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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의문에 있지 않음(로마서2:25-29)
‘의문’/gravmma/grâmma이란 문자(letter)나 규정(ordinance)입니다. 곧 글자로 기록된 율법입니다.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는 Aeschylus이래 그라포/gravfw/grâpho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라페/grafhv/graphê와 같은 의미로서 ‘새기거나 조각된 것’입니다. 후에 ‘기록된 것’이란 넓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명각’, ‘그림’, 기록하기, 기록하는 행위와 결과, 기록하는 행위자체, 기록할 수 있는 능력, 알파벳의 개개의 ‘문자’, 책의 글자들, 상징. 편지, 문서, 공문서, 법령과 같이 기록된 것, 문법, 초보적 지식, 학습, 문헌. ‘거룩한 문서’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의 문서들, 마술에 관한 서적, 그리고 연금술에 관한 문헌과, 신성한 것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황제의 편지와 교령(敎令)에도 적용되었습니다.‘성경’이라는 개념으로도 헬라시대에 사용되었습니다.
LXX역본에서 grâmma는 히브리어 rp,se/sêper/세페르/‘문서, 기록, 책’의 번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용법에서 ‘의문’은 갈라디아서6:11에서 알파벳 글자였습니다( …글자…), 사도행전28:21에서 grâmma는 기록된 정보입니다(편지). 문자에 의한 의사전달이나 소통입니다. 누가복음16:6에서 grâmma는 ‘채무증서’였습니다(증서). 그런가하면 요한복음7:15에서 grâmma는 ‘학식’입니다(글). 사도행전26:24에서 베스도는 바울의 학문(grâmma)을 깔보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학식이나 학문이란 성경에 관한 지식입니다. 요한복음5:47에서 grâmma는 모세의 ‘글’ 곧 율법을 의미합니다(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디모데후서3:15에서 grâmma는 거룩한 ‘기록’을 의미합니다(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바울사도는 종종 grâmma와 pneu'ma/pneȗma를 대조하였습니다. 로마서2:27,29에서 grâmma는 논증할 수 있도록 기록된 것으로서의 율법입니다. 증명할 수 있는 할례의 표시와 달리, 율법은 율법의 준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율법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범죄자들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grâmma는 단순한 글자 이상입니다. 즉, grâmma규정, 규범이라는 의미입니다. 참된 유대인은 grâmma를 이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할례, 즉 영적할례가 필요했습니다(롬2:28-29).
서로 대립되는 savrx/sârx/사르크스(육)와 kardiva/kardîa/카르디아(마음), ejn tw'/ fanerw'//en tȏ phnerȏ/엔 토 프하네로(표면적인/보이는 것 안에)와 ejn tw'/ kruptw'//en tȏ kruiptȏ/엔 토 크륍토(이면적인/감추인 것 안에)는 ejn gravmmati'//en grâmmatȋ/엔 그람마티(율법의 글자에 의한) 할례와 ejn pneuvmati/ejn pneu'mati/엔 프뉴마티(인격적 삶의 결정적인 개입에 의한) 할례 간의 차이에 대응합니다. 사람 안에서 대립되는 것이 있는데, 육과 마음이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며, 기록된 율법과 인격적인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늘 다투고 있는 것들입니다.
grâmma는 pneȗma가 하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대조는 성경과 성령 간에 있지 않습니다. 순전히 기록된 규정(prescription)인 율법과 성령 간에 있습니다. 로마서7:6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단순한 grâmma로서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섬기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없으면 율법은 아주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grâmma와 pneȗma가 절대적으로 대조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기록된 것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그것만으로 새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3:6-7은 양자의 관계에 개입했습니다. 여기에서 grâmma는 옛 언약과 연관되었습니다. pneȗma는 새 언약과 연관됩니다. 예레미야31:33에 근거하여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단순히 기록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마음에 새기신 율법은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목적으로 율법으로서의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명을 얻게 하실 목적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3:7의 gravmmasin/grâmmasin (복수형)은 돌에 새긴 글자들(의문)입니다. 율법의 돌판 들을 가리킵니다. 이 글자들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단지 글자를 영에, 혹은 불충분한 글을 참된 의미에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옛 계시 문구를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가져다주는 새 계시에 대립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베일을 제거하실 때에 비로소 옛 율법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날 것입니다(고후3:14,16). 그리스도께서 완고히 거부당하실 때 하나님의 목적은 감추어집니다.
