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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일제의 박해(사도행전21:7-14)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에서는 전범재판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독일의 나치주의자들에게는 공소시효도 없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유럽의 전범재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후에 독일은 이웃국가에게 늘 고개를 숙였습니다. 독일의 총리로 당선되면 이웃나라에 가서 90도로 절하며 우리조상들이 잘못했노라고 빌었습니다. 영국에 가서도 빌고, 프랑스에 가서도 빌고, 스위스에 가서도 90도로 절하며 유럽의 국가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늘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독일은 유럽에서나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쪽에서 군국주의자인 일본은 그 반대였습니다. 전범재판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주변국들과 영토분쟁 중에 있습니다. 러시아의 쿠릴 열도,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우리나라의 독도를 자기나라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어서 일본은 아시아의 똘아이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태까지 아시아의 전쟁피해국에게 이렇다할 사과한마디 하지 않았으며 욱일승천기를 은근히 내밀면서 과거로 급 회귀하는 듯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그래서 늘 아시아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침략 때문에 많은 것들을 소모했습니다. 임진왜란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침략이 잦았던 것과, 급기야 36년간의 치욕적인 역사로 인해서 아직도 그 피해를 보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즉 친일파들로 인해서 역사가 엉망이 되었고, 엉망이 된 역사가 바른 역사처럼 행세하게 하려고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모든 것들을 말살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신사참배라는 것은 일본의 과거 천황들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에 전 국민이 참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우리나라 도시나 읍, 면에 이르기까지 신사를 세우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의 교회는 절대적으로 반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합병직후에는 축절 때마다 천황이란 작자의 사진에 절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이미 뒈져버린 일제의 천황이란 놈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고 뒈져버린 무사놈들에게 경건하게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로서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삼엄한 일제하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곧 수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박관준 장로, 박의흠 전도사, 이영한 목사, 전치규 목사, 손갑종 목사 등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했습니다. 한국의 교회역사도 피 흘린 역사였습니다. 오늘날도 잃어버릴만 하면 일본의 총리라는 작자가 신사참배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일본은 군국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들은 틈만 나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우는 사자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선한 사람들은 우리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국을 부활시키려는 현재의 정치일선에 있는 자들은 사탄의 자식이요, 마귀의 앞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침몰합니다. 이제라도 일본에게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유럽처럼 전범재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황이란 작자를 비롯해서 모든 군국주의자들을 모두 전범으로 처리하여야 합니다. 태평양에 수장을 시키든지, 남극의 바다에 수장을 시키든지 해야 합니다. 아시아에 이런 똘아이가 있는 한 늘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로마행 (0) | 2016.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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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저스틴 마터(사도행전21:7-14)
Justin Martyr(100-165)는 2세기의 변증가중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Justin은 100년경 팔레스타인의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에서 태어났는데, 구약시대에는 세겜이라 불렀습니다. Justin은 160년 경『유대인 트뤼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he Jew Trypho』라는 책을 썼습니다. Justin은 주후 135년경 에베소에서 트뤼폰이라는 유대교 랍비와 이틀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책은 그 대화를 회상하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의 중요점은 Justin이 어떻게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는지를 묘사해 주기 때문입니다. Justin은 소년시절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에베소로 갔습니다. 에베소에서 Stoa철학자에게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Stoa철학을 곧 실망했습니다. Stoa철학은 하나님에 관한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Stoa철학이 하나님에 관한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 것은 인생과 세계에 대한 궁극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진지하게 시도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Stoa철학에 神論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Stoa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보다는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을 더 강조했습니다. Stoa철학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래서 Stoa철학자들은 이성(理性)을 인간 속에 있는 신적(神的)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기 Stoa학파에 속했던 철인황제(哲人皇帝) Marcus Aurelius는 이성(理性)을 신(神)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Stoa철학의 범신론적(汎神論的),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경향이 Justin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Stoa철학에서 실망을 느낀 Justin은 소요학파/逍遙學派에게로 갔습니다. 소요학파는 Aristoteles/384-322)가 창설한 학파로 Aristoteles의 경험주의(經驗主義)를 계승 발전시켰으며, 자연과학 연구에 힘썼고, 결국 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 경향으로 흘러갔습니다. Justin은 소요학파에서도 실망했습니다.
