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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시는 이도 아니십니다. 제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을 제거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확립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상되는 조건들에 근거하여 장차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을 작정하실 때 그것이 장차 있을 것으로 예지하셨거나, 또는 그 가정된 조건들에 근거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지하셨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작정하신 것은 아닙니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3장1-2항).
성경에 정당한 권리를 부여하는 성도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최우선의 목적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랑으로 또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 의 사랑의 중심에 그분 자신이 서 있다는 것과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추구하는 것과 그분을 이끄는 원동력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사43:7,21).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뛰어난 많은’ 지혜를 나타내려 하셨습니다(엡3:9-10). 그분 자신의 명성과 찬양과 명예를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렘13:11). 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알리기 위해서 고대의 백성들이 그분께 반역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시106:7-8).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삼상12:20-22). 그들을 계속해서 남겨두셨습니다(겔20:9,14,22,44).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이 최대한으로 파멸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사48:8-11). 이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일을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 땅에 첫 번째 오셨습니다(요17:4,6). 그분이 가져다 주셨고 그분 스스로가 즐거워하시는 구원의 모든 세밀한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자신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게 하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엡1:6,12,14). 예수님은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기 위해”(살후1:9-10)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러한 동일한 관심사 곧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핵심이라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1항을 보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깊은 것”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다.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 그러나 믿음 또는 선한 행위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인내 또는 피조물들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들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저희들을 선택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이 아니다.
신앙고백서는 또한 “나머지 인류’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 위에 행사하시는 그의 주권적인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택함 받은 자 이외의 나머지 인류에게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버려두실 뿐 아니라 그들이 치욕과 진노를 당하도록 작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는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미케 하려 하심이다(3장7항)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결정해 놓으신 자신들의 종착지에 임의적으로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을 것인가 또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으시는 가운데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다음의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정하셨다(3장6항).
그 방법에는 사랑하시는 아들의 속죄 사역, 선택된 자들에 대한 유효한 부르심, 인간의 마음에 이루어진 회개와 믿음을 통한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 그리고 그분 자신의 칭의와 성화 사역 등이 있습니다. 또한 나머지 인류를 버리시기로(‘passing by’는 라틴어 praeteritio에서 유래한 ‘preterition’/간과하심을 가리키는데) 정하신 하나님의 결정이 오직 그분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만 근거한 것이 사실인 반면, 그분께서 버리시기로 정하셨던 자들을 모욕과 진노에 처하도록 결정하신 것에는 그분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상태(죄)가 또한 고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자신의 창조사역을 통해 실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전능한 권세와 헤아릴 수 없는 지혜, 무한한 선하심을 섭리적으로 행사하심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오는 그 영원한 목적을 계속해서 실행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섭리하심은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들에게까지 이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5장4항을 보면
그 섭리는 아담의 첫 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그러한 죄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여러 세대에 가장 지혜롭고 강력하게 제한하시고 그 밖에도 명하시고 주관하시어 그 자신의 거룩한 뜻들을 이루도록 하신다.
아담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죄로 인해 아담은 원래의 순결한 상태(ststus integritatis/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던 상태/posse peccare aut posse non peccare)로부터 타락하였고, 죄로 죽게 되었으며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습니다(status corruptionis). 즉 아담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peccare)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온 인류의 언약적 대표자였기 때문에, 그가 범한 최초의 죄가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그로부터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습니다(6장3항). 이에 따라 (아담으로부터의 통상적인 출생에 의한 후손이 아닌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는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의 대표성 때문에 또한 그들 자신의 죄와 부패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윤리적 거룩성과 그분이 세운 율법의 의로운 기준에 계속해서 못 미쳤으며(롬3:23), 그로 인해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은혜로운 선택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으며, 그들을 위하여 그들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또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축복의 유익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하여 그들을 영원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록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에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조금도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가지고 오는 모든 것들은, 그들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자신들의 죄와 도덕적 오염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근본적이고 전적으로 오직 주님께만 속하며(욘2:10), 이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엡1:6,12,14/Robert L. Reymond).
