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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제자들의 상황(마태복음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jIdouv ejgw; ajpostevllw uJma'").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리라 하셨습니다. 양과 이리는 먹히고 먹는 관계입니다. 사납고 파괴적인 “이리 가운데로”라는 말은 위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뱀같이 기민해야 했습니다. 즉 사려 깊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습니다. “뱀처럼···”이라는 말은 ‘뱀’의 어떤 나쁜 면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뱀이 움직일 때 신중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뱀의 경계심과 조심성은 속담이 될 정도입니다. 제자들은 주변의 환경에 대한 통찰력,즉 사람과 물건의 상황 분석과 민감한 상식 합당한 때에 합당한 것을행하게 하고 합당한 방법으로 합당한 위치에 처하게 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항상 좋은 것을 찾으려고 항상 진지하게 시도하는 것은 최고도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실 때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이리가운데에서 양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양이 강건해지고 믿음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리’가 있는 곳에 ‘이리’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양을 보내는데도 ‘이리들’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뒤에 ‘이리’보다 더 두려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살피시면서도 그들의 개인적인 책임을 예외로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뱀같이 지혜롭고,비둘기 같이순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복음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고 순수해야 합니다. 타협하지 말고, 순수한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 말고 자신들의 어떠한 상식도 전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라는 것,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것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왜 심한 질타를 받습니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교 100년여 지나서 한국교회는 심하게 타락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전쟁하지는 않아도 깊이 밀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과거 박정희정권 시절부터 줄기차게 정치와 유착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정치와 유착되어서 좋은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국가의 비호를 받습니다. 국가의 비호를 받는 교회가 어떻게 국가의 잘못을 질타할 수 있습니까? 이제는 한 수 더 떠서 교회의 목사들이 더러운 정치판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로써 교회가 심하게 썩었습니다. 악취가 진동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합니다. 주님께서 2000년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양을 ‘이리’속에 보낸다 하셨는데, 지금은 양이 아니라 ‘이리’입니다. 이리가 되어서 반대로 양을 물어뜯어서 죽이려 합니다. 교회의 순수함이 갈수록 심하게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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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영접치 않는 자는?(마태복음10:14-15)
internet에 ‘나는 안티크리스찬이다.’라고 한 사람의 글을 인용하면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반기독교를 지향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한 단체에서 각 초-중학교에 단군상을 세워 놓았는데 기독교인들이 이것들을 밤중에 몰래 가서 톱으로 목을 잘라낸 것이다. ···· 자신의 국조의 목을 베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 수가 있나라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고,···· 그리고 그들의 배타성에 질렸다. ··· 그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과 반대가 되는 집단은 무조건 마귀, 사탄의 준동이라고 말하는 것에 질려버렸다. 수년간 인터넷을 해 오면서 들은 기사들은 나를 점점 안티 크리스찬으로 몰고 갔다. 스스로 일제에 맞섰다고는 하지만, 실상 일제의 신사참배에 그들은 동의했다. ···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고 종교계열의 학교에서는 종교와 관련해서 자신들의 입장에 반대하는 학생을 상대로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이 잘못된 생각이 꽉 찼습니다. 그래서 어떤 계기가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어떤 사고가 나서 기적을 베풀기 전에는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복음은 좋은 것인데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을 보면 복음을 전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의 땅을 여행하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들의 신과 옷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은 먼지를 떨어버림으로 해서 이방땅과 같이 여긴다는 것이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보다 더 극악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화를 제공하는데 뻔뻔스럽게 무시하는 자들에 대한 수치스러움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주님의 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은 심판 날에 말할 수 없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은 보화이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보화를 가지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면서까지 전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기를 원하는 사단의 후손들을 위해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마련하셨습니다. 전도는 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아야 하고, 세상에 잔뜩 취한 사람들의 욕구에 맞추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혀 천국에 관심이 없습니다. 끝까지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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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주거문제에 대한 태도(마태복음10:11-13)
예수님은 전도를 하는 중에 당일에 돌아오지 못함으로 기거할 임시주거를 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합당한(a[xio") 자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일단 찾은 후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말고 그 지역을 떠날 때까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11절). 그 집에 들어가면서 그 집의 평안을 빌라(ajspavzomai)고 했습니다(12절). 만일 그 집의 평안(eijrhvnh)을 빌었을 때 합당(a[xio")하면 그 평안이 그 집에 임하고, 합당하지 않으면, 다시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라 하셨습니다(13절).