소요학파를 떠난 Justin은 Pythagoras學派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Pythagoras학파의 선생은 Justin에게 철학공부를 하기 전에 음악, 천문학, 기하학 등의 분야를 철저히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전문가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Justin은 철학 공부하는데 그러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까지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Justin은 Pythagoras를 떠나서 플라톤(Plato)학파에게로 갔습니다. Justin은 비로소 만족해하였습니다. 플라톤학파가 철학을 연구하는 다른 어떠한 학파보다 하나님의 문제에 대해 깊이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Justin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관심 내지는 종교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는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까지, Justin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직 이성적으로만 이해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당시 Justin이 찾아간 플라톤학파는 중기플라톤학파였습니다.
유대인 트뤼폰은 Bar-Kochba전쟁을 피하여 팔레스틴을 떠났습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유대인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전쟁이후 유대인은 1800년 이상 실향민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Justin은 기독교를 유대인 앞에서 체계적으로 변증할 수 있을 만큼,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Justin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유스틴은 플라톤주의 철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Justin은 플라톤주의 철학을 기독교와 연결시켰습니다. 따라서 Justin은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최소한 12세기까지는 철학적으로 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는 교부 어거스틴(Augustine)입니다. 1200년경부터 서구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데, 중세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신봉했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가 Thomas Aquinas입니다. Justin은 교회 안에서보다는 교회 밖에서 더 많이 활약했습니다. 평신도로서 Justin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Justin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각지를 다니며 선교사로도 활약하였습니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고 있어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태어난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가 에베소와 로마에 철학자 학교(schola philasophorum/150년경)를 세웠던 것도, 철학을 가르치려 했던 것이라기보다는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Justin은 철학뿐 아니라 신학도 가르쳤습니다. Justin의 제자 가운데 앗수르 출신의 변증가 타티안(Tatian/110?-?180)입니다. 플라톤주의자였던 Justin은 플라톤의 스승이었던 Sōcratēs를 대단히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Sōcratēs처럼 제자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Justin은 Marcus Aurelius때 165년경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유니우스 루스티쿠스는 Justin에게 이방신에게 경배하면 석방하겠다고 하였으나 Justin은 거부하고 참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순교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를 寫하여 형벌을 (或은 苦難을) 받음으로 福 있는 者가 되는 것이니, 이는 우리의 主님이시요 구속자되시는 분이 온 世上을 審判하실 때에, 그 분의 무서운 審判臺 앞에서 우리가 救援의 確信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니라.
Justin은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알기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으며, 복음을 알고 난 후에는 그 복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사항입니다.