바울사도가 grâmma와 pneȗma를 구별하는 것은 성경자체를 경시하려함이 아니었습니다. grâmma는 성문율(법)으로서의 율법을 가리키는 반면에, grafhv/graphê/그라페는 바울이 성경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운 말씀(롬10:8)은 grâmma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입증된 성경입니다. 비록 우리가 단순한 율법의 글자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성경의 권위가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규정되므로 우리는 여전히 성경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새 언약은 성령에 의해 생명을 줍니다. 이는 기록되지 않은 율법이 기록된 율법을 대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기록된 율법의 내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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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로마서2:25-29)
야고보서와 로마서를 보면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성경 안에서 심히 다투고 있는 듯합니다. 바울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2:14-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너희에게 믿음이 있느냐? 그래, 그럼 행함이 있느냐?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 믿음을 구하겠느냐고까지 질문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여 봐? 너희중 형제자매가 헐벗고 굶주려서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를 만났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하는 말이 ‘평안하게 가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면서 그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다. 그러나 너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 믿는다고? 그래? 잘 하는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귀신도 믿고 그 앞에서 떠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허탄한 사람이로구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에 어떻게 했느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지 않은가? 기생라합도 이스라엘을 도와서 구함을 받지 않았느냐? 따라서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믿음을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직역을 하면 모순입니다. 야고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까? 실제로 믿지도 않으면서 위선적으로 믿는다고 한 사람들의 믿음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 예가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에 제대로 된 믿음을 소유했다면 구원 얻는 믿음일 것입니다. 결국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믿음일 것입니다.
복음은 지리적으로 볼 때 지중해변 구석진 작은 해변의 나라 아주 작은 유대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들어오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심한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시로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서 말을 했건만 듣지는 않고 아브라함의 표면적인 후손이라는 것만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말씀대로는 살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만 우려먹고 또 우려먹으려 했습니다. 주후70년 로마의 Titus(Titus Flavius Vespasianus)에 의해 그들이 금쪽 같이 여겼던 헤롯성전을 파괴했어도 그 뜻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지금도 유대인, 유대인이라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아니면서도. 유대인이라고 표면적으로만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갈라디아서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갈라디아서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이면적인 유대인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이면적인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어떤 총회들에서는 회의를 할 때 한국의 장자교단, 장자교단 하는데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특별해지려고 하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특별한 교회가 되고자 하면 표면적인 유대인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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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누린 특권(로마서2:25-29)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지구상) 어디에서든지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은 이 세계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돈을 거머쥐고서 좌지우지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 때 이방인들은 유대인을 가장 진절머리 나는 종족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을 가장 비천한 노예의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로마정부로부터 특전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예루살렘으로 성전세를 보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 성전세의 예루살렘의 송금이 주전60년경에 아시아지방에서는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화폐의 수출이 금지되었었습니다. 로마제국 내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보내려 했던 20톤의 밀수금을 압수당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 자신의 법정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들의 법에 따라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한 민족이 마치 별다른 민족같이 특정을 누리는 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로마정부는 유대인의 안식일을 존중해주었습니다. 법률상으로 유대인은 안식일에 재판정에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백성에게 특별의연금이나 선물 등이 나누어질 때 그것이 안식일일 경우에 유대인은 그 다음날 자기의 몫을 찾아갈 수 있게 규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만 징집면제를 했습니다. 전면면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군사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병역의무의 특별면제가 다른 민족들에게 엄청난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했습니다(William Barclay, 1981, 80-81).
