다. 순종하면 인생이 순풍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이라는 말씀을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요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살았습니다.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4km지점에 위치한 곳입니다. 아나돗은 다윗시대에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왕상2:26)과 예레미야(1:1)의 고향입니다.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이곳에 살았습니다(7:27, 10:19).

예레미야(hy:m]r]yI)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세우심을 암시하는 이름입니다. 예레미야는 주전627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1:4-9). 40년간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요시야,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때 선지자였습니다(1:2-3/주전627-586/42년간). 종교개혁의 시대에서부터 예루살렘과 유대가 망할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절을 보면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말(Why:m]r]yI yrEb]DI)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h~w:hy] Arb'd])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의 출처는 여호와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중계하는 중계자일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 위대할 수 없습니다. 예례미야가 없으면 제2의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는 등장시키십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위대하다고, 어떤 목사들을 그릇이 크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릇이 큰 것이 아니라 잘못된 야망을 가졌다고 해야 합니다. 잘못된 야망을 가지고 망하는 목회자들을 우리들은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을 크고 작다는 그릇 론은 대단히 잘못된 말입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대변인일 뿐입니다. 대변인들은 자신의 정당이나 조직체의 의견을 피력할 뿐이지, 그 사람이 실권자가 아닙니다. 실권자는 그 뒤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기독교가 계시종교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계시종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심입니다. 다른 여타의 종교들은 교주들의 가르침이나 정신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교주들의 정신과 가르침을 받고, 그대로의 삶을 지향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정신, 누구의 가르침에 끝날 뿐이지, 죽었던 교주가 그들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어떠한 action을 취해주거나 계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믿음은 인간의 추측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信念이나 槪念도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입니다. 우리가 믿는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어떤 법보다, 무슨 말보다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과 도덕에 대한 우리의 권위를 확신해줍니다. 성경은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어서 지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종교도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Luther성령은 하늘과 땅에서 가장 분명한 저술자이자 화자(writer and speaker)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말은 위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의 사람들, 역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목숨까지 걸고, 목숨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과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그 말씀이 적용됩니다. 성경은 거의 유대인들이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성경은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을 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적용됩니다. 노아와 우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우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을 믿어야 유다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에 어떤 정신을 계승받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자 왔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섭리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그냥 주일이 되었으니까 교회 가자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는 가정은 그 집이 아무리 좋아도 나침반이 없는 배와 같습니다. 언제인가는 반드시 침몰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임을 믿고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라하면 하고 말씀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법이요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II. 말씀을 듣지 않은 예루살렘(3)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아의 아들 시드기야의 11년까지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이 기간이 22년입니다. 22년간이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2년도 아니고, 2년 두 달도 아닌 22년간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적국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천사 하나가 출동하니까 하루 밤에 18,5000명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갈라진 바다위에 손을 폈더니 이스라엘을 뒤따라오던 애굽 군인들이 모두 수장이 되었습니다. 애굽의 군인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망했습니다. 망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김은 왕이었습니다. 왕이 되어가지고 백성들이야 죽든 살든 엄청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습니다. 제 돈으로 제 집을 지었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 집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심히 탄압하고 죽였습니다. 일한 대가도 주지 않았습니다(22:13-19).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7 그러나 네 눈과 마음은 탐남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여호야김의 죄목이 무엇입니까? 불의한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린 것입니다. 국가 지도자로서 백성에게 폭력을 행한 죄입니다(22:17).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화롯불에 태웠습니다. 궁정관리로 하여금 성경을 읽게 한 후, 칼로 싹뚝싹뚝 잘라서 화롯불에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왕과 신하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옷을 찢지 않은 죄를 하나님께서 물은 것입니다(36:20-24). 유대인들은 이래서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나라를 멸망케 한 것입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이미 주시면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못 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정보판단과 자신들의 능력은 믿으면서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지상에 오셨을 때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27:1-2). 예수님의 사도들에게 굴레를 씌워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철저하게 훼방한 것입니다. 역사이래로 사탄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와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니까요. 말씀을 믿고 떠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고, 말씀을 믿고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올라갔으며, 말씀을 믿은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냈습니다. 말씀을 믿은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말씀을 믿은 다윗은 전쟁마다 승리했습니다. 말씀을 믿은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믿은 사람들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1031일은 종교개혁일입니다. 15171031Martin Luther(1483-1546)가 타락할 대로 타락해버린 공룡 같은 Roman Catholic이 잘못되었음을 조목조목 지적한 날입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가 제자리를 잡도록 도운 날입니다.