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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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 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23 |
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5 |
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1 |
이신칭의의 결과/인내할 수 있음 (0) | 2020.02.07 |
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성경은 하나님의 의지, 즉 그분의 계율, 목적, 계획 그리고 계명들의 뜻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의지는 우리 영적존재의 본질적 속성일 뿐 아니라 우리 인격의 필수조건이기도 합니다. 합리적인 자기결정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電氣전기, 磁氣자기 또는 식물의 생존원리와 같은 단순한 힘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결정 능력 곧 자기 자신의 선한 기쁨에 따라 행하거나 행하지 아니할 능력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그분을 이성적 피조물로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존재의 영역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자유롭습니다. 자유는 자발성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보존에 있어서만큼 행함에 있어서도 자유로우십니다. 그 까닭은 이 행위들은 그분의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창조하거나 창조하지 아니할 우주를 존속시키거나 존속시키지 아니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또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데 있어서 자유로우십니다. 그 까닭은 그렇게 행할 그분의 목적은 그분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도덕적 확실성이 필연성만큼 엄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decretive will)는 그분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건들의 미래 상태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교훈적 의지(preceptive will)는 그분의 이성적 피조물의 의무준칙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일으키거나 허용하는 목적을 무엇이든 작정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의 피조물이 행해야 할 바나 행해서는 안 될 바를 교훈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는 결코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금하는 것을 행하도록 작정하시거나 다른 사람들이 행하도록 야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금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작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비록 죄를 범하는 것이 금지된 것이기는 해도,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작정적 의지가 부정적인 교훈적 의지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신학자들에 의해 학문적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를 범하도록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작정적 의지는 긍정적인 교훈적 의지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예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명령할 수 있지만, 지혜로운 이유들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금하실 수 있습니다. 흔히 숨겨진 의지(voluntas beneplaciti)와 드러난 의지(voluntas signi) 사이의 구별은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 사이의 구별과 똑같습니다. 그분의 작정들을 언급하는 전자는 그분의 선하신 기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의 교훈들을 언급하는 후자는 그분이 허용하거나 허용하지 않는 것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는 여전히 그분 자신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분의 목적을 의미합니다. 또 그분의 드러난 의지는 그의 피조물에게 알려진 그분의 교훈들과 목적들입니다. 선행적 의지와 결과적 의지는 어거스틴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서 작정들 상호간의 관계입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목표(the end)는 수단들에 선행하고 전자의 목적은 후자의 목적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행적 의지(antecedent will)를 통해서는 자신의 영광의 현현을 결정하시고 결과적 의지(consequent will)를 통해서는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세상의 창조를 결정하셨다고 말합니다. 루터교인들과 항변파(Remonstrants)는 그 말들을 이주 상이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선행적 의지를 통해서는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지만, 모든 인간이 다 회개하고 믿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지하고 결과적 의지를 통해 믿을 것으로 예지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먼저 어떤 사실을 목적하셨고, 그 다음에 다른 사실을 목적하셨다는 것입니다(Charles Hodge).
하나님의 작정( 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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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8 |
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1 |
이신칭의의 결과/인내할 수 있음 (0) | 2020.0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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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우리가 왜 인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멸망 받았던 우리를 지옥에서 끌어내시기 위해서 삼위하나님은 각각 책임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성부하나님은 우리들의 구원을 작정하셨습니다. 성자하나님은 작정하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시고, 이루신 구원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멸망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임론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려면 영원히 무죄상태로 만들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일어날 모든 일을 확실하게 하시는 영원한 결정(작정/God’s decrees)입니다. “예정하다”(predestinate)와 “작정하다”(foreordain)라는 단어는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정하다”는 “작정하다”보다 문자적으로 다소 좁은 의미입니다. “예정하다”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의 운명을 언급할 때 사용합니다. 특별히 도덕적 행위자들의 영원한 상태와 관련될 때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할 때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입니다. “작정하다”라는 단어는 보다 넓은 의미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결정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영원한 구원이나 정죄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합니다. 예정이라는 개념 안에 들어 있는 “선택”(election)이라는 단어는 개인들이나 민족들 혹은 단체들이 영생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선택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유기”(reprobation)는 부정적인 의미의 예정입니다. 어떤 이들로 영원한 정죄나 잃어버림의 고통을 겪게 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예정”이란 “선택”이나 “유기” 혹은 둘 다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작정”이란 선택과 유기 혹은 둘 다를 언급할 수도 있지만 보다 넓은 범위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Millard J. Erickson).
