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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신앙에 대한 변증/모세이야기(사도행전7:18-22)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들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준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할머니께서 잘 사실 때 친동생에게 밭도 주고, 논도 주었습니다. 힘을 피면 후에 반드시 돌려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그것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고스란히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를 올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밭도 주고 논도 주신 분이 어렵게 되고, 받은 사람은 부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할머니가 논과 밭을 되돌려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두 분이 모두 세상을 뜨셨습니다. 현재까지 땅은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어떤 한 사람의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현존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들에게 배신한 예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8절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올랐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애굽의 왕으로서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애굽의 전국에 기근이 들었을 때, 요셉은 역대총리로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한해두해도 아니고 7년이라는 긴 세월의 흉년을 이겨내어 애굽을 살게 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러한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애굽에 ‘새 왕이 올랐다’는 말은 애굽에 왕권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말하는데, 쿠데타로 왕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왕권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새 왕은 요셉이 활동하던 시기의 왕조(Hyksos)가 붕괴되고새로운 18왕조가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왕은 18왕조의 첫 왕 아모세(Ahmose)의 손자인 투트모세 1세로 모두 보고 있습니다(Unger).

그러나 스데반은 살기등등한 박해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 석 달을 숨기다가 나일 강에 버렸는데, 그 모세를 바로의 딸이 길러서 모세가 애굽의 학술을 모두 익혔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애굽이 이스라엘 말살정책을 쓴다하더라도 애굽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단이 진멸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사단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교회를 끊치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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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통한 구원(사도행전7:9-17)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압축해서 말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이 부분이 37장에서 47장에 걸쳐 나옵니다. 이 부분에서 강조되는 점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스데반집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섭리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섭리하셨습니까? 요셉은 야곱의 아들입니다. 야곱의 네 아내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 라헬의 아들입니다. 그런 만큼 야곱은 아들들 중에서 요셉을 심히 편애했습니다(창37:3).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요셉은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했습니다(창37:5). 그 꿈이야기는 형들에게 못마땅한 꿈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요셉을 형들이 없애려고 했습니다(창37:11). 마침 절호의 기회를 형들은 포착했습니다. 요셉의 형들과 가축을 살피고 오라는 야곱의 말을 듣고, 세겜을 지나 도단에 이르렀을 때,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이스마엘의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는 거짓보고를 합니다. 이후에는 그 일을 잊어버리려 애를 씁니다. 야곱은 요셉이 이미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물론 여러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한 사건으로 인해서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지하 감옥에 갇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옆에 계십니다. 따라서 요셉은 꿈으로 인해서 결국 애굽의 2인자가 됩니다. 전국을 통틀어 요셉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요셉은 당시 중동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애굽 사람을 살리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야곱의 집을 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의 꿈→야곱의 편애→형들의 시기→도단의 상황→미디안의 상고에 팔림→애굽의 보디발의 노예로 감→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으로 감옥행→관리들의 꿈해석→바로의 꿈 해석→애굽의 총리로 발탁됨 등입니다.

시편145:9,13,15-17을 보면 ‘9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고 했습니다. 선대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고,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십니다. 사실 이러한 섭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이든 신약시대이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시의 목적을 최종적인 순간까지 실행해 가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하나님 자신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은혜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섭리하심(간섭하심)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어려워도 견딜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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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족장들(사도행전7:1-60)


이스라엘에서 족장이라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욥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창세기12장에서 24장에 걸쳐서 말하고, 이삭은 25장에서 27장에 걸쳐서 말하며, 야곱은 25장에서부터 38장까지, 요셉은 37장, 39장에서 50장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족장시대에 욥은 별도로 욥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하여 가나안에서 생활하다가 하나님께 갔습니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출생하여 가나안에서 살다가 역시 하나님께 갔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에서 출생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살다가 다시 가나안에서 살다가 애굽에 들어가서 죽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에서 살다가 애굽으로 팔려가 애굽에서 죽습니다. 욥은 우스 땅에서 살다가 우스 땅에서 죽습니다.

