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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信稱義이신칭의의 결과/자유를 누림(로마서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마태복음18:21에서 27을 보면 어떤 임금에게 일만 Talent 빚진 자를 蕩減탕감해주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만 달란트(Talent)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우선 Roma의 屬州속주였던 유대에서 Roma에게 조공세로 바치는 금액이 연 6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약 34kg입니다. 한 돈이 3.75g입니다. 약9067돈입니다. 한 달란트는 Roma의 화폐로 6000데나리온(Denarius)입니다. 한 데나리온이나 한 드라크마(Drachma)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데나리온은 Roma의 화폐, 드라크마는 Hellas의 화폐입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라면 6000일(약17년)의 품삯입니다. 최소한 20년의 한 사람의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인 셈입니다. 한 사람의 6000만 일의 품삯입니다. 한 사람의 16,4384년의 품삯입니다. 바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가치입니다. 따라서 이 돈을 갚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만’murivo"/muirîos는 Homer 이래로 ‘셀 수 없는’, ‘무수한’이라는 뜻이기에 산술적인 수자가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일만 달란트입니다.
2절을 보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해결할 수 없는 일만 달란트를 갚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상상할 수 없는 돈을 갚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갚기 전에는 노예였었는데 갚았기 때문에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억압에서 놓여나는 것이 자유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지불하거나 감옥에 가둡니다. 죄를 지었으니 자유를 속박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기백성의 빚을 갚아주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의 빚을 갚아주시고 성부께 그들을 인도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부하나님께 인도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갚아주셔서 우리가 자유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두신 놀라운 구원입니다. 그래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즐거워하되 대단히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신칭의의 결과/환난중에도 즐거워함(롬5:1-11) (0) | 2020.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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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의 결과/즐거워함 (0) | 2020.01.28 |
이신칭의의 결과/화평을 누림 (0) | 2020.01.13 |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0) | 2020.01.11 |
범죄 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0) | 2019.12.27 |
以信稱義이신칭의의 결과/화평을 누림(로마서5:1-11)
사람이 근심이나 걱정이 있으면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쉼을 가진다해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과 마음이 한 몸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편치 않으면 함께 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절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 죄를 해결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화평은 골고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죄가 골고다에서 해결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화평의 길이 마련된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의와 화평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리스도께서 마련해주신 화평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화평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실 유대에 있어서 평화라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부터 유대는 긴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긴 전쟁에 돌입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에 가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순종을 했습니다.
신명기7:1-11 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것은 4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찌니라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들은 많은 이족으로부터 수많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 괴롭힘은 지루하게 이어졌습니다. 천년을 넘어서 이어졌습니다. 로마서의 배경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소망이자 꿈이었으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화평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화평을 잡은 것 같으면서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창세기3:22-2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소망을 걸었던 가인도 범죄 함으로 에덴동산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창세기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사람들이 마치 죄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하얀 도화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하얀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늘 무엇엔가 쫓겨 삽니다. 시간에 쫓기든, 세월에 쫓기든, 재물에 쫓기든 여러 가지 등에 평생을 쫓겨 삽니다. 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평생을 화평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화평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Pax Romana는 로마의 평화입니다. Pax Romana는 로마제국이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세기와 2세기경의 시기입니다. Pax Romana는 Augustus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Pax Augusta로 불리기도 합니다. 주전27년에서 주후180년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고대 Roma역사상 유례없는 태평성대였습니다. 간헐적으로 군사적인 충돌도 일어났고, 이따금 속주의 반란도 일어나긴 했습니다. 그러나 Pax Romana는 Roma제국의 지배계급들에게는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렇지만, Roma제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더없이 가혹한 때였습니다. Roma의 평화유지를 위한 로마의 폭력과 착취로 인해서 고통 받는 제국주의 체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없었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학생들은 교육 때문에 평화가 없습니다. 성인들은 가정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평화가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정말 조금의 쉴 틈도 없습니다. 이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반복적인 pattern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적용하심으로 인해서 진정한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신칭의의 결과/즐거워함 (0) | 2020.0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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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의 결과/자유를 누림 (0) | 2020.01.16 |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0) | 2020.01.11 |
범죄 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0) | 2019.12.27 |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0) | 2019.12.20 |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마서4:18-25)
로마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온 책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그간에 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에 속아서 살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행위라는 것, 행위로 인한 공덕이라는 것에 많이 속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결코 행위로 인한 구원은 없다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엄청난 속임을 당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태산과 동산의 차이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도토리 키 재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탁월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래프로 그린다면 조금 돋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나라까지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상이 아니고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조상이요, 행위로 인한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을 뒤엎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기자가 어떤 사건에 camera를 들이댑니다. 기사화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기사가 fact가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자의 해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건이 fact가 될 수도 있고, fiction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도가 됩니다. 예를 들면 안중근의사는 우리나라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웅입니다. 그러나 친일파들이나 일본사람들에게는 영웅이 아닙니다. 아시아전체 사람들은 일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정부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시아 전체가 뭉쳐버립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성령주의자들은 성경에서 성령만 찾습니다. 성경 어디를 설교해도 성령은사로 귀결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 유대인의 해석과 바울사도의 해석이 다른 이유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육신적 조상인 행위로 인한 아브라함입니다. 아닌데도 굳이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하나같이 행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입니다. 아닌데도 굳이 맞는다고 설파합니다. 그 설파함에 넘어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이라 함은 사람에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인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어떠한 행위, 어떠한 공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공로라고 해봐야 그것이 어떻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여기실 때에 역사하시는 원리입니다. 공로나 행위와 대조되는 믿음은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원리입니다. 이에 바울사도는 창세기15:6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기시킵니다. 시편32편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진리였던 것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진리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신칭의의 결과/자유를 누림 (0) | 2020.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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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의 결과/화평을 누림 (0) | 2020.01.13 |