출처: 초대교회사.교부열전(김광채)
3차 전도여행을 끝내며 (0) | 2016.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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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일제의 박해 (0) | 2016.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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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이그나티우스(사도행전21:7-14)
Ignatius는 시리아 안디옥의 제3대감독이었습니다. Ignatius가 활동하던 당시 안디옥은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Cristianouv"/Xhristianoûs/행11:26)이라 최초로 사용했으며, 기독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도 역시 Ignatius라고 합니다. Ignatius는 트라얀 황제(98-117)의 재위기간에 체포당하였습니다. 이때는 기독교가 모든 사회 계급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Ignatius는 열 명의 군인들에게 체포, 구금당해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Ignatius는 로마로 이송되어 가는 도중에 에베소인들, 마그네시아인들, 트로이인들, 로마인들, 빌라델비아인들, 서머나인들, Polycarp에게 일곱 개의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Ignatius는 당시 Roma는 성도들을 붙잡아서 압송할 때 일부러 먼데로 돌아서 압송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성도들을 압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Ignatius는 열 명의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서 압송되어 가는 도중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서머나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Polycarp 감독의 영접을 받고 에베소, 마그네시아, 트랄레스(Tralles) 등지에서 온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문안을 받습니다. 이어서 Polycarp는 북으로 드로아를 거쳐 선편으로 네압볼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빌립보를 지난 다음 에그나티안 도로를 이용해 마게도냐를 가로질러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맹수의 이빨에 “밀”처럼 갈아지기 원하였던 Ignatius의 열렬한 소원은 마침내 로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Ignatius의 편지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순교에 대한 예찬입니다. Ignatius는 순교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이르기를 열렬히 갈망했습니다. Ignatius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죽는 것이 더 나은가라는 문제에 대해 전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순교를 막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나는 그대들의 친절이 나를 오히려 해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그 계획을 성공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디 나의 부탁을 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얻게 하라. 나로 하여금 맹수들의 밥이 되도록 상관 말고 놓아두라. 맹수들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하나님의 밀이다. 내가 야수들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의 순결한 떡으로 나타나리라. Ignatius에게 있어서 순교는 진정한 제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서머나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Ignatius는 나는 순교가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알고 있노라. 이제야 나는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얻을 수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나의 야망을 자극하지 못한다.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이나 또는 내 뼈를 찢고 사지를 부러뜨리며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매를 맞는 등 그 어떤 마귀의 괴롭힘도 참고 견디겠노라. 트라얀 황제는 기독교를 몹시도 경멸했습니다. 그가 안디옥을 방문하였을 때 안디옥의 감독 Ignatius를 만났습니다. 그의 소문을 들었던 황제는 Ignatius에게 여기 사악한 마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있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Ignatius는 “나는 마귀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자입니다”라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트라얀은 “네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라고 되물었다. 감독은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그렇습니다. 그 분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Ignatius는 로마로 이송되어 4,5000명의 관중이 가득 찬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 트라얀이 Ignatius에게 사형언도를 내리자 Ignatius는 “오, 주여 나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이와 같이 영화롭게 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나이다”라는 마지막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의 생활을 많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경제적으로 여유치 않다면, 마치 자신이 신자가 아닌 듯 생각합니다. 심지어 성도들이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우리의 선배들은 우리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에.
출처:초대교회사?박용규
박해에도 불구하고/일제의 박해 (0) | 2016.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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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폴리갑(사도행전21:7-14)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Polycarp/Poluvkarpo"은 사도요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Ignatius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Polycarp은 Ignatius가 로마로 압송되는 107년경에 이미 서머나교회 감독이었습니다. Polycarp과 Ignatius는 매우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Polycarp은 사도요한의 제자로 Irēnaeus와 Tertulliān이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Polycarp은 영지주의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137년에는 이단 Mārkion과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Polycarp은 Mārkion이 소아시아 지방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Mārkion은 137년경에 Hierapolis의 감독 Pāpiās와 Polycarp의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둘다 Mārkion을 배척했으며, Polycarp은 Mārkion을 사탄의 장자라 했습니다. Polycarp은 155년경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교회의 감독 Anīcētos와 부활절의 시기문제로 논쟁을 벌렸습니다. Polycarp이 로마를 방문한 것은 로마의 교인들 가운데 소아시아 출신의 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Polycarp과 Anīcētos 사이의 부활절논쟁은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로 아무 결론도 없이 끝냈습니다.Polycarp은 80년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할 때까지 86년동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했습니다. Polycarp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Ignatius의 서신들을 모으고 보존하였습니다. Ignatius의 순교는 Polycarp에게 큰 도전과 용기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그날이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연하고 담담한 Ignatius의 신앙에 도전을 받은 Polycarp은 자신도 언젠가는 순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olycarp은 Marcus Aurelius 때인 165년 경에 순교하였습니다. Polycarp의 순교에 대한 서머나인들의 편지에 의하면 “내가 86년동안 그 분의 종으로 살아왔지만 그분은 결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마지막 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순교를 딩했습니다.
