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4)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8)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0)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7)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15.02.04
    분통터지는 종교지도자들
  2. 2015.02.03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하는 어리석은 자들
  3. 2015.02.02
    교회에 능력이 더해짐
  4. 2015.01.31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5. 2015.01.30
    교회의 진로를 막으려 했던 사람들
  6. 2015.01.28
    초대교회의 바나바
  7. 2015.01.27
    현대교회의 경제
  8. 2015.01.26
    초대교회의 경제

분통터지는 종교지도자들(사도행전5:17-32)

신분이 높다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머리가 좋다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며, 지도자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석학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통달한 것이 아니며, 지도자라고 해서 선한 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라고 하면 최소한 하나님의 의중은 읽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돈을 주고 그 직을 샀더라도, 이스라엘에 사는 이상, 그 자리에 있는 이상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진짜구나’라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눈앞에서 기적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영적인 눈먼 자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미친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가두었다고 안심했습니다. 아마도 잠을 편안히 잤을 것입니다. 모조리 잡아다가 아예 진멸할 생각까지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그들이 안심하고 있었을 때에 주님의 천사가 밤에 옥문을 열었습니다. 사도들을 끌어냈습니다(19절). 그리고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20절). 사도들은 새벽에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시간이 되자 대제사장 패거리들이 공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옥에서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이 패거리들은 아직도 사도들이 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관리들이 감옥에 갔으나 사도들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옥문이 열려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옥은 철통 같이 잠겨있었습니다. 감옥 문을 지키는 사람들도 든든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간수들은 사도들이 안에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감옥 문을 여니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간수들을 책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알렸습니다.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분통이 터질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을 다 잡아서 가두었다고 안심했는데, 그들을 심문해서 입을 막으려고 했는데, 일이 터져 버린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분통터지는 일이었습니다. 이러기를 몇 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은 많이도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해석도 많습니다. 시장에 나도는 하나님의 뜻은 자신들이 금식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형교회에서 헌신하지 않고 대형교회로 이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사를 하는지, 교회에 빗물이 새고 있는지, 목회자가 잠잘 곳이 없는데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제사장 패거리들이 하는 짓이 가관입니다. 그들은 기적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믿지 않았지만, 사도들 때에는 더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량한 지식 때문입니다. 그들의 장로들과 랍비들의 유전에 의해서 그들이 완전히 맛이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제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혹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지 우리들도 살펴야 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많은 것들이 사람의 뜻에 의해서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And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하는 어리석은 자들(사도행전5:17-32)

17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을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이에 사도들을 가만히 두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모두 들고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들고 일어났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들고 일어난 원인이 시기였습니다. 보통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못된 시기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시기가’의 시기는 보통 질투가 아닙니다. ‘시기’ zh'lo"/젤로스zevw/제오/끓이다 에서 온 말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의 능력이나 상태로서 열심입니다. 그런데 이 열심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이 가득함 역시 ‘완전한 가득함’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시기는 사도들을 죽여야겠다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패거리들이 함께 모여 뜻을 같이 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즉시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의 시기심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일어난 기적들과 그간의 정황들을 생각한다면,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해서는 안 될 일들이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이미 이런 박해는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21:12을 보면‘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박해는 이미 예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들이 어떤 상태로 나온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 사도들이 이렇게 담대해졌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이고, 성령께서 지금 그들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박해 따위는 사도들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1세기 경의 예루살렘성전을 맡은 자들입니다. 사두개인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들과 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가솔들과 하속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처럼 모든 사람들이 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전하고 있는 유전을 지키고,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계명을 지켜야 하며, 그들의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하기를 바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방식이 아닌 예수의 방식을 전한 것이 몹시 괘씸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가둔 것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입니다. 지도자들이 제대로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실제로는 사도들이 실권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였습니다. 아닌 사람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예루살렘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닌 사람들이 실권을 잡고 있는 정부나 나라들은 결국에 가서는 모두 彼岸(피안)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이 우리들일수도 있다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And

교회에 능력이 더해짐(사도행전5:12-16)

사단은 참 간교합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최초의 인간 아담을 일격에 쓰러뜨렸습니다. 최초의 인간을 유혹하여 온 세상을 망가뜨렸습니다. 이어서 가인을 꼬드겨서 최초의 인간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했습니다. 이후로 사단은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의 최측근인 베드로까지 유혹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사단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아담이후로 현재까지 사람에게 붙어서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에게서 사람들을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았습니다. 이토록 사단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로 멀어지게 했습니다.

