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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마서6:1-11)

 

Ohmy News 2015.05.25.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교회와 50megachurch 23개를 갖고 있습니다. 1958년 가정교회에서 시작한 순복음교회는 최대치를 찍은 2010년에 신도 수가 78만 명이었습니다. megachurch에 속하는 23개의 한국 교회 중 5개는 전세계 10위권에 들어 있습니다.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답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 출신 대통령도 3명이나 나왔었습니다.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 명의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하나, 그들은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들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정재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만해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교인처럼 파당정치를 하느라 상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같은 하늘아래에 있어서는 안될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철천지 원수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셨다는 것은 아담 즉 인간의 방향전환(方向轉換)입니다. 방향전환이라 함은 죄와의 관계를 끊고 타락이전의 아담상태로 회복시키심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루신 구원을 우리는 너무쉽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아서 난 이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이런 것쯤은 이해하실거야하면서 죄에 대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교리는 권면의 형태로 바뀝니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구원이 성취된 사실을 확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원리적으로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으로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우리들의 모든 사고에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계획, 언사, 행동을 위한 도약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우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죄에 매여 있어서, 죄의 종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새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택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4장을 보면 가인의 죄악상과 가인의 후손들의 생활이 기록되었습니다. 4:26부터 셋의 후손들이 기록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후손들만 기록되었습니다. 몇 살까지 살다가 자녀를 낳고 죽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셋의 후손들은 기록이 되었습니다. 셋과 가인의 후손들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6장에 가면 1절과 2절에 전환점이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1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입니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이요,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입니다. 문제는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 b/f/tôb 좋은, 선한, 즐거운, , 이익, 번영, 복지등으로 번역합니다. 때로 토브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매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매력에 빠지니까 헤어나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심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로보건데 오늘날 우리들은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산위의 동네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되었기 때문입니다.

And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역사적인 예수님의 이적들(로마서6:1-11)

 

전해오는 이야기, 호랑이가 담배 피었다던 시절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자연을 거스르는 어떤 기적도 이적도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신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기적을 여러 말로 표현했습니다.

기이한 일(출15:11,시78:12,사29:14), 표적(행4:30,막16:17)과 기사(렘32:21,요4:48,고후12:12), 일(마11:2,요5:20,36,10:38,14:12,권능과 능력, 능한 일(막6:5,9:39,갈3:5)로 표현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출7:5),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출14:31),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하여(삼상12:17),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출19:4), 복종을 증진시키기 위하여(출16:4),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하여(눅5:26),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요2:11),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보이기 위하여(출4:2), 하나님의 사자(使者)임을 확증하기 위하여(출4:8), 하나님의 정당하심을 보이기 위하여(출17:4),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하여(마11:2), 복음의 사도임을 보증하기 위하여(고후12:12),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요12:37), 이방인을 순종케 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롬15:18), 의인을 보호하기 위하여(단3:28), 사악한 계획을 변경시키기 위하여(출3:19),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기 위하여(막16:20),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행10:10), 징계와 경고를 위하여(레10:1), 특별한 사명을 주기 위하여(출3:2), 인생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마 15:32)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요2:7). 귀인의 아들을 고치셨습니다(요4:46). 심히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눅5:5).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막1:23).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으며(마8:14),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셨습니다(마8:3).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마9:6-7). 삼십 팔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요5:5-9).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마12:10-13). 백부장의 하인을 낫게 하셨습니다(마8:5-13). 어떤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눅7:12-15).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눅11:14). 폭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마8:23-27).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마9:18-25).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을 고치셨습니다(마9:20-22).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마9:27-29).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마14:19-21). 바다 위로 걸으셨습니다(마14:24-27).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셨습니다(마15:21-28).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마15:34-38).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셨습니다(막7:31-35). 소경을 고치셨습니다(막8:22-26).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셨습니다(마 17:14-18).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을 얻으셨습니다(마17:24-27).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게 무리 가운데로 지나가시기도 하셨습니다(요 8:59).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눅17:11-15).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요9:7).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뇨11:38-44). 18년 동안 귀신들려 병든 여인을 고치셨습니다(눅13:10-17). 고창 병 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눅14:1-4). 두 소경을 고치셨습니다(마20:29-34).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셨습니다(마21:17-19). 말고의 귀를 낫게 하셨습니다(눅22:50-5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눅24:6).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셨습니다.