Polycarp의 순교는 유명합니다. Polycarp이 발걸음을 옮기자 총독은 Polycarp인지 물었습니다. Polycarp이 그렇다고 하자 총독은 고소를 거부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총독의 회유의 말입니다.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태도를 바꾸라.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없애 버리라. 이야기하라’고 덧붙이면서 총독은 ‘너의 나이를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Polycarp은 운동장에 모인 군중을 쳐다보면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신을 믿지 않으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층독은 강요했습니다. ‘맹세하라. 그러면 너를 자유롭게 해주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 Polycarp은 ‘86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그는 나를 나쁘게 대한 적이 전혀 없다. 나를 구원해 준 나의 왕을 내가 어떻게 욕할 수 있겠는가?’ 총독은 ‘나는 사나운 맹수들을 가지고 있다. 만일 네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그 맹수에게 던질 것이다’고 했습니다.
Polycarp은 ‘맹수들을 불러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태도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잔인함에서 정의로 바꾸는 것운 훌륭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총독이 ‘네가 맹수들을 얕잡아 보고, 또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화형에 처하겠다’라고 했습니다. Polycarp은 ‘당신이 위협하는 그 불은 잠시 타다가 곧 꺼진다. 당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불이 있다. 즉 장차 임할 정의의 불과 영원한 형벌의 불 그리고 불신자들을 위해 예비된 불이 그것이다. 왜 당신은 주저하는가? 당신이 원하는대로 행하라’ 그리고 곧 이어 화형에 처했습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저스틴 마터 (0) | 2016.0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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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이그나티우스 (0) | 2016.03.11 |
박해에도 불구하고/사보나롤라 (0) | 2016.03.02 |
박해에도 불구하고/요한 후스 (0) | 2016.02.27 |
박해에도 불구하고/위클리프 (0) | 2016.02.23 |
박해에도 불구하고/사보나롤라(사도행전21:7-14)
교회의 기능을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하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한 두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된 의무는 창조주를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리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권세로 말미암아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교회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온 세상에까지 선포해야 할 권세와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로 전도하는 기능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의 진리 증거 기능의 한 측면은 전도와 교회성장입니다 교회를 향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마28:18-20),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며”(눅24:47), “땅 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성례시행입니다. 교회는 성례를 시행할 책임이 있고, 교회가 성례를 시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교회는 봉사해야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성도들을 양육하고 덕을 세우는 고귀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섯째 기능으로 교회는 질서유지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시며”(고전14:33), 그분께서는 자신의 교회 내에서 “모든 일들이 질서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심”(고전 14:40)입니다. 일곱 번째로 교회는 구제의 기능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 특히 억압의 결과로 가난하게 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판결이 약자와 고아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권리를 유지하며 약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셨습니다(시82:3-4). 이런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교회의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John Wycliffe는 영국인이었습니다. John Hus는 보헤미안이었습니다. Jerome Savonarola는 이태리인입니다. Wycliffe와 Hus는 Roman-Catholic의 비정상적인 교훈들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Savonarola는 다른 것을 공격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의 도덕적인 면을 공격했습니다. 부도덕한 습관, 악한생활을 공격한 것입니다. Savonarola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Savonarola는 1452 년에 Ferrara라는 이태리의 도시출생입니다. 