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새벽기도'에 해당되는 글 216건
- 2019.09.17
- 2019.09.12
- 2019.09.09
- 2019.09.05
- 2019.09.02
- 2019.08.31
- 2019.08.29
- 2019.08.26
모두 다 무익한 인간(로마서3:9-18)
로마서3:12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Renaissance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문화운동입니다. Renaissance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 부활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의 Greco-Roman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입니다.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운동입니다. 5세기 Roma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Renaissance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로 구분했습니다.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중세 1000년간 Roman-Catholic에 의하여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보고 거기에서 벗어난 운동이 Renaissance입니다.
Renaissance는 철저하게 인간본위의 운동(movement)이었습니다. 이때에 나온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의 표현은 인간을 아름답게 묘사하거나 표현했습니다. 억압되었다 터진 모든 분야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다시피 터져 나와 그야말로 인본주의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이것이 아니다싶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다시 떠나고 싶었습니다. 탈(post)출하고 싶었습니다. 소위 근대라는 16세기 이후의 과학기술과 계몽사상에 근거한 인본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양식이 지배하는 이상한 시대(modern)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이른바 postmodernism입니다. 자신 나름대로 현시대가 마음에 맞지 않아 탈(post)하고 싶은 것입니다. 세계 제1차대전전에는 사람들이 온통 utopia사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버린 것이 세계제1차대전이었습니다. 인간본위의 utopia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결코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사상은 그 시대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신학사상도 여러 가지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 초월성을 다시 재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내재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익하다’ ajcreiovw/achreiôo는 ‘무용하게 하다’입니다. 지팡이가 손상되었을 때, 그 지팡이는 더는 쓸모없어져 버립니다. 이럴 때 ‘아크레이오오’라고 말합니다. 비유적으로는 ‘부패(타락)하게 되다.’입니다. 한마디로 이전에는 어땠을지 모르나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것입니다. 부패한 음식은 아무리 값이 비싸고 아까워도 버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고부가가치를 지닌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의 선행에 대해서 청교도 목사인 William Gurnal은 거듭나지 않은 도덕가의 삶은 그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펜에 머리털이 끼어 있으면 아무리 잘 쓰려고 해도 이중으로 흐린 글씨밖에 쓸 수 없는 것처럼, 흠이 있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성실함은 이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는 낫지만, 도래할 세상에서 중생한 사람들이 가지는 성실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이전의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의 논증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모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인간 (0) | 2019.09.28 |
---|---|
영원히 큰 일 난 인간 (0) | 2019.09.18 |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 (0) | 2019.09.12 |
깨닫지 못하는 인간 (0) | 2019.09.09 |
단 하나의 의인도 없다. (0) | 2019.09.05 |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로마서3:9-18)
로마서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시편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기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왜 찾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이 범죄를 했습니다. 따라서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을 받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대하15:12). 여호와를 찾는 자는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22:26). 여호와를 찾는 이유는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기 때문입니다(습2:3). 그러므로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슥8:21).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두 생애를 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생애가 이 생애입니다. 첫 번째 생애는 모두 같이 살고 있습니다. 신자건 불신자건 간에 똑같은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불신자들이 이 생애에서는 더 받은 것이 많은 것 같아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형을 판결 받는데 형이 확정되고 판결을 받으면 두 번째 생애가 이어지는데 이 생애는 영원한 생애입니다. 평안과 아름다움으로 영원을 지내면 영광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되면 그야말로 영원히 후회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두 번째 생애가 사람들에게 반드시 찾아옵니다. 두 번째 생애는 첫 번째의 생애가 지난 다음에 찾아오는 생애입니다. 두 번째 생애는 철저하게 분류되어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자동으로 분류되어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고 싶다고 해서 가고, 가고 싶지 않아서 가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자동으로 분류되어서 천국과 지옥에 가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범죄 한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 그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시대 때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똑 같습니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병원에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가 불편한가 치료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과 마음이 편안합니다. 사람은 그 자체의 상태가 심히 불편한 상황입니다. 영혼이 푹푹 썩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어떤 사람도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수 있습니다.
