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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마태복음10:2-4)

열두 제자는 세 군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제1군(群)으로 시몬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입니다. 제2군(群)으로는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이며, 제3군(群)으로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레바오 혹은 다대오, 시몬, 가룟유다입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열 두 제자들의 명단에는 귀족, 랍비, 부자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진흙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들을 영적천재로 만들었습니다.

사도(ajpovstolo")는 ‘보내다’를 뜻하는 (ajpostevllw)에서 유래되었으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사도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서기를 좋아하고, 자기주장이 강했습니다. 그의 형제 안드레는 표면에 나서지 않고 주제넘은 참견을 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화산과 같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조용한 여름의 호수 같았습니다. 빌립은 항상 달려가기 전에 우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우선 달리고 나서야 생각하였습니다. 그들 중 몇 몇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기질상으로 베드로는 행동파로서 대담하고 충동적이며 열성적이었습니다. 요한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조용하고 애정이 많았습니다. 바돌로매는 믿음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의심이 많아 다른 사람들의 증거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열심당원으로 로마를 적대시했습니다. 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빌립은 벳세다출신입니다. 마태역시 벳세다에서 살았습니다. 바돌로매는 갈릴리의 가나, 도마,작은 야고보,유다및 열심당원 시몬은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가룟유다만 유대지방에서 살았습니다.

마10:2-4

막3:16-19

눅6:14-16

행1:13-26

시몬 베드로

시몬 베드로

시몬 베드로

베드로

반석

안드레

야고보

안드레

야고보

베드로의 형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야고보

요한

세베대의 아들

요한

안드레

요한

안드레

우뢰의 아들

빌립

빌립

빌립

빌립

진지한 탐구자

바돌로매

바돌로매

바돌로매

도마

소박한 이스라엘 사람

도마

마태

마태

바돌로매

우울한 사람

마태

도마

도마

마태

(자칭)세리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

야고보

야고보

작은 야고보

레바오/다대오

다대오

시몬

시몬

이름이 셋

가나안사람 시몬

가나안인 시몬

유다

유다

열심당원

가룟유다

가룟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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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디아

배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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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선택하심(마태복음10:1)

성경에서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숫자도 심오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숫자는 기계적 의미보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3x4=12의 숫자는 이스라엘에서 신성시한 숫자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기초한 12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에게서 엄청난 매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는 이 열둘이라는 숫자는 좋아했지만 실제로는 실패했습니다. 그 지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정통성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미션에 실패했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로 모여진 이들이 앞으로 하나님의 미션에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특히 이들의 활약은 유대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전 세계로 하나님의 복음이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모든 약한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이력은 유대인들에 비해서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하다기보다 지탄의 대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혁명분자도 있었고, 세리까지 있었습니다. 어쨌든 엘리트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엄청난 일들을 해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ejxousiva)은 ‘어떤 행동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엑수시아는 성령의 은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엑수시아는 파송받은 그의 본질에 기초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엑수시아는 악마와 귀신들이 그들이 권세를 박탈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엑수시아가 악마의 활동을 파괴하고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들을 구해낼 권세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사도들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위도 없었고, 사람들의 보기에 특별한 것들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특별하지도, 유명하지도 않은 그들이었지만 그들을 부르신 예수님은 천지를 뒤흔들어버릴 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능력은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지도도 별로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높은 인지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위대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능력을 사용하면서 마치 제 것처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은 그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그 능력들은 그들의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능력들이 그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우선은 아니었습니다.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기적을 주신 이유는 복음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할 복음을 위해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일들은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죄로부터 회개시키려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엑수시아를 주신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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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추수기(마태복음9:35-38)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를 심히 왜곡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것을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류의 시작을 추정으로만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는 이스라엘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담이후로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에덴동산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홍수심판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노아로 인해서 다시 번성했습니다. 예전보다 더 번성했습니다. 지구촌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저기 모여 살면서 자신들이 깎아 만들거나 이상한 형상들을 섬기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사후세계와 현세를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삼위하나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종교가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사람들이 모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곳을 다니셨습니다.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didavskwn).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khruvsswn to; eujaggevlion th'" basileiva"). 그리고 무리를 민망하게 여기셨습니다(ejsplagcnivsqh). 마치 목자없는 양같이 여기셨습니다. 부차적으로 그들의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곧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으로 엄청난 추수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일꾼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할 밭에 더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추수가 완성되기까지 예수님께 기도를 계속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들 가운데에 섞여 있는 추수할 성도들이 많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가운데 예루살렘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슥2:11).