그는 잠시 도미니크파 수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38세 때에 Florence로 갔습니다. Florence는 과학과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암흑과 무지의 도시였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중들, 성직자들, 평신도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부패상에 대한 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큰 성당 안에 수많은 군중들이 들어차서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열심을 가지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강퍅한 많은 사람들이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회개하였습니다. Florence는 Roman-Catholic의 교훈들이 뿌리박혀 있었지만, 부흥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Savonarola의 영향력은 곧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당시 Florence는 메디치가(the House of Medici)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Savonarola의 강력한 설교의 영향력이 널리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로렌쪼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메디치家는 사보나롤라의 가르침과 윤리에 대하여 동감하지 않았습니다. 로렌쪼는 Savonarola의 설교를 잠재워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Savonarola는 듣지 않았습니다. 로렌쪼가 44세 되었을 때 중병을 앓았습니다. 로렌쪼는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Savonarola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로렌쪼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Savonarola는 그를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백성들은 로렌쪼의 아들을 추방하고 사보나롤라를 플로렌스의 통치자로 뽑았습니다. Savonarola는 자기의 개혁활동을 쉽게 수행하리라는 생각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Savonarola는 3년 동안 플로렌스를 다스렸으며, 善政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엄격한 통치에 반발했습니다. Savonarola는 Florence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범죄의 소굴이 소탕되고 도박이 금지되며 남녀를 불문하고 사치스러운 옷이 금지되고 경건한 생활이 장려되었습니다. 차드, 주사위, 사육제 때에 입는 옷, 음란서적, 음화 등이 소각 처분되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Savonarola는 자기가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빗나가자 지지자들마저도 불신하였습니다. 그 결과 Savonarola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죄악 된 생활로 유명한 알렉산더 보르기아가 교황이 되어(알렉산더 6세) Florence의 Savonarola를 공격했습니다. 교황은 스페인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악했습니다.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세를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그 자식들의 진로, 결혼 등에 있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의 문제로 유럽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목표를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살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계획이 성취되는 일이라면 독약의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모와 계략에 도취된 교황은 Savonarola를 뇌물로 매수하려 했습니다. 교황은 Savonarola에게 추기경의 직위를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Savonarola는 “나는 순교자의 면류관 이외에 다른 면류관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Savonarola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하여 다른 책략을 썼습니다. 수도승들을 설득하여 그를 비방하고 그의 권위를 해치도록 하였습니다. 곧 교황은 그를 파문하여 투옥시켰습니다. 이전에는 Savonarola에게 박수를 보내던 시민들도 이제는 그의 가르침을 철회하도록 고문을 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어서 단죄하라고 함께 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 1498년 5월에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했습니다. Savonarola는 친구 두 사람과 함께 화형대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45세의 나이로 Savonarola는 순교했습니다. Roman-Catholic은 순교자들(당시 세 사람이 화형당함)의 유골을 Arno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진리는 항상 자기 디스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억압하고 전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통해서라도, 어떤 사건을 통해서라도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며, 위협하더라도, 진리와 복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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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요한 후스(사도행전21:7-14)
역사는 항상 정의와 싸워왔습니다. 역사는 정의와의 싸움입니다. 그런데도 정의는 실제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만일에 정의대로 사람들이 산다면 국가와 사회가 이렇게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같은 법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10년징역형을 받고 교도소에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범법을 저지르고도 법무장관을 하며, 대법원장을 하고, 대법관을 하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정의가 죽고, 불의가 살면 역사는 후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지켜야 합니다.