범죄 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0) | 2019.12.27 |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0) | 2019.12.20 |
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 (0) | 2019.12.12 |
범죄 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로마서4:18-25)
성경은 다른 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법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하나님나라의 일반적인 체계입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삶에 대한 완전한 규칙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영광된 삶에 대한 확실한 약속 등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만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무죄상태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청교도인 John Flavel은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나은 삶의 방식이 무엇이고, 가장 고상한 경험이 무엇이며, 가장 편안하게 죽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한 설교는 두 세대를 잇는 다리역할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오늘의 시대를 연결시키는 가교역할을 설교가 합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을 설득합니다.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이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다고 지루하고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득함은 수백년 내지 최소한 천년 이상을 잘못된 율법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번 머리에 어떤 것을 새겨버리면 그것을 지우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오래도록 뇌리에 박혀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인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념을 고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類比/유비라는 말은 맞대어 비교하는 뜻입니다. 바울사도는 당시 아브라함과 바울시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천 년 전의 아브라함과 오늘의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만 의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바울시대도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의로 여기심 받은 그대로 똑같이 대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의 예수님과는 더욱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도 과거로 치부되지 않습니다. 遡及適用소급적용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을 뛰어넘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 범죄 함을’paraptwvmata hJmw'n/파랖토마타 헤몬에서 범죄/paravptwma는 ‘진리나 정도에서 벗어남 또는 이탈함’입니다. ‘파랖토마’는 비유적으로 인간을 타락시키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위치를 상실하게 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어코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의도에서 심히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그 범죄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하나님께서 내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에서 건짐을 받지 않았다면,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건짐을 받았습니다. 건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신칭의의 결과/화평을 누림 (0) | 2020.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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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0) | 2020.01.11 |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0) | 2019.12.20 |
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 (0) | 2019.12.12 |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0) | 2019.12.10 |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로마서4:13-17)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는 역사에 근거를 둔 신앙입니다. 교회는 역사적이지 이교들처럼 허무맹랑한 전설과 신화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간은 흐르면서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식은 하고 있지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구는 그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시속1600km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1600km로 자전하면서 시속 11만km로 태양을 공전합니다. 지구는 은하계를 시속 10만km로 가로지르는 태양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는 시속 77만km로 움직이는 은하계 공전 궤도 안에서 움직입니다. 지구는 시속 216만km로 공간을 통과합니다. 24시간마다 우리는 9000만km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336억km의 공간을 여행합니다. 일 년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지만, 분명히 같은 봄은 아닙니다. 우리를 변하게 한 봄을 맞고 각 계절을 맞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때문입니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되 교리적 진술이나 신학적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과 언약관계의 이야기 가운데 계시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장들이 그들의 자녀들의 질문에 대답할 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신6:20) 하거든 다시 한 번 출애굽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위대한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전해진 것입니다. 즉 그것은 애굽과 광야에서, 다윗의 통치하에서, 솔로몬 당시의 문명 속에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그리고 마카비가(家)의 지도 아래 싸울 때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동일한 이야기의 모든 부분은 로마에서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와, 교회의 성장 및 확장과 개혁되어야 하고 사도들의 비전을 다시 가져야 하는 필요성과 더불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신비입니다. 복음의 신비는 간단한 진술로 한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시정(詩情)을 위해서 정통교리의 기하학적 해석을 잘못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잘못된 교리가 마치 정통교리인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행세를 할 때 교회의 건물로, 교세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시입니다. 즉 성령께서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역동적 여정 안에서 그 백성에게 활력을 줄 때, 성령의 맥박과 심장의 고동소리를 지닌 시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사를 망라하는 이 하나의 이야기에는 초점이 있다. Oscar Cullmann은 이것을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시간의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신앙의 불명예는 세속사의 다른 기간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이 수년간을 ‘전체시간’의 중심이며 표준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만물이 시작될 때 말씀은 이미 존재하였음을 이것에 못지않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이 시간을 습격한 실재이며(reality), 불확실한 전망의 그늘진 세계에 쳐들어 온 실제적이고 참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예수만을 강조하는 교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통로로 마리아를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우리 눈은 밝아지고 궁극적인 진리를 얼핏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다른 모든 경험들은 오직 이것과 관련하여 판단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수수께끼를 의미 있게 하는 참조표입니다. 그래서 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절정은-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있어서 그 끝이 아니라 중간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사도신경에서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는 만납니다. 바로 신앙의 세계밖에 있는 본디오 빌라도가 그리스도인의 주장의 신빙성을 위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억측이나 상상의 어떤 전설적 인물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높임을 받아야 하는가? 마리아인가? 예수님인가? 누가 크리스마스의 주인인가? 산타크로스인가? 예수님인가? 누가 교회의 주인인가? 성도들인가? 예수님인가? 우리들은 오늘 이것을 많이 잊고 있습니다.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수님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0) | 2020.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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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0) | 2019.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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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로마서4:13-17)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o}" par j ejlpivda ejp j ejlpivdi ejpivsteusen/호스 파라 엘피다 에피 엘피디 에피스테우센/이사람이(아브라함) 소망할 수 없는 중에 소망을 가지고 믿었다.