하나님의 뜻(작정)은 자유적 행동과 모순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인간의 모든 동기를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드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작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역사가 발전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수립하시거나 변경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수립하심에 있어서 영원 안에서 수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하신 뜻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은 全知전지하셔서 최선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심으로 악한 것은 무엇이나 목적하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작정은 하나님의 자유에서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기 만한 피조물들처럼 부득이해서 어떤 추가적 일을 하시거나 목적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계획하실 경우에 조금도 제한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작정은 일차적으로 피조물의 행복을 목적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성도의 완전을 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의 행복과 성도의 완전을 기하는 문제들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영광 속에 작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유효적 작정(efficacious)과 허용적 작정(permissive)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 가운데는 유효적으로 발생하게 결정하신 것도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기로만 결정하신 것도 있습니다. 허용적인 섭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은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정 속에는 모든 과거 현재 미래가 내포됩니다(Henry C. Thiessen).
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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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5 |
이신칭의의 결과/인내할 수 있음 (0) | 2020.02.07 |
이신칭의의 결과/환난중에도 즐거워함(롬5:1-11) (0) | 2020.02.01 |
이신칭의의 결과/즐거워함 (0) | 2020.01.28 |
以信稱義이신칭의의 결과/인내할 수 있음(로마서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인내한다는 것, 참는다는 것은 어떤 기회를 기다리고 낚싯대를 물속에 잠가놓고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어떤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전쟁상태입니다. 인내/uJpomonhv/huipomonê/휘포모네는 평상상태가 아니라 어떤 압박하는 상태나 환난을 당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뎌내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인내/huipomonê는 히브리어 소망/hw<q]mi/miq-veh/미크베를 번역했습니다.
예레미야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인내는 히브리어 소망/hw:q]Ti/thiq-vāh/티크바를 번역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휘포모네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면서도 여간해서 사람들이 변하지 않을지라도 꾸준히 인내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 라도 끈질긴 인내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잡은 것은 결코 시시하지 않습니다. 끝없이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을 잡았기 때문에 절대로 잡은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금 울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독한 고난과 환란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성도들은 갈등을 합니다. 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시는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지? 하면서 심한 자괴감과 절망감에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robot은 사람이 memory한대로만 움직입니다. 절대로 memory이외의 움직임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robot처럼 만들었다면 사람은 죄를 질 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해놓으시고 천사들더러 24시간 감시하라고 하셨다면 사람이 타락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menual대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전연 없이 꼭두각시처럼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robot처럼 menual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선용해야 했습니다.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들의 생애는 처음 창조 때보다 훨씬 힘들어졌습니다. 땀을 흘려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잡은 영생은 어렵게 잡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놓치지 않으려면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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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1 |
이신칭의의 결과/환난중에도 즐거워함(롬5:1-11) (0) | 2020.02.01 |
이신칭의의 결과/즐거워함 (0) | 2020.01.28 |
이신칭의의 결과/자유를 누림 (0) | 2020.01.16 |
以信稱義이신칭의의 결과/환난 중에도 즐거워함(로마서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kaucwvmeqa ejn tai'" qlivyesin/kauchômetha en taȋs thllîpsesin/‘카우코메싸 엔 타이스 쓸립프세신’은 직역하면 ‘환난 안에서 내가 자랑한다’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못 말릴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기 때문입니다. 2세기경에 익명의 저자가 Diognetus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언어 혹은 풍습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도시에 살거나 어떤 이상한 방언을 말하거나 혹은 어떤 독특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이 가르침은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의 재능이나 사색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단순히 인간적인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면 헬라의 도시와 외국의 도시, 어디에나 살았다. 그들은 의복과 음식 그리고 삶의 다른 면들에 있어서 지방의 풍습을 따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시민권의 놀랍고 유별난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고국에 살고 있으나 이방인이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그러나 이방인처럼 모든 어려움을 겪는다. 모든 외국은 그들에게 고국과 같고, 또한 모든 고국은 외국과 같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원치 않은 아기를 죽이지 않는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하지만 잠자리를 함께 하지는 않는다(성적문란이 없음을 말함). 그들은 “육신”으로 존재하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 않는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들의 생애를 보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들이다. 그들은 제정된 법을 준수하고 또한 그들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그 법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모든 사람은 그들을 박해한다. 그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비난받는다. 그들은 사형을 당하나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부요해지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모자라지만 모든 것이 풍족하다. 그들은 굴목을 당하나 그 굴욕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다. 그들의 이름에 누명을 씌우나 그들은 깨끗하다. 그들은 조롱당하나 대신 축복한다. 그들은 부당하게 다루어지나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행동한다. 그들이 선을 행할 때 그들은 악행자처럼 처벌받는다. 처벌을 받을 때 그들은 새 생명을 얻은 자처럼 기뻐한다.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유대인의 공격을 받으며, 헬라인의 박해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그들의 적의의 어떤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몸에 대한 영혼의 관계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영혼은 몸의 모든 지체를 통하여 퍼져 있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모든 도시들에 걸쳐서 존재한다. 영혼은 몸 안에 있으나 몸에 속하여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무척이나 싫어하지만 싫어해야 할 아무런 근거나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냥 싫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 때문에 환난을 겪습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는 것은 복음 때문에 겪는 시련입니다. 그런데 그 시련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시련 즉 고난, 육체와 정신적인 고난을 복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많은 환난을 받습니다.
