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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범한 다윗의 예(로마서4:1-8)

 

마태복음1:1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예수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소위 위인이라고 할 경우에 그의 전기들을 보면 엄청나게 과장되어 있습니다. 위인전을 쓰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서 과장이 더 될 수도 있고, 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 많은 인간을 거의 신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유대인들이 다윗과 아브라함 생각하기를 자신들의 신앙에 맞추어 생각합니다. 자신들을 높이려고 아브라함과 다윗을 모델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도 인간인지라 범죄와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윗이 전장에 나가 있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큰 죄였습니다. 간음죄와 더불어 살인죄까지 저질렀습니다. 그 죄를 성경은 절대로 작지 않다고 말합니다.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다윗은 후방에서 범죄 한 것입니다. 다윗이 그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다가(사무엘하11:1-27), 나단 선지자가 지적한 후에야 인정합니다(사무엘하12:1-12). 그때 다윗이 말합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죄를 범하였노라ytiaf;j;/hātā’tî 는 내가 하나님의 봉신왕(封臣王)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하고 그릇행하여 마땅히 죽어야 할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크게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 ‘하타나 신약성경에서 ’ ‘하마르티아는 영원히 죽어야 할 죄입니다. 둘 다 과녁에서 빗나갔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갔다는 말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고등비평학자들은 정경 안에서 정경을 찾고자 애씁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성경 밖의 관점과 기준으로 접근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짜 말씀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주로 고등비평학자들이 말하기를 창세기3장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병원학적(aetiological) 전설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합니다. 사람들은 왜 옷을 입는가? 뱀은 왜 배로 다니는가? 왜 사람들은 뱀을 싫어하는가? 등을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고대 셈계신화들에서 찾고자 합니다. 즉 성경의 類比(유비analogy)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Payne). 성경에서 죄를 찾지 않으면 그것은 죄일 수 없습니다. 죄는 어디로 간곳없이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인간의 의만 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신이 되고 영웅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원래 를 의미하는 aJmartiva/hamartîa는 고전헬라어문헌에서 심각한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표적(과녁)을 벗어나는 것, 잘못, 실수하는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다aJmartavnw/hamartâno는 창을 표적을 향하여 던졌는데 적중하지 못하고 빗나가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단어 군들은 헬라에서 큰 실수나 적극적인 범죄보다는 하찮은 것들의 실수나 실패를 말할 때 썼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심각한 것을 묘사할 때 하마르티아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는 거의 인격화되었습니다. 죄가 대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그 수중에 가진 사악하고 인격적인 능력으로 묘사했습니다. 죄가 관념적으로 특별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편적입니다.

 

로마서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로마서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갈라디아서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요한일서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죄가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에 감염되고, 어떤 사람은 피해가는 병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죄는 단지 돌발적이나 발작적인 발생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상태입니다.

 

aJmartiva/hamartîa사람을 그 수중에 쥐고 있는 힘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 아래’/uJpo; aJmartivan/huipô hamartîan 있습니다. Barclay는 예로서 아이는 그 아버지 아래있고, 군대는 그 지휘관 밑에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 아래, 죄의 힘에, 죄의 지배 가운데있다는 것입니다(3:22, 3:9).

 

죄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ejbasivleusen/ebasîlleusen)이라고 했습니다(5:21). ‘바실류스을 의미하는 헬라어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왕 노릇 한다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을 사로잡습니다(aijcmalwtivzontav/aichmallotîzontâ)로마서7:23. 이 말은 전장에서 포로를 사로잡는데 사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죄는 인간 속에 거합니다(7:17,20). 죄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죄는 단순히 인간에게 지배력을 가지는 외적인 힘이 아니고 적이 나라를 점령하는 것같이 인간을 점령하여 그 존재의 본질이나 중심, 핵심에 침입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인간이라고 하면 죄와는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즉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한다면 절대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고백하기를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시편32:1,2)

 