 

Luther가 비텐베르크 정문에 95개 조항을 내걸었지만, 처음에 교황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Luther의 게시문이 시한폭탄일 줄은 몰랐습니다. 갈수록 사람들이 Luther의 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Luther로 인해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Roman-Catholic은 여우같은 에크를 시켜서 독일에서 추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하여 에크의 음모로 독일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에 Luther15208, 10, 11월에 세 가지 논문을 발표합니다.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An den christlichen Adel deurscher Nati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입니다. ‘교회의 바벨론 감금’(De Captivare Babylonica Ecclesiae)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입니다.

그중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중에서 Roman-Catholic은 세 가지 담을 쌓고 있다고 폭로했습니다. 첫째 담은 영적문제에 관하여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담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교황만이 유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담은 교회의회(Konzil/)를 소집하는 권한은 교황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Roman-Catholic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황청에 무력으로 유배시켜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시켰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모든 것들이 교황의 뜻이어야 했고, 교황의 칙서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황의 칙서가 더 권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감금’(De Captivare Babylonica Ecclesiae)에서는 교회의 성례전을 교황청에 감금했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어떠할 때 타락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타락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인간 자신들의 뜻대로 해석할 때 교회는 타락합니다. 이 문제는 비단 교회사에서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반역사도 관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에 많은 나라들이 뒤안길로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이슬람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Caliph Omar는 예루살렘을 637년에 정복했습니다. Omar는 철저하게 마호멧이 시킨 대로 했습니다. 유대인의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슬람사원을 세웠습니다. Omar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불태웠습니다. 이 자가 성경의 초기사본들을 모두 태웠습니다. 수천 개의 교회들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이슬람사원으로 바꾸었습니다. 한때 어거스틴과 키프리안이 사역했던 북아프리카도 이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모조리 색출해서 죽였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시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 진짜야, 기독교인들이 믿는 경전일 뿐이야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성경을 믿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과거의 성도들이 지키고 믿었던 말씀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의 성도들이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악에서 떠나라” “네가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남겼을까?”하고 우리에게 수시로 다짐하십니다. ‘너에게 현재 보이는 것이 없지? 그래도 나를 믿어봐’ ‘너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나를 믿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청교도인 Philip Henry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회심을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때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의 시금석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 우리의 거울로 삼아 자신의 모양을 보게 되고(1), 우리의 규례로 삼아 좇아 행하며(6:16), 우리의 물로 삼아 깨끗하게 씻고(119:9), 우리의 불로 삼아 마음을 뜨겁게 하고(24), 우리의 검으로 삼아 마귀를 대적하며(6), 우리의 조언자로 삼아 모든 의심을 물리치며 (119:24), 우리의 감로주를 삼아 위로를 받고, 우리의 재산으로 삼아 우리를 부요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꼭 믿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우리성도들을 감시하며, 성경이 우리성도들을 읽게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영생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 세상에서 승리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살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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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

사도행전1:1-5 

 

어느 나라든지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국정수반에 당선되면,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국정철학을 발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임이 했던 일들이 옳으면, 그것을 반드시 계승해야 합니다. 만일에 옳은데도 계승하지 않고, 무조건 헐고, 새롭게 세운다면 국가가 이상하게 되어 국민들이 힘들게 됩니다. 지난 정권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국정전반에 걸쳐서 수정을 할 시에 국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가 발전한다든지,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는 지속적으로 좋은 정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별로 알지도 못하면서 국민들의 가는 길을 막아설 때, 그 정책은 대단히 나쁜 정책입니다. 우리나라의 혹자들은 정권만 잡으면 무조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한 대화도 막아버리고, 국민 중 일부, 그것도 그러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철학도 없습니다. 따라서 국정철학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을 때 국민들이 엄청 고통을 당했습니다. 4대강공사라든지, 해외개발 사업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실익은 전혀 없으면서 마치 거대한 이익이 있는 것처럼, 과대포장을 했기 때문에 국가에 치명상을 입었음을 우리들이 아주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은 자신의 철학과 사명을 그의 제자들에게 맡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나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친구 데오빌로에게 그간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1절에서 3절을 보면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둘 다 데오빌로에게는 사람에게 써 보냈습니다(1:3,1:1). 과연 데오빌로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3에서 누가는 그를 데오빌로 각하”/Qeovfilo" kravtisto"라고 불렀습니다. 각하란 말을 쓰는 것을 보아 데오빌로는 로마정부의 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총독을 각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를 심히 박해했던 로마정부의 고관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런 사람에게 목적을 가지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누가는 기독교를 로마정부에 천거하고자 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여러 차례 반복하여 로마의 지방장관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3:12에서는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18:12에서 아가야 총독인 갈리오가 고린도 사건 때 철두철미하게 공평했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16:35절에서 빌립보의 관헌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후 바울에게 공개사과를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19:31절을 보면 에베소의 관현들이 바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기 전까지는 로마관헌들이 친하고 기독교에 대해 공정하고 공평한 태도를 취한 것을 여러 번 보여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누가는 기독교인들은 신령하고 충성스러운 국민이며 항상 그렇게 인정되어 왔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18:14절에서 총독 갈리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부정하거나 괴악한 일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19:37절에서 에베소의 서기장이 기독교인들에게 유리한 중언을 합니다. 23:29절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합니다. 25:25절에서 베스도는 바울이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같은 장소에서 만약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하지만 않았다면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 글을 기독교인들이 증오와 박해를 받을 때 썼으므로 로마 관헌들이 기독교에 대해 항상 공평하게 대했으며, 기독교인들을 악한 사람들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토록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바칠 수 있던 가장 고귀한 것인 예수님의 이야기라고 써서 헌정한 것입니다.