로마서8:35-39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린도전서4:9-13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1:4-10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고린도후서11:23-30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갈라디아서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주의 백성이 되지 않았으면 아무런 고난이나 환란을 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를 믿고 보니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같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과 성경대로 살다가 보니 세상이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 즉 세상과 짝하지 않는 성도들을 돌려세우고, 억압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살되 항상 불이익을 당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것을 자랑한다는(즐거워한다) 것입니다. 어떻게 환난이 복이 될 수 있습니까?
빌립보서1:17-30 1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히브리서12:5-11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시편119:67,71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예레미야31: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인간이란 본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환난을 받을 때 더 연약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권능은 상대적으로 크게 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자신은 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수많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환란 중에 즐거워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즐거움이 그 안에 있는 “존귀한 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최고의, 최상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선발되고, 선택받은 핵심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0) | 2020.0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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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의 결과/인내할 수 있음 (0) | 2020.02.07 |
이신칭의의 결과/즐거워함 (0) | 2020.01.28 |
이신칭의의 결과/자유를 누림 (0) | 2020.01.16 |
이신칭의의 결과/화평을 누림 (0) | 2020.01.13 |
以信稱義이신칭의의 결과/즐거워함(로마서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2절의 ‘즐거워하느니라’ kaucavomai/kauchâomai는 Sappho이래(주전612년경에 태어난 그리스 여류 시인) ‘자랑하다, 자랑으로 여기다’입니다. 보통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카우카오마이’는 철학자들이나 풍자 작가들의 저서에서 자랑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에서 발견되었습니다. 70인역본의 성경용법에서도 대체적으로 ‘자랑하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 히브리 단어들을 번역했습니다. 70인역본에서는 자랑에 대한 비판적인 격언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20:11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잠언25: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부함이나 지혜 그리고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9: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왜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치 창조하고 이룬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기에 사람은 자랑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사사기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유대인들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철저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교리가 대대손손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바울사도는 인간의 공로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유대인의 교리를 차단합니다. 바울사도는 율법성취에 근거한 인간의 자기 자랑의 습관을 모두 차단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자랑은 하잘 것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인간의 공로나 행위에 의해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은 바울서신의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에베소서2:8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어떤 교리나 어떤 행위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영광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2:23에도 율법에 근거한 인간의 자랑이 무가치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바울사도는 인간이 개종하는데 따르는 자랑을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소위 지식인 또는 인간의 교육을 받고 자신들의 지혜를 믿는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자신들의 지혜를 신봉하거나 신뢰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9, 3:21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어떤 형태로든지 육적인 자랑을 배제합니다. 그것은 허위적인 자랑이요 의롭지 못한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고린도후서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고린도후서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편5:11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로마서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자랑)하느니라
빌립보서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갈라디아서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린도후서11:12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고린도후서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로마서15: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마땅히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하신 일과 사도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에 대한 자랑도 서슴없이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권위도 자랑해야 하며 믿음의 열매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교회를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즐거이 자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인해서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신칭의의 결과/인내할 수 있음 (0) | 2020.0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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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의 결과/환난중에도 즐거워함(롬5:1-11) (0) | 2020.02.01 |
이신칭의의 결과/자유를 누림 (0) | 2020.01.16 |
이신칭의의 결과/화평을 누림 (0) | 2020.01.13 |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0) | 2020.01.11 |
거짓자 이세벨을 책망하시는 주님
요한계시록2:18-29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Verfassungsgericht)는 국가 내에서 최고의 실정법 규범인 헌법에 관한 분쟁이나 의의(疑義)를 사법적 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특별재판소입니다.