불가지론(不可知論/Agnosticism)과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자들은 성경의 이적들을 자연현상으로 설명하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또한 현대주의자들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포함하는 어떤 이야기도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근거 위에서 기적들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어떤 반대를 하더라도 기적은 부정 할 수도 반대 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요, 그 기적의 수혜자들이 수가 없이 많기 때문이며, 목격자들이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And

누차 언론에서 이야기했겠지만 과연 8.15광복절 집회를 허가한 것은 100% 허가한 판사의 잘못이다. 그들 곧 극우주의자들 미국기, 태극기, 심지어 욱일기까지 든 미친 데모대들은 과거에도 얼마든지 인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와 정부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올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이른 새벽부터 결혼식장행, 돌잔치행 등의 황당한 표식을 하고 마스크무시, 질병관리본부에서 하는 거리두기무시 하면서 이 나라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때 최소한 국가의 안녕을 몇 년 후퇴시키고 있는 사랑제일교회를 비롯해서 극우유투버 등이 병원을 호텔처럼 생각하고 이것 가져와라, 저것 가져와라 하는 등 온갖 눈꼴사나운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독불장군을 넘어서 미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어제인가 대통령과 소위 기독교총회장들이 모였다. 한기총대표, 한교연대표, 한교총대표 등과 모여서 정부입장과 이 나라의 현재 코로나19상황을 서로 주고받았다.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잠을 설쳐가며, 수고하는 의료진들은 방진복을 입고 언제 벗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철주야 수고 하고 있는데 세 기독교대표자들의 하는 말은 코로나19상황의 한국상황과 전 세계상황은 다른 이야기처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우리교회의 대변자들인가 심히 우려스럽게 생각한다. 예배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조심해서 대면예배를 드려서 코로나19환자를 최소화 해달라는데 교회를 핍박한다는 등, 대면예배금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니 목사로서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거북스럽게 생각한다. 교회에 코로나19환자가 발생돼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마치 초대교회의 바리새인들을 보고 있지 않나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교회의 대표라고 하지만 교회에 조금의 보탬도 되지 않고 오히려 전도문을 막고 있는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과 같다고 생각한다.

 

전공의들이 파업으로 인해서 두 분의 생명이 삶에서 떠나버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참 기가 막힌 뉴스다.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도, 병원이 옆에 있었는데도, 의사가 있었는데도 순전히 자기 밥그릇 챙기려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에 귀를 막은 것이다.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반드시 숙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의료의 윤리적 지침으로, 현대의 의사들이 의사가 될 때 하는 선서이기 때문이다. “이제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 나의 위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이런데도 아무리 자신들은 어떤 변명을 해도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밥그릇 지키기 위해서 터무니없는 파업을 하고 있으니 국민 된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적잖이 속이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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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동정녀탄생의 목적(로마서6:1-11)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fashion show는 fashion designer가 Fashion week의 기간에 있을 일련의 옷들을 공개하는 행사입니다. 전형적인 fashion show에서는, fashion model이 designer가 만들어낸 옷을 입고 무대를 걷습니다. 이때 fashion model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옷이 fashion model보다 더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정녀 마리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일 뿐 마리아는 실상 인간으로서 종에 불과합니다(눅1:38). 그러므로 마리아는 사람들이 숭배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만일에 마리아를 숭배한다면 엄청난 우상숭배입니다.