요한 후스(John Hus/1374-1415)는 체코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영국에서 왈도파는 프랑스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Hus는 1401년 사제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라하의 찰스 대학에서 가르치고, 찰스대학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했습니다. Hus는 저술과 설교에서 삶의 개인적 경건과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Hus가 이렇게 한 이유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Hus는 교회내의 권위로서 교황이 아니라 성경을 강조하였습니다. 설교를 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습니다. Hus의 주저 교회론(On the Church)에서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정의하였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전통적 권위를 옹호하였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죄 사함을 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Hus는 어떤 교황이나 추기경도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를 만들 수 없으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잘못된 자들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였고 사람들이 彫像(조상)을 예배하고 거짓된 기적을 믿으며 “미신적 순례 여행”을 하는 것을 비평했습니다. Hus는 성찬식에서 잔을 평신도에게 허락하지 않는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프라그의 대주교는 Hus의 입장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위클리프의 저서도 그는 배격했습니다. 프라그의 대주교는 이들의 책들을 스스로 모아다가 같이 참석한 사제들이 부르는 Te Deum(하나님이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의 찬송가가 울려 퍼질 때 자신의 마당에서 책들을 불에 태웠습니다. 미친 개 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의 Roman-Catholic은 교회가 아니고 교회를 빙자한 거대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Hus는 프라하에서 오랜 악전고투 가운데 있었습니다. Roman-Catholic이 Hus를 가만둘 리 없었습니다. 곧 그의 문제는 로마에 회부되었습니다. 1415년에 후스는 그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콘스탄스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에 참석하였습니다. Hus는 황제의 안전 통행증을 가지고 여행하였습니다. 그러나 Hus는 그의 견해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불법재판을 받고 화형선고를 받았습니다. Hus가 말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Hus의 말이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방적인 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체코인의 민족감정이 일어났습니다. 체코인은 합스부르크(Hapsburg)家가 1620년 정복하여 Roman-Catholic교회를 회복할 때까지 보헤미아에 Hus파 교회를 세웠습니다. Hus의 개혁은 독일의 지배에 대한 체고인의 저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Hus주의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다볼파(Taborites)라고 불리다가 보헤미아 형제단, 모리비안 형제단(the Moravian Brethren)으로 알려졌습니다. Hus는 순교를 당했지만, 그의 사상과 신앙은 오늘의 바른 교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처: 기독교회사,중세교회사,교회사핸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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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위클리프(사도행전21:7-14)
개혁교회라 했을 때 성도들은 ‘개혁’이란 말을 자꾸 무엇을 고쳐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개혁’이란 말은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꾸 고쳐나간다 해서 성경적으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초대교회를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초대교회로 회귀하자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고 확장을 했습니다. 문제는 313년의 밀라노칙령입니다. 분명히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로부터 구해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교회여야 했고, 황제가 다니는 교회의 규모는 당연히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儀式이 말씀보다 앞섰고, 행위가 신앙보다 앞서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꾸 초대교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6세기부터 17세기 약 1000년간 교회는 그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것을 개혁하고자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John Wycliffe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옥스퍼드에 있다가 1361년에 밸리얼 대학(Balliol College)의 학장이 되어 이 대학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Wycliffe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썼습니다. 당시 영국도 교황권의 지역이라 교황에게 세금을 바칠 때였습니다. 영국의 왕들과 영국의 지성인들은 영국이 굳이 Roma-catholic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Wycliffe는 1366년 왕이 교황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한 사건과 관련하여 에드워드 3세의 눈에 띄었습니다. Wycliffe는 교황에게 세금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작은 논문을 썼던 것입니다. Wycliffe는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영국교회의 돈을 모아서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영국이 오랫동안 매년 1000 마르크에 상당한 세금을 바치지 않고 있었으므로 영국에게 매우 못마땅해있었습니다. 이 돈은 죤 왕이 교황 인노센트 3세에게 매년 로마에 바치기로 약정했던 금액입니다. 이에 교황 우르반 5세가 그동안 밀렸던 세금을 받으려고 하자, 1360년에 에드워드3세는 의회를 소집하였는데, 의회는 세금을 거부했습니다. 