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사도가 類比유비로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구원을 행위나 윤리, 자기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려 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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삯과 은혜(로마서4:1-8)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이냐?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을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차이, 그리스도인과 이교도의 차이, 목사들 상호간의 차이, 신학자들 간의 차이 등 많습니다. 4절을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일을 하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행위, 공력에 의한 칭의를 좋아하고 지지합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을 보는 관점부터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리새파의 교리로 철저하게 훈련이 된 사람들입니다. 바르게 훈련이 되었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이들은 철저하게 행위와 율법만을 강조합니다. 율법도 성경대로의 율법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위한 율법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공력에 의한 칭의의 대표적 인물로 아브라함을 내세웁니다. 유대교의 랍비들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아브라함은 그의 당대에 유일한 의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룩한 민족의 조상으로 선택되었던 주된 이유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있다고 그들은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공력에 의해 쉐키나(Shekinah/빛나는 구름/출24:15,16)를 불러들여 장막에 머무를 수 있게 하였던 일곱 사람들 중의 첫 번째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교리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3살에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할례와 율법을 豫期的으로 수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의가 완전케 되었다고 합니다. 외경 므낫세의 기도는 더 과장된 의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오 주님, 의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당신을 향하여 죄를 범하지 않았던 의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지 아니하시고 죄인인 저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셨나이다” 또한 주전2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경 유빌리(Jubilees)서는 족장들의 약점을 극소화합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에 대한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 완전하였고 평생 동안에 의안에서 즐거워하였다?(23:10)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하는데 저들은 이토록 행위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만큼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만들어놓고는 자신들을 거기에 대입시켰습니다. 의인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의인의 육신적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행위로 인해서 간다고 생각하면 과연 누가 가며, 어떤 사람이 가야 할까요? 아마도 한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겨주시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은혜로 습득하는데 하나님의 칭의없이(은혜없이) 본인들이 자격을 취득하겠다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바울사도의 논증은 4절에 일하는 자들은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한 보수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십니다. 경건치 않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까? 불의한 우리를 의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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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로마서4: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4:1-3)

 

흔히 지성이 있다. 종교성이 있다. 종교인이다.’라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 행위입니다. 그들 조상들의 가르침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또는 과거의 철인들이나 명사들의 가르침을 좇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거기에 매료되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나 소위 말해서 凡人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곧 유명해집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을 그렇게도 끔찍이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평하고 존경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이지, 어떤 것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5:6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창세기15장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중요한 진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장에서는 믿음과 계약이라는 것을 병행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무자한 상태에서 말씀에 의해 부름을 받습니다.

 

창세기11: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창세기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라함의 여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들을 약속합니다. 그의 나이 75이나 되었지만 자녀 하나 없는 상태에서입니다. 그런데 그 불임은 15장에 와도 계속됩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약속만 있었지, 여전했습니다. 결국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데, 희망을 품고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삶의 정황들이 약속과는 많이 어긋납니다. 많이 뒤틀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童話처럼 바로 이루어지거나 나타나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은 많이 실망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성장합니다.

 

창세기15:1을 보면 아브라함이 두려워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왜 두려워했습니까? 14장을 보면 롯을 구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그들이 아브라함을 반격할지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날마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두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창세기15:2-3 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대답입니다.

 

창세기15:4-5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약속을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그의 의로 여기십니다.

 

