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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변증(사도행전21:37-22:1)
바울은 로마의 군영 안으로 끌고 들어갈 때에 천부장에게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헬라말로 유창하게 말했습니다. 천부장은 깜짝 놀라서 네가 헬라말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이전에 난을 일으킨 자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Josephus War ii 13장 5를 보면 그러나 이들보다 유대인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 자가 하나 있었으니 그는 애굽인 거짓 예언자였다. 그는 사기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인 것처럼 행세하였다. 이에 그에게 현혹된 추종자들이 무려 3,0000명이나 되었다. 그는 이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광야를 돌아 감람산에 오른 후에 거기서부터 무력으로 예루살렘 안으로 쳐들어가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로마군 수비대와 유대인들을 정복할 수 있다면 추종자들의 도움을 얻어 예루살렘을 통치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벨릭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벨릭스는 로마군을 거느리고 그 거짓 선지자를 만났다. 유대인들도 벨릭스를 도왔다. 이에 접전이 벌어졌으며 결국 그 거짓 선지자는 추종자 몇 명만을 거느리고 도망을 쳤다. 이에 그를 따르던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죽음을 당했거나, 생포 당했으며 나머지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가 몸을 숨겼다.
고 했습니다. 요세푸스는 3,0000명이라고 했지만, 누가는 4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Josephus는 과장을 한 것일 것입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맞고 있을 때 그 애굽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나는 애굽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길리기아 다소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하기를 허락하라고 했습니다. 천부장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층대위에 서서 백성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방언으로 말했다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당시에 사용했던 아람어로 말을 했습니다. 아람어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타르티아 제국을 포함하여 서아시아 모든 주민들의 공통어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공통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변증이라는 것은 나의 사상을 옳다고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사상들이 옳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사상은 옳았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으로부터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상을 받아들이기란 너무나 멀리 가버린 유대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통 전통하는 그들에게, 잘못 가르침을 받은 그들에게는 초대교회의 사상이란 너무나 이상한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교회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으로 내려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건히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필요합니다.
살인자 유대인들(사도행전21:27-36)
유대인들이 성전 밖으로 바울을 끌고나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분노한 군중들이 밀고 들어와 성전에서 바울을 살해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죽여도 밖에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주의자들은 제 나름대로 율법을 지킨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으면서도 법대로 산다고 자부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면은 바울로 하여금 제단 뿔을 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전의 제단 뿔을 잡고 있는 한 절대로 죽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마성을 드러냈습니다. 이전에도 스데반집사를 죽였었습니다. 성전에 이방인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정식으로 재판도 하지 않고 에베소에서 온 거짓증인의 말만 믿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이 나서 바울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에워쌌습니다. 그래서 미친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저마다 주먹만한 돌을 들고 내리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동은 곧 로마의 주둔군에게 알려졌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수비대는 안토니아 요새를 본부로 삼았습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헤롯대왕이 세웠습니다. 안토니아 요새에는 보병이 760명, 기병이 240명이었습니다. 이들 군인들은 소요진압과 치안과 질서를 유지함을 주목적으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천부장에게 소요소식이 들렸습니다. 즉시 백부장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소요진원지로 내려갔습니다.
천부장은 우선 바울을 잡아서 묶었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며 어떤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로, 어떤 사람은 저 말로 횡설수설했습니다. 소동만 크게 일어났지 천부장은 실상을 알 수 없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친 유대인들은 계속 바울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바울을 들어서 영문 안으로 데려갔습니다.
옛말에 무식한 자가 용감하면 큰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고집을 피우고 끝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거슬리면서 진리를 지키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만일에 이들에게 권력이 주어진다고 하면 히틀러나 무쏠리니 그리고 일본의 천황이라고 하는 작자들처럼 됩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주님께서 폐기처분한 율법 때문입니다. 쓰레기통에 버려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진리에서 벗어나면 쓸데없는 것들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진리인양 수호하려고 합니다. 실은 진리가 아닌데 진리인양 생각하고 앞으로 나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거슬리지 않습니다.