사단은 불가시적이고, 불멸적이며, 불사적입니다. 사단은 비위치적이지만, 편재하지는 않습니다. 무소부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일정한 시간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보다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을 뿐입니다. 마귀가 사람들을 홀리려고, 조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여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도 하지만,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역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사단이 이렇다 하여도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머리가 깨졌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마귀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마귀를 이기려면 우리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께서 눈에 보이게 활동하셨습니다. 밖에서 박해할 때 사도들을 도우셨습니다. 안으로 교회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려고 할 때에 과감하게 퇴치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초대교회는 한층 더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결과로 믿는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행각에 모였습니다. 온 백성들이 이들을 칭송하였습니다.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로 더 많이 나왔습니다. 예루살렘 근읍의 사람들이 모여 각종 병든 사람들이 혹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일까 바랄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데려오는 사람들은 모두 고쳐졌습니다.

우리들은 현재의 괴로움을 견디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지나갑니다. 반드시 지나갑니다. 그 후에 그 고난 못지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옵니다. 초대교회는 점점 그 능력과 세력이 커졌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더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회에서 수고하는 직분자들을 포함해서 목회자들도 힘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마귀가 더 활동하면 더 많은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And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사도행전5:1-11)

아나니아(!Ananiva"/아나니아스)는 히브리어 아나니아의 음역이며,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삽비라(Sapfeivrh/삽페이레) 아람어 삽피라(아름다운)의 음역입니다. 이들의 이름과 그들의 일들과는 상반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헌신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들었습니다. 아니나아와 삽비라는 그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처럼 할 수 있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의를 했습니다. ‘얼마를 감추자고’이것이 그들을 멸망케 한 원인이었습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책망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둘만의 감쪽같은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 내용은 3절에 있습니다. ‘성령을 속이고/yeuvsasqaiv se to; pneu'ma to; a{gion/프슈사스싸이 세 토 프뉴마 토 하기온’입니다.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창1:2), 여호와의 영(삿3:10), 주 하나님의 신(사61:1), 하나님의 선한 신(느9:20), 하나님의 성신(시51:11), 여호와의 성신(사63:10,11)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사11:2), 은혜와 간구의 성령(슥12:10)으로 호칭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영(마3:16),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고후3:3), 하나님의 일곱 영(계1:4), 너희 아버지의 성령(마10:20),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롬8:11), 하나님의 아들의 영(갈4:6), 그리스도의 영(롬8:9), 성령(눅11;13), 약속의 성령(엡1:13) 등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성령은 구약의 여호와로 동일시되었습니다. 이사야6:9-10절에서 여호와가 말씀하셨다고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것을 바울은 성령이 말씀하신 것으로 말했습니다(행28:25-27). 시편96:7-11절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이 말씀하신 것으로 말했습니다(히3:7-9).

이렇듯 성령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세상을 주관하신 분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우주와 이 세상을 간섭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에도, 그리고 현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동일하게 전능하시고, 무한하시고, 전지하시며, 그 권능이 한이 없으십니다. 제삼위라고 하셔서 권능이 성부하나님보다 못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런 분이 초대교회를 잡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스라엘 사람이면서, 성령을 속일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떳떳하게 일부를 떼었노라고 해도 아나니아가 교회에서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령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고, 자신들이 계획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속여교회의 진로를 잠시라도 멈추게 하였기 때문에 하루에 두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성령께서 이들을 징계하셨습니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앞으로 땅 끝까지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And

교회의 진로를 막으려 했던 사람들(사도행전5:1-11)

