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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질문(마태복음11:2-15)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의견들이 많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감옥은 헤롯궁전의 한 부분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제자를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왜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까? 이것은 세례요한의 실수였습니다. 헨드릭슨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이해하기를 형벌과 멸망을 베푸실 자로 나타냈습니다(마3:7,10, 눅3:7,9). 그러나 요한이 놓친 것은 그가 예언한 멸망이 현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성취되리라는 것을 놓쳤습니다. 즉 요한은 현재와 미래를 보지 못한 것이라 했습니다. 권성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칼빈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그가 바로 메시아이심을 확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천둥처럼 사람들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대체적으로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면 세상이 심판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날’ 즉 ‘여호와의 날’은 ‘멸망의 날’로 생각을 했습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기를 아마도 세례요한보다 못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 같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으며, 계명을 어기는 사람같이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약간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그만큼의 이적을 베푸는 분이라면 능히 로마도 제압하고 불법을 과감히 제거해야 하며, 로마의 식민정권을 해방하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의한 정치인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이사야35:5과 61장의 일부를 인용하여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가 도래하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선지자들이 증거 했던 말들입니다. 누구보다 이것을 잘 아는 세례요한이었지만 잠간 실수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실족(skandalivzw)을 지적하시면서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했습니다. 즉 메시아를 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침노한다는 말은 세례요한 때부터라고 하셨는데, 힘이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천국을 빼앗지 못한데 반하여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을 침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세례요한의 영향력은 크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예수님을 알기를 윤리적인 삶이나 말씀하고, 기복적인 신앙만 말씀하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들어야 한다는 비밀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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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갈릴리 사역(마태복음11:1)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여러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저희 여러 동네(갈릴리)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떠나셨습니다(1절). 요 몇 년 사이에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이유가 여러 가지입니다. 생계 때문이 아니고, 악성루머, 또는 사회에 대한 이슈에 대한 죽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공통적인 것은 도저히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회에서 견디기 어려워 생을 마감하면 괜찮을까? 성경은 자살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1.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삼손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 스스로 죽었습니다(삭16:29-30). 블레셋에 잡혀 있을 때 블레셋을 죽이기 위해서 자살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죄로 인해서 자살했습니다. 시므리는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목숨을 끊었습니다(왕상16:18-19). 굴욕과 반역자로 죽는 것을 면하기 위해 아히도벨은 자살했습니다(삼하17:23). 자신의 한 일을 후회로 인하여 유다는 자살했습니다(마27:3-5, 행1:18).

2. 자살한 사람들은 아비멜렉(삿9:56), 삼손(삿16:29-30), 사울과 그의 병기 든 자(삼상31:4-5, 대상10:4-5), 아히도벨(삼하17:23), 시므리(왕상16:18), 유다(마27:5, 행1:18)입니다.

3. 성경에서는 자살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9:6). 우리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고전6:19), 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출20:13). 때가 되면 주께서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4:6-8, 18).

4. 자살을 원했던 사람들을 보면 유다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렘 8:3). 모세도 죽음을 원할 때가 있었습니다(민11:15). 엘리야 같은 대선지자도 죽기를 구했습니다(왕상19:4). 욥이 환란에 처하여 죽기를 간구했습니다(욥3:6-11,

7:1-3, 15-16, 10:1). 요나가 육체의 고통을 당함으로 죽음을 원했습니다(욘4:8).

삶의 여러 정황이 우리들을 힘들게 합니다. 죽어 버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만큼 심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받음으로 그것을 이기지 못해서 고금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살을 좋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살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구절은 살인하지 말라(출20:13)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목숨이나 내 목숨을 끊는 것은 살인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똑같이 공범들입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잔인하고 못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귀한데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은 극악한 살인자들입니다. 자살을 한 사람도 잘못이겠지만, 자살로 몰고 간 사람들이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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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수까지의 연대표

연표

출생 및 사건

출생

첫출생시나이

나머지

생 애

전체

생애

아담

130

800

930

130

셋(130)/912세/창5:3

105

807

912

235

에노스(105)/905세/창5:6

90

815

905

325

게난(90)/910세/창5:9

70

840

910

395

마할랄렐(70)/895세/창5:12

65

830

895

460

야렛(65)/962세/창5:15

162

800

962

622

에녹(162)365/창5:18

65

300

365

687

므두셀라(65)969세/창5:21

187

782

969

874

라멕(187)777세/창5:25

182

595

777

930

아담죽음/창5:5

987

에녹승천

(아담 죽은 후 57)