아브라함(!h;r;b]a'/’Abrâhâm)은 셈의 후손이며(창11:10), 우상 숭배하던 데라의 아들로(창11:26, 27; 수24:2).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창11:28, 31).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형제 나홀, 하란과 함께 살았으며, 사래와 결혼했습니다(창11:29). 하란이 죽자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과 함께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했습니다(창11:31).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는 죽었습니다(창11:32). 75세 때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창12:4-6). 그러나 가나안에 도착하자 흉년이 들었습니다. 차츰 남쪽으로 옮겨가다가(창12:9),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창21:10). 그러나 애굽에서 사래로 인해서 고난을 받다가(12:14-20), 벧엘로 돌아왔습니다(창 13:1-4). 그러나 가나안에 돌아온 그에게 다른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롯과의 다툼이었습니다. 롯에게 비옥한 요단의 들을 양보하고(창13:8-12),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옮겨 단을 쌓았습니다(창13:18).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후 100세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창21:1-4 21:1-8).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고(창21:9,10,14).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후, 브엘세바를 거주지로 확보합니다(창21:1-34).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모리아 땅에 가서 제단을 쌓아 아들을 올려놓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대신 제사를 드립니다. 후에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에 막벨라 굴이 있는 밭을 사서 사라를 위해 매장지로 삼았습니다(창23:1-20). 아브라함은 이삭이 40세가 되자 자기 종 엘리에셀을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나홀 성으로 보내어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선택, 데리고 와서 결혼시켰습니다(창24:65-67).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후처로 삼고 자녀를 얻었으며 175세에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떠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이교문화의 본거지 갈대아 우르를 여호와의 명령만 믿고 미지의 땅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을 떠나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아브라함이 떠났을 때 동행하시고, 그 약속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삭(qh;x]yI/Yitschâq/이츠핰)은 ‘웃음’을 의미하며, 이삭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이삭의 탄생(창21:1-7)은 창세기12:1-3의 약속의 성취로 향하는 첫 단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인 성급함으로 이스마엘을 생기게 한데 대한 하님의 논박입니다.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수시로 점검하는 것이며, 약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관한 의문들, 이삭을 희생하라는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들이 이삭의 생애에서 기초가 됩니다(창22:1-19). 이삭의 생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약속의 발전과 리브가와의 결혼과(창24:62-67)에서와 야곱의 탄생입니다(창25:19-28). 이삭의 생애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의 표적이기도 합니다(창26:12-13, 29). 야곱의 속임은(창27장) 약속이 작은 아들의 자손들을 통해 진전되는가를 설명합니다. 이삭은 180세에 헤브론에서 죽어 그의 아내가 묻힌 막벨라 굴에 안장됩니다(창49:30-32). 이삭은 순종적(창22:9), 평화적이며(창26:20-22),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창25:21, 26:25), 그러나 우유부단하며, 소극적이며(창26:18-22), 에서를 편애하고, 조급하고, 이기적이라 가장의 축복전수에 실수하기도 했습니다.

