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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히 서 가는 교회들(사도행전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스데반을 죽인 산헤드린은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주동이 된 이 소요는 유대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에게 큰 장애였습니다. 이전에는 감옥에 가두기만 했지만, 이들은 아예 사도들과 성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만큼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이들은 그 魔性(마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유대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울까지 가세해서 유대와 시리아의 전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아예 없애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회심으로 인해서 그들의 꿈이 좌절되었습니다. 교회가 오히려 역전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었습니다.
9:31을 헬라어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ejkklhsiva)는 단수형으로 나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갈릴리, 사마리아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유기적인교회라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며 수가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수가 많아지며, 평안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경외한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베푸시는 위로로 교회의 부흥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들은 주를 경외했습니다(행2: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5:5,11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초대교회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과 성령의 적극적인 지원이었습니다. 밖으로는 복음선포를 성도들이 파죽지세로 나갈 수 있도록 장애물들을 제거하셨습니다. 안으로는 성도들의 내적인 삶을 위로 하신 것입니다.
Calvin은 성령의 거룩한 회심과 위로가 성도들의 생활을 번창하게 하기 마련인데, 이것을 빼앗길 경우에 행복을 상실하고, 無(무)로 전락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평화를 남용해서 쾌락과 태만에 빠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정돈해서 신앙심에 더욱 정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 교회들이 많습니다. 동양에도 있고, 서양에도 있습니다. 오지에도 있고, 번화가에도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반드시 있습니다. 이 교회는 교회들(복수)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단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한 형제(ajdelfov"/)adelphôs/아델포스)입니다. 크다고 자랑할 것이 없으며, 작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사람의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교회에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야기시킨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마술쟁이 시몬, 그리고 알지 못하고 덤벼든 유대인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작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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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을 신임하지 않는 예루살렘교회(사도행전9:26-30)
바울사도의 개종은 예루살렘교회에 파다하게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메섹의 주변에만 아는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그가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악하게 핍박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으나, 사울을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아무도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서 사울의 옛 동료들은 변절자로 각인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사울이 거짓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참 저돌적으로 전진하는 교회에 찬물을 끼얹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사울의 입지는 좁아졌습니다. 이때 사울을 위해서 예루살렘교회에 사울을 위해서 변호자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다메섹의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보았는지,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 다메섹에서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한 것을 세세하게 변호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명망이 높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울을 보증했기 때문에 모두들 안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상황을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1:18-24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 거짓말이 아니로라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뭇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누가는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교제를 나누었다고 말하는데 바울사도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를 때까지는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얼굴로 알지 뭇하고” 소식으로만 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F. F. 브루스는 28절과 29절은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의 활동을 묘사한 것이고, 그 대신 “유대”(갈1:22)를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의 다른 지방들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해석했습니다(F.F.브루스, 1986, 251).
사울의 여정은 이제 성령에 잡혔습니다. 다메섹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와서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박해의 한 면이 헬라파의 유대인들과의 논쟁이었습니다. 헬라파유대인들과의 논쟁은 스데반이 했었습니다(행6:8-7:59). 박해자였던 사울이 가표를 던진 스데반의 일을 이제는 사울이 했었습니다. 헬라파유대인들은 성난 사자들이었습니다. 맹렬하게 사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보기에 사울은 진리를 배반한 자였습니다. 충성스럽게 기독교운동을 억누르던 추종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사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행22:17-18).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형제들이 그를 가이사랴로 보내 다소로 가게 하였습니다. 사울의 사명은 이방이었습니다. 이방의 여정이 사울에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을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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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알 수 없는 여러 날(사도행전9:23-25)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에 사도바울에 대하여 누가는 ‘여러 날이 지나매…’라고 했습니다. 회심 후에 여러 날이 지나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교는 즉시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24시간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성문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이 사도바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성 밖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누가는 ‘여러 날이 지나서’ 바울사도가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며칠이 아닙니다. 바울자신이 그 알려지지 않은 날들을 갈라디아서에서 밝혔습니다.