창5:24

857

에노스

752

게난

662

마할랄렐

592

야렛

527

에녹

365

므두셀라

365

라멕

113

1056

노아(182)/창5:28

500

450

950

1557

노아501세에 셈 출생/창5:32,11:10

1656

노아600세에 홍수, 므두셀라 죽음,

셈99세, 창7:11

And

메시야에 대한 반응들(마태복음11:1-12:50)

1. 배척의 시작 11:2-30

가. 세례요한에 대한 배척 11:2-15

나. 친척들의 배척 11:16-19

다. 고라신,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배척 11:20-24

라. 내게로 오라 11:25-30

2. 바리새인들의 배척 12:1-50

가.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12;1-8

나. 안식일의 병고침에 대한 논쟁 12:9-13

다. 바리새인들의 암살 음모 12:14-21

라. 바리새인들의 성령모독 12:22-37

마.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 12:38-45

바. 예수와 참 동역자 12:46-50

세상의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서 너무나 몰랐으며,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자신들을 지으신 주님을 모른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1장과 12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를 보내려고 교육을 시키신 후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지 않은, 반응들입니다. 12장의 반응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적대의 반응입니다. 11장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그분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을 장터 아이들 비유를 통해 다루고,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표적을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을 다룬 다음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천국 메시아를 수용한다고 하시면서 메시야의 초청으로 끝냅니다. 12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이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은 것을 계기로 유대인들과 안식일논쟁이 벌어진 사건부터 다룹니다.

메시아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11장은 불수용의 반응을 지적한 다음 메시아에게 겸손하게 나아오는 것이 바른 반응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12장은 적대의 반응을 지적한 다음 메시아가 전하신 성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기로 마음먹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자들은 도무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습니다. 바로처럼 망할 때까지 계속합니다. 마치 악에 중독된 사람들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And

예수님의 명령/주님을 영접하는 복(마태복음10:40-42)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너희(제자들/성도들)들을 영접(decovmeno")하는 자 곧 받아들이는 자는 나(예수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40절). 뿐만 아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받아들이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며,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받아들이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41절). 또한 어떤 사람이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적은 자(하찮게 여기는 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는 그 사람이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2절).

제자들이 가는 길이 꼭 핍박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활동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복음이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자주장사 루디아나 바울사도가 갈 때마다 자신의 집을 기거하게 하고, 자신의 집을 교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보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로 알고 선지자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했는데, 선지자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대우하고 예우한 사람이 선지자가 받는 상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일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의인을 대접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어떤 하찮은 사람에게 제자의 이름으로 정말 하찮은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다하더라도 보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신분고하를 무척이나 따집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를 철저하게 따집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전반에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는 상대적인 약자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 세상입니다. 현재 용산참사가 왜 일어났습니까? 인권을 생각하지 않은데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데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가난한 사람들을 마녀 사냥하듯이 쫓아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의 특색입니다. 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특성은 엘리트들은 엘리트대로 살기를 바라는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보다 사람들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를 돕는 자들도 보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주님의 이름으로라든지, 제자들의 이름으로라든지 하나님의 일에 관련된 일에는 반드시 보상을 하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And

이단의 처리방법

유다서1:1-4

짝퉁이라는 말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모조품, 유사품, imitation 등의 뜻입니다.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꼭 진짜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용한 사람들이 과거에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짝퉁 히틀러라는 말이 있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목숨은 금쪽 같이 여겼습니다. 명색이 총통이기 때문에 가야 할 곳이 많았습니다. 물론 경호원들이 있었지만 웬만한 곳에는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꼭 가야할 자리에는 짝퉁 히틀러를 보냈다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히틀러입니다. 경호원들도 그대로고, 동행하는 사람들도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히틀러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요새 짝퉁 명품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유명메이커의 상품을 단 짝퉁들이 진짜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볼 때는 짝퉁이지만 남이 볼 때는 명품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짝퉁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짝퉁이 있습니다. 바로 이단들입니다. 1절과 2절 그리고 4절을 보면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I. 우리는 이단의 정체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4).