전도자들의 생활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찾아야 합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두 부류로 나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이러므로 아무 곳이나 가서 기거할 집을 정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당한 자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당당해야 합니다. 어떤 곳을 정했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있을 곳이 없어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권위를 위해서 안전감 있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행하여야 할 일중에 하나는 평안을 비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당시 유대인들의 인사법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문안인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수천 년을 전쟁으로 인해서 평안이 그들에게는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전도자가 빈 이 평안은 없어지지 않는 평안입니다. 즉 겉치레의 인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빈 평안은 그 집에서 받으면 그 집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받지 않으면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오는 평안입니다. 하지만 마술적인 평안은 아닙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효력이 있는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축도의 경우에도 같습니다. 목사가 복을 선포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로 빈 자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기계적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빈 자를 복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자의 자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마땅히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도 복을 받고, 복을 빈 자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리고 전도자의 삶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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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재물에 대한 태도(마태복음10:8b-1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병을 고치고, 문둥병을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입니다. 이런 것들은 반드시 돈과 결부되었습니다. 병을 고치면 감사해서 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셔서 주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베풀라’고 하셨습니다(8절). 또한 복음을 전하러 돈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9절). 복음의 여행을 떠날 때에 여러 가지를 준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넣을 주머니나 여벌의 옷, 신이나 지팡이 등이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습니다(10절).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제자들이 이러한 복음과 권세를 예수님께 돈을 주고 샀다면 돈을 받고 팔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료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거저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행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따라서 상거래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돈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이나 복음을 파는 행위는 신성모독입니다. 거룩한 것을 돈으로 바꾸는 아주 나쁜 행위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나 기도 응답의 대가로 돈을 받는것은 대단한 잘못입니다. 같은 의미로 성경을판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행위도 잘못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사람이 ‘저작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저자이시며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인간 저자이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절의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이번의 복음전도는 긴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며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랜 여행을 위한 짐을 꾸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최소한의 것 외에 어떤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새 개척교회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서울 같은데서 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자리를 잡아도 최소한 1억 원에서 2억 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개척했다가 접어버립니다. 성경말씀을 믿고 했는데 실제로 해보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해보니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성경이 틀리거나 내가 틀렸거나 둘 중에 하나가 틀린 것입니다. 누가 틀렸겠습니까? 우리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리했거나, 아니면 성경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한번 개척을 하면 죽는 날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서 사역을 한다면, 분명히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여러 어려운 상황이 노도처럼 닥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다른 교회들이 공조를 하지 않습니다. 같은 노선을 걸어도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의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지 다른 교회들을 인정하지 않고, 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사역자는 재물에 대해서 초월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필요한 재물들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제자들의 임무(마태복음10:8)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천국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인 것만 강조한다든지, 육적인 일만 강조한다든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함께 취급하시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라’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라’하셨습니다.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을 돈을 받지 말고 거저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입으로 복음을 전하면 되었습니다. 어떤 다른 무기가 필요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들이 잠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적들은 거저주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천국의 임재의 표시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세의 표시입니다. 