교회는 언제나 사람들이 부족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소형교회일수록 더합니다. 예전과 달리 상당수의 교인들이 자기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반면에 자기얼굴들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소위 사람 많은 교회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숨습니다. 즉 편안하게 생활을 하자는 속셈입니다. 매우 잘못된 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추수할 일꾼을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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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린 벙어리를 고치심(마태복음9:32-34)

사람들은 극히 利己的입니다. 먼저 자신을 챙기고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경중은 있어도 사람들마다 모두 이기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 혼자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egoist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egoísmus). 이런 사람들을 egoism이라고 합니다. 소피스트·키레네학파·에피쿠로스학파·T. 홉스 등에 egoism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이들은 개인의 선(善)이라는 목적을 행동의 의무, 올바름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점에서 실제로는 목적론적 윤리의 한 형태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극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심히 시기했습니다. 왜 그렇게 예수님을 심히 싫어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들이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모든 행동들이 자신들의 교리와 틀리고 맞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을 적극 반대합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반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는 귀신들려서 벙어리가 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32절). 이미 예수님의 능력은 소문을 들어서 알았지만, 이런 능력이 있음에 새삼 놀랐습니다.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왕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단의 하수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아담과 하와 중에서 하와를 선택했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뱀을 시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목적대로 타락시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나라를 파괴하는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이 아니고 사탄의 편에 있는 줄 몰랐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하수인이 된 것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당시 가장 영향력이 많은 바리새인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사역현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탄은 감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목적하고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을 무효화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일을 정면으로 도전해서 못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의 일들을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복음의 일을 못하게 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서 사면초가처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역이 좁아지거나 능력이 제한 받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훼방을 해도 주님의 일은 거침이 없습니다. 그분의 뜻과 하실 일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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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을 고치신 예수님(마태복음9:27-31)

소경은 눈이 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길을 인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서 나오실 때 두 소경이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이 소경들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불쌍하게 여겨주기를 바랐습니다(27절). 좀 특이한 상황입니다. 이 호칭은 족보에서 등장한 이후(마1:1), 처음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의 눈을 내가 뜨게 할 수 있겠느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그렇게 믿는다고 했습니다(28절).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소경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엄히 경계하였지만, 이미 그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파다하게 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믿음대로 베풀었습니다. 믿음( pivsti")은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으로 ‘계약이나 약정을 존중하는 행동’입니다.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합니다(마23:23, “····와 인과 은 버렸도다 ····”.롬3:3, 딛2:10, 갈5:22, 살후1:48). 피스티스는 ‘엄숙한 약속, 서약’을 나타냅니다 “처음 믿음을 ····”딤전5:12). 피스티스는 ‘증거, 보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행17:31,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딤후4:7). ① 하나님에 대하여( (막11:22, 벧전1:21, 히6:1, 살전1:8, 롬4:5,9 4:11-13, 4:16,19 이하 등). ② 그리스도에 대하여(마8:10, 9:2,22,29, 15:28, 막2:5 마4:40; 마5:34 마10:52; 눅5:20 눅7:9 눅 7:50 눅8:25 눅8:48 눅17:19 눅18:42. 롬3:23 롬3:26 갈2:16 갈2:20 갈3:22 엡3:12 빌 3:9 약2:1 계14:12). 피스티스는 ‘신앙의 내용, 교리’를 나타냅니다.(유1:3,20 롬 1:5 갈1:23, 3:23, 딤전1:19, 4:1,6, 6:10 딤후2:18, 롬12:6, 딤후4:7).

기독교는 독특한 믿음의 사건(faith event)입니다. 믿음과 결부된 사고형태, 사고 구조들, 그리고 관련된 진술들과 기준들(복음, 케리그마,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믿음의 행위는 기독교에서 특별한 의의를 갖습니다. 이 믿음에는 직업이 없습니다. 신분의 고저가 없습니다. 동양과 서양이 없고, 학벌도 없으며, 남녀의 구분도 없습니다. 노소도 없고, 지역도 없습니다. 이러므로 믿음은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경건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어려운 상황들을 넘겼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우리 자신들을 맡긴다는 것은 계산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인류를 원래의 에덴으로 돌리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들을 부르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죄인이라고 놀림을 받던 사람들을 구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었을 때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기적을 동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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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마태복음9:20-22)

sandwich는 얇게 썬 2쪽의 빵 사이에 육류나 달걀·채소류를 끼워서 먹는 간편한 대용식 빵입니다. 흔히 혈루증 여인의 병을 고친 사건을 sandwich에 비교합니다. 야이로의 딸의 병을 고치러 가는 사이에 끼워져서 고쳐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9:18-19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심.

9:20-22 혈루증 여인의 치료.