유다서를 기록한 사람은 예수님의 동생 유다입니다(카일·델리취, 톰슨, 틴텔, 레이몬드 E. 브라운 등). 예수님의 동생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였습니다(마13:55). 이 중에 유다가 본서를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유다는 사도들보다 인간적으로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예수님을 형님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자신은 그 노예로 여겼습니다. 30년이나 형님, 동생하며 한 집에서 살았는데, 유다는 예수님을 형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주인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은 인간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1절).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e[leo")과 하나님의 평강(eijrhvnh)과 하나님의 사랑(ajgavph)이 많을 것을 축복합니다. 이 내용으로 보아서 유다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평강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상당히 필요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위축되었습니까? 이단들 때문입니다. 이단들 때문에 유다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유다는 그들을 위로하고 이단의 정체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유다는 이단에 대해서 말하기를 교회에 몰래 숨어들어왔다(pareisevdusan)고 말합니다. 벌레가 몰래 기어들어오듯이 몰래 교회에 숨어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최소한 두 명 이상입니다. 이단들은 절대 혼자 다니지 않습니다. 떼로 다닙니다. 그런데 이단은 이미 심판(krivma)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이단은 불경건하여(ajsebei'")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단은 하나님의 호의를 색욕거리로(ajsevlgeia) 변질시켰습니다. 색욕거리란 온갖 악을 모두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였습니다(ajrnouvmenoi). 유다는 이단의 생태를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였습니다.

이단이란 헬라에서 독특한 주장이나 교리를 갖고 있는 철학자를 이단이라 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행5:17[당파], 15:5[파], 24:5,14[이단], 26:5[파], 28:22[파], 고전11:19[편당], 갈5:20[이단], 딛3:10[이단], 벧후2:1[이단]).. 따라서 이단들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의나 교리를 부인합니다.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저들이 삼위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부인합니다. 아예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단들은 돈과 연결되었습니다. 이성문제가 복잡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단들에 대한 정체입니다.

사도시대에도 이단들은 극성을 부렸습니다. Ebionism, Essenes, Docetism, Cerinthus 등입니다. 이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Ebionism)이었고,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Essenes)이었으며,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Docetism).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을 부인하였습니다(Cerinthus).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 시대 이단들도 많았습니다. 주후 3세기와 4세기 있었던 이단들인데 Gnosticism(영지주의), Origenism(오리게네스주의), Marcionism(말시온주의), Monarchianism(모나키아니즘), Montanism(몬타니즘), Paulicians(바울파), Manichaeism(마니교) 등입니다. 이들은 육신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물론 마지막에는 악마도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반대했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일신론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주장했습니다. 세례를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에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Ariaanism(아리우스주의), Apollinarism(아폴리나리우스주의), Nestorius(네스토리우스), Pelagianism(펠라기우스), Eutychianism(유티게스주의) 등입니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배격하거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부인하였습니다. 아담의 죄의 전가를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단의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교회와 신앙』에 나온 이단만 해도 그 숫자가 엄청납니다. 굵직굵직한 것만 들어도 금방 몇 십 개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들이 운영하는 단체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운영하는 회사들도 많습니다. 이들 회사에서 만들어낸 제품들을 알게 모르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합니다. 국제적인 대회들을 개최하기도 합니다. 국제적인 신문(journal)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모읍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교회들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교회에 암적인 존재들입니다. 각 교회들이 이단 때문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문난 이단들은 그래도 주의하여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문나지 않은 이단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television에 205번이나 버젓이 설교한 이○○ 목사의 설교가 늦게나마 검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윤○○ 목사는 성령님을 예수님이라고 하며, 예수님을 성령님이라고 하는 양태론을 주장하며, 베뢰아귀신론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역시 텔레비전에 설교를 하는 ○○○○교회의 이○○목사는 낙원에 있는 사람들도 천국과 지옥으로 갈 사람이 나누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공로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 율법, 계명을 지켜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황당합니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이단을 우리가 왜 주의해야 합니까? 이단에 빠지면 영혼과 육신이 한꺼번에 죽습니다. 나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믿었는데, 심판 때에 지옥에 있다면 얼마나 절통합니까? 그리고 이 땅에서 엄청난 착취를 당합니다. 그래서 한번 이단에 빠지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살아서는 잘못된 교리로 노예처럼 삽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지옥에 빠집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보고 있습니다. 통일교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다미선교회에 빠져서 패가망신한 사람들, 귀신론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집회에 가서는 안 됩니다. 검증이 되지 않은 설교도 위험합니다. 모르는 사람과 함부로 성경공부에 참여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지금 마귀들이 영혼을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단은 사람이 아닙니다. ○○○마귀, 통일교마귀, 다락방마귀, 몰몬교마귀, 여호와의증인마귀 등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마귀입니다. 그들이 비록 우리와 같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마귀라는 것, 그래서 우리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애쓰는 ○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 이웃에 살고 있더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어갑니다. 이단에 이자만 들어도 아예 상종치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 끌고 가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II. 우리는 이단에 대처해야 합니다(3절).