이들이 말할 때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능력으로 무장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즉 후한 일군들이 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능력을 혼자만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自明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라 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라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깨끗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을 괴롭히는 약한 것들을 말씀으로 응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통로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위세를 부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현재 국론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1%와 99%로 분열되어 있고, 강남과 강남을 제외한 지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인해서 사람들이 7명이나 용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죽었지만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겨우 전세나 사글세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느 날 갑자기 개발해야 하니 나가라는 것입니다. 청천벽력입니다. 하나마나한 보상비로 서울에서는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돈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검찰과 정신 빠진 언론에 의하여 억울함과 수치스러움에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일 때 교회들이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서울의 일부 대형교회들은 dilemma에 빠져있습니다. 오히려 약자 편에 서지 않고, 강자 편에 섰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들 입에서, 장로들 입에서, 교인들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들을 거침없이 품어내고 있습니다. 거저 받은 것을 대가를 받고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이 나라는 기독교와 깊은 밀월관계입니다. 정교유착이 너무나 깊어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임무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돌보아야 합니다.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차별하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정권을 가진 세력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영접치 않는 자는? (0) | 2010.0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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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0) | 2010.02.21 |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레위기 1.1,2
우리나라는 미국의 募兵制와 달리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20세 이상이 되면 신체검사를 하고 그에 따라 정한 날짜에 국가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을 나라에서 부르려면 엄청난 경비가 듭니다.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합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고 수십만 명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입니다. 훈련을 시켜서 나라를 지키게 하려고 부르는 것입니다. 직장이든지 사업장이든지 국가든지 사람을 부르는 데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름받은 사람들을 사용하려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부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복 받게 하려고 부르십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11).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도 모세를 수시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이 부르심은 공적인 문제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대표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대화의 창구를 모세로 정하였습니다. 즉 대화의 채널이 이스라엘에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 하나로 정하셨습니다. 모세가 위대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위대하지도 않습니다. 깨끗하지도 않습니다. 이전에 애굽에 있을 땐 살인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깨끗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그 앞에 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면하셨습니다(민12:8).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앞으로 나오겠지만 회막에서 정한 불을 쓰지 앉고 다른 불을 붙였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 일이 나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누누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여호와 앞에 수시로 섰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어떻게 설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청하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 초청에 사람이 응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자격증을 하나님께 주십니다.
성도란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은 사람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성도라 말합니다. 성도 역시, 이전에는 사망이 함께 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황이 바뀌어졌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 사람을 사망이 주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망이 그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이전에 우리를 세상이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우리를 주관한지 못합니다.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바뀐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뀐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서너 가지가 있다고 존 머레이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성취하도록 부름 받은 부르심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전7:20.24).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특별한 직분으로의 부르심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롬1:1, 고전1:1). 복음과 관련해서 죄인들에 대한 차별 없는 회개와 믿음의 호소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지칭된다(잠8:4, 마 22:14).
Millard J. Erickson은 하나님의 부르심 중 특별소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별소명(special calling)이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와 신앙으로 응답하도록 하시며 그들이 확실히 그렇게 역사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한 소명이 주어지는 상황은 매우 광범위하게 다양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 가운데 주요한 인물들이 될 사람들에게 특별한 소명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마4:18-22; 막1:16-20).
박형룡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경은 죄인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神的使役의 시작을 소명(vocation or calling)으로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부르심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범죄 한 아담을 부르심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국가에서 군인들을 부르심같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복을 주시려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로운 부르심입니다.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초대하는 부르심입니다. 우리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모두 멸망하기 때문에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엡4:1-3). 이 합당한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을 누구 때문에 창조하셨습니까? 우리 때문에 우주만물을 지으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복을 주시려고 부르셨습니다(신 28:1-7).