헌법재판소는 법적분쟁을 사법적으로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일반법원과 같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파급효과가 큰 헌법적 분쟁을 대상으로 하며, 헌법을 최종적으로 유권 해석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일반법원과 구별됩니다. 헌법재판소는 법원의 제청에 의한 법률의 위헌여부 심판, 탄핵의 심판, 정당의 해산 심판, 국가기관 상호간,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간 및 지방자치단체 상호간의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법률이 정하는 헌법소원에 관한 심판을 담당하는 그야말로 이쪽도 저쪽도 아닌 한 가운데서 귀를 막고 바른 판결을 해야 할 기관입니다. 그런데 가끔가다 ‘위법’이지만 ‘유효하다’는 모순의 판결을 한 예도 있습니다. 2009년 10월 29일 헌법재판소는 지난 7월22일 국회에서 표결처리한 신문법, 방송법 등 소위 media법이 ‘위법’이라는 지적이 그것입니다.
‘違法’인데 ‘正法’이라는 말은 ‘검정색’의 페인트와 하얀색 페인트를 섞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헌법재판소는 검정색이 아니고 하얀색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검정색을 검정색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하얀색이라고 말하는 것은 헌법재판소에서 할 일이 아닙니다. 이로 인해 나라의 도덕성이 또 한 번 국내외적으로 심각하게 실추되었었습니다. 이에 대한 파급은 훗날에 엄청날 것입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과연 존치해야 될 기관이가를 생각해볼 판결입니다. 이후로 계속 헌법재판소는 右 click한 판결을 내곤 했습니다.
두아디라교회도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교회처럼 칭찬을 받을 점이 있었습니다. 19절을 보면
내가 네 사업(행위)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I. 두아디라교회의 믿음을 칭찬하는 예수님(19).
옛날 우리들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숙제검사를 받았습니다. note를 선생님에게 제출하면 선생님은 빨강색 펜으로 원을 그려주었습니다. 원이 다섯 개면 100점, 원이 네 개면 80점, 세 개면 60점입니다. 더러 네 개를 받는 날도 있었지만, 다섯 개의 원을 받는 날이 많았습니다. 다섯 개의 원을 받으면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사람이 괜찮아서 원을 다섯 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숙제를 제대로 했기 때문에 다섯 개의 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도요한을 통해 두아디라교회의 감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잘 안다( oi\dav). 너희 교회가 하는 일들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많다고 하셨습니다. 칭찬을 받아도 보통 받은 것이 아닙니다. 빨강색의 원을 다섯 개나 받았습니다. 두아디라교회의 행위(ta; e[rga)는 곧 사랑(th;n ajgavphn)과 믿음(th;n pivstin), 섬김(th;n diakonivan)과 인내(th;n uJpomonhvn)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평안할 때 받았다면 칭찬의 도가 좀 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에서 받았다면 칭찬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가 칭찬받은 행위, 곧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는 짝을 이루는 것들입니다. 사랑은 섬김을 낳습니다. 믿음은 인내를 낳습니다. 이 모두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역시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섬김은 인내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으로 인내할 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믿음, 믿음(pivsti"/faith.)하는데 과연 우리가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120년이나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 25년이나 기다렸습니다. 이삭도 20년을 지나서야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다윗은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어땠습니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습니다. 그 많은 날들을 우리 선배들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예수님 당시 혁명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존재한 의식적 경건을 버려야 했습니다. 랍비식 가르침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인간적인 것의 계속적 포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꼭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병 고침을 받을 때에 그들의 믿음을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보다 ‘믿음’을 구(求)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통로입니다. 마가복음6:5-6을 보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불신이 매우 강해 예수님께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수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불신은 하나님의 능력과 항상 충돌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머릿속에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꽉 차있을수록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자기의 의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불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신앙이 이 세상에서 범하는 죄 중에 가장 크고 두려운 죄입니다. 사실 믿지 못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갔고, 지금 가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도 헤매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문맹자들이 아닙니다.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에 관한한 my-way를 외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가능성들에 복종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산을 옮긴다 하셨습니다(막11:23). 믿음은 뽕나무 뿌리를 뽑는다 하셨습니다(눅17:6). 