1374년에 왕실 성직자로 임명받은 Wycliffe는 왕을 대표하여 교황의 사절들과 만났을 때 왕의 신임을 더욱 얻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과 탁발 수도승들이 위클리프를 미워했습니다. Wycliffe는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 행위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왜곡하는 사실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Wycliffe는 우상(또는 형상)과 유품들을 숭배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행진(行列聖歌)과 순례 등을 부정하였습니다. Wycliffe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가장 저주받은 도둑이요 사기꾼이며 교만한 로마의 사제”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영국교회의 주교들은 1377년에 런던에서 열린 성 바울교회의 성직자회의에 참석하도록 Wycliffe를 소환하였습니다. Wycliffe는 그 회의에 참석하여 혹독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교황은 바로 Wycliffe에 대하여 다섯 가지의 교서를 발표하여 그의 저술에서 19가지 혐의를 걸어 정죄하였습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Wycliffe는 화체설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극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왕도 Wycliffe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여러 학장과 동료들마저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Wycliffe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1381년에 농민반란(the Peasant’s Revolt)이 일어났습니다. 이것 때문에 Wycliffe는 더욱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Wycliffe는 책임이 없었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이 그 사건과 관련하여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공작 곤트의 죤이 Wycliffe에게 개혁운동을 포기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계속 공표하였습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합하여 숫자로 진리를 왜곡하곤 했습니다. 의회는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교회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지진회의’(Earthquake Council)로 불리었습니다. 회의기간에 지진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Wycliffe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심으로 그들을 돕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Wycliffe의 가르침은 정죄를 받았습니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소환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로마로 가지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두 사람의 교황이 권좌에 있었습니다. Wycliffe의 추종자들과 동료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Wycliffe는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1384년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Wycliffe는 전도단을 조직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의 무지와 영적인 맹목성을 불쌍히 여겨 그는 이러한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전달해 주려고 했습니다. 전도자들은 붉은 갈색의 길다란 가운을 입고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Wycliffe의 가장 큰 업적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서 그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Roma-catholic은 Vulgate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일반 백성들이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Wycliffe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몰랐습니다. Latin語를 번역을 해야 했기에 정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큰 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할 때였습니다. 가난한 전도자들은 번역 성경의 일부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도시나 촌락에 사는 남녀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Wycliffe는 최초로 성경전체를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로 많이 나옵니다. 영국의 의회와 교회는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화형 시켜야 한다는 법을 1401년에 통과시켰습니다. 1417년에 존 올드캐슬(John Oldcastle)경이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직자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성경번역을 정죄하였습니다. Roma-catholic은 존 위클리프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 후에 콘스탄스 회의(The Council of Constance/1415)를 열어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1428년에 링컨의 주교는 위클리프의 유해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그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순교자들의 피에 빚진 자들입니다. 스데반을 비롯해서 최근에 일어한 순교자들의 피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출처: 교회사핸드북,중세교회사,기독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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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에도 불구하고/왈도파(사도행전21:7-14)
John Milton은 1655년에 이러한 시를 썼습니다.
피이드먼트에서 ‘일어난 최근의 학살에 대하여(1655년)
오! 주여, 주님의 죽임당한 성도들의 원한을 보수하소서.
그들의 뼈가 차가운 알프스 산맥 위에 흩어졌나이다.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막대기와 돌을 섬길 때,
그들은 주님의 진리를 그토록
순결하게 변함없이 지켰나이다.
주님의 책에 그들의 신음을 꼭 기록해 주소서.
저들은 주님의 양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양떼들입니다·
주님의 양떼들이 피에 주린
피이드먼트 사람들에 의하여 피 흘리며 죽어가나이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도 돌에 맞아 쓰러지나이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골짜기와 하늘까지 울려 퍼집니다.
그 순교자들의 피와 재는
지금도 폭군들이 난무하는
온 이태리 땅에 씨가 되어
수백 배의 결실로 자라날 것입니다.
그 폭군들은 주님의 방침을 깨달은 후에
바벨론에 임할 재난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로마카톨릭을 지칭.
14-15세기에 벌어졌던 교회의 비극적인 모습으로 말미암아 이의 개혁을 시도하는 여러 가지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종교회의 운동(conciliar movenment)은 분열을 종식시키는 동시에 성직매매 및 족벌주의와 같은 부정부패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 종교회의운동은 그때까지 교회가 받아들였던 기독교 교리에 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John Wycliffe와 John Huss 등은 교회생활뿐만 아니라 교회가 지켜오다가 잘못된 교리자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Justol L. Gonzalez, 1995. 197).