11.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하나님(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하셨습니다. 예물(코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말합니다. 이 예물은 “희생으로 드려질”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는 성소에서 사용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헌물”을 의미합니다. 왜 갑자기 하나님께서 예물의 이야기를 하십니까? 우리는 예물하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드린다는 것의 밑바닥에는 자기의 희생을 생각합니다. 어딘가 물질에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짙게 나타냅니다. 이것이 우리의 좁은 생각이며 좁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물을 가져오려거든 하면서 형식을 주셨습니다. 제물의 종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르게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예물은 내가 하나님께 선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물을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레1-7장).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로 가져와서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사람은 에덴에서 죄를 지은 이후로 하나님께 예물(제사)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영원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죽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대신 죽음을 가져가야 합니다. 바로 그 죽음이 제물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 제물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열납은 하나님의 표준에 부합하여야 합니다. 희생 제사용으로 구별해 놓은 산 제물에 안수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헌물자의 의향뿐만 아니라 죄까지 그 제물에 전가시켰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에서 예물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드릴 수도 있고 드리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사항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죄를 용서받아야할 사람들입니다. 죄를 용서받으려면 죄 용서함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죄를 용서받을 대상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입니다. 그가 지혜자든지 우매한 자든지 인종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입니다. 사람이면 모두 해당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분상 제한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으면 됩니다. 호흡이 붙어 있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호흡이 끊어지기 전에 해야 합니다. 죽은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롬3:10).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롬 6:23). 죽되 영원히 죽어야 합니다(마25:41).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물은 제물입니다. 우리 대신 죽는 제물입니다.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소입니다. 또는 양입니다. 이 제물 때문에 우리가 죽지 않습니다. 이 양과 소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대신 죽었습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을 인간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대학 죽으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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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전도의 내용(마태복음10:7)
말라기4:5을 보면 하나님께서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곧 세례요한을 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을 보내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보내시는 왕의 길을 먼저 와서 닦는 일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3:2). 예수님도 시험이 끝나 첫 외침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유대에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천국이 가까웠다’를 전하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poreuovmenoi de; khruvssete, levgonte" {Oti h[ggiken hJ basileiva tw'n oujranw'n. 제자들은 가면서 외쳐야 했습니다. 유대의 길잃은 양들에게 외쳐야 했습니다. 외칠 내용은 ‘천국이 가까웠다’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은 이 땅과 천국이 거리상으로 조금 가까워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천국의 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천국이 가까웠다’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신비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든지 회개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전도로 인해서 많은 매를 맞고서 빌립보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때 찬송을 했고, 그로 인해서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문들이 깨졌습니다. 간수는 당연히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을 하려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기들이 그대로 있음을 알렸습니다. 간수가 달려와서 그를 집에 데리고 가서 대접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행16:31)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8)고 했습니다.
사람이 회개한다는 것은 자신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전에 있던 올바르지 못한 생활(주님을 믿지 않던 생활)에서 바른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회개를 함으로서 사람들이 에덴동산의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회개를 함으로서 잃어버려진 천국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께로 가야하는 회개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회개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람의 회개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이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동등하게 나타나는데, 회개는 효력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무기가 사람을 회개시키는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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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명령/1차전도대상(마태복음10:5-6)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유대에 내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이방인의 길에’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도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5절). 이스라엘로 한정하라고 하셨습니다(6절). 왜 사마리아나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이 전도법은 전도론이 아닙니다. 만일에 이대로라면 이방인에게는 절대로 복음이 올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1차전도대상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가라고 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첫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는 자신의 권속인 유대인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방인으로 여기셨습니다. 유대인들을 잃어버린 양으로 부르시는 것은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들은 천국에 가는 것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길 잃은 양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아직 1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유대의 길 잃은 양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사도들은 자신들의 할 일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양으로 부르신 것은 아직 우리에 들어 있지 않은 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양들을 하나님의 양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리하는 양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겨야 할 양이었습니다. 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차례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방인들의 전도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부할 승천하신 후에 비로소 이방인에게 길이 열렸습니다.
복음이 온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은 예루살렘부터였습니다(창12:3, 18:18, 22:18, 26:4, 행3:25, 사49:6, 행13:47, 사54:1-3, 갈4:27, 암9;11,12, 행15:16-18). 이사야49:6과 사도행전13:47을 보면
사49:6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행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에게 가지 말고 유대인들에게 가라고 하신 것은 처음 전도여행을 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고, 병든 자들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전파였습니다. 잃어진 양들을 찾아서 우리에 넣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사로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 이제 세상에 복음을 내놓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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