동정녀 탄생의 기사에서 예수님의 마리아 동정녀 잉태를 그의 신성의 작용인(作用因/efficient cause)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Geerhardus Vos는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주님의 신성(神性) 사이에 아주 긴밀한 관련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사실을 그의 신격의 궁극적 근거나 출처로 연장해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신성에 대한 개념 자체를 아주 낮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부모로서 하나님이신 후손을 생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부모들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순전한 동정녀라도 이러한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동정녀 잉태라는 사실보다 뛰어나게 또 그것과는 아주 별도로 온전히 그리고 진실 되게 하나님 곧 성자 하나님이 되신다는 이 사실을 지속해서 믿기 위해서는 어떠한 다른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정녀 잉태로 인해 혼합종 즉 하나의 신(성령)과 한 인간 어머니 사이의 연합으로 생기는 후손인 일종의 반인반신(伴人半神)이 생겨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인반신이라면 단지 반인반신 일뿐 아니라 온전한 신도 아니고 온전한 인간도 못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조금도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하는 한갓 신화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목적에는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함은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한 작용인입니다(고후5:21/히4:15) 대체적으로 “원죄”는 ‘남성’ 계열을 따라 전이됩니다. 그러나 여성도 인간의 죄를 공유하고 그로 인해 부패하게 되며, 또 이러한 만연하는 죄가 마리아를 오염시켜, 그녀도 죄성의 소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라고 해서 신격마리아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자요, 구세주가 필요한 사람입니다(눅1:47). 생물학적 증거는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의 모든 증거에 의하면 자연적 출생을 통해서 태어나는 자녀의 신체적, 영적, 심리적인 면 전체를 구성함에 여자도 똑같이 기여합니다(시51:5). 다윗의 회개의 시에서 그가 자신의 죄악 된 행실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모친을 언급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내 어머니가 죄 있는 채로 나를 임신하였으매’ 따라서 동정녀 잉태자체의 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존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마리아는 그녀의 장자에게 죄성으로 기울어진 인간성을 전이했을 것입니다. Calvin은 “그리스도가 모든 오염에 물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남자와의 성관계 없이 태어난 때문이 아니요,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구별됨으로써 그 출생이 순결하게 그리고 마치 아담의 타락 이전처럼 오염이 없는 출생이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의 최고의 목적을 논하기 전에 비록 그 본질상 동정녀의 잉태이지만 바로 그 육신의 어머니의 태안에서 정상적으로 발육된 것과,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잉태되신 사실과 또 마태와 누가가 모두 기록한 대로 그 인간 자궁 안에서부터 세상에 출생하기까지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완전히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주고 또 보증해 주는 그의 인성(人性)의 기원의 특질들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완전하시며 참되신 인성이 그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이적으로 인해 전혀 위협받거나 손상 받는 면이 없다는 점을 아주 확고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한 인간 모친에 의한 잉태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공유하였고…(히2:14), 또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셨다’(히2:17)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복음서 기자는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동정녀 잉태에 의해서 그 밖의 모든 일 전에 “(선재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는 사실을 이해시켰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수단 즉,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시는’(고후8:9) 수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God-man)이심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인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라는 그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변입니다. 동정녀 잉태는 “임마누엘 사건”(사 7:14/마1:22-23)을 가능케 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인격에 결합시키지 않은 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람(man with us)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로 말미암아 성자 하나님은 본래의 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시오, 영원한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이 아니신 일이 없이 성자(聖子)의 신격(神格)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우리의 인성(人性)을 연합함으로써 “임마누엘”로서 “우리와 함께”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에 대한 또 다른 목적이 진리를 설사 담고 있다 할지라도, 임마누엘 사건의 영광스런 빛에 가리워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마태와 누가의 기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고전적(古典的)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기독론(基督論) 교리(敎理)를 위한 신약의 모든 다른 증거들과 함께 그것들의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는 동정녀를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And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역사적인 예수/동정녀탄생(로마서6:1-11)

 

신화는 인간이 고안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내용이 황당합니다. 동물과 사람과의 사이에서 사람이 만들어졌다거나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신과 사람이 결혼해서 영웅이 되었다거나 하는 등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주전4년경에 유대 땅에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童貞女) 탄생의 역사성으로 성경적인 근거로 이사야7:14절에 예언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에 마태복음1:16절에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1:18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20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1: 22-23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선지자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l:25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누가복음1:27처녀에게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성경은 예수를 임신한 것이 결혼생활과 관계없이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저자들 중 마태와 누가 둘만이 예수의 처녀잉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유일하게 기록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예수님의 처녀잉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라든지, 요한이라든지, 마태의 진술이 그 증거들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이 부인된다면 그리스도교는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공격을 가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사실인데 어쩌겠습니까? 반드시 여인의 후손이어야 인간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신화적인 분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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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1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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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아침마다 산책하는 길입니다. 원래 이길은 칡과 덩쿨식물이

길까지 점령했습니다. 약300m구간입니다.

보기에 좋지않아 올해에 두번에 걸쳐 예초기로 풀을 깎았습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노랑색코스모스를 옮겨 심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것들은 이렇게 꽃이 피었습니다.

덩쿨식물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매일 몇센티미터가 크는듯 합니다.

온통길을 점령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풀을 깎은 후에 코스모스를 심자 이렇게 자라고

꽃을 드문드문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노랑코스모스와 더불어 10월중에 필 코스모스 씨앗을 500g 사서

뿌리고

비가 올때 심었더니 날마다 자라고 있습니다.