뽕나무 뿌리가 뽑힌다는 것은 당시 히브리관용어였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할 때 뽕나무를 들먹거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그 불가능한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창조의 질서를 변형시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Ecete pivstin qeou'/have faith in God/막11:22), 믿음을 더하소서(Provsqe" pivstin/increase faith/눅17:5)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특별히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가능성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Martin Luther는 믿음이란 ‘전망을 밝게 하고, 관망을 환하게 하며, 소망을 솟아나게 한다’고 했습니다. Spurgeon은 ‘믿음이란 자신을 약속 위에 던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힘은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미래는 믿음에 있습니다. 가정에도, 사업장에도, 직장에도 내가 있는 곳에는 항상 믿음과 같이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살지 않습니다. 남을 짓밟고, 흔들어서 떨어뜨린 다음에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뇌구조와 그들의 뇌구조가 다릅니다. 우리들은 법대로 살지만, 그들은 무법으로 삽니다.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법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fair play를 하려고 하지, 편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민완형사가 자리 잡고 있어 편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주님의 능력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는 성도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여러분을 전혀 다른 사람을 만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II.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20-23).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 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단체행동을 할 때 가장 제재를 받는 곳은 군대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서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군에 있을 때는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와 비슷하게 제재를 받는 것이 조합(partnership)입니다. 농업협동조합, 축산협동조합, 인삼협동조합 등 조합은 2인 이상이 상호 출자하여 공동사업을 할 목적으로 결합한 단체입니다. 조합은 단체를 이루어 공동사업을 경영하는 단체입니다. 조합의 목적은 조합원 전원에 의해 경영되고, 그 이익은 전 조합원에게 분배됩니다. 그러므로 조합은 함께 경영하고 함께 분배를 받는 단체입니다.
성경주석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두아디라는 종교적으로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Artemis와 Apoll0 신전이 있었지만 유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황제숭배(Caesar Worship)의 중심지도 아니기 때문에 이방종교의 위용에 압도되거나 황제숭배 위협에 직면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이 외부적으로 박해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두아디라市는 종교적인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상업적인 요충지였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도로망을 통해서 세계무역의 반수이상을 관장했다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양모의 중심지였으며 염색 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사도행전16:14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왔습니다. 당시 자주빛 염색약은 엄청나게 비싼 품목이었습니다. 자주염료 453g이 약1억원(10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자주장사 ‘루디아’는 엄청난 물품을 파는 귀부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아디라는 어느 도시들보다 무역조합이 많았습니다. 이 무역조합이 교회에게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습니다. 두아디라에서는 어떠한 장사나 업자도 상업조합 일원이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가입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역조합을 하는 사회적인 활동들은 이교의 신들의 숭배와 연관되었습니다. 각 조합마다 수호신인 우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두아디라에서 출세하려면 조합에 가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합원이 되면 우상을 숭배해야 했습니다. 조합원은 조합에서 갖는 제례의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조합원들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이 밥은 ‘아폴로’나 ‘아데미’ 신전에 바쳐지고 남은 술잔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 다음 식사 후에는 동물을 잡아서 아폴로나 아데미 신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바쳐진 고기를 먹었습니다. 다음으로 술에 취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행음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경제적인 제재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Iezavbel)이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난국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타결 책을 그럴듯하게 제시하였습니다. 이세벨의 타결 책이 무엇입니까? 사단을 이기기 위해서는 사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란 것을 경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죄를 알 수 있느냐? 그러므로 사단의 은밀한 행동을 배워보자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파격적이었습니다. 우상숭배 괜찮아, 까짓것, 음행? 신전행사잖아?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어. 그러므로 우상숭배도 해라. 신전의식의 음행에 참여하라,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머물면서 보다 나은 성도가 되자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도들에게 간음을 행하고 우상에게 바쳐진 것들을 먹어도 좋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충동해서 이교의 상업조합에 가입하고, 우상에게 절하고, 바치고, 먹고, 행음해도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단의 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의 깊은 ‘계곡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이 판을 치고 있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엘리야 선지자의 대적자입니다. 시돈에서 섬기던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끌어와 이스라엘을 타락시킨 여자입니다(왕상18:4).