영원히 큰 일 난 인간 (0) | 2019.09.18 |
---|---|
모두 다 무익한 인간 (0) | 2019.09.17 |
깨닫지 못하는 인간 (0) | 2019.09.09 |
단 하나의 의인도 없다. (0) | 2019.09.05 |
죄 아래 있는 인간들 (0) | 2019.09.02 |
깨닫지 못하는 인간(로마서3:9-18)
로마서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시편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말들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들을 남보다 조금 안다고 해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들갑을 떨어댑니다. 이렇게 해서 깨달았다고 하지만 실상 그 자신의 영혼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는 예가 허다합니다. 특히 깊이 깨달아서 종교의 교주들이나 창시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의 깨달음이(?) 오히려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과 깊이 통달했다고 하는 유대인에게 말하기를 깨닫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시면서 지각이 있는가 하고 살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시지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4장을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즉 사람의 자손들입니다.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창세기5장을 보면 셋의 후손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의 후손들입니다.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6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8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1 그가 구백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 사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그가 구백 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 오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가 팔백 구십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일백 육십 이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그가 구백 육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이들 자손들이 혼합됩니다.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혼합되어버립니다.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합해집니다.
창세기6:1-2 1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경건했던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자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져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경건했던 자들이 너도나도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들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건했던 셋의 후손들이 정욕적으로 해결하려고 경건하지 않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아내를 삼은 것입니다. 문제가 붙은 것입니다.
창세기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신(성령)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의 신적인 영, 즉 육체적, 윤리적, 자연적, 영적인 생명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의 성령을 사람에게서 거두신다는 말씀입니다. ‘육체가 됨이라’는 사람들이 그들의 범죄와 배신으로써 자신들이 육체가 된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능력이 결여되고 있는 육신과 하나님의 영이 논쟁하는 것은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육체에 맡겼습니다. 그리하다보니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점점 그들의 생활은 하나님의 목표하신 것에서 후퇴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점점 벗어나버렸습니다. 더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짐승같이 변해버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잊었습니다. 오히려 잊으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쾌락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육신적인 정욕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한 사람도 깨닫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소위 도통(道通)했다고 하는 사람들,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변화무쌍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과학의 정상에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람의 따뜻함을 찾기가 여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정신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래도 살 수 있는 사랑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두 다 무익한 인간 (0) | 2019.09.17 |
---|---|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 (0) | 2019.09.12 |
단 하나의 의인도 없다. (0) | 2019.09.05 |
죄 아래 있는 인간들 (0) | 2019.09.02 |
선행이라는 맹점 (0) | 2019.08.31 |
단 하나의 의인도 없다(로마서3:9-18)
로마서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시편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다윗은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리석은(분별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부패했고(파멸했고), 소행이 몹시 가증하다고 했습니다. 이사야32:6을 보면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어리석은 사람은 분별없는 말을 합니다. 그 마음에 항상 불의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짓마다 간사합니다. 패역해서 여호와를 거슬립니다. 그의 하는 짓들은 주린 자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혼자서 물을 마신 후 물이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은 패역한 사람이며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인간사에서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존재하시지 않는다고 하니까 사람일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세상에서 돋보일수록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인(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의지하지 않거나 근본 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사람들이나 과거에 존재했었거나 미래에 존재할 인간들도 의인은 하나도 없을 뿐입니다. 그만큼 뼈속 깊이 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조금은 타락하지 않은 면이 있다고 하는 어떤 종교인들의 말을 들으면 역겹기가 그지없습니다.
기독교신학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이중적인 진리를 균형 있게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초월자로서 관계를 맺으십니다. 초월하여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분리되어 스스로 자족하여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전5:2). 하나님께서 내재하여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 존재하여 계심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주 안에 활동적으로 존재하시며, 세계와 인간사 양자의 운영과정에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억측들이 수없이 역사에 반복되었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 어떤 자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존재한 이후에 단 하나의 의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연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 (0) | 2019.09.12 |
---|---|
깨닫지 못하는 인간 (0) | 2019.09.09 |
죄 아래 있는 인간들 (0) | 2019.09.02 |
선행이라는 맹점 (0) | 2019.08.31 |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 (0) | 2019.08.29 |
죄 아래 있는 인간들(로마서3:9-18)
사람들은 나쁜 상황에서는 제외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은가? 즉 유대인들이나 도덕주의자들보다 나은가?라고 질문합니다. 결코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고발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다에서 ‘죄 아래’(uJf j aJmartivan)/‘휘포 하마르티안’입니다. Barclay에 의하면 ‘휘포’는 ‘…의 권한 하에’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8:9에서 백부장이 “내 아래(uJp j ejmauto;n)도 군사가 있으니”라고 했는데, 내 지휘 하에 군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죄악의 명령 하에, 죄악의 권위 하에, 죄악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고 간에 죄악의 지배 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도덕군자라고 하는 사람들, 훌륭한 철학가라고 해도, 사람들로부터 성인이라고 추대 받는 사람들도, 종교교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죄악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를 인식(認識)하고 있든지, 인식하지 못하든지 간에 모두 죄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자고 간에 죄 아래에 있다는 법입니다.