의사는 환자가 병원에 오자마자 수술하거나 치료하지 않습니다. 먼저 환자들을 진단합니다. 여러 가지를 검사하고 진단한 후 병에 대해서 치료를 합니다. 유다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강력하게 권하여야 할 필요를 가졌다(e[scon)고 했습니다. 무엇을 권할 필요를 가졌습니까? 우리가 가진 구원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한 대처방법입니다.

유다는 구원을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바른 성경은“우리가 함께 받은 구원”이라 했고, 표준새번역 성경은 “우리가 함께 가진 구원”, 공동번역은 “우리가 함께 받은 구원”이라 했습니다. 또한 영어성경도 “우리가 함께 받은 구원”; to you of our common salvation)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받은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또한 유다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 했습니다(a{pax paradoqeivsh/ toi'" aJgivoi" pivstei). 이 역시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단번에 베푸신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과거에 받았습니다. 현재 확신 있는 구원입니다. 미래에는 구원받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립니다. 한번 구원 받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한번 믿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신앙에 단계라는 것이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단계를 밟지 않습니다. 오늘 10%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20%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구원받기 위해서 10번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번에 구원을 받습니다. 한번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았습니다. 한번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한 번 구원으로 하나님나라의 영주권을 영원히 받았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특별대우하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홀대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구원, 똑같은 믿음입니다.

유다는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써 싸우라고 말합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 ‘힘써 싸우라’(ejpagwnivzomai)는 말은 운동경기, 레슬링 등의 싸움에서 쓰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헬라작가들은 덕 있는 삶을 이 단어에 비유했습니다. 따라서 이 싸움은 힘든 싸움입니다. 누구들처럼 싸워서는 안 됩니다. 방송국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다고 무차별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통신위원장이란 사람은 대놓고 나가라고 합니다. 감사원에서는 특별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합니다. 검찰에서는 소환명령을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이단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단과 싸울 때에 진지하게 싸워야 합니다. 싸우기는 싸우되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힘든 싸움인 것입니다.

요즘 최고로 문제인 이단이 ○○○○입니다. 이들은훈련된 사람들을 통해서 기존교회에 침투시켜 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믿은 사람들은 이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듯 말듯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이단들의 먹이의 대상입니다. 이단들은 절대로 전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전도는 이단같이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이단들은 절대로 전도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교인들을 빼앗아가지, 전도하지 않습니다. 언제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조금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이단들의 대상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많이 넘어갔습니다.