교회는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인 것 같은데도, 아닌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막을 둘러서 사단을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도, 기도하는 시간에도, 찬송하는 시간에도 사단은 우리를 계속 공격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破竹之勢(파죽지세)로 교회가 예루살렘을 강타하고 있을 무렵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합니다. 4:36-37에서 바나바와 대조되는 일이 이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들은 교회에 재산을 바치고 즉사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누가 교회에 재산을 바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천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교회에 재산을 기부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handicap을 생각하면서 누가는 이 일을 기록했습니다. 왜 그랬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여호수아시대에 가나안정복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40여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다음으로 아이성을 정복할 차례였습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은 그 크기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성을 탐지한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온백성이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2000-3000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수7:3). 이들의 생각이 잘못되거나 情報判斷(정보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올라가서 얼마 있지 않아 大敗(대패)했습니다. 약36명이 죽고 혼비백산했습니다(수7:4-5). 도대체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여호수아도 몰랐고, 족장들도 몰랐으며,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시나이까?’(수7:7). 이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에서 패한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아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것입니다. ‘아간의 죄’‘아나니아 부부의 죄’를 같이 묶어서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아간’은 구약의 교회를 진군을 멈추게 한 죄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신약교회의 진군을 멈추게 한 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를 위해서 재산들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을 부러워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일부만 바치기로 모의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전 재산을 팔아서 바친 것처럼 보이고자 했습니다. 즉 재산을 바치려는 마음이 시기심이었습니다. 충성이 아니라 허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세상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간의 경우와 아나니아와 삼비라의 경우가 大同小異(대동소이)합니다. 이들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승장구하고 교회의 전진을 가로막으려는 사단의 계략이 위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들 속에서 사단이 활동했습니까? 교회의 약진을 막는데 이들이 적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에 능력이 더해짐  (0) 2015.02.02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0) 2015.01.31
초대교회의 바나바  (0) 2015.01.28
현대교회의 경제  (0) 2015.01.27
초대교회의 경제  (0) 2015.01.26
And

초대교회의 바나바(사도행전4:36-37)

초대교회에 있어서 훌룽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들 외에 속사도들이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등장시키면서 소개를 합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족에 속한 사람이면서 요셉( jIwsh;f)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그Barnavba"(바나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아는 대로 그 자신을 ‘권위자’로 입증하였습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출신이지만 예루살렘에 친척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의 업적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에 대해서 초월을 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땅이 토지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팔아서 핍절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이방선교의 거점인 안디옥교회를 발전시킨 목회자였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활동하도록 힘쓴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안디옥에 복음 전파자들의 선교를 지원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행11:20,22). 안디옥에서 복음 전파자들을 격려하고(행11:23),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게 하고(행11:24), 동역자가 필요했을 때, 바울을 다소에서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행11:25). 그리고 바울과 함께 교회의 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행11:26). 또한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가 경제적으로 핍절했을 때, 예루살렘교회릏 위해 안디옥교회의 구호금을 전달했습니다(행11:27-30).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그 일을 마치고 마가와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행12:25).

안디옥교회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을 복음 전파자로 파송했습니다(행13:1-3). 그리하여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에서 구브로섬으로(행13:4-6), 구브로에서 버가로(행13:13), 구브로에서 비시디아요 안디옥으로(행13:14),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행14:6-8), 루스드라에서 더베로(행 14:20), 더베에서 다시 안디옥으로(행14:21)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에게 1차 전도여행의 결과를 보고했습니다(행14:27).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 이방 전도여행의 성과에 대해 보고했습니다(행15:1,12).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인정했습니다(행15:26). 그리고 바울과 함께 이방교회에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를 전했습니다(행15:22). 때로는 바울과 의견차이로 인해서 심히 다투기도 했습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으로 인해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섰습니다(행15:36-39). 바울은 바나바의 가시적인 행동에 대해 매우 분노했습니다(갈2:13). 그러나 후에 바나바는 바울과 화해하고 함께 일했습니다(갈2:1,9). 바울은 바나바를 일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라고 했습니다(고전9:6). 오늘의 교회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0) 2015.01.31
교회의 진로를 막으려 했던 사람들  (0) 2015.01.30
현대교회의 경제  (0) 2015.01.27
초대교회의 경제  (0) 2015.01.26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0) 2015.01.25
And

현대교회의 경제(사도행전4:32-35)