창세기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다arey:/yārē’/야레는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성경에서는 두려움의 감정, 존경이나 경외, 의로운 행동이나 경건이라는 영역의 단어입니다. 두려움에 관한 예들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의 불을 보고 두려워했을 때입니다.(5:5). 또한 유대인들이 블레셋인들의 동원소식을 듣고서 미스바에서 두려워했을 때 야레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복합적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연합국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 이 나이 먹도록 자식하나가 없어서 종에게 모든 것들을 물려줄 것을 생각하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는 말씀입니다. 방패란 말할 것도 없이 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상급/rk;c;/sākār/사카르, 임금, 보수라는 뜻입니다. 상급이란 당연히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일한 보수로 마땅히 받아야 할 삯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물입니다. 왕이 위험을 무릅쓰고서 자신의 일을 수행한 신실한 종에게 주는 특별한 표창이 상급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무자한 상태에서 맞서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상급은 희망입니다. 여러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믿음은 성취의 원인이 아닙니다. 만일에 믿음이 성취의 원인이라고 하면 상급이란 마땅한 보수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하루에 열 시간씩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더라이럴 경우에는 상급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에 속합니다. 이런 목사들, 이런 성도들이 더러 있는데, 이들은 자기의 의를 쌓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자기의 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대두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떤 업적이나 도덕적인 결단으로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즉 믿음을 인간의 공적이나 행위에 의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고, 내가 이렇게 했으니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자신의 어떤 행위를 내놓고 대드는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고백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인간 피조물에게 새로운 미래를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Walter Brueggemann은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모든 主義(-ism)를 종결시킨다고 했습니다. 道德主義(moralism), 獨斷主義(dogmatism), 敬虔主義(pietism), 實存主義(existentialism), 實證主義(positivism), Marx主義(Marxism), 資本主義(capitalism), 人本主義(humanism) 등은 항상 현재를 통제하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는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현재를 통제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고 행하는 것은 약속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면 아브라함은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서 받아들여 의롭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성도들이나 하나님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삯이 아니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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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임을 내세우는 유대인들(로마서4:1-8)

 

2:1은 ‘그러므로’, 3:1은 ‘그런즉’, 4:1도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를 씁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깊은 골은 여간해서 메꿔지지 않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굴삭기로 산도 옮겨서 골짜기를 메울 수 있지만, 예전에는 깊은 골짜기를 메운다는 것은 상상에만 그쳤습니다. 그만큼 깊은 골은 메꾸기가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사용함에 있어서 극히 배타적이었습니다. 죄 지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성전은 여섯 구획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각 구획마다 한 단계씩 높은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결의 정도를 강조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에게 허용한 유일한 장소로서, 성전 경내 바깥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했습니다. 성전 벽은 90cm의 담으로서, 이방인들이 이를 넘어설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여인의 뜰은 이방인의 뜰보다 90cm 높은 곳으로서, 유대 여인들에게 출입이 허용되었으나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뜰은 3m가 더 높았으며, 유대 남자들이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의 뜰은 이스라엘의 뜰보다 90cm 위에 있었으며,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제사장의 뜰2.5m 위에 있었으며, 성소와 지성소라는 두 개의 구획으로 분리되었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방인들을 배제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선민으로 간주하고 다른 민족들과 구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뜰을 계급별로 나누고 출입을 금지하여 유대교 체제의 엄격한 신분 차별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공로를 심히 찬양하고 있습니다. 누가 조금 정의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일들(善行)을 하면 그 사람을 상당히 높이 평가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血緣과 地緣 그리고 學緣에 의해서 돌아가는 나라입니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데 副應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해도 깎아내리고 끌어내리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같은 출생을 해도 고난과 어려움을 안고 출발해야 하는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공력에 의한 구원을 옹호하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요새로서 아브라함을 내놓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지 바깥으로 굽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배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는 자신들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민과 특권으로 아브라함을 내세웠습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하면서 다른 말들을 내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인간의 공력에 의한 구원을 옹호하는 자들이 강력하게 내세우는 것이 자신들의 어떠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전면에 세웠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래? 과연 그럴까? 사도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꼭 유대인들만의 조상일까? William Hendriksen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뿐 아니라 이스마엘과 에돔 사람의 조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세기25:1-4 1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2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3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또한 아브라함은 로마서4장에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요지는 아브라함이 어떤 의미에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조상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꽉 막힌 사람에게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데 그 기간이 120년이었습니다. 현시대의 수명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기간입니다. 노아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120년이나 보았을 것입니다. 어디에 사용하려고 만드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반드시 노아가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로, 홍수심판 때 피할 배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노아가 무척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홍수라는 것을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아가 만드는 모습을 보고는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곤 어떤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20년의 오랜 기간에 배를 만들었지만, 홍수를 피한 사람은 열 명이 채 안되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왜 그들이 홍수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까? 꽉 막혔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절대로 홍수심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과거의 그들이나 大同小異합니다. 구원에 관한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현대 비 기독교인들이나 모두 같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수정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큰일입니다. 바로 수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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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브라함에 대한 견해(로마서4:1-25)