바울의 출생과 배경 (0) | 2016.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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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변증 (0) | 2016.05.09 |
패역한 유대인들 (0) | 2016.04.30 |
야고보의 중재 (0) | 2016.04.19 |
율법에 죽고 율법에 살고 (0) | 2016.04.16 |
패역한 유대인들(사도행전21:27-36)
바울사도는 야고보의 중재에 의해서 유대의 결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결례일이 끝나갈 무렵에 예루살렘성전 뜰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소아시아 특히 에베소지방에서 소동을 일으켰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선동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사도가 3년간을 사역하면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적으로 간주해서 살해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좋은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사람 드로비모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드로비모’Trovfimo"/trôphmos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바울과 동행했습니다(행20:4),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 줄 선물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동행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드로비모가 이스라엘의 뜰(Court of Israel)에 바울과 함께 있을거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가는 것은 사형을 당할만한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바깥뜰에는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인들이 성전의 안뜰에 들어갈 때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로마당국조차도 유대인의 종교적인 금기사항을 지킬 정도였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당시 로마의 총사령관인 디도(Titus)가 예루살렘성전 경비병들에게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주지시켰다는 것입니다. 설령 로마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금지된 지역 안으로 들어갈 때는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일으키며 그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성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마귀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반면에 마귀는 사탄의 편에서 사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는 존재들이 또한 존재합니다. 교회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끌고 간 유대인들이 사탄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명분을 가지고 일합니다. 자신들은 율법에 충실하고 유대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성전을 심히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의식화되고 정형화되면 다른 것들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한번 박혀버린 사상이 그래서 무섭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정형화된 사상에 반하는 사람들은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을 제지할 어떤 근거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정형화로 인해서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이 더디어졌습니다. 그러나 더욱 복음전파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을 뻔 했던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의 중재(사도행전21:20-24)
20…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일사천리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떤 지역에 들어갈 때 환영을 해주고, 복음을 즉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싫어하고, 반대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서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심히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 내에 있었던 초대교회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야고보는 바울사도를 비방하며, 교회를 훼손하려는 유대인들이 각 곳으로부터 모여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차에 예루살렘에 바울사도가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날 것은 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유대인 중에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이 수만 명이 있었습니다. 이들과 부딪히면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 도착해 있던 소문들은 사실(fact)이 아니고 거짓 섞인 악평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들과 바울사도간의 중재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교회 측에 네 명의 서원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실인 서원은 민수기6:1-21에 나와 있는 대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여 소원을 세운다는 뜻으로 요구되지 않는 선행의 실행이나 경건행위를 자발적으로 엄숙하게 하나님께 약속하는 서약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신앙반응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행위입니다.
네 명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된 나실인이 정결케 되려면 7일이 경과해야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7일에 머리를 깎고, 제8일에는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 예물은 어린 양 한 마리, 어린 암양 한 마리, 수양 한 마리 및 그에 따른 소제물과 전제물이었습니다(수6:14). 이들 네 사람은 결례를 곧 마칠 예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은 그들의 결례에 합류하여 그들의 예물비용을 지불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결례비용을 지불하는 일들을 경건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권면은 곧바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번에는 유대인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는 합력할 때 더 역사합니다. 합력할 때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율법에 죽고 율법에 살고(사도행전21:20-21)