이러한 특권을 누리고도 그 이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특히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썩을 대로 썩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이 사람들은 안심했습니다. 자신은 안심했습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자심의 육체에 할례의 표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족보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어떤 판정승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조상은 영의정을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편승해서 나도 보통의 집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닌데, 맞다는 것입니다. 특권의식만 잔뜩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논증은 유대인이라는 것은 할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행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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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와 무할례와의 사이(로마서2:25-29)
할례는 여러 민족이 행하였습니다. 현재까지도 일부국가에서는 잘못된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할례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언약의 표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에 소속한다는 것의 표였습니다. 이 할례의식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길 때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였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들이 Hellenism 시대에 Hellas문화와 구별되게 살려고 할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성인들도 했었습니다(창17:10-14). 그러다가 소년들이 했었습니다. 나중에는 갓난 사내아이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행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다. 그러나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무할례로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할례가 율법을 범하게 되면 삭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그 무할례자가 오히려 할례를 받은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지킨 무할례자가 할례 받고 율법을 범하는 너희들을 판단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논증은 겉으로의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보이는)인 육신의 할례는 할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약속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면적(은밀한) 유대인이 진짜 약속받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받은 할례가 진실된 할례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신령(성령의 능력)에 있고, 의문(문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했다는 것이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자칫하면 윤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율법을 행하였느니, 하지 않았느니 논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론은 그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문제입니다. 거기에 삶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바알사상이 상당히 많이 교회에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물질이 풍부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어떤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업경영의 방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모으기, 재벌들이나 하고 있는 세습화 등이 세상의 기업인지, 교회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모든 성도들을 자신의 교회로 몰려들었으면 하는 것 같습니다. 세속화가 되어도 너무나 세속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교회에서 세상을 대할 때 상당한 훼방을 받습니다. 된다하더라도 지연을 받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유대에서 할례란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권과 책임이 공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면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면적 유대인과 표면적 유대인 (0) | 2019.0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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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로마서2:17-24)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교회당 건물에는 어김없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방송설교를 합니다. 방송에 출연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서 대외에 많이 알려졌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좋은 것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일, 부적절한 일로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전체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거기에서만 그치면 괜찮은데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면 전도의 길도 막히고, 교회가 크게 훼방을 받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믿는/ 스스로 자랑하는’ 것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유대인들이 평소 행하는 행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자신이 가르침을 받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은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을 유대인들을 만들려고 혈안이었습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정부의 요직에 공석이 생기면 정신 나간 사람들은 전화를 기다립니다. 정부의 부름을 받자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괜찮았습니다. 부르는 즉시 그 직(職)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힘듭니다. 청문회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사람이 정부의 고위직에 앉을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막상 청문회에 들어가면 부동산투기, 군 징집거부 등 부적절한 일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자신을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총리에 몇 사람이 나갔다가 그냥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도적질에 대해서 악명이 높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음을 했습니다. 우상을 가증하게 여기는 그들은 오히려 신사의 물건을 도적질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Fulvia(로마의 Claudius 장군의 아내)가 로마에 있으면서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달라고 어떤 유대인들에게 자줏빛 옷과 금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그들의 개인적인 용도에 써 버렸습니다. 그것을 티베리우스 황제가 Claudius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민족들과 달리 특권을 주었는데도, 툭하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유대인들이 심히 못마땅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로부터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교의 사원을 수시로 약탈했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증오한다는 열성 유대인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감행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으로부터 모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행위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그렇게 하지 못해도 너희들(그리스도인들)은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이 이 세상에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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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믿는 사람들(로마서2:17-24)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예전에 흔히 직장에서 보던 일중에서 승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승진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파티까지 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틀림없이 승진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전날저녁 파티에서 승진된 직함을 불러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뒤집어진 것입니다. 엉뚱한 사람이 승진이 된 것입니다. 본인이나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무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확신은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 17절에서 20절까지는 유대인에 대한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특권의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집착을 했습니다. 율법에 심히 기대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자신들만 소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특권을 누렸습니다.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하나님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특권에는 의무가 수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 중 대부분은 자신들의 우월한 특권을 어려운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도와주는 일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랑만 했습니다. 그들의 자랑에는 선민사상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세상의 많은 나라 중 유대인이라는 그 사실을 자랑하고 즐겼습니다. 그런 권리를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출애굽기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신명기10: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이사야43:20-21 20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유대인들 중 신실한 사람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은혜주심을 감사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율법이 있음을 심히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 특권을 남용했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특권만을 심히 나열하고는 그 특권대로는 살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을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소경에게는 인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직한 인도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적이지 못하고, 도덕적이지 못하며, 영적으로 눈먼 상태였습니다.