그러나 ‘불꽃같은 눈’을 가지시고 악인을 발로 밟으실 주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심판이 그에게 임합니까?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와 같이 하는 사람들은 큰 환난가운데 던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자식들은 죽여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빨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여기에서 이세벨의 이름을 썼습니까? 그 여인의 이름 이세벨은 음행과 우상숭배에의 유혹과 동의어입니다.
열왕기상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인을 가져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인을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9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19:1,2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성도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유명한 사람들이 망치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 같이 작은 교회들은 제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은 교회들은 여러 가지가 개입됩니다. 정권, 경제, 스포츠, 문화 등이 서서히 교회를 타락시킵니다. 2015년에 W.C.C. 세계대회를 부산에서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일부는 좋아하지만, 일부는 싫어합니다. 이 대회는 세계적인 대회입니다. 그런데 싫어하는 이유는 천주교, 힌두교, 기독교, 불교, 무당들도 함께 하는 모임입니다. 우리는 Sola Fide, Sola Christus, Sola Gratia입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것입니다. 꿀에 설탕을 약간 넣어도 꿀맛 그대로입니다. 먹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수된 물 20ℓ에 한 컵의 하수도 물을 섞는다면 마시겠습니까? 이세벨은 두아디라 성도들에게 정수된 물 10ℓ에 썩은 물 20ℓ를 타서 마시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외부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내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위협은 외부적으로 오는 박해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소리 없이 안으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아디라교회에게 너희 교회에 있는 칭찬한 일들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너희들은 너희에게 ‘있는 것들’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입니다. 이것을 절대 놓치지 말고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안에 넣고 꼭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신앙을 굳게 잡는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처럼 세상을 깨트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믿음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들에게 닥치는 악들을 제거하신다 하십니다. 그리고 참된 왕권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어떤 권세입니까?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트리듯 하는 권세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누가 함께 하십니까? 교회를 쥐고 계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실 요새 취업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IMF이후로 우리나라는 청년실업이 해마다 정체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정책과 억지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右click 정권8년 만에 그나마도 잡은 직장을 비정규직으로 묶어놓고 있습니다. 좋은 정책, 좋은 제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을 정책, 죽일 제도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조합에서 탈퇴한다면 빈곤과 배고픔, 핍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과 행위를 감찰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불꽃같고 날카로운 눈은 이세벨 같은 자들을 용납하고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기실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로 남아있는 성도들에게는 아무 짐도 지우지 아니 하십니다(행15:28,29). 성도가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음행을 피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판도(版圖)는 갈수록 뒤바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깨끗한 양심을 갖고자 하는 성도들이 억압당하는 때입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들의 현재가 심상치 않아도 주님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의 성도들은 아사직전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날그날 사는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의 신앙을 굳게 지켜 이 세상을 이깁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잡을 때 사탄의 머리는 우리의 발아래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있을 때 소망의 항구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을 때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하고 말씀을 굳게 붙잡으십시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새벽별은 새벽하늘을 다스리는 상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빛나는 왕권과 통치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별은 항상 홀과 연결된 왕권의 상징입니다.