갈라디아서1:17-18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
갈라디아서에서도 자신이 왜 아라비아로 갔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3년의 시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사도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자기 앞에 맡겨진 큰일을 숙고하고, 하나님께 그에게 전하도록 말씀하신 메시지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할 뿐입니다(Herbert Lockyer, 1982, 377). 그러나 아라비아에 3년간 체류했다고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3년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한 기간이 3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11:32과 3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바울사도를 잡으려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도를 잡으려고 성을 지킬 때, 광주리를 타고서 성을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아레다 4세는 주전9년에서 주후 38년까지 고대 아라비아의 나바테아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그의 영향권은 다메섹의 근교까지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지역에서 전한 전도로 인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독일성서공회해설성경).
누가의 기록과 사도바울의 기록이 따로따로인 것 같지만, 매칭이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성경은 사도바울의 3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기간에는 사도바울이 주님과의 교제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와중에 아레다 왕이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박해를 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기간을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뿐만 아니라 천국에 올라갔었던 일도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취사선택해서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중요한 내용,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비밀은 비밀에 붙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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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사도행전9:19-22)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신이 났었을 것입니다. 보기 싫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체포해서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정통유대인으로 각광을 받고, 촉망을 받는 인물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그렇게 살아왔고, 다메섹에 그러한 이유로 왔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유대들은 아직 사울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성령과 아나니아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점점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날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각 회당을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사울의 이 말은 유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말이요, 인정하기 싫은 말입니다. 따라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22절을 보면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이 말하는 것에 대해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데, 이 사람이 사울이 맞아? 다메섹에 온 이유가 뭐야, 저들을 잡아가려고 오지 않았나?’ 주님께 잡힌 사울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울은 자신을 부른 주님의 이름을 힘있게 전파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다메섹에서는 사울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정작 도착해서 하는 말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메시아) 전파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달리 교회는 이로써 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主(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크고 작음이 없이 모두 교회입니다. 사실 사람들보기에 크고 작은 것이지, 교회는 대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교회자랑이 아닙니다. 교회표어의 자랑이 아닙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축복, 복이 교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보여지는 물질의 복이 전부였다면, 열 두 제자들은 최고로 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부자가 없었고, 모두 순교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의 제자들을 복된 자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계속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사울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우리들이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오늘 우리들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든지 안하든지, 어디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끝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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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사도직(사도행전9:10-18)
바울사도의 사도직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서신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을 사도라고 말한 서신들은
로마서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린도전서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후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갈라디아서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디모데전서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모데후서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도서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바울사도가 자신을 사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서신들은 이렇습니다.
빌립보서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데살로니가후서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빌레몬서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왜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등은 사도라고 했고,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 등은 사도직에 대해서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교회,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에베소교회, 골로새교회, 디모데, 디도’에게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증을 하려 했을 것입니다. 곧 사도로 인정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물론 디모데나 디도에게는 그들을 교회의 책임자로 세우면서 사도가 세웠음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빌레몬’에게는 굳이 사도직에 대해서 변증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을 부여받은 근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영원토록 살아계신 주님을 실제로 보았습니다(고전9:1,15:8).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했던 그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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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사도행전9:10-18)