선언했다는 말은 뉘앙스가 어떤 것을 선포했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선언했다’ proh/tiasavmeqa/proêtiasâmetha/‘프로에티아사메싸’는 proaitiavomai/proaitiâomai/‘프로아티아오마이’의 과거 복수동사입니다. 즉 ‘우리가 이미 고발했다’는 법정용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저주아래에 있다는 것은 일시적인 심판이 아니라 심판을 받은 후에 영원히 형벌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간 (0) | 2019.09.09 |
---|---|
단 하나의 의인도 없다. (0) | 2019.09.05 |
선행이라는 맹점 (0) | 2019.08.31 |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 (0) | 2019.08.29 |
반비례 신앙 (0) | 2019.08.26 |
선행(善行)이라는 맹점(로마서3:1-8)
인간의 선이라는 것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면을 감추는 면이 있고, 밝은 면을 나타내는 선이 있습니다.
Albert Schweitzer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이고, 사상가이며, 신학자이고, 음악가입니다. 그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한 의사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외경(Ehrfurcht vor dem Leben)을 윤리의 기초로 하였습니다. 또한 원자폭탄 실험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였습니다.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받았습니다.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였습니다. 철학가로서는 칸트를 연구하였습니다. 독자의 윤리관인 '생명의 경외'를 주장하였습니다. 음악가로서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가였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 개량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추앙을 받았었고, 현재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음악가요, 도덕가요, 사상가이며, 의사였고 신학자였던 Schweitzer. 그런 그가 내세운 예수님에 대한 것이나 종말론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Schweitzer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묵시적 요소가 그의 가르침의 껍질이 아니라 핵심이라고 주장한 바이스(Johannes Weiss/1866-1914)의 견해에 찬성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하나님 나라의 비밀』(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1906)과『역사적 예수 탐구』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영역본 1910)에서 Schweitzer는 예수가 19세기의 사람이 아니라 1세기의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또 유대주의적 묵시의 장르가 비록 19세기의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의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였다고 주장했습니다. Schweitzer에 의하면 ‘망상적 광신자’였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앞으로 오실 인자(coming Son of Man)로 생각하고서 “허황된 묵시적 꿈에 사로잡혀 자기의 삶을 헛되게 내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생전에 올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말론적 동기를 일관되고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메시지는 근본적이고 그리고 절대적으로 종말론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신 목적은, 마지막 위기(즉 심판)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마태복음 10장에 진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마10:23) 재림(Parousia)이나 ‘메시야적” 수난이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일어나지 않자, 예수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깨닫고서(“재림”의 첫 번째 지연), 자신을 대속제물로 삼아 메시야적 저주들을 홀로 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시대를 강요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상에서 자기의 오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가운데, 버림받고 완전히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으로(a forsaken and utterly disillusioned man)죽었다는 것입니다(마27:46). 즉 하나님께서 행할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아니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스스로 무덤을 판 사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역사적 예수 탐구』가운데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진술에 보면 Schweitzer는 예수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오실(coming) 인자로 알고서 모든 평범한 역사를 끝장내는 마지막 혁명을 항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나가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바퀴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그 위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러자 바퀴가 움직였고, 그 바퀴는 그를 박살냈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상황들을 가져오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을 파괴시켰다. 그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위대했던 그 사람. 너무나도 강하여 스스로를 인류의 영적 통치자로 생각하고서 역사를 자기 목적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의 몸은 그 위에 아직도 매달려 있다 그것이 그의 승리요 그의 통치였습니다.