 

I.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1-3)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단어적인 차이로는 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ejn tw'/ aijw'ni touvtw//en tô aiȏni toûto)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 즉 오는 세상(ejn tw'/ mevllonti/en tô mêllonti)은 우리가 이 세상의 판단으로 죽었을 때의 세상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저 세상을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갑니다. 한번 저 세상으로 가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오지 못합니다.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는 절대로 올 수 없습니다. 저 세상에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은 불과 100년 안팎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합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사람들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육안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매우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 세상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직 이 세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는 모두 같이 있습니다. 가족과 같이 있고, 친지들과 같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 갈 때는 나누어져서 가게 됩니다. 그때는 내 마음대로 가지 못합니다. 선택사항(option)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라고 묻지 않습니다. 각각 분리되어서 automatic으로 갑니다. 저 세상에서 분리되는 기준은 사람들이 웃었겠지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안했느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기준은 없습니다. 선한 행동, 윤리적인 행동은 아예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도덕적인 행위이지 저 세상에서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저 세상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fact) 구약시대만 해도 오는 세상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해서 이 세상저 세상은 긴장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저 세상이 공존하는 세대로 변했습니다. 어떻게 공존하는 세대로 만들었습니까?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헌정(presentation) 했다고 했습니다.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누가가 먼저 쓴 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1:1-4절을 보면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써서 헌정한 복음이 누가복음인데 그 안에는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가르치심, 사도들을 택하시고 명하신 일, 그리고 승천하신 날까지를 기록했습니다. 즉 누가복음 안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부터 다시 가신 일까지가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까지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저 세상의 약속을 가져다주는 세상인데, 곧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심가르치심에서 출발합니다.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저 세상에서의 삶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지금 당장 미국을 우리에게 준다 해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한다면 물려야 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 사면령을 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화목하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이 저 세상의 능력을 체험하고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저 세상이 세상서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전체를 선물 받은 것보다 더 기뻐해야 할 사건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며,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3절에서 5절을 보면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는 조용하지만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데오빌로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II. 구원을 위해 제자들이 할 일(3-5)

 