다메섹은Damaskov"(다마스코스)은 시리아의 아주 오래된(창14:15)도시입니다. 당시만 해도 상당히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현재도 시리아의 수도로서 약600만명이되는 큰 도시입니다. 유대인들과 시리아는 역사적으로 많은 마찰이 있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서 시리아의 다메섹까지 성도들이 피하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있던 제자였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집에서 다소사람 사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가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기도중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보게 될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사울에 대해서 들은 정보를 말했습니다. 즉 성도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리아에 온 것도 주의 성도를 체포하러 온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지금 네가 알고 있는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신 나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서 많은 해를 당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유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안수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네가 다메섹으로 오던 길에서 만났던 주께서 나를 보내셨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시어 너로 다시 보게 하셨다. 성령으로 너를 충만하게 하신다고 하면서 사울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즉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극적입니다. 가말리엘로부터 철저한 유대의 교육을 받아 누구도 그를 주의 제자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그에게 주님께서는 스데반의 순교를 목도하게 하시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조직적으로 하려는 그를 불러서 엎드리게 하시고 다메섹의 유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을 회심하게 했습니다. 사울은 이제 비로소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1절을 보면 ‘주의 제자’(tou;" maqhta;" tou' kurivou/투스 마쎄타스 투 퀴리우), ‘그 도를 좇는 사람들’(tina" th'" oJdou' o[nta"/티나스 테스 호두 온타스/2절), ‘주의 성도(들)’(toi'" aJgivoi" sou/토이스 하기오이스 수/13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tou;" ejpikaloumevnou" to; o[nomav sou/투스 에피칼루메누스 토 오노마 수/14절) 대열에 사울도 서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신실한 주의 사람인 다메섹사람입니다(행22:12). 사울을 바울되게 한 사람 중에 아나니아는 사울의 회심이야기에서 잠깐 나왔다가 사라집니다. 사울을 첫형제로서 환영해준 첫 기독교인입니다. 주의 사명을 사울에게 충실히 전해 준 사람으로서 결코 작지 않은 사명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큰 교회들의 목회자들과 작은 교회목회자들을 과연 같이 취급할까요?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0) | 2015.0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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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바울)의 소명(사도행전9:1-9)
사을(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가표를 던진 사울은 이제 그 여세를 몰아 시리아 지방으로 피한 성도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시리아의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공문은 최근 예루살렘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킨 예수의 제자들은 발견하는 즉시 남녀를 불문하고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습니다(1-2). 그런데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하늘에서 빛이 갑자기 사울을 둘러서 비추었습니다. 순간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사울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말씀하시는 정체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 일로 인해서 눈은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같이 가던 일행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을 볼 수 없었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사울은 이 일을 직접 당했습니다.
사울의 소명과 회심은 극적이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8),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8:1), “사울이 주위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9:1).사울자신은 당시 가장 옳다고 생각한 유대교에 대하여 충성코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 생각이었습니다. 주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본인의 계획은 유대교였지만, 주님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본인은 유대교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성경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다메섹으로 피한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나의 제자들을 왜 핍박하느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큰 곤경에 처했습니다. 일곱 집사를 세웠는데, 순교당했습니다. 산헤드린은 신이 나서 무차별공격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중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증거 하는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런 상황에 다메섹도상에서 사울이 ‘주 앞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이후에 있을 세계 선교에 가장 중요한 획을 그은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이 ‘선포자 사울’로 변한 그 길에는 주님께서 계셨습니다. 누구보다 예루살렘을 주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기구가 가장 큰 도구가 되는 계기였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회심은 이방을 위해서 큰 빛이었습니다. 다메섹의 주님의 제자들을 체포하려는 그 열심이 바뀌어 이방에서 마귀를 결박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1세기에 사도바울은 유명한 사도요, 유명한 선교사였습니다. 사도바울을 부르심으로서 민족저그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복음전파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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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오피아 재무장관 전도(사도행전8:26-40)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破竹之勢(파죽지세)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나무를 쪼갤 때의 맹렬한 기세라는 뜻으로, 세력이 강대해 감히 대적할 상대가 없음을 비유한 말입니다. 복음전파가 파죽지세와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 사마리아로 전해지고 있는 때에 빌립이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향하는 길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만난 내시는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세당한 내시였습니다. 여왕을 가까이서 모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에디오피아의 왕은 태양의 아들이라 하여 신성시했습니다. 왕궁의 세속적인 일은 왕 대신에 정규적으로 간다게라 칭하는 왕조의 황태후가 수행하였습니다. 이 시종은 재무장관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명령을 따라 중요한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직접 예물을 드리러 나아온 ‘순례자’였습니다. 그는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병거에 앉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28절).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빌립이 다가가서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립에게 병거에 오르라고 청하였습니다. 내시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은 이사야 53:7-8이었습니다.
저가 사지(死地)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성경을 읽고 있던 내시는 제일 궁금하게 여겼던 구절을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그’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은 즉시 내시가 궁금하게 여긴 ‘그’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및 빌라도에 의해 고난을 당해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고, 오순절 날에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으며,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내시는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올 때 빌립은 또 성령에 이끌려 바로 아소도에 나타났습니다. 빌립의 전도는 동화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전도하지 않으십니다. 천사를 통해서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빌립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집사와 사도들처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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