이단들하고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잘못하면 가라지를 뽑으려하다가 곡식마저 뽑힙니다. 가라지가 뽑히는 것은 괜찮은데, 곡식은 조금이라도 다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단과 맞붙어 싸워서는 안 됩니다. 이단들은 문답식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웬만한 성경지식으로는 답을 하지 못하고 막혀버립니다. 목사들도, 장로들도 넘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의 말을 100%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토론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넘기려고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잘못 덤벼들었다가는 그냥 당합니다. 그래서 싸우기는 싸워야 하는데 지혜롭게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사도들도 이단들은 모두 쓸어버려라 하지 않았습니다. 쓸어버릴 대상이지만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조심을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이단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알고 있습니다. 디도서3:10을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이단들과 교제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힘써 싸우라”는 말은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단과 싸우기 위해서 이단을 알자는 것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넘어질 일이 없습니다. 손자병법에 보면 제18계에 금적금왕(擒賊擒王) “적을 잡으려면 적의 우두머리부터 잡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상대방의 핵심을 공격하여 적을 완전히 제압하는 전술입니다. 이 전술의 핵심은 과연 어느 곳을 건드려야 적이 무너질 것인지 정확히 분석하라는 것입니다. 조직마다, 사람마다 가장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곳만 무너지면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이단들이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예 이단이 발붙일 근거를 우리가 제공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단과 힘써 싸우는 것입니다. 용감하게 “이단들아 다 나오라”했다가는 큰 일 납니다. 그 용기는 가상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단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아는 것입니다. 통일교는 무엇이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무엇이며, ○○○는 무엇이다,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는 아예 담을 쌓아야 합니다. 그들과 같이 생활했다가는 넘어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단을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천지에서는 계속 교인들을 기존교회에서 도둑질해가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피스퀸컵을 유치해서 자신들이 못할 일이 없음을 계속 과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리서치조사원 같이 위장해서 교인들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제칠일안식일교회는 좋은 시설의 요양원을 짓고 국가의 지원금을 받아서 세를 늘리고 있습니다. 신학이 확실치 않은 목사들은 양들을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주위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 안에도 겉은 멀쩡하지만 이단이 있을지 모릅니다. 일단 이단에 빠지면 가정이 파괴됩니다. 심하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단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단들은 성경을 악용하여 부모형제나 부부를 이간질해서 가출토록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도둑질해갑니다. 그들은 성경의 지식이 조금 약하다 싶으면 한없이 파고듭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이단들은 기존교회에서 할 수 없는 일을 자기들은 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맡겨진 사명에 충실할 때 유혹을 당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완전하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목회자가, 집사가, 그럴 수 있느냐 하면서 불평을 조장하며,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받은 구원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받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수십 년 간 또는 수년간에 걸쳐서 믿음을 고수해왔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마귀의 입에 톡 털어놓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났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세가 애굽의 궁중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님의 피값입니다. 아주 값비싼 구원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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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주님께 합당한자(마태복음10:34-39)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도록 전도하는 것은 신구약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며, 신앙은 역사적 경험적 열매로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불교를 믿으나 힌두교를 믿으나 어떤 것을 믿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많은 종류의 사람들과 그들이 믿는 신앙으로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기독교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에 근거하여 절대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절대주의만큼 그 결과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꼭 기독교만 고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가 나온 이유는 W.C.C. 때문입니다.

원래 W.C.C.의 종교대화는 전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사람들이 모이다보니까 어렵게 사는 나라들과 전쟁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W.C.C.는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고 인류의 평화와 복지라는 세속적 목적과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했습니다.

피터 버거는 피터 버거는 현대 사회는 종교도 시장경영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은 종교다원주의를 “첫째는 존재론적으로 많은 신들이 있다는 가설, 둘째는 한 종교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반면 다른 종교는 잘못된 우상을 섬긴다는 가설, 셋째는 하나님은 한 신으로, 그가 만물을 창조하였고 만물의 주가 되는데 다른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이 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가설이다. 힉은 이상의 세 가설 가운데 현대는 부득이 세 번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젠 모든 나라들이 평화와 번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불화한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영혼의 모든 충동들과 상반될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성도들)은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육신적인 혈연관계라고 해서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자기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결국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가족의 힘을 뛰어넘고, 주님의 복음은 세상의 어떤 곳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 밖의 사람들이 무어라고 해도 하나님의 복음에 우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주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이념도, 육신적인 평안함도, 육신의 안락함도 아닌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자신의 목숨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생각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신적인 목숨을 내놓고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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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신앙고백(마태복음10:32-33)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고백)하는 자를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자신도 시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에 자신을 부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역시 부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시인(oJmologevw)한다는 말은 법정적인 말입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하다는 말은 ‘그 말에 동의하다’, ‘영수증을 확인하다’ ‘약속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그가 하는 모든 것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로마제국시대에는 황제가 신이었습니다. 황제가 ‘주’였으며, 황제가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한 신앙고백에는 죽음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28절).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물리쳐야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 주변에는 항상 뱀의 후손과 늑대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므로 신앙은 항상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을 시인하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하나님의 복음은 퍼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무력으로 충성맹세를 합니다. 힘으로 자신들의 부하들을 제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진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만일 성도들이 신앙을 속으로만 말하고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는다면 신앙의 불은 얼마가지 않아서 꺼질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고백을 거짓신앙과 대조시켰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되면 자신의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조법을 사용하셔서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의 여하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든지, 부인하든지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수많은 배도자들이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초대교부들도 순교를 당했습니다. 폴리갑 같은 경우는 한마디만 하면 로마의 행정관이 살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리스도의 否認을 거절하고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만큼 신앙고백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서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시류에 흔들리지 말고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하면 그대로 고백해야 합니다. 신앙에 관한한 단호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을 하면 손해를 보더라도 고백해야 하며, 자신이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굽히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이 나라는 기독교인들이 입을 다물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음으로 나라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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