9:18-19 야이로의 딸을 고치심.

혈루증이라 하는 병은 여인들이 하혈하는 병입니다. 이 여인은 주기적으로 하혈했는지, 계속적으로 하혈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 여자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아픈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수치스러운 병으로 오랜 기간 힘들게 살았습니다. 누구도 이 여인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눅8:43). 많은 의원들이 고치려고 했지만 재산만 허비했을 뿐입니다. 이무런 효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병세만 더욱 악화되었습니다(막5:26).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아마도 아무도 몰래 만나서 병을 고쳤으면 했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공개적으로 ‘내 병을 낫게 하여 주소서’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야이로의 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내가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지면 나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났습니다.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낫지 않았던 혈루의 근원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겨우 옷에 손을 대었을 뿐인데, 그렇게 고생하던 불치의 병이 나은 것입니다.

무엇이 이 여자의 병을 낫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긍휼과 사랑하심입니다. 다음으로 여인의 믿음입니다. 여인의 믿음이 그 자신을 낫게 한 것입니다. 곧 능력의 주님이신 예수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낫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이 여자는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갈 때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마8:2)하는 문둥병자, ‘내 하인의 병을 말씀만 하시면 났겠습니다’(마8:8)하는 백부장,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꼭 고쳐주실 것을 믿고 함께 데리고 온 사람들(마9:2), 죽은 딸을 살려주심을 믿은 회당장 야이로(9:18:26) 등이 전부 예수님께 자신들을 의지함으로 일어난 기적입니다.

믿음의 모습들이 다양합니다. 믿음의 모습들이 한 결 같습니다. 그러나 모두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의 양상은 다를 수 있어도 역사는 같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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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1:1-7

오는 10월31일이 종교개혁일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Luther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목적이 없었습니다. Luther는 애초에 종교개혁을 하려고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Luther는 종교를 개혁할 의사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Luther는 95개조 논제를 게시하였을 때 Roman-Catholic에 반기를 들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Roman-Catholic에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95개조를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붙였을 때도, Luther는 면죄부 판매 등 당시 Roman-Catholic이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서 학문적인 토론만 할 계획이었습니다.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95개 조항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가 아니라 당시 10% 미만의 사람들만 읽을 수 있는 Latin語로 작성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Luther자신은 종교개혁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1517년 10월 31일의 95개조 사건은 Luther 자신도 예견하지 못했던 사건으로, 1000년 동안 썩었던 Roman-Catholic에 핵폭탄을 던진 사건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이 전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1절에서 5절을 보면

1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인이었더라

야곱이 그의 권속을 데리고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에 갔습니다. 애굽에 들어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들이 이러하다고 출애굽기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1. 애굽에 들어간 야곱의 아들들(1-5절).

성경의 첫 책을 우리는 창세기라 부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창세기라 부르지 않습니다. “태초에”(tyviarEB]; 베레쉬트)라고 부릅니다. 출애굽기 역시 히브리 사람들은 “그리고 이것들이 그 이름들이다”(t~/mv] hL,ae%w]; 베엘레 세모트)라고 부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 레위기만 제외하고 첫 글자가 성경의 제목입니다. 출애굽기의 Exodus라는 이름은 19:1에 나타난 헬라어 LXX의 “떠남, 출발”의 뜻에서 나왔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는 창세기 46:8-27에 있는 말씀입니다. 애굽에 있는 요셉은 흉년 때문에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각국으로부터 식량을 사러오는 과정에 형제들을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을 시켜서 가나안에 있는 야곱의 모든 가족들을 애굽에 오게 했습니다. 이때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의 가족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입니다. 연장자순으로 레아의 소생 6명 라헬의 소생 2명, 라헬의 종 빌하의 소생 2명, 레아의 종 실바의 소생이 2명으로 12명의 아들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46:8-27절을 보면 레아의 소생이 6아들, 23명의 손자들, 2명의 증손자들로 야곱까지 33명입니다.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이 2명의 아들, 11손자, 증손자2, 딸 1명으로 16명입니다. 라헬의 소생은 2명의 아들, 10명의 손자, 증손자 2명으로 14명입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이 2명의 아들, 5명의 손자로 7명입니다. 야곱의 열한 아들과 손자들, 증손자들을 합하여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을 합하여 70명이 들어갔다고 모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70명입니다. 70명의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7:14을 보면 스데반은 75명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스데반 간에 5명이 착오가 납니다. 히브리 성경(MT)에서 70명을 LXX에서는 75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성경(MT)은 야곱, 요셉, 요셉의 두 아들까지 포함했습니다. 그러나 LXX은 야곱과 요셉을 빼는 대신 요셉의 아홉 아들을 포함시켰습니다. LXX은 요셉이 후에 낳은 아들들을 더 계산해 넣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LXX역을 인용한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여자들을 합치면 150명은 넘을 것입니다.