 

인류사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부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서 한 변법을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방법으로 모든 인간을 대하셨습니다. 즉 한 나라나 한 인물을 노아를 제외하고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불순종했을 때, 인류는 홍수로 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부름으로 이 세계적인 접근방식은 바뀌었습니다.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라 특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인간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개별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하심의 의도는 새로운 인간을 길러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여 나라를 선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역사 가운데서 그의 피조 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들을 구체화하시고, 계시하시며, 유효 있게 하시고, 법적으로 기반 닦으시고, 이행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도래는 하나님의 성품의 통합적인 구원사역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임하심은 인류의 구속사에 필연적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성경에서 또는 유대교사상에 있어서도 아주 큰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언약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역할을 아브라함이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믿음과 순종을 생생하게 인격화시킨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대한 유대인들과 우리와의 견해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견해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서 듣고 배운 것으로서,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육신의 조상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연코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논증은 모든 구원받는 자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신앙에 의해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란 율법과 이 세상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며 살아간 행위로 소위 말해서 착한 일을 말합니다. 이 착한 일을 쌓아두는 것, 즉 공적행위(功績行爲)를 말합니다.

오늘의 우리나라도 조상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소위 세간비를 세워서 우리조상 몇 대조 누구가 조선시대, 또는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높은 벼슬을 했다하여 족보를 만들어서 큰 산 높은 곳에 비석을 세웁니다. 사람들은 그 조상이 자신들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앞에 제사합니다. 즉 유명했던 조상들의 행적이, 오늘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이 유대교적사상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따논 당상(堂上)’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떼어 놓은 당상이 변하거나 다른 데로 갈 리 없다는 데서,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가만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후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동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입니다. 할례와 율법이 있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적인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할례와 율법 밖에 있기 때문에 언약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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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세우는 믿음(로마서3:24-31)

 

27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다. 어떤 율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이다. 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인정한다. 29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정으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30 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으니,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바른성경»

 

유대인들은 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입지를 손익평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회계장부에서 매일 대차계정을 따집니다. 즉 하나님과 자신과의 수지균형평가를 계산합니다. 만일 차액 균형이 대변(貸邊/선행)으로 기울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일 차변(借邊/악행)으로 기울면 그 사람은 정죄를 당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균형의 헤아림에 따라 판단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계정의 대변으로 균형이 기울게 하는 선한 행위들은 토라연구, 자선, 자비의 행위 등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믿음으로 이방인들이나 불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가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나 불경건한 자들이 받아야 할 대우라면 정죄를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재판관이 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사면한다면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어도 차변에서 대변으로 나가기 위한 행위 즉 공적의 행위로 나가기 때문에 율법을 구원의 행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종교들이 구원을 위한 공덕을 쌓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그들에게 율법은 심히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율법은 유대인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준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은 어떤 하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나 바울사도가 Text에서 율법을 말할 때, 오경에서 말하는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1세기경의 율법은 원 율법을 쪼개고 쪼갰습니다. 더하고 붙이고 빼어서 율법조문은 아무런 역량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병자를 더 낫지 않게 유지는 하되 낫도록 고쳐서는 안 될 정도였습니다. 안식일에 노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손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손을 씻으면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전에 불을 피웠다가 안식일에 이르러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불을 끄거나 줄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심히 왜곡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히브리어는 점과 획으로 글자가 형성됩니다. 그 중에서 일점ijw'ta/iȏta/이오타입니다. iȏta는 히브리어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문자인 요드(')입니다. ‘일획keraiva/keraîa/케라이아입니다. 이것은 작은 뿔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b/베이트와 k/를 구분 짓는 것은 베이트오른쪽 밑의 작은 돌출부입니다. 이것이 베이트카프를 구분 짓습니다. 즉 작은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율법은 모두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1세기나 2세기의 심히 변조된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원 율법입니다. 소위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시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유전,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이 변조한 율법을 지키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무결함을 재 확증하신 것입니다. 성취되는 말씀은 구약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 하더라도 결코 성취되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예표(豫表)들은 원형(原型)으로 대치될 것입니다. 모든 예언들이 모두 실현될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육신과 같은 부분들과, 부활, 승천, 오순절의 사건 등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이후의 일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의 논지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입니다(3:20). 그리고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3:21). 그 결과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가치를 박탈하고, 율법을 폐하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교리와 하나님의 율법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의식하고, 이 의식이 성령을 통하여 거룩하여질 때 바로 이 의식은 도움과 구원을 간구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And