야곱(bqo[}y"/Yaʽăqôb/야아코브)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입니다. 족장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Jacob)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출생한 에서의 동생입니다(창25:20,21,26, 대상1:34), 이삭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출생했습니다(창25:21). 야곱과 에서(Esau)는 쌍둥이입니다. 야곱은 출생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으며(창25:26),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습니다(호12:3). 에서와 성격이 달라 장막에 거하였고(창25:27), 리브가가 그를 편애하였습니다(창25:28).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겨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창25:31-34, 27:36). 리브가의 제안에 따라(창27:8-10), 변장하고(창 27:15,16), 거짓말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에서 대신 축복을 받았습니다(창27:18-20, 22-24,30). 그 축복으로 인하여 에서의 원한으로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갔습니다(창27:42-45). 야곱은 도피생활을 하러 가는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창28:10-12). 그는 아침에 일어나 베개 했던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명명했습니다(창28:16-19). 그리고 십일조를 서원했습니다(창28:20-22). 야곱은 하란에서 라헬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라반이 그를 속이고 레아를 주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취한 후 7년을 봉사했습니다(창29:27-30). 야곱은 하란에서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결국 라반의 변역으로 인하여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성의 남자들을 도륙을 합니다. 에서를 만나기는 하였지만, 돌아오는 도중에 라헬을 잃습니다. 가나안에 돌아와 요셉을 편애함으로 인해서, 아들들이 요셉을 팔아버립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후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야곱의 가족들을 애굽의 고센지방으로 이주를 시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애굽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요셉(#se/y/Yôwçêph/요쎄프/Joseph)은 ‘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이다’를 의미 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삽니다. 귀하게 태어나 대접을 받다가 벼랑길에 떨어집니다.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라헬이 낳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입니다(창 30:22-24).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여(창39:6), 야곱의 총애를 받았습니다(창 27:3). 요셉은 야곱의 편애 때문에 형들에게 항상 미움을 받았습니다(창 37:4). 꿈을 꾸고(창37:7, 9), 그 꿈 이야기를 형들에 말한 이유로 형들에게 더욱 미움과 시기를 받았습니다(창37:5-11).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창37:14-20). 하지만 유다로 인해서 대상들에게 팔려(창27:26-28)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에게 다시 팔렸습니다(창37:36).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창39:2-3).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여호와의 복이 임하여 번영했습니다(창39:5). 그래서 보디발이 소유를 다 요셉에게 일임했습니다(창29:6). 그러나 요셉의 시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로 인하여 무고로 옥에 갇혔습니다(창39:17-20). 하지만 옥중에서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범사에 형통하였습니다(창39:21-23). 떡굽는 책임자와 술 맡은 책임자의 꿈을 해석해 주고 석방의 때를 기다렸습니다(창40:21-23). 요셉은 바로의 꿈을 계기로 석방되어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 경제를 다스렸습니다. 요셉은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삼고(창41:45),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습니다(창41:50-52). 요셉은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곡식 사러 온 형을 만나고 야곱 족속을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시켰습니다(창45:3-6). 야곱은 요셉을 축복하고 죽어 막베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창50:12-14).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끝까지 돌보아 주었습니다(창50:19-21).

(b/Yai/’Îyôwb/Job)은 ‘괴롭힘을 받는’이란 뜻입니다. 욥은 구약성경의 정경 중 그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그 교훈시에서, 그의 신앙 및 시련 속에서 변함없이 굳세게 견딘 인내로 인하여 기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욥은 노아나 다니엘과 함께 겔14:14,20에서 의의 본이 되는 고대의 훌륭한 인물로서 인용되었습니다.

스데반이 말하는 데에는 욥은 빠졌습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족장들을 말할 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욥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논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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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의 언약(사도행전7:1-60)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8절)