이사야42:18-19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따라서 영적으로 소경된 인도자에게 인도를 받는 영적인 소경의 처지는 무지하게 어리석고 딱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즉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엘리트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각 종교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자신들은 가장 확실한 소경의 인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제대로 된 인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할 때에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제대로 된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몫이었습니다. 빛이 유대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 중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항상 소수였습니다. 마태복음23:15을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유대교인을 하나 얻기 위해서 온천지를 두루 다니다가 막상 하나를 얻으면 자기들보다 더 지독한 바리새인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네가(유대인)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를 가르치기에 충분할만한 많은 지혜와 지식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스스로 믿으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금기사항, 규제의 짐이 전혀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율법은 전 세계적으로 따져 봐도 보고였습니다. 십계명, 모세오경 등 구약성경 전체를 보면 그만한 교육적인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끝머리에 pevpoiqav" te seauto;n/pêpoithâs te seautôn/‘너 자신에게 납득시켰다’(스스로 믿으니)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바울사도가 그들을 조롱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이 말하는 그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세상에 없는 엘리트로 여기는 우(愚)를 범했습니다. 특권은 가지고 실천하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거절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특권은 가지고 있으면서 그 특권을 가진 만큼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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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주 예수그리스도(로마서2:4-16)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인해서 엄청나게 속았으면서도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문이라는 것, 학력이라는 것, 지리적인 것 등이 사람들과 실제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데 이런 것들이 아직도 득세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왕들이 시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의 후손이라고는 하나 너무나 시시하게 보였습니다. 망해가는 왕가의 목수로서 근근이 살아가는 집안에 예수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한 번 무시된 예수님은 어떤 기적을 행하여도, 아주 기이한 가르침을 주어도 여간해서 믿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을 공격까지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석처럼 생각하는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는데, 기이하게 해석하였습니다. 자신들의 해석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건건 자신들과 부딪혔습니다. 그리고 별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문제는 사흘 있다가 일어났습니다. 하도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시체를 도적하고 악성 루머를 퍼뜨릴까봐 로마군을 세웠는데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백성들에게 믿지 말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이들이 모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한분이신 줄만 알았지, 삼위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모른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자신들이 생각하고 섬기는 성부하나님만 생각했습니다. 구약시대 때 수시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그리스도를 몰랐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종말론을 통합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구약종말론의 중심에 위치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약의 성경기자들을 위해 종말론적 paradigm을 세워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한번의 종말론적 심판이 아니라 두 번의 임하심입니다. 그분께서 처음 오셨을 때는 사탄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은혜의 나라를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재림하실 때는 권능의 주로서 임하십니다. 처음 오셨을 때부터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비로소 역사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구속역사에 있어서 다음(미래)에 일어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때는 산자나 죽은 자 모두 그분 앞에 서서 최후의 심판을 받습니다. 영광중의 참된 교회는 하나님 우편에 있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들은 백보좌 심판대에서 변호인 없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때에는 세상의 모든 기구들은 무력하며,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갈보리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이 땅에 재림을 하실 때 적대적인 모든 원수들을 함께 멸하십니다. 그때에는 모든 종교인들이 백보좌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권세 있는 자도 서야 하고, 무력한 자들도 서야 합니다. 하늘의 권세 잡은 자도, 이 땅에서 종교권을 쥐고 쥐락펴락하는 자들도, 힘좀 있다고 나불대는 사람도 그 앞에 어김없이 서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조건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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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 없는 심판(로마서2:4-16)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성경해석은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다가는 잘못된 길로 인도하거나 그리로 같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로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를 띄어쓰기를 잘못하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된다. 글자 수는 틀림없는데 띄어쓰기를 잘못함으로 엉뚱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에 들어가는데, 가방에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15절을 언뜻 보면 이방인들도 양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nuance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복음이 완전히 흐트러져버립니다. 굳이 양심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들어오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아도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삶을 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바울사도가 왜 이런 구절을 썼습니까?