우리나라에 정확한 교회의 숫자는 모릅니다. 각 교회의 경제사정도 모릅니다. 어떤 교회는 풍부하게 사용하고, 어떤 교회는 늘 빚에 쪼들리고 있습니다. 같은 사명과 같은 뜻을 가졌지만, 사정은 다릅니다. 어떤 교회들은 돈이 남아돌아 사회사업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들은 돈이 없어서 대출받고, 그도 모자라 매달의 운영비를 걱정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극과 극의 경제를 운영하는 곳 중 하나가 교회입니다. 어찌보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면서 평행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성도들이 많이 있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적은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교회를 개척하라고 했어?’ ‘이제 교회도 big-deal 이 필요해’라고 합니다. 순전히 작은 교회를 비하하는 말이며, 동시에 생각 없이 하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되도록 목회자로 부름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목회자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때에 목회자로 간다고 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보장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앞으로 나갈 뿐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사회의 경제구조와 비슷합니다. 피라밋으로 형성된 맨위에 부유한 교회들이 있고. 그 밑에 중소형교회들(순전히 교인들의 숫자에 의한)이 있습니다. 사실 중형교회도 경제면에서는 괜찮습니다. 문제는 소형교회들입니다. 소형교회의 어떤 목회자들은 눈을 뜨기가 겁이 날 정도라고 했습니다. 밀려드는 세금 등과 각종요금을 어떻게 감당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교육비 등을 어떤 방법으로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은 없거나 미미합니다. 그야말로 핍절한 목회생활입니다. 어디에서 조달할 수도, 그렇다고 목회를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끝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기도하고, 움직이고, 또 기도합니다. 그리고 움직입니다. 그래도 힘이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국의 성도들의 신앙성향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들이 신앙생활 할 때는 충성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들의 움직임은 직장과 가정과 교회였습니다. 직장이 끝나면 교회로 갔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에서 직장으로 출근할 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도들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큰 건물을 선호하고 그 인파에 숨어버리기를 원합니다. 적당한 부서에 들어가 적당히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소일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소형교회는 힘이 들어집니다. 또는 도심에서 목회하다가 재개발이 되면 그냥 쫓겨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쫓겨날 때는 맨손으로 쫓겨나는 것을 우리들은 언론을 통해서 봤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내 일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남의 일입니다. 4:34을 보면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현재 양극화된 한국의 교회는 핍절한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들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형제애(ajdelfovth")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애가 없기 때문에 양극화된 상태로 계속 질주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의 진로를 막으려 했던 사람들  (0) 2015.01.30
초대교회의 바나바  (0) 2015.01.28
초대교회의 경제  (0) 2015.01.26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0) 2015.01.25
교회와 박해  (0) 2015.01.24
And

초대교회의 경제(사도행전4:32-35)

사람이 한 평생을 살려면 엄청난 식량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양을 계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하루에 물만 계산한다하더라도 1일분을 최소한 1.8ℓ로 계산한다면 1.8ℓx250만명=450만ℓ입니다. 빵으로 계산한다면 제과점 빵으로 기준해서 5개정도로 계산한다면, 5개x250만=1250만개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당시에 정확한 숫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250만-300만 명으로 계산한다면, 1일에 소모하는 물만해도 약 6000톤, 빵2000만개 이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죽는 날까지의 양을 계산한다면 과히 적지 않은 양입니다. 식량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옷, 집 등 수많은 것들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합니다.

이번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들은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총리를 비롯해서 장관들을 하려면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도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은 그들이 저지른 일들을 범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위장전입을 하면 추상같은 법의 제재를 받습니다. 국민들이 땅 투기를 하면 언론과 법의 엄청난 제재를 받습니다. 국민들이 쪽방 촌 투기를 하면, 범법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국민들이 대가성으로 뇌물을 받으면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국민들이 어떤 사람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을 정부와 여당에서 인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덕성은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삶은 윤택하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살림을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라를 이용해서 자신들을 윤택하게 해보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32절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물건을 서로 같이 썼습니다. 자기 소유지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같이 쓰고, 같이 먹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들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밭을 팔고, 집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판 것의 일부를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으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즉 이때 초대교회는 공동체경제였습니다. 같이 쓰고 같이 나누는 공동체경제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재산문제를 생각해볼 때, 초대교회와 비교해보면 극과 극입니다. 개교회 독립체제인 교회들은 위치 좋고, 세력이 있으면 경제생활은 걱정이 없습니다. 걱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주 마다 부흥되고 확장됩니다. 그러나 재정이 넉넉지 못한 교회들은 매주 마다 걱정입니다. 전기세, 수도요금, 통신비, 교회월세금 등을 매달마다 걱정해야 합니다. 정말 핍절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같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려운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과 이상간의 dilemma에 아니 빠질 수가 없습니다. 교회공동체를 어렵게 운영해가는 교회들 힘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때에 더욱 힘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실테니까.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대교회의 바나바  (0) 2015.01.28
현대교회의 경제  (0) 2015.01.27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0) 2015.01.25
교회와 박해  (0) 2015.01.24
사도들의 교회에 대한 태도  (0) 2015.01.22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