지구상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만 구원을 받는다는 선택 아닌 선택사상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고 했음에도 그들의 역사를 보면 사람을 무한히 의지하고, 사람의 가르침을 무한히 따라서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역사에 심한 오점들을 남겼습니다.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소위 랍비라 하는 사람들, 소위 율법도 지키지 않으면서 율법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하게 훼손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성경범위를 그들은 선을 그어놓았습니다. 주전4세기에 모세오경의 편집이 끝났습니다. 오경의 최종적인 확정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분열되기 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토라는 유대교에서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으며 토라의 영광과 존귀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잘못된 랍비들은 토라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구약성경의 나머지 책들은 토라의 다음 서열에 놓여 있습니다. 토라가 인간의 협력 없이 모세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하늘에 있었던 반면, 다른 성경은 인간의 신적인 영감의 힘에 의하여 기록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최고의 서열이 율법에 주어졌습니다. 그 외의 모든 성경은 토라에 의해서만 그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토라와 일치될 때에만 그들에게 정경(Kanan)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세-여호수아-장로들-예언자들-대회당에게 전수된 율법들을 대하는 태도는 사두개파는 기록된 율법만을,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구전된 율법까지 전승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장로들의 전승(막7:3)이 그것입니다. 기원후 70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전승의 발전은 성서해석을 통하여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랍비들이나 장로들이 세분화시킨 율법은 성경을 심히 훼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심히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동물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을병에 걸려도 안식일에 고침을 받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극히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위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하나님을 위하고 섬긴다는 사람들이 가장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도록 그들의 허락된 권한 아래에서 갖은 발악을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나 이방교회에 이들은 큰 훼방거리였습니다. 율법에 살다가 율법으로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가장 복을 먼저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래도록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도, 사도들에게도, 초대교회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빙자한 사람들, 예수님을 팔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막고 있습니다. 교회를 빙자한 사람들,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이에 속합니다. 복음의 진로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야고보(사도행전21:17-20)
신약성경에는 5명의 야고보/!Iavkwbo"가 등장합니다. 세배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게네사렛 호수의 어부인 야고보(막1:19,29, 마4:21, 눅5:10).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3:18, 마10:3, 눅6:15, 행1:13). 더 어린(막15:40). 사도 유다(가롯 유다가 아님)의 아버지 야고보입니다.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만났던 사람이 “주의 형제”야고보입니다(갈1:19). 야고보는 예수님의 네 형제 중 맨 첫째입니다(막6:3, 마13:55). 사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생애동안 예수님을 가족으로만 알았습니다(막3:21,31). 그러다가 을 보면 야고보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고전15:7). 야고보는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서야 예수님을 믿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이 형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주의 종으로 자신을 여겼습니다. 야고보는 초기공동체에서 특별한 권위를 소유했습니다(행12:17).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35년경) 베드로와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갈1:18).
야고보는“세 기둥”가운데 하나였습니다(갈2:9/야고보, 요한, 베드로). 야고보는 이방인 선교와 관련한 예루살렘회의에서 바울 및 바나바와 의견을 같이했습니다(갈2:1-10, 행15:13).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유대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야고보는 회의에서 이방인선교에 어떤 조건을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갈2:3-6). 이방인기독교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반면, 야고보는 유대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의 의식적명령의 준수를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유대기독교인과 이방인기독교인간의 식탁친교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갈2:12). 예루살렘교회의 지도권은 베드로가 떠난 후 야고보에게 맡겨졌습니다. 갈라디아서2:12은 예루살렘 밖에까지 야고보의 광범위한 영향력이 미쳤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세 번째 여행에서 이방인교회의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행21:18). 유대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지녔습니다(Hegesippus; Clement of Alexandria). 요세푸스는 야고보가 대제사장 안나스의 예루살렘교회 핍박시 희생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안나스는 야고보를(예루살렘 교회의 다른 몇몇 교인들과 함께) 베스도가 사망하고 아비누스(62년)가 도착하기 전에 돌로 쳐 죽였다고 했습니다. Hegesippus는 야고보의 순교를, 바로 뒤이은 예루살렘 함락과 연관시켰습니다.