직장인들이 회사에 드나들 때는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출입증이 있어야 합니다. 대한민국국민이라면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합니다. 왜 출입증과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합니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징표이고, 직장의 member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민등록번호, 여권, 출입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멤버도 아닌데 회사를 출입할 것이며,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의 국민행세를 할 것이며,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공항을 통해서 속속 들어와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킬 것입니다. 스데반이 말한 아브라함의 할례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할례는 이스라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할례’가 나오니까 특별히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할례를 위생학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위생학적인 사람들이라고 이스라엘을 추켜서 말하는데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족장시대에는 근동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유아기나 혹은 사춘기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할례는 오늘날의 중동지방에 아직도 내려오는 풍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할례만 특별한 의의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할례의 언약(diaqhvkhn peritomh'"/디아쎄케 페리토메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의 표입니다. 이삭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였고, 야곱으로 이어지며, 이스라엘의 12지파로 이어졌습니다.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표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할례의식을 과대하게 해석했습니다. 육적인 할례를 대단히 중요시했습니다. 물론 육적인 할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할레만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기독교 공동체마저도 이 문제로 긴장이 있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행10:45)과 할례 받지 않은 이방기독교인들(엡2:11) 사이의 긴장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베드로와 바울과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이 베드로에게 위임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갈2:7),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을 위한 복음이 자신에게 위임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할례법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후에 사도공의회에서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은 형식적인 것입니다. 마음에는 없으면서 외형적으로만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전혀 교회에 헌신할 마음이 없는데, 남들을 의식해서 헌신하는척하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이제는 할례로의 신앙이 아닙니다. 성령세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물과 성령은 세례와 관계가 있다./물로 세례를 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듭나지 않으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일수 없습니다. 성령의 정결사역이 있어야 하는데, 죄인의 마음속에 새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영적인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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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 대한 변증(사도행전7:1-60)

아브라함에 대한 이력은 창세기12장입니다. 12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에 대해 나옵니다. 12장은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11:26에 처음으로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11장과 12장 이후만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랜 후에 스데반은 ‘우리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부르셨음을 말합니다. 스데반이 말한 내용은 창세기 15:7과 느헤미야9:7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느헤미야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란이전에 하나님과 교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란과 메소포타미아/갈대아 우르와의 거리는 약 800km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가기까지는 약1600km라는 여행을 한 것입니다. 갈대아우르에서 하란까지 800km,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800km인 거리를 보이는 것 없이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왔지만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가나안에서 없었다고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약속된 땅에서 나그네로 지냈다는 것입니다(2-5).


거기에 아직 낳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로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 땅(애굽)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종으로 삼을 것이라 예언하셨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400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번성하여 400년이 지난 후에는 나올 것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삼는 나라를 징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1600km 되는 먼 땅인 약속의 땅에 오게 하였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약속의 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삭이나 야곱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자기 땅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은 이방에서 종살이를 400년이나 해야 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괜찮게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원대한 계획을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미래를 보여주면서 그 후손들이 400년을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경우에는 어쩔까요? 아마도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을 변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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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박해하는 재판장들(사도행전7:1)

재판관이 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裁判席(재판석)에 앉아서 사람들을 심판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재판이란 공의를 행하는 것인데, 재판으로 불의를 행하였던 것이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습니다. 히틀러의 유대인재판, 각국의 혁명재판, 쿠데타의 군사재판 등은 공의와 정의가 사라진 재판입니다. 재판이라는 要式(요식)을 갖추려는 것뿐 오히려 재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행위입니다. 1절에 ‘이것이 사실이냐?’의 대제사장의 질문이 그와 같습니다. 이 사람은 가야바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불법재판관입니다. 소위 이스라엘 최고법정의 수장으로서 자리 값을 못한 사람입니다.

가야바는 주후18년에 유대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최고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가야바는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었을 때 10년을 포함 18년을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비텔리우스가 36년 빌라도를 소환코자 유대에 왔을 때, 가야바도 해임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서(요18:13) 세례요한의 선교 시작 전부터 사도행전 초기 박해시대 동안의 대제사장직을 해먹었습니다(눅3:2, 행4:6,7). 가야바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을 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요11:49-52). 그러나 이 말은 그 해에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오히려 더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기 때문입니다(요11:53).