프랑스사람들은 영어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프랑스어를 반드시 씁니다. 영국 사람들도 미국의 영어를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국식 발음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미국식 영어에 죽습니다. 영어에 살고, 영어에 죽습니다. 어린쥐, 어미쥐 하면서 orange의 본토발음을 하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영어를 모른다고 해도 흉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모르면 흉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모른다고 해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습니다. 미국사람이나 영어를 잘해야지, 한국 사람이 영어를 미국사람보다 잘한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서울을 서울로 발음해야 하는데 서우-’로 발음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자국어를 왜 세계 공용어로 만들려고 합니까? 미국이 세계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식의 모든 것을 세계로 퍼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강제로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로 퍼뜨리려 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는 자발적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주전333년에 AlexanderHellas문화를 전 세계에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주전 60년에 Caesar는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그의 정치철학을 전 Roma제국에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NapoleonEurope을 제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HitlerMussolini(Benito Mussolini), 일본의 도조 같은 악한 자들이 세계제패를 하려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려고 한 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악한 발상들이었습니다. 무력적인 발상들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위험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실패해야 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패하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세계가 위험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Hitler나 일본의 흉악무도(凶惡無道)한 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전할 일이라면 우선 그 발상이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공정성이 있어야 하고, 인류를 살리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화(globalization)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것을 전한다 해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전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전할 사람들이 있다하더라도 전할 내용이 시원찮으면 전할 수가 없습니다. 전할 내용이 좋다하더라도 그것을 잘 전하지 못하면 역시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것들이 되고 세계화가 되려면 내용도 좋아야 하고, 전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상품(commodity)은 극상품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상품은 나라전체를 주고서라도 구해야 할 상품이었습니다. 현재 국제적인 최고의 상품은 석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상품은 그보다 더 좋은 상품이었습니다. 꼭 구해야 할 극상품입니다. 얼마나 좋은가? 저 세상에까지 소용되는 필요한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품은 이 세상에서 꼭 구해야 할 상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제품입니다. 누구도 이 상품을 만들지도 못하고 복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상품명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상품을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행해야 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예수님께 들었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14:26을 봅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보혜사입니다. 보혜사를 NIV성경에서는 CounselorNKJVHelper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ASV(미표준역)Darby성경은 Comforter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의 보혜사(comforter)란 단어는 Wycliffe(1320 1384)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Wycliffe시대 1300년에서 1400년경에 comforter란 단어는 Latin용감하다는 fortis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란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 넣 어 주시는 분입니다. 곧 하나님이신 성령이십니다. 제자들이 가져갈 상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만드시고 함께 하시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들은 그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어떤 사람이 물에 푹 잠기듯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지배받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은혜를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의식이었습니다.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세례는 실체였습니다.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참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전하는 제자들이나 전함을 받는 사람들에게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열정적(passionate)으로 전하면 되는데 왜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열정(passion)을 앞세우고 가면 되는데 왜 말리십니까? 무장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는 제자들이 나오자마자 잡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은 무력을 세워서 공격해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붙잡히지 않으면 그냥 나가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성령세례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마치 마력적인 체험을 하는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전도를 받는다든지, 우리의 사역의 대상에게 함께 하심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지, 특별한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받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의심했던 제자들에게 40일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믿도록 독려하셨습니다. 믿음을 확실히 갖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또 한분의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구원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망하지 않을 길을 모두 마련하셨습니다. 그는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지성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폐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들이 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첫 번째 명령을 받은 제자들도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위명령은 제2, 3, 4의 제자들이 계속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그 대위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약속하신 성령도 이미 우리는 받았습니다. 받은 그 은혜를 우리는 사장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할 일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많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과 우리 중, 우리가 주체(main body)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체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돕는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대위명령에 임해야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내가 부흥시켜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은퇴한 신자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일광욕을 즐기듯이 교회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야성(wild)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모여야 합니다.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모여야 합니다. 부지런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님께로부터 들은 성령님과 함께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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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信稱義이신칭의의 결과/자유를 누림(로마서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마태복음18:21에서 27을 보면 어떤 임금에게 일만 Talent 빚진 자를 蕩減탕감해주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만 달란트(Talent)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우선 Roma의 屬州속주였던 유대에서 Roma에게 조공세로 바치는 금액이 연 6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약 34kg입니다. 한 돈이 3.75g입니다. 약9067돈입니다. 한 달란트는 Roma의 화폐로 6000데나리온(Denarius)입니다. 한 데나리온이나 한 드라크마(Drachma)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데나리온은 Roma의 화폐, 드라크마는 Hellas의 화폐입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라면 6000일(약17년)의 품삯입니다. 최소한 20년의 한 사람의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인 셈입니다. 한 사람의 6000만 일의 품삯입니다. 한 사람의 16,4384년의 품삯입니다. 바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가치입니다. 따라서 이 돈을 갚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만’murivo"/muirîos는 Homer 이래로 ‘셀 수 없는’, ‘무수한’이라는 뜻이기에 산술적인 수자가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일만 달란트입니다.

 

2절을 보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해결할 수 없는 일만 달란트를 갚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상상할 수 없는 돈을 갚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갚기 전에는 노예였었는데 갚았기 때문에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억압에서 놓여나는 것이 자유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지불하거나 감옥에 가둡니다. 죄를 지었으니 자유를 속박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백성의 빚을 갚아주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의 빚을 갚아주시고 성부께 그들을 인도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부하나님께 인도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갚아주셔서 우리가 자유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두신 놀라운 구원입니다. 그래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즐거워하되 대단히 즐거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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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信稱義이신칭의의 결과/화평을 누림(로마서5:1-11)

 

사람이 근심이나 걱정이 있으면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쉼을 가진다해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과 마음이 한 몸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편치 않으면 함께 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절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 죄를 해결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화평은 골고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죄가 골고다에서 해결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화평의 길이 마련된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의와 화평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리스도께서 마련해주신 화평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화평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실 유대에 있어서 평화라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부터 유대는 긴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긴 전쟁에 돌입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에 가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순종을 했습니다.