바울사도는 야고보에게 그간에 이방인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는지를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실 바울사도는 3차까지 여행을 하면서 성령에 이끌렸습니다. 자신의 고난과 고통은 잊다시피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류하다시피했습니다. 오직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바울사도가 그렇게 해서 오늘의 우리까지 복음이 빨리 전해졌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도들과 우리 이전의 전도자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중재 (0) | 2016.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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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죽고 율법에 살고 (0) | 2016.04.16 |
바울의 로마행 (0) | 2016.04.07 |
3차 전도여행을 끝내며 (0) | 2016.04.01 |
박해에도 불구하고/일제의 박해 (0) | 2016.03.23 |
바울의 로마행(사도행전21:17-28:31)
바울은 1차에서 3차까지 전도여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로 향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럽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수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로마 여행 21:17-28:31
1. 예루살렘에서 증거 21:17-23:33
가. 유대 풍습을 따르게 함 21:17-26
나. 바울의 체포 21:27-39
다. 군중 앞에서 바울의 변론 21:40-22:23
라. 천부장 앞에서 바울의 변론 22:24-29
마. 공회 앞에서 바울의 변론 22:30- 23:11
바.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계획 23:12-22
사. 바울의 구출 23:23-33
2. 가이사랴에서 바울의 증거 23: 4-26:32
가. 벨릭스 앞에 선 바울 23:34-24:27
나. 베스도 앞에 선 바울 25:1-22
다.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25:23-26:32
3. 로마에서 증거 27:1- 8:31
가. 파선하는 동안에 바울의 중거 27:1-44
나. 멜리데에서 바울의 증거 28:1-15
다. 로마에서 바울의 중거 28:16-31
구약성경의 마지막에는 유대가 페르시아의 속주였습니다. 페르시아에서 귀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인 마태복음에 로마가 등장합니다. 침묵기 400년 동안에 제국은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판도가 바뀝니다. 그런 동안에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은 헬라와 로마를 주님께서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준비되어진 하나님의 섭리와 시기 그리고 장소가 로마였습니다. 오랜 유대의 역사, 거대한 로마제국 및 고도의 헬라 문화는 초대교회의 배경으로서 종교, 정치, 사상적인 면에서 기독교적 복음의 씨앗이 자라도록 하나님에 의해 조성되어졌습니다. 로마제국이 초대교회에 대하여 갖는 의미는 지대합니다. 만일 교회의 복음이 팔레스틴이라는 소지역에 국한되었더라면, 복음이 불길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지중해를 마치 내륙호처럼 끼고 있는 로마, 그 판도가 영국에서 페르시아까지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북유럽까지 뻗쳐있는 대제국로마를 그 활동무대로 삼음으로써 복음의 씨앗을 세계 전역으로 뿌릴 수 있었습니다.
율법에 죽고 율법에 살고 (0) | 2016.0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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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야고보 (0) | 2016.04.13 |
3차 전도여행을 끝내며 (0) | 2016.04.01 |
박해에도 불구하고/일제의 박해 (0) | 2016.03.23 |
박해에도 불구하고/저스틴 마터 (0) | 2016.03.18 |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공식적인 전도여행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가장 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어쩌면 가장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라고 딱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사도도 유대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보면 전반부에 바울사도가 얼마나 유대인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에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만의 편협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과 율법 중에서 그들은 율법의 우월만 생각했습니다. 복음이 우선이어야 했는데, 율법만을 생각하고 강조하고 지키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만 바라보았지, 갈보리산은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바울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연구가 처음부터 열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인 Franz Overbeck/1837-1905은 Marcion이 바울을 잘못 이해했지만, Marcion만큼 바울을 이해한 사람도 그때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연구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시대 이전에는 Roman Catholic으로 인해서 성경연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통만 강조했습니다. 성경보다 교황청이 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연구가 이러다보니 성경연구에 장애를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행위와 전통을 강조하는 때에 바울은 ‘믿음으로’를 강조하다보니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Augustine 이후로 황무지와 같았던 바울연구가 비로소 종교개혁으로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Martin Luther의 바울의 해석 ‘오직 믿음으로’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바울이 나타나기만 하면 살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이 허다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의 일행은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지 며칠 만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들은 약 100km이상을 가야 했습니다. 갈 때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 몇 명이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예루살렘의 어떤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물 집은, 구브로의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멤버들 중 한 사람이었던 Mnason의 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적 성격이 뚜렷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자기들의 집에 맞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에 속했을, 나손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부딪히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그 부분에서는 왈칵 개방적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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