모악산 로터리길을 다 하지 못하고 조금 했는데도

예쁘게 꽃을 피워주어서 지나가는 분들이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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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로마서6:1-11)

 

United Nations/UN/國際聯合은 전쟁방지와 평화유지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입니다. UN활동은 크게 평화유지활동, 군비축소활동, 국제협력활동입니다. 설립목적은 전쟁방지, 평화유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국제협력 증진입니다. 현재 가입된 국가만 193개국입니다. 상당한 양의 분담금을 부담해야 함에도 UN에 가입하는 이유는 UN이라는 기구가 주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많은 나라라도 가입하는 것입니다. 연합의 혜택을 받고 누리기 위해서 가입하는 것입니다. 가입되지 않으면 혜택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재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합하여란 헬라어로는 eij"/eis입니다. ‘~안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합하여그리스도 안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혜택이 우리에게 돌아옵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24항을 보면 삼위 중에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오,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또한 동등하신 분으로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또한 인간의 본성에 속한 모든 본질적인 성질들과 일반적인 연약함들을 아울러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고, 그녀의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나셨다. 이 직분을 주 예수께서는 아주 기꺼이 맡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으나 결코 썩지 않으셨다. 사흘 만에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으되 그가 고통 당하셨던 바로 그 몸을 가지고 또한 하늘에 오르셨다. 그는 거기서 그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 간구하시고 세상 끝 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차범근 전 감독을 기념하는 명예도로(名譽道路) 조성을 추진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계가 적극 반대하였습니다.
해당도로는 화성시 기안동 67-1 지점에서 안녕동 6-10 지점까지 서부로 5.2km 왕복 6차선 구간입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와 융건릉을 가로지르는 도로입니다. 이 도로는 지난 4월초 화성시의 고시를 거쳐 422일 화성시 도로명주소위원회에서 차범근 명예도로로 확정공고됐습니다. 위원회는 화성시 출신으로 대한민국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차범근 선수의 공을 기리기 위해이 같이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불교계의 주장은 수백 년 역사를 지닌 문화유산보다 차범근 선수의 가치가 더 크다는 말이냐고 반대이유를 축구와 교회만 안다는 차범근 집사의 이름을 딴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차범근 선수가 불교인이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인데 교회의 집사라서 반대했다는 것 같습니다.

때가 차매”/h\lqen to; plhvrwma tou' crovnou/ȇllthen tô pllêroma toȗ chrônou/갈라디아서4:4 란 하나님께서 준비해 오신 때가 다가왔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상황은 유대인 Diaspora는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헬라인들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으로 성경이 제공하는 신학적 권위와 매력에 눈을 돌렸습니다. 국제상황은 큰 교통중심지를 통해 거의 모든 곳까지 잘 왕래할 수가 있었습니다. 헬라어라는 언어를 통해 로마제국이 효율적이고도 통일된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형태의 여행이나 상업거래가 가능해졌다. 한때 기승을 부리던 헬라철학 사상은 그 위세가 위축되어 회의론으로 바뀌어 당시 고대세계를 개선하려 했던 인간지혜를 추구하는 운동에서는 전혀 희망이 없었습니다. 소위 문명인이라는 사람들이 심히 도덕적 타락에 빠졌습니다(1:21-32). 이방인들조차 자신의 주위에 만연한 부도덕한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로 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지신 모든 것을 조금도 감하시지 않으시고 성삼위중 한분 신격과의 연합을 취하셨습니다. 또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성을 충분히 갖추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에 대해서 마태는 다윗까지 또 아브라함까지 추적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는 아담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3:23-37).

예수님의 이야기는 어떤 종교들같이 황당한 이야기를 교묘하게 꾸며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예수의 생애 중에서 그의 나이 12살 때 일어났던 일에 대해 서술했습니다(2:41-51). 예수님께서서는 역사적 인물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사역을 하셨을 때가 Tiberius Caesar Augustus가 통치하던 기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있던 때입니다. 또 안나스와 가야바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예수의 참된 인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초자연성은 다름 아닌 거짓된 신화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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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로마서6:1-11)

 