사실 70명이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요새 장수하는 사람들의 자손을 보면 100명이 넘는 자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70명이라면 많지 않은데 이들이 애굽에 들어갔습니다. 왜 하필 70명입니까? 모세가 제유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제유법이란, 같은 종류의 사물 중 어느 한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법입니다. 제유법에 의해 70명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7이라는 숫자를 완전성에 두고 있습니다. 10도 마찬가지입니다. 10은 역시 충만한 숫자입니다. 따라서 7과 10의 만남은 크고 완전한 숫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70인은 무시 못 할 큰 존재들입니다. 애굽에서는 요셉의 총리대신의 가족들이 들어왔나 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으로서는 후일에 이들로 인해서 국가적인 정책을 썼습니다.

출애굽에 첫 번째 등장하는 야곱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야곱은 에서 대신 이삭의 축복을 받고서 하란으로 달아났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한 일은 오직 아내를 얻는 일과 재산 증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삭이나 아브라함처럼 단을 쌓았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가나안에 돌아와 요셉을 잃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야곱의 가족들을 요셉이 살려냅니다. 그 가족들의 이름을 모세는 세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사실 이들은 성경에 기록될만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도덕적인 사람들도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 형제를 팔아먹은 사람들입니다(창37:28). 스캔들이 있는 사람들입니다(창37:2).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들입니다(창34:26-31). 흠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대로 의로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대에 유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는 행위로 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tyriB]/berîyth)이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피로 맺은 언약이 있었습니다. 이 언약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십니다. 이 언약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뒤를 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의 교회들은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모두 백두장사, 한라장사, 태백장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같은 교회들은 game이 되지 않습니다. 씨름판에 나가겠다고 하면 아예 받아주지 않습니다. 등급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씨름판에 등장한 선수들은 모두 장사가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game을 해서 이겨야 합니다. 따라서 보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씨름판에 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더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라장사, 백두장사는 경기가 끝나야 천하장사가 되지만 우리는 이미 한라장사, 백두장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메달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삶은 이미 game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가나안을 비우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결속시켰습니다. 애굽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단일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성장시키는 밭이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물줄기였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식량원이었으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경호원들이었습니다.

애굽은 흔히 세상으로 비유됩니다. 예수님도 헤롯을 피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 갔었습니다. 애굽은 세상인 반면 성도들을 자라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애굽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셨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애굽 행은 뜻밖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있다가 하란으로 갔었습니다. 하란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올 때에 하나님의 인증을 받았습니다(창31:3). 그래서 가나안에서 생을 마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창46:3).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애굽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어디고 무엇이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로

II. 애굽에서 번성한 야곱의 아들들(6-7절).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제가 물옥잠화를 장재동의 어떤 교회에서 몇 개 가져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물옥잠화 한 개를 집안의 연못에 던져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름이 되자 엄청나게 번성했다는 것입니다. 한 개에서 여러 개가 나와서 번성하더니, 한 여름이 되자 상당히 넓은 연못을 온통 물옥잠화가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거기에 예쁜 꽃까지 계속 피고 있었습니다.

식물이든지 동물이든지 환경과 여건만 좋으면 기하급수로 번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천적이 있고 재해가 있어서 번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없으면 얼마든지 번성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장면이 바뀝니다. 애굽에 70명이 들어간 오랜 후에 야곱은 물론이고 요셉의 형제들이 모두 죽었다고 말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했습니다. 이제 그 전후 세대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거주기간을 430년이라고 했습니다(출12:40). 여기에서 모세의 성장기간 40년과 미디안으로 도피생활 40년을 제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략 350여년 째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Thompson Bible, 82).

그 사이에 이스라엘은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애굽을 떠났을 때는 약 25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70명이 25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번성했습니다. 만배 이상으로 번성한 것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사람들의 번성을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번성(WrP;)했다고 말합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넘쳐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번식했다(Wxr]v]YIw")고 합니다. 연령별로 사람들이 우글거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창성했다(WBr]YIw")고 말합니다. 고센 땅이 모자랄 정도로 계속 늘어갔습니다.