인간이 자랑할 수 없는 구원(로마서3:24-31)

 

27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다. 어떤 율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이다. 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인정한다. 29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정으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30 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으니,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바른성경»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서 중세의 신학자들이 전개한 종교개혁기에 첨예화된 균형이 깨져버립니다. 지구가 네모져서 어느 지역 이상 갔을 때, 한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것,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것 등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이 시대를 계몽주의시대라고 말합니다. 계몽주의 시대 인간들은 Renaissance라는 기초위에 모든 것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는 중세적인 사고와는 다른 사상을 가졌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해를 전개시키고 발전시켰습니다. 인간의 위치를 격상시켰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한층 높게 평가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역사의 중심무대에 두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따지는 식으로 하나님을 평가했습니다. 철학은 철학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괜찮을 수 있는가를 발전시켰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DescartesGalileo와 같은 사상가들이 개척한 새로운 방법론을 지식의 모든 분야에 적용했습니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신학 등도 이 과학적 표준규정에 맞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철학까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노력이 드는 모든 분야가 자연과학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포함한 몇 가지 원리들이 있는데 자율, 자연, 조화, 진보 등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계몽주의의 제1원리는 이성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대단히 강조했습니다. 이성의 원리란 우주전체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 질서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켰습니다. 이성의 원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원리인 자연입니다. 사실상 자연(nature)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이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고 사전에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자연은 아닙니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의 원리란 물질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고 그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우주를 내재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질서정연한 체계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과 자연법이라는 말들은 지적추구에서 표어로 되었습니다.

이성자연은 계몽주의 사고의 세 번째 원리인 자율’(autonomy)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자율적인 인간이 진리와 행동의 결정권자가 되어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가르침의 직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니까라는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 신앙이나 행위를 부추기는 수긍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개인이 권위에 대한 그런 종류의 모든 외적 주장들을 시험해 보려했습니다.

계몽주의의 넷째 원리인 조화는 이성의 시대가 그 원리로 간주한 우주의 합리성과 질서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사상가들은 우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질서가 특징적으로 내재되어 있어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각 개인이나 물질의 이기적이고도 독립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주전체가 가장 적절한 모양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진보에 대한 낙관적 신념의 시대였습니다. Descartes 등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적 작업에 힘입은 이성의 시대 사상가들은 우주가 질서정연할 뿐 아니라 인식 가능한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적합한 방법론을 채택한다면 진정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신학자, 과학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들 나름대로 진리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믿는 사상 체계들을 구축하였습니다.

이성의 시대는 문화가 교회와 기독교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던 때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 말씀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는 아니었습니다. 소위 말해서 지성인들은 교회로부터 세상에 눈을 돌리고 세상에 의하여 연구하려 했습니다.

이런 영향을 교회에서 전연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데, 교회에서 받아들였습니다. 계시종교는 자연종교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곧 계시종교보다 자연종교를 앞세웠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존로크에 의해서 마련된 이신론자들은 자연종교가 합리적이므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은 자연종교로 순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서 19세기의 신학은 이신론을 제껴 버리고 초월성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Immanuel Kant는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Hegel은 사변 이성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Schleiermacher는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Albrecht Ritschl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윤리적 문화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Immanuel Kant는 종교의 적합한 영역으로서 삶의 실천적 영역을 제시했습니다. 즉 도덕적 영역을 제시하였습니다. 실천 이성 안에 그 적절한 기초를 두었습니다. Kant는 거기에서부터 신학을 형성하려 했습니다. 그것으로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맞추려 했습니다.