신명기7:1-11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것은 4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찌니라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들은 많은 이족으로부터 수많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 괴롭힘은 지루하게 이어졌습니다. 천년을 넘어서 이어졌습니다. 로마서의 배경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소망이자 꿈이었으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화평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화평을 잡은 것 같으면서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창세기3:22-2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소망을 걸었던 가인도 범죄 함으로 에덴동산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창세기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사람들이 마치 죄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하얀 도화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하얀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늘 무엇엔가 쫓겨 삽니다. 시간에 쫓기든, 세월에 쫓기든, 재물에 쫓기든 여러 가지 등에 평생을 쫓겨 삽니다. 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평생을 화평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화평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Pax Romana는 로마의 평화입니다. Pax Romana는 로마제국이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세기와 2세기경의 시기입니다. Pax RomanaAugustus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Pax Augusta로 불리기도 합니다. 주전27년에서 주후180년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고대 Roma역사상 유례없는 태평성대였습니다. 간헐적으로 군사적인 충돌도 일어났고, 이따금 속주의 반란도 일어나긴 했습니다. 그러나 Pax RomanaRoma제국의 지배계급들에게는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렇지만, Roma제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더없이 가혹한 때였습니다. Roma의 평화유지를 위한 로마의 폭력과 착취로 인해서 고통 받는 제국주의 체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없었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학생들은 교육 때문에 평화가 없습니다. 성인들은 가정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평화가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정말 조금의 쉴 틈도 없습니다. 이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반복적인 pattern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적용하심으로 인해서 진정한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And

그리스도께서 충분히 죽음과 지옥을 극복하시고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시고 승천하신 날보다 더 영광스러운 날이 있을까? 그러므로 당신은 모든 관문을 다 통과하고 거기에 이를 때까지 영광에 이르는 계단으로서 당신의 안식일을 십분 활용하라.

                                 Richard Bax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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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마서4:18-25)

 

로마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온 책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그간에 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에 속아서 살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행위라는 것, 행위로 인한 공덕이라는 것에 많이 속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결코 행위로 인한 구원은 없다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엄청난 속임을 당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태산과 동산의 차이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도토리 키 재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탁월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래프로 그린다면 조금 돋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나라까지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상이 아니고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조상이요, 행위로 인한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을 뒤엎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기자가 어떤 사건에 camera를 들이댑니다. 기사화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기사가 fact가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자의 해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건이 fact가 될 수도 있고, fiction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도가 됩니다. 예를 들면 안중근의사는 우리나라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웅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들이나 일본사람들에게는 영웅이 아닙니다. 아시아전체 사람들은 일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정부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시아 전체가 뭉쳐버립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성령주의자들은 성경에서 성령만 찾습니다. 성경 어디를 설교해도 성령은사로 귀결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 유대인의 해석과 바울사도의 해석이 다른 이유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육신적 조상인 행위로 인한 아브라함입니다. 아닌데도 굳이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하나같이 행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입니다. 아닌데도 굳이 맞는다고 설파합니다. 그 설파함에 넘어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이라 함은 사람에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인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어떠한 행위, 어떠한 공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공로라고 해봐야 그것이 어떻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여기실 때에 역사하시는 원리입니다. 공로나 행위와 대조되는 믿음은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원리입니다. 이에 바울사도는 창세기15:6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기시킵니다. 시편32편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진리였던 것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진리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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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세 성전

 

이스라엘은 역사 이래 세 차례에 걸쳐 성전 건축이 있었다. 제1성전은 솔로몬성전이고, 제2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이며, 제3성전은 헤롯성전이다. 솔로몬성전은 처음성전이고, 스룹바벨성전은 바벨론 포로 후에 페르시아 시대 때 페르시아 왕의 허락으로 귀환해서 건축했으며, 헤롯성전은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던 성전이다.

 

제1성전-솔로몬 성전

성전건축

솔로몬성전은 솔로몬 재위 5년째에 시작되어 7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재위 11년에 준공되었다(왕상6:37-38).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 구릉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은 원래 다윗 왕 때 계획되었다. 그러나 왕국 통일을 위해 너무 많은 전쟁을 치르며 피를 홀린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채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것으로 그의 역할을 마쳐야 했다. 성전건축을 위해 다윗과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자재와 기술 원조를 받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꾼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 당하던 B.C.586년에 파괴되고 성물은 모두 약탈되었다(왕하25:13-17,렘52:13).