요즘의 성도들은 세례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지 못하여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고 요소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뭇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1-7항을 보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로서 세례 받은 당사자를 유형교회에 엄숙하게 가입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그 당사자에게는 은혜언약의 표호와 인호가 된다. 또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고 중생하고 죄를 사함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나타내며 확증한다. 이 성례는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명하신 것이기에 세상 끝 날까지 그의 교회 안에서 계속 집행되어야 한다. 이 성례에 사용되어야 하는 외형적 요소는 물이며 이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되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복음의 사역자인 목사에 의해서 집례 되어야 한다. 세례 받는 사람을 물속에 잠기게 할 필요가 없고 세례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물을 붓거나 뿌려서 베푸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앙과 순종을 실제로 고백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양친이 다 믿

거나 어느 한 편만 믿는 집의 유아들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이 의식을 모독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죄가 된다. 그렇지만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생할 수 없다거나 구원 못 받는다든가 또는 세례 받는 사람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중생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세례의식에 은혜와 구원이 불가분하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의 효력은 그것이 집행되는 그 순간에 꼭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을 옳게 집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하나님 자신의 뜻하신바 계획을 따라서 약속된 은혜를 받도록 되어 있는 사람(어른이든지 유아든지)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제공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로 나타나고 부여된다. 세례 의식은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한 번만 베풀어져야 한다.

사도바울 당시의 세례는 오늘날의 세례와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성인세례(成人洗禮)였습니다. 당시에 유아세례는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의 개인으로 그것도 곧 자기가족을 뒤에 두고 그리스도에게 나왔습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신앙고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 들어올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교(異敎)에서 직접적으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세례는 그의 생애에서 분계선이었습니다. 세례로 자기의 생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뿌리로부터 찢어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기 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세례는 전신 침례였습니다. 사람이 물속으로 내려가 물이 그 위에 덮일 때면 그것은 무덤 속에 파묻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올 때 그것은 무덤에서 나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세례는 상징적으로 죽고 부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 가지 생에 죽고 다른 종류의 생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옛 죄악생활에 죽고 은혜의 새 생활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사람으로 물속으로 내려갔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교인(異敎人)이 유대교에 들어갈 때 세 가지 일을 수반했습니다. 제사와 할례와 세례입니다. 이방인은 세례로 유대교에 들어갔습니다. 세례의식에서 세례 받을 사람은 자기 손톱, 발톱과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옷을 완전히 벗었습니다. 세례수(洗禮水)는 약 40세아 약 500정도의 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몸의 어느 부분이나 물이 닿아야했습니다. 그가 물속에 있을 때 세 명의 세례 집례자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권면과 축복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이 세례의 효과는 완전히 중생(重生)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루 밖에 안 된 갓난아기라고 불려졌습니다. 그의 모든 죄는 다 용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낳기 전에 지은 죄를 하나님은 별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William Barclay는 헬라인들의 세례이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헬라의 종교는 신비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 신비종교들은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방은 어떤 신과의 결합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화는 수난극(受難劇)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난을 당해 죽고 다시 살아난 신들의 이야기에 근거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야기를 연극화(演劇化)했습니다. 누구나 그 연극을 관람하기 전에 기초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그 연극의 내적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기나긴 사전교육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행을 해야 했습니다. 이어서 조심스레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지고 준비되어졌습니다. 드라마는 음악, 조명, 향과 제물 등 모든 방편을 다 동원하여 연출되었습니다. 연극이 연출되는 동안 그 사람은 그 신과 하나가 된 것 같이 느꼈습니다. 그는 신과 일체가 되는 감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 경지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입신식(入信式)을 받았습니다. 이 입신식은 인간이 영생을 위해 재생하는 새 출생이 뒤따르는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신식을 받은 사람은 자기는 자발적인 죽음을 체험했다고 말해야했습니다. 어떤 신화극에서 입신식을 받을 사람을 죽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는 도랑에 머리까지 잠겼습니다. 그가 입신식을 받을 때 그는 어린아이라고 불리고 갓난아이와 같이 우유를 먹였습니다. 어느 다른 신화극에서 입신식을 받을 사람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신이여, 나의 영과 나의 생각과 나의 전생(全生)으로 들어오시오. 당신은 곧 나요 나는 곧 당신입니다.” 철저하게 이교였던 헬라인은 아무라도 바울이 죽었다가 세례 안에서 다시 산다고 하는 중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를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가 그의 아이디어나 그의 말들을 유대교적 또는 이교적 관계에서 빌어 왔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함께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말과 예화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우리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먼저 우리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이 세례입니다. 죽은 우리가 다시 부활할 모습으로, 세상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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