앞이 캄캄하여 전혀 보이지 않는 12세기 초 프랑스 Lyons에 Peter Waldo라는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1170 년경에 4복음서와 성경의 일부 책들을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한 사제를 고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세속적 소유를 포기하였습니다. 청빈하고 설교의 단순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법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Waldo는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복음전도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비슷하게 헌신한 남녀의 무리가 그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청빈의 삶을 사는 무식한 세속인들의 이러한 이상은 저13차 라테란 공의회(1179)에서 교황 알렉산더 3세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그들이 설교하기 전에 지역교회 당국자들의 승인과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왈도파는 성경의 메시지를 전파하였으며, 청빈의 덕목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로마-카톨릭의 부와 나태에 대해 강하게 정죄하는 위치에 섰습니다. 왈도의 본래의 목적은 전적으로 정통적인 것이었습니다.
1181년경 리용의 대주교가 왈도파의 성경적 설교를 금지하자 그들은 더 열심히 설교했습니다. 성경을 강해함으로써, 교회의 역할을 떠맡는 가운데 그들은 많은 다른 중세의 분파들이 지닌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청빈의 삶을 설면서 그들은 많은 성직자의 세속성을 강조하였다. 1181년의 정죄는 1184년 베로나(Verona)에서의 파문에서 그대로 되풀이되었으며 이때 교황 루키우스 3세는 왈도파와 다른 유사한 집단들이 감독의 종교재판과 세속의 처벌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나기 전에, 열심 있는 대중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여기에서 이단은 로마카톨릭에 의해 판단 된 것)(교회사핸드북).
처음에 로마-카톨릭에서 이들에 대하여 관대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왈도파를 법으로 금하였습니다. 1229년의 발렌시아 회의(The Council of Valencia)에서는 사제가 아닌 사람들은 라틴어로든지 각 나라 언어로든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일반인들도 시편이나 예배용 소책자 또는 성모(聖母) 찬송집 등은 가질 수가 있었는데,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금서(禁書) 목록으로 로마-카톨릭에서 정한 것입니다. 왈도파 뿐만 아니라 로마-카톨릭의 부패함을 공격하는 다른 종파들에 대해서도 온갖 박해를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수 년 동안 살육 작전이 감행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죽임을 당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했던 그들의 고향은 황폐하여 사막처럼 변해갔습니다. 심지어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였습니다. 피이드먼트(Piedmont)라는 지역에서 더욱 심했습니다. 신자들은 안전을 위하여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한번은 400여명의 부녀자들이 남자들이 멀리 떠나 있는 동안 동굴안에 있는 집에서 지냈습니다. 로마-카톨릭은 이 은신처를 발견하고 동굴 입구에다 불을 질러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 9세(Gregory IX:1227-1241)는 종교재판소의 사무를 위하여 도미니크파 수도승들을 임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왈도파에게 잔혹한 형벌을 주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왈도가 남부 프랑스 출신이었으므로 그 지역이 처음부터 그들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툴루즈(Toulouse)와 프와(Foix) 백작들은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많은 왈도파 사람들이 스페인, 사보이, 그리고 피이드먼트 둥지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곧 스페인에서 쫓겨나서 16세기까지 프랑스에 남아 있었습니다. 일부는 남부 이태리로 도망갔으나 거기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알프스 남부에 있는 서부 피이드먼트 지역에 피난했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박해를 받지 않는 그들만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Oliver Cromwell이 줄기차게 로마-카톨릭에 항의하고 군사행동을 통한 위협으로 박해를 멈추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감당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신의 생명을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와 같은 환난의 시대에도 진리의 증거를 굳게 지킨 자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싸워서 얻은 자유를 현재의 일부 교회들은 세속화되어 사탄의 다른 박해에 빠져들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짝하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출처: 교회사 핸드북,중세교회사,기독교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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