그리고 심히 강대(daom] daom]Bi Wmx]['Y"w")하였습니다. 건강치 못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요셉당시의 애굽 사람들은 70명의 야곱의 가족들이 왔을 때 하찮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 7000명이나, 7,0000명이라면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7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약 400년 동안에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쳤습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청장년들이 넘쳤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은 병에도 강했습니다. 웬만한 병이 들어와도 자고나면 나았습니다. 산파들이 바빴습니다. 매일 출산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낳고 자라고, 낳고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정확한 숫자를 말하지 않고 그냥 온 땅에 가득하였더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로 보아서는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볼 때는 걱정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 비하여 신체도 건강했습니다. 계속 인구는 증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이 계속 번성하고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번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번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자손을 주십니다. 또한 거두시기도 합니다. 가족을 번창케 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시편 127:5절을 보면 “화살이 전통에 가득한자는 복이 있다”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화살은 자녀들을 말합니다.

예레미야 30:19을 보면 국가적으로 번성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31을 보면 교회를 번성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애굽의 궁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인공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센지방은 애굽의 관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살고 있지만 고센지방이 애굽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셨을 때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top-star입니다. 애굽은 extra에 불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0은 60,0000이다(70=60,0000)는 공식을 어디에서고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공식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등식이 성립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을 볼 때 이 등식을 성립시킬만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잘난 것도 아닙니다. 잘 생긴 것도 아닙니다.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능력도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야곱의 70명과 같습니다.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세상에서 많이 얻어맞았습니다. 세월에 씻김을 당했습니다. 큰소리 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참으로 irony입니다. 할 수는 없는데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등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한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계약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못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시내산으로 데려와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 당사자들은 계약을 깨뜨릴 때 계약적 저주를 감수해야 합니다. 계약당사자들은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계약식을 체결하는 의식을 하였습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이 의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후손을 시내산으로 데려와 장로들 70인을 불러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출24:9-11). 이 의식이 계약을 인치며 축하하는 계약식사(covenant meal)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누구를 통해서 계약식을 거행하였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과 이미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번성하게 하십니다.

1666년에 런던에 큰 화제가 있었습니다. 무역으로 부자가 되었던 사람들이 하룻밤에 가난해졌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곤궁해졌습니다. 그로부터 47년 후에, 청교도인 존 플래블은 연설 중에 “런던을 휩쓸었던 전염병과 화재는 능력 있고 충성된 많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이 도시와 국가로부터 내쫓김과 묵살을 당한 결과였습니다.”

당시에 영국에 ‘5마일 법령’이라는 법을 영국국교가 발효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5마일 법령이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이 도시로부터 5마일 밖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법이었습니다. 그 법령으로 인해 영국국교회로부터 쫓겨나고 집으로부터 잔인하게 내몰렸습니다. 모든 집단으로부터 5마일 이내에는 거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이 목회하던 곳에서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화재가 일어나서 5마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망했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로, 심판이 임하기 전에 그들을 그 도시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약합니다. 마치 대제국인 애굽에 들어간 70명의 보잘것없는 야곱의 아들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하찮은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들을 어디에서나 보호하시며, 언제나 인도하십니다. 70명을 600000만 명으로 번성케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extra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우리는 extra가 아닙니다. top-star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And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마태복음9:18-26)

지금까지 예수님은 여러 병을 고쳤습니다. 문둥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에 걸린자, 귀신들린 자, 그 외에 여러 병을 고쳤습니다.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한 직원(회당)이 예수님께 와서 절하면서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당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오셔서 손을 얹으면 살겠습니다(19절). 그 사람의 간청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갔습니다(19절). 그 집에 들어가니까 벌써 장례식을 치루느라 시끄러웠습니다(23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모두들 물러가라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24절). 예수님은 사람들을 내보내신 후에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바로 그 소녀가 일어났습니다(25절). 이러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회당은 장로의 회에 의해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목격도 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 딸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눅8:42). 그러다가 예수님이 그 집에 가는 사이에 죽었습니다. 그 집에서 회당장에게 기별하기를 이제 죽었으니 예수님을 더는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눅8:49-50). 회당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결국 그는 딸과 다시 살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나온 첫 번째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통상 사람들이 죽으면 영혼은 육신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이미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곳에서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분리되었던 영혼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 소녀의 몸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집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은 죽으면 다시 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엘리야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왕상17:23). 엘리사가 죽은 뒤 어떤 시체가 그의 뼈에 닿자 살아난 사람이 있었습니다(왕하13:21). 하지만 수백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죽었었는데 살아 난 것입니다. 숨이 멎어서 장례를 치루고 있었는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납니까?

질병과 죽음은 죄의 산물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생긴 것입니다. 이 질병과 죽음은 인간들이 뛰어넘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사람 앞에서 지금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탄의 위세는 예수로 인해서 접어야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불치의 병들이 나았습니다. 심지어는 죽었던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어둠의 세력들이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감히 피조물이 창조주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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