믿다/pisteuvw/pisteûo는 고전 헬라어문헌에서 ‘신뢰하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으로서 불가능의 상태는 현재의 어떤 것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의학적으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들,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 홍해가 갈라진다든지(출14:21-23), 태양이 뒤로 돈다든지(수10:12), 하늘에서 약300만 명분의 만나가 40년간 꾸준히 내린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하다든지 할 때 우리들은 불가능에 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동양에서 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까지 생각은 하고 있지만, 사람들로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가능(impossible)에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에는 맞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임, 정확히 말하면 사라의 불임은 불가능입니다. 사라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이라는 것은 어쩌면 막연한 꿈일 수 있습니다.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일도 소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능한 것들을 사람들은 소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전혀 소망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에게 자녀를 가진다는 것은 꿈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신 사람의 은혜입니다. 전혀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것, 하나님의 사람들만 가능합니다. 무엇으로 소망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불가능해서 전혀 소망할 수 없는 것들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이나 되어서 자기의 몸이 이미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사라의 胎(태)도 이미 불임상태로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이 전혀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주실 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소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믿음이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바울사도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을 오늘 우리의 믿음도 똑같이 의로 여기신다고 논증했습니다. 아브라함만 의로 여기신것만이 아니라 의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예수님 사역의 두 정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지심과 부활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은 인간의 죄의값을 대신 치룬 것입니다. 칭의의 전제조건인 순결상태의 획득을 위한 것입니다. 부활은 칭의(외롭다하심)의 선포자로서의 등장을 위한 하나님편의 약속이행입니다. 소망할 수 없는 중에 믿은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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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로마서4:13-17)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언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보여준 믿음과 신뢰, 신임 그리고 복종 때문에 온 것입니다.
창세기12:1-3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3절을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들만의 조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아브라함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11:30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어떠한 자녀도 없었습니다. 자녀가 없다는 것은 대가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대가 끊어지면 후손이 없기 때문에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무가치하고 무능한 인간일 뿐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이스라엘하고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재형성입니다. 민족들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소망대로의 소극적인 부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다 큰 목적들을 향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궁극적인 이유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총에 다만 응답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총과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으로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일 뿐입니다.
언약/ejpaggeliva/epanggellîa/에팡겔리아는 무조건적으로 만들어진 약속입니다. 에팡겔리아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뜻했습니다. 에팡겔리아는 약속뿐만 아니라 약속한 것의 성취 모두를 의미했습니다. 무능하고 무가치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모든 족속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통한 은총밖에 없습니다. 행위나 공로는 선택한 사람들의 구원에 아무런 기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에 구원에 행위가 개입이 된다면 하나님의 은총은 사라져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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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유대인에게만이냐?(로마서4:9-12)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사람은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버린 인간으로서는 어떤 방법이 없었습니다. 창세기3장에서 이미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림으로서 어떻게 할 바도 몰랐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색해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그런 것들이 소위 종교적인 제의들이나 신화들입니다. 이런 것들로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데도 사탄의 계략으로 사람들은 속아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라고 사람들을 끝없이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과 우주의 주관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소위 종교의 창시자들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그런데 대등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교리는 어떻습니까? 표준적인 유대의 교리는 ‘오직 할례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은 깊이 뿌리가 박혀서 초대교회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서 조차도 민족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15:1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할례에 대해서 말할만합니다. 왜냐하면 할례 그 자체에 구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우주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인간의 기원이 600만 년 전이라고 하든지, 우주폭발이 몇 백억 전이라고 할 때에 단위가 100억 또는 100만년입니다. 정확한 기원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럼에도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시14:1).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의 할례와 의로 여김을 받았던 때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의롭다고 선포된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는 99살 때였습니다.
창세기17:24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아브라함과 같은 날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스마엘은 13살이었습니다.
창세기17:25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 삼세이었더라
아브라함과 같은 날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자들과 돈으로 산 모든 남자들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17: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창15:18),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의로 여김을 받은 때는(창15:6), 아직 이스마엘은 잉태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15:2-3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창세기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William Hendriksen에 의하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선포된 순간과 할례를 받은 때 사이는 적어도 14년이라는 기간의 갭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유대인들은 할례를 들고 나옵니다. 그 의도는 자신들만 하나님의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도 구원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어떤 행위에 의해서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자기의 의를 들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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