Hegel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지적인 차원에 주목했습니다. Hegel은 궁극적인 진리를 인간역사의 진행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성의 능력과 연관을 시켰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때 신은 자기인식에 이른다고 주장했습니다.

Schleiermacher는 그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찾기 위하여 감정에 주목했습니다. Romanticism(계몽주의 철학의 냉랭한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에 매료된 Schleiermacher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직관 등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자기실현과 자기표현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Albrecht Ritschl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 곧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자유주의 대표자들인 Adolf HarnackWalter Rauschenbusch 등은 기독교의 신조들을 현대적 지식의 빛 안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신학은 계몽주의 이후로 문화 속에서 일어난 어떤 발전들을 신학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신학이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학 속에 융화(戎華)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학은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사상의 주장들을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개개기독교 사상가가 전통적 신조들을 비판하고 재구성할 자유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실천적, 윤리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기초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초월성을 간과하고 신적 내재성 쪽으로만 기울어갔습니다. 원래 신학이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성경의 이중적인 진리를 균형 있게 표현해야 하는데 말입니다(Stanley J. Grenz Roger E. Olson).

요새 우리나라의 어떤 교회들은 자랑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요정도 되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숫자를 자랑하고, 프로그램을 자랑하며, 건물을 자랑하려 하며, 목회자의 자격을 자랑하며, 성도들의 격이 다른 교회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랑하려 합니다. 우리교회의 성장은 이러이러해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성장했다고 하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공로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기념비를 세우고, 동상을 세우려 하며, 기념관을 지어 인간의 공로를 최대한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Barclay에 의하면 어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경리장부와 같이 대차대조표를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의 율례를 작은 것까지 엄격하게 지키고 그것을 수행하고 나면 수입에다 기록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갖은 show를 해서 사람을 모아놓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저 목사는 그릇이 커서(?) 성공한 것처럼 포장되어 버립니다. 사실 우리들의 구원과 우리들의 목회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특히 복음 이외에 윤리적, 율법적인 것들은 고도의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로부터 빚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And

영원한 노예해방(로마서3:24-3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Greco-Roman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성행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전쟁포로들은 거의 노예였습니다. 한번 노예가 되면 몸에 노예라는 표식을 불에 달구어진 쇠로 표식하기 때문에 대대로 노예에서 벗어 날 길이 없었습니다. 노예의 노동은 강제적이었습니다. 전 생산물은 노예주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노예에게는 약간의 생활필수품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소위 귀족들은 많은 노예를 소유했습니다. 노예로 인해서 생산성이 향상되고 노예로 인해서 그들의 살림은 불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예는 일을 하되 자신의 소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것이란 없었습니다. 안락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좋은 것은 모두 주인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노예들을 양산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생활은 처참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고 주인의 의도에서 벗어나면 곧 죽음이었습니다.

 

ajpoluvtrwsi"/apollûitrosis/‘아폴뤼트로시스속량하기, 속죄하기, 자유케 하기라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서 자유케 했다는 말로 아폴뤼트로시스를 사용했습니다. 죄의 권세가 사람들에게 악질 상전처럼 꼭 붙어 있어서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죄의 권세 하에 있다고 했습니다. 죄의 수중에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죄의 지배하에 있어서 도저히 어떤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해방시키셨다는 것입니다. LXX인역 성경에서 아폴뤼트로시스는 다니엘4:34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이상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Greco-Roman시대에나 여러 시대에도 양심이 있고 지성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속했던 노예들을 더러 해방시켰습니다. 노예문서들을 찢어서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유를 얻은 노예는 그야말로 행복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중적인 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절대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죄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래서 어떤 죄인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을 의롭게 인정하십니다. 흉악한 죄인을 아들과 딸로서 여겨주신다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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