 

성전 구조

가. 본체

성전 본체는 길이 약 27m(60규빗. 넓이9m(20규빗. 높이 약 13.5m(30규빗)의 크기로 이루어졌다. 이 중 지성소는 길이 약9m(20규빗)이며, 성소의 길이는 약 18m(40규빗)이었다(왕상6-7장 대하3-4장).

 

나. 낭실

성소 앞의 현관을 말한다. 길이는 약9m(20규빗)이며, 높이는 약54m(120규빗)이다.

 

다. 야긴과 보아스

낭실 좌우에 있는 두개의 청동 기둥으로 높이는 15.8m(35규빗)이며 기둥머리는 2.3m(5규빗)로 백합화 꽃모양을 했다.

 

라. 뜰

a. 바다

큰 물두멍. 솔로몬 성전에서는 성전 좌우에 각 5개씩 도합 10개의 바다가 있었다 직경이 약 4.5m(10규빗)이며, 높이 약 2.25m(5규빗)로 아래는 12마리 황소가 바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b. 번제단

높이 약 4.5m(10규빗)로 성막 뜰에 있던 번제단보다 무려 3.1m(7규빗)나높았다(대하4:1).

 

2성전-스룹바벨 성전

 

건축동기

유다왕국의 멸망은 곧 성전파괴와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후 예루살렘은 70년 동안 폐허가 되면서 성전도 같은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면서 성전재건은 활기를 얻게 되었다 본토로 돌아온 1차포로 귀환 인솔자 스룹바벨은 제일 먼저 성전재건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제2성전인데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하여 스룹바벨 성전으로도 불린다.

 

건축과정

페르시아 왕의 허락 하에 재건된 성전 건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원주민과 암몬 등 주변국의 지속적인 방해로 작업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 귀환 초기 어려운 생활고와 식어진 신앙열기도 성전재건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격려하며 성전재건 역사를 독려한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다. 그리하여 B.C.515년에 성전은 재건되었다.

 

건축 결과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비교할 때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지성소에는 언약궤와 속죄소도 없었고, 현관의 우림과 둠밈도 없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성전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생활에 중심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고.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건축 이후

2성전은 이후 B.C.169년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졌다 유대를 헬라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수리아 왕은 성전 번제단 자리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성전을 더럽혔다. 이런 일련의 성전모독 행위들은 곧이어 일어난 마카비 혁명으로 중단되고 마카비 가문은 성전 외벽을 쌓는 등 성전을 정화시켰다. 하지만 B.C.63년경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B.C.106-48)에 의해 제2성전은 파괴되었다.

 

3성전-헤롯 성전

 

건축시작

파괴된 제2성전을 개축한 사람은 헤롯대왕이다. 그는 재위 18년째 되던 해(B.C.20년경) 성전개축을 시작하였다.

 

건축과정

헤롯은 공사시작 18개월 만에 본체를 15층 규모로 개축하고 B.C. 9년 경에 제단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모두 완성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헤롯은 성전 뜰, 성전 담, 성전 문등 외곽을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몄는데이 공사는 헤롯 시후 A.D. 64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성전공사는 1000 명의 제사장들을 포함하여 무려 20,000명이 동원되는 어마어마한 대역사였다. 이때 사용된 돌의 크기나 대리석의 아름다움은 당시 건축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리석의 높이는 평균 90-120나 되었고, 어떤 것은 돌 하나의 길이가 12m이고, 무게가 100t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성전을 본 자는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13:1), 유대 랍비들은 이 성전을 보지 못한 자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까지 극찬하였다고 한다.

 

건축이후

3성전은 이런 외적 규모나 아름다움과는 달리 본연의 모습을 많이 훼손하였다. 이미 로마의 지배 하에서 정치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대제사장은 왕이나 총독에 의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절기 때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많은 유대인들은 성전을 거점으로 하여 로마에 항거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성전은 열심당원들의 본거지처럼 활용되었다. 결국 A.D.70년 로마의 장군 Titus (디도)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시켰다. 성전 완공 6년 뒤의 일이었다.

 

성전 파괴 이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는 파괴된 성전 터에 로마식 신전을 세웠고, 7세기 경에는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으로 불리는 이슬람식 사원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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