가야바는 즉 당시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대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사단에게 속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모의 헸을 때, 진위여부도 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아문(뜰)에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습니다(마26:3-5).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써 바른 직분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증인을 세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마26:59). 사도들에게도 가야바의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가야바 앞에 수시로 고발을 당했습니다(행4:1-8). 이제 가야바는 스데반에게도 같은 방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대체적으로 순탄하게 전해집니다. 약간의 어려움은 있지만, 순탄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종교들이 어떤 진리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면, 힘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이 신과 저 신들을 합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와 종교 간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은 한분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부딪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군왕들과 종교들은 늘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권과 왕권이 위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역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의 이권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단은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박해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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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변증(사도행전7:1-60)

변증이란 변호하는 것입니다. 변증하려는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변론으로써 증명하는 것이 변증입니다. 기독교를 변증하려면 기독교의 전반에 대해서 소상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부분만 가지고는 변증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을 법정에서 변호하려면 변호사는 그 사건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該博(해박)했습니다. 스데반의 변증에 어떤 사람도 당하지 못했습니다. 과거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때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변증을 해갔습니다. 스데반의 변증은 이후로 교회사에 수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데반의 변증은 장장 50절에 걸쳐서 막힘없이 대적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먼저 2-16절까지는 족장시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불러내신 것을 비롯해서 이삭과 야곱이 장사됨에 이르기까지를 자세하게 변증해갔습니다. 다음으로 17-43절까지는 모세와 율법에 대해서 변증을 했는데,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의 박해부터 시작해서 모세가 소명받는 장면과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모습들을 소상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44-50절까지는 장막과 성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모세 때부터 증거의 장막이 광야에 있다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입성할 때 들어갔는데, 그 장막이 항상 밖에 있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다윗이 성전을 세우겠노라고 했지만, 거절하시고 대신 아들인 솔로몬 때에 세우게 하셨지만, 과연 하나님이 계실 처소가 어디이겠느냐고, 성전중심의 사람들에게 변증을 했습니다. 51-53에는 스데반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반격하는 말입니다. 스데반을 공회에 세우고 그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에게 스데반은 목이 곧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항상 거스르고 있는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너희들은 잘한다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고 하지만 늘 성령을 거슬러 왔다는 것입니다. 모세 때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짓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의인들을 죽였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바른 설교를 하려고 지향하는 목사들은 항상 외롭습니다. 너무나 세속화되어 교회인지, 세상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른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그 자신 순교한다는 각오로 설교를 해야 합니다. 소위 크다고 하는 대형교회들의 설교를 모니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없습니다. 윤리와 잘사는 법, 복을 많이 받는 법의 설교들은 넘치는데, 너희들이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과감하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변증은 갈수록 힘이 들것입니다. 세속화된 시대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순교의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더 반대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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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을 반대한 자들(사도행전6:8-15)

최초의 예루살렘교회집사 스데반을 소개할 때 누가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어떤 자들이 스데반과 변론을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집사로 임명을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일에 매진했습니다. 스데반에게 표적이 나타났고, 성령 충만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민간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로 인해서 교회를 위해하려 하는 자들에게 심한 반대를 받았습니다.

스데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리버디노 회당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인 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스데반에게 변론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 충만하여 말함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못했습니다.

…능히 당치 못하여…

그러면 이들은 스데반에게 감동하여 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회당에서 가르침 받는 것이 제일인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스데반을 무더기로 공격을 했습니다. 이들은 교회와 스데반을 공격하기 위하여 치졸한 방법을 썼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사주했습니다. 마귀가 통상 쓰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11)

다음에 그들은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격동시켰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12절). 결국 스데반을 공회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공회에서 거짓증인을 세웠습니다.

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13절,14절).

이쯤 되면 스데반은 자신의 목숨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수 아닌 죄수(?)로 잡혀 있었는데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고소자들이 그를 얽어매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는데,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착한 얼굴이 아닙니다. 즉 온화한 얼굴이 아닙니다. 복수의 천사와 같이 무서운 얼굴, 내적인 영감이 밖으로 품어져 나왔습니다. 계시의 빛으로 인하여 불타는 눈빛이었고, 얼굴이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얼굴이었습니다(F. F. Bruce). 교회는 시작부터 박해였습니다. 아담을 넘어뜨린 사단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계속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때마다 굳건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들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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