실제로 Schweitzer의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문장 가운데 있는 “강한’이라는 단어보다는 ‘미친”이나 “망상에 속은”이 더 적절한 단어이다. 더욱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가르침의 종말론적 내용은 예수에게는 중심적일지라도 오늘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예수의 종교적 가치가 1세기 팔레스틴의 유대인으로서 그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무관한 까닭에 예수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비종말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윤리적 강조점들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 짧은 기간만을 위하여 의도된 “한시적 윤리”였을 뿐입니다. 홈스트렴(F. Holmstrom)은 Schweitzer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러므로 Schweitzer의 결과적(consequent) 종말론은 결과적 자유주의 기독론이다. 그는 형식상으로는 종말론을 옹호하고 있어 보이지만 사실상은 종말론을 배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윤리는 리출의 윤리주의보다도 참된 기독교로부터 훨씬 더 멀어져 버린 도덕주의로 남아 있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역사이래로 선행이 자칫 하나님의 구원과 대치될 뻔했던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요새는 아마도 더 그럴 것입니다. 그만큼 선행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행은 어디까지나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선행’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다 인정한다 해도 하나님보시기에 좋은 선행이 아니라면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조금의 자극제는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선행자체가 구원에는 절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단 하나의 의인도 없다. (0) | 2019.09.05 |
---|---|
죄 아래 있는 인간들 (0) | 2019.09.02 |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 (0) | 2019.08.29 |
반비례 신앙 (0) | 2019.08.26 |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 (0) | 2019.08.24 |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로마서3:1-8)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그림물감에서 노랑색을 하얀 백지에 칠하면 그리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얀색인지, 노랑색인지, 멀리서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깥에 검정색을 칠하면 노랑색이 확연히 돋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검정색이 노랑색을 두드러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3:4절은 시편51:4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바울사도는 사람은 다 거짓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참되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51:4을 인용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시편51편은 표제에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시편51:3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y['v;p]/pĕshâʽay/‘페샤아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살인죄(우리야를 죽게 한 죄)를 졌습니다. 그런데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죄를 삭감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반역죄를 졌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란 복합적으로 나타나서 어떤 결과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죄란 서로 얽혀서 이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저렇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죄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항상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억지스러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말하기를 “당신(바울)의 말이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 전능하신 분께서는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진노를 내리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요?” 이에 대한 바울사도의 말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고 분노에 찬 말을 함으로써 사악한 생각을 타파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니 네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살 자격이 있으시다.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불의하실 수가 있느냐?
바울을 시기하고 반대하는 자들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임한다면, 죄를 많이 지을수록 은혜가 넘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바울이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너 마음에 원하는 대로 계속 죄를 지어라. 그러면 은혜가 더 크게 작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건전한 교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왜곡되게 말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들 (0) | 2019.09.02 |
---|---|
선행이라는 맹점 (0) | 2019.08.31 |
반비례 신앙 (0) | 2019.08.26 |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 (0) | 2019.08.24 |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 (0) | 2019.08.21 |
반비례 신앙(로마서3:1-8)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대백성들에게 다른 백성들보다 엄청난 특권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시편147:20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이사야5:5-6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아모스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마태복음22:1-8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저희가 돌아 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누가복음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누가복음14:16,17,24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바울사도에게서 유대인은 참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까지 유대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지위에 있었음을 믿었습니다. 그 사실은 유대인들 자신도 믿고 여겼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나음이(perisso;n/perissôn/뛰어남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인가? 이전에 바울사도는 할례만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과 전혀 받은 바 없는 이방인들 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을 부인하고 무효화시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반증을 하려면 할례가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론을 펴야 했습니다. 할례에 근거한 유대인의 자랑이 그릇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두고두고 써먹었습니다. 오래도록 우려먹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까지 맡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명령뿐 아니라 예언과 언약을 포함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어떤 나라에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유대인에게 맡겨진 것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귀하게 보존하며, 그것에 대하여 모르는 다른 민족에게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특권은 의무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변증은 이스라엘이 이 책임들을 졌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받은 특권만큼 충실했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품위를 확보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입니다(Calvin). 할례의 유익도 표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가치는 지킬 때에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유대인들 가운데 계속 머무르게 하신만큼 유대인들은 말씀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분배하고자 하실 때에, 그들은 그 말씀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려야 했습니다. 이것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위탁한 것은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너희는 특별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특별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은 특별한 임무였지, 임무의 특별면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약5%-10%의 교회만이 자립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약1%의 교회는 재벌교회입니다. 약90%의 교회는 어려운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재벌의 교회들이 사고를 치고 있습니다. 대형교단들이 계속 사고를 치고 있습니다. 이미 세속화되어 중세교회를 보는 듯합니다. 대사회(對社會)에 대한 책임은 없어지고, 특권의식만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책망을 하게 되면 고치려 하지는 않고 거세고 거칠게 반격을 합니다. 고칠 의도가 전 혀 없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인데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회의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선행이라는 맹점 (0) | 2019.08.31 |
---|---|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의 변명 (0) | 2019.08.29 |
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 (0) | 2019.08.24 |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 (0) | 2019.08.21 |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누린 특권 (0) | 2019.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