독일성서공회해설 성경은 율법을 소유하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모세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역시 선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도 그것을 행할 수 있으며, 그들의 양심에 의거하여 스스로를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둘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야말로 인간의 삶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밝혀 줄 것이다.고 했습니다.
Thompson 성경은 구체적조항인 율법은 없어도 본성의 양심이 율법의 기능과 목적을 대행할 것이다. 사람들의 양심이 스스로에게 증거하듯이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각성시킨다고 했습니다.
How주석에서 최갑종은 율법의 소유와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특권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이방인들이 설사 할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일 그들이 율법을 행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주장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Calvin은 우리가 취한 행위의 바른 경로를 옹호해주는 어떤 논증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우리의 악한 행실들로 인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유죄선고 하는 논증이라고 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이 공정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순종의 법칙이 하나님의 심판의 법칙이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진행될 것이다. 이방인들은 자연의 빛이 있고, 유대인들은 율법의 빛이 있다는 것입니다.
William Hendriksen은 사도바울은 어떤 사람이 율법을 모르고 죄를 범하든, 또는 율법을 알고 죄를 범하든(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거스르는 자는 범죄한 자로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형벌이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방인에게 과연 공정한 것일까? 이방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희미한 개념조차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왜 그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4,15절에서 보는 바대로 이러한 반론은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방인이 본래 돌판에 기록한 율법을(출24:12) 알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마음에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들을 기록해 두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옳고 그름에 대한 지각을 주셨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William Barclay는 문장의 의미로 볼 때 16절은 13절 다음에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14,15절은 괄호 안에 들어 있다. 바울은 책상에 앉아서 단어 한 마디 한 마디 그리고 문장 하나하나를 생각하며 써 내려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더디오(롬16:22)에게 불러 주면서 방을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였고, 더디오는 받아쓰느라고 애를 썼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긴 괄호가 왜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6절로 직접 연결하고 14-5절은 부가적으로 설명하면 그 내용의 뜻을 바로 이해하기가 더 쉽다는 것입니다. 1
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바울사도가 이방인들에게로 눈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릇 생각하는 특권과 편애의 주장을 다루었는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특권이려면 그것은 율법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알았을 유대인을 벌할 것이고, 우리 이방인들은 율법을 알 기회도 없었으니까 선악을 분별할 줄도 몰랐기 때문에 심판을 확실히 면하게 될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답하기 위해서 바울은 두 가지 대 원칙을 내세웠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은 그에게 알 기회가 주어진 것에 의해서 심판된다. 만일 그가 율법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율법을 안 자로서 심판될 것이고, 만일 그가 율법을 몰랐다면 그는 율법을 모르는 자로서 심판될 것이다. 하나님은 공정하시다. 여기에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과 기독교 메시지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고 질문하는 사람에 대한 대답이 있다. 기독교적인 대답은 사람은 그가 알 수 있었던 최고수준에 대한 성실성에 의해 심판된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그가 알고 있었던 최고표준에 진실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더 이상 요구할 수도 없고 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더 나아가 글로 써진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들 마음 속에 불문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선악에 대한 본능적 지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스토아파 철학자들은 우주에는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도 범하려는 법칙들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과 생활을 지배하는 법칙, 건강의 법칙, 도덕률 등이다. 바울에 의하면 사람의 본성에는 우리가 꼭 해야 할 것에 대한 선천적이고 천부적인 그리고 본능적 지식이 심겨져 있다. 바울은 세계가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고 보았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이 직접 주어지고 씌어져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은 이 씌어진 율법은 없으나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심어주신 선악에 대한 본능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심판에 대해 변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특권을 가졌다고 하는 유대인이나 특권이 없는 이방인이나 예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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