제1주일 : 인생의 유일한 위로(제1-2문)
제1문 생사 간에 있어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대답: 내 영혼과 육체는 생사 간에 있어서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모든 죄를 대신하여 완전히 속량하여 주셨으며, 모든 악한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신 신실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지게 할 수 없으며 또한 나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수밖에 없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을 통하여 나에게 영생을 보증하시며, 이후로 온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그를 위해 살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로마서4:7,8,8:14,16,28, 고린도전서6:19,3:23, 베드로전서1:18,19, 요한일서1:7,2:2, 요한복음6:39, 마태복음10:29-31, 누가복음21:18,
고린도후서1:20-22, 에베소서1:13,14
고린도전서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전서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요한일서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해설] ‘위로’(慰勞)라는 말은 인간의 심리적 안정감의 욕구를 표현해 준 느낌을 갖게 해준다. 인간은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인간적인 위로를 실존적(實存的)으로 필요로 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위로는 실제로 고난 속에 있는 인간 기쁨과 희망을 잃어버린 인간 삶의 근거를 잃고, 낙심하며 좌절하고 있는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 때문에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Heidelberg Katechismus)은 인간적으로 접근하기에 매우 용이하고 배우는 자들이 질문의 대답에 관심을 갖도록 동기부여의 역할을 잘 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위로’라는 말은 첫 질문에서 취급되어 인간적으로 접근하도록 하지만 대답은 가장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본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위로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성령님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는 이 책 전체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가르침의 총 주제이기도 하다. 또한 제시된 질문의 대답은 인간이 삶과 죽음의 관계를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주체로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위로가 인간에게 진실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인간은 생의 마지막에 한 분 심판자를 대면해야 하며, 죽음의 한계에서 존재와 영혼과 육체의 전적인 파멸을 직면하는 문제를 인간은 맞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지만 언제나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결산되어야 할 인생임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삶은 어두움의 그늘 아래에 놓여 있으며,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그늘에서 다시 나아와 생명을 약동하며, 꽃피우는 밝고 활기찬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하이텔베르그 요리문답서 제1문은 그런 점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이 영생하는 방법을 알도록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뜻임을 일깨워 준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 복음은 인간을 위로하고 인간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그것으로 인간이 다시 기쁨을 얻게 하며, 참 생명의 풍성한 존재로 살도록 생명의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제1문은 이러한 근거를 알리기 위하여 ‘위로’란 말을 사용하였고, 그 위로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주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유일한 위로는 생명의 소유권이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제1문의 대답은 ‘나’란 존재는 그 소유가 ‘나의 것’으로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며 나는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한, 그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위로의 근거임을 밝히고 있다. 제1문에 제시된 대답은 아래의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나’ 외에 참 소유주(主)가 따로 있다는 것이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고전6:19)
2. 그는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를 속량하였고, 죄악의 권세에서 나를 해방(자유하게)시켜 주신 분이시다(롬8:1-2).
3. 그는 성령을 통하여 나의 영원한 삶을 보증하시며 주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의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후5:17).
첫 번째 것은 생사 간에 있어서 인생의 유일한 위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밝혀 주었으며 둘째와 셋째의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의 객관적인 근거와 주관적인 근거가 되는 것임을 밝혀 주었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피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과 내 죽음에서의 유일한 위로자요 또한 위로 그 자체임을 증거 해 주고 있다. ‘객관적인 근거’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피 안에서 즉 그의 생명의 헌신(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흐트러진 질서를 새롭게 하셨으며 그 안에 우리의 유일한 위로로서 삶의 시련에서도 인내하며 용기를 가지며 기쁨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객관적 근거가 된다. 그리고 ‘주관적인 근거’란 우리 안에 위로로서 작용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의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 자신이신 성령을 뜻한다. 성령님께서 인간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이 이루신 질서의 자유 속으로 옮겨 주신 것이다(엡1:13).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의 성령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인 ‘나’를 보증하신 것이다. 생각하면 죄인 된 인간은 불안과 흔들림 속에 살고 있으며 미래적으로도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무너진 질서와 파괴된 인권은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존재로 세워졌다(고후5:17).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은혜를 입은 새 존재(새로운 피조물)로서 인간은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질 수 없는 자유의 상태